|
설교본문 : 아가 3장 1-11절
설교제목 : 찾아다님과 찾아냄
쓰러질 듯 자라는 화초
좋으신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습니까? 개인적 평안을 외치기에는 불온한 세상인 듯합니다. 전쟁의 참혹함은 여전히 진행형이고, 참사를 겪고 여전히 힘겨운 싸움을 하는 이들은 시선에서 소외되고, 외면당하고 있습니다. 제레미 리프킨은 《회복력의 시대》에서 효율성과 진보의 시대는 끝이 났고, 미래는 적응성과 회복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기후 위기(기후 정의) 시대를 맞이한 인류가 회복해야 할 가치가 ‘생명애’라고 규정합니다. 인류는 세상의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한 국가의 경제, 사회, 의료 위기는 전 지구적으로 공명한다는 것을 코로나 판데믹을 통하여 우리는 몸소 경험하고 있습니다. 생명 세계 전체를 아우르며 사랑하고 존중한는 것이 바로 생명애입니다. 제레미 리프킨은 이 “생명애 의식은 단순히 권장사항이나 희망사항이 아니다”고 강조합니다.[제레미 리프킨 지음, 안진환 옮김(2022) : 《회복력의 시대》, 민음사, p330] 자연 세계 전체를 향한 생명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 우리의 미래를 판가름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생명애’는 고사하고 가까이 있는 이들의 고통에 눈길조차 주지 못하는 나약함에 실망합니다. 그럼에도 이런 반성적 물음을 던지다 보면 어떤 형태로든 실행할 수 있는 시간이 도래할 것입니다. 부족하고 모자란 듯 때로 비실대는 우리네 인생이지만, 이런 성찰이 새로운 변환을 위한 밑거름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코로나가 한창일 때, “새해전야”라는 영화가 2021년 개봉되었습니다. 새해까지 일주일 동안 네 커플의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는 일상을 담아낸 이야기입니다. 강력반 경찰직에서 좌천, 이혼소송, 번아웃, 일방적 이별 통보 등 다양하고 복잡한 에피소드를 담아내었습니다. 극 중 패럴림픽 국가 대표 ‘래환’과 원예사 오원의 관계가 사소한 오해로 인하여 서먹해집니다. 오원이 농장일을 하면서 풀이 죽어 있자 어머니는 딸에게 아빠가 평생 그리던 식물도감 이야기를 꺼냅니다.
“너 아빠가 평생 그리시던 식물도감 기억나? 틸랸샤, 삐뚤삐뚤 쓰러질 것처럼 자라는 화조, 겉에서 보면 다 죽어가는 화초 같은데, 그게 진짜 잘살고 있는 거래더라. 하이고 좋다.”
겉보기에 다 죽어가는 화초같은데, 그게 진짜 잘살고 있는 것이란 이야기가 위로를 전합니다. 조금 부족하고, 쓰러질 것 같고, 모자란 듯 하고, 어리석은 듯 보여도 어쩌면 그것이 참 인생이 아닐까요! 이런 불완전함과 부족함이 때로 우리에게 희망임을 마음에 품고 살아갔으면 좋습니다. 2023년의 시간 동안 생명에 대한 사랑을 오롯이 살아낼 수는 없다 할지라도 생명애의 지향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갈등하고 방황하고, 힘겹게 살아가며 비실거리며 뒤뚱거리지만, 그게 인생이고 잘 자라고 있는 것이라고 위로를 건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임을 찾아다니는 꿈
지난 주 아가서 2장의 말씀에서 신랑은 겨울이 지났으니 나의 사랑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신부에게 속삭입니다. 겨울은 불완전한 상태의 고통이지만, 푸른 싹을 기다리는 복된 희망의 상태입니다. 그 시간을 지루함과 우울함이 아닌 인내로 명랑함으로 견디어낸 자에게 신랑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리고 포도원을 망치는 새끼 여우를 잡아달라고 합니다. 꽃이 피는 결정 시간, 결실이 일어나는 전의 만개시점에 교활함과 잔임함, 파괴적 여성적 본능인 탐욕과 소유욕이 포도원을 망가뜨릴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함을 나누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술람미 여인은 다시 임을 찾아다닙니다. 2장에서의 만남은 일시적이었는지, 다시 신랑을 찾아나섭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잠자리에서 임을 찾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나는 잠자리에서 밤새도록 사랑하는 나의 임을 찾았지만, 아무리 찾아도 그를 만나지 못하였다. ...거리마다 광장마다 샅샅히 뒤져서 ... 찾겠다고 마음을 먹고, 그를 찾아나섰지만 만나지 못하였다(1-2)”
대부분 주석가들은 ‘잠자리에서’, 혹은 ‘밤의 침상에서’를 꿈의 상황이라고 해석합니다. 술람미 여인은 꿈속에서 임을 찾아나섰지만, 아무리 찾아도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꿈의 장면으로 가정한다면, 여인이 주도적으로 찾고 있는 상황이니, 그래도 안심입니다. 무시하거나 억압해왔던 측면에 쫓길 때는 자신의 본성과 불화하고 있기 때문에 의식은 일방성에 경도된 불균형의 상태일 것입니다.
이 찾아다님과 찾아냄의 주제는 원형적 주제입니다. 애타가 임을 찾아다니는 주제는 바빌로니아의 태양신 탐무즈와 지모신 이슈타르의 신화에서, 이집트의 오시리스와 이시스 신화에서도 동일하게 등장합니다. 모든 민담이나 성서에서도 등장합니다. 찾아다님과 찾아냄은 행위 당사자에게는 말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찾아도 찾아낼 수 없고 방황하며 배회해야할 때 불안과 두려움, 막막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때는 기도로 산을 옮길 것 같은 믿음도 다 소용이 없습니다. 이런 술람미 여인의 곤경의 상황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떠오르는 새벽빛》의 “7번째 비유,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의 대화”에서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진심으로 내게 돌아오라. 내가 검고 더럽다고 해서, 태양이 나의 색깔을 변화시키고, 바다가 나의 얼굴을 덮으며, 흙이 나의 작업을 오염시키고 더럽힌다고 해서, 나를 멀리하지 마라. 위로는 어둠이 덮여있고, 깊은 수렁 속에 박혀있기 때문에 나의 실체는 드러나지 않는다. 나는 깊은 곳으로부터 소리쳤고, 땅속 깊은 곳으로부터 그 주위를 지나가는 당신들 모두에게 소리쳤도다. 주의를 기울여 나를 보시오. 내게 어울리는 사람을 발견하는 사람은 누구에게든 새벽별을 주겠소. 내가 밤에 침상에서 나를 위로할 자를 찾았으나 찾지 못하였고, 불렀으나 나에게 대답하는 이가 하나도 없도다.” [Marie-Louise von Franz(2000) : Aurora Consurgens, Inner City Books, p133-134.]
위로 어둠이 덮여있고, 깊은 수렁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 애타게 임을 불러도 대답이 없다면 이는 너무나 잔인한 형국입니다. 이런 찾아다님, 찾아나섬의 어려움은 도마복음 2장의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구하는 자는 찾을 때까지 구함을 그치지 말지어다. 찾을 때 그는 고통스러울 것이다. 고통스러울 때 그는 경이로울 것이다. 그러면 그는 모든 것을 다시리리라”
구하는 것은 쉽게 찾을 수 없음을 시사합니다. 이는 구한다고 두드린다고 해서 쉽게 열리지 않는다는 경고입니다. 쉽게 즉각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렵고 지루한 과정인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 중도에 포기하기 쉽상입니다. 중용 20장에서도 “배우지 못한 부분이 있을지언정 배울 바엔 능숙해지지 않고서는 그치지 않는다. 질문하지 못한 부분이 있을지언정 질문할 바엔 알게 될 때까지 질문을 그치지 않는다.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 있을지언정 생각할 바엔 파악할 때까지 그치지 않는다”합니다.[주희 엮음, 김미영 옮김, 《대학, 중용》, 홍익출판사, p183]
연금술에서도 어둠 속에서 찾아내야 하는 과정, 원질료, 무의식의 내용을 다듬어야 하는 작업은 인내와 끈기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아주 긴 길이며, 그 여정에서 필요한 것을 위의 문헌에서 언급합니다. “세 가지가 필수적이다. 즉, 인내, 끈기, 그리고 도구의 적절한 조작”[《인격과 전이》, “전이의 심리학”, 솔, p198, fn.42.]
사랑하는 여러분, 찾아다님의 길고 고통스런 여정에서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찾아냄을 이룰 수 있는 우리의 인생 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막에서 오시는 분
문헌비평적이고 양식비평적인 성서학자들은 이 아가서가 고대 근동의 종교적 표상을 상당히 차용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2장 16절에서 “임은 나의 것, 나는 임의 것”, 다른 번역은 “그는 나의 것이고, 나는 그의 것이다”라는 표현은 기독교 신비가들이 자주 차용한 문구입니다. 그런데 이 표현은 <길가메쉬> 6장 9절에서 “그대는 내 남편이고, 나는 그대의 아내이다”라고 한 이슈타르의 권고와 유사합니다. 고대 근동의 전형적인 사랑표협니다. 또한 아가서가 제사시 불려진 노래라면 여신은 사라진(죽은) 신을 찾아 다니가다 그를 찾아내어 신방으로 데려갑니다.[《국제성서주석:아가서, 애가, 에스겔, 룻기》, 한국신학연구소, p37-39] 본문 4절에서 어머니가 나를 잉태하던 바로 그 방(신방)으로 데려간다고 노래합니다. 이런 구절들은 모성신의 제의와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드러냅니다. 이 여인의 꿈은 전형적으로 신과 왕족의 결혼인 신성혼Hieros Gamos을 표상합니다. 은밀한 내면의 신방에서 결합은 집단과 개체의 새로운 변환을 예고합니다. 융은 〈전이의 심리학〉에서 “융합의 상은 언제나 인간 정신의 발달 과정의 특출한 대목에서 나타난다[《인격와 전이》, p174]”고 말합니다. 심리적으로 유대인들이 유월절에 이 노래를 부르며 되새김질했던 이유는 신비로운 합일을 통한 개체와 집단의 변환을 위한 시도였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합에 대한 갈망은 인간 정신의 변환을 추구하는 개성화의 충동입니다. 이는 우리 모두의 정신적 과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본격적으로 6절에서 신랑으로 표상되는 솔로몬이 탄 가마의 출현의 모습을 노래합니다. “거친 들을 헤치며, 연기 치솟듯 올라오는 저 사람은 누구인가? 몰약과 유향 냄새를 풍기며, 장사꾼들이 가지고 있는 온갖 향수 냄새 풍기면 오는구나(6).”
연기가 치솟으며 몰약과 유향, 향품을 품기며 오는 형국은 신현현의 장면, 신성력이 발현될 때 나타나는 이미지를 묘사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 질문을 던져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거친 들’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사막’입니다. 왜 그토록 기다리던 임은 사막에서 오시는 것일까요? 왕궁에서 오지 않습니다. 사막은 기존에 익숙했던 삶의 방식, 집단적 준거틀로 구성된 곳이 아닙니다. 세대 밖이며, 낯선 곳이며, 심지어 어두운 세력이 살고 있는 대극적 요소가 있는 장소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사막을 대극의 일치가 형성되는 곳으로 메시아의 충만한 상태가 이루어지는 곳으로 선포합니다(이사야 35:1, 이사야 11:6-7). 사막에서 오신다는 것은 개혁과 변환은 낯선 곳으로부터 다가오는 것이며, 새로운 변환은 낯선 것이 침투할 때만이 가능함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송파지방에 속한 교회들이 모여서 저녁에 집회를 했습니다. 설교를 들으며 불편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강사로 온 목사의 교회는 청년들이 20여명이었는데, 5년 사이에 몇 백명으로 부흥하였습니다. 그분은 청년들이 모여서 집회했던 사진 한 장을 보여주었습니다. 수 백명 청년들이 똑같은 흰색을 입고 그 옷에는 말씀의 구호가 적혀 있다고 전했습니다. 장의자에 앉은 흰 옷 입은 많은 젊은이들의 모습은 군집본능에 길들여지는 말 잘 듣는 순한 양떼처럼 보였습니다. 과연 그 청년들이 새로운 미래를 짊어져갈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기성세대를 모방하거나 답습한다면 새로운 가치는 창출될 수 없는 법입니다.
우리 주님은 사막에서 나타나십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신비입니다. 화려하고 안락한 궁전에서 출생하지 않으시고, 동물의 우리 속에서 가장 비천함 속에서 탄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낯선 방식으로 우리에 오시어 우리와의 연합하고자 하십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사막으로부터 오시는 낯선 주님을 만나곤 합니다. 나의 계획을 틀어지게 하고, 나를 혼돈으로 빠뜨리고,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을 격렬하게 못가게 만들고, 나의 관점을 산산히 부수게 만드는 사건들을 대면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가 바로 내가 변화해야 할 시간임을 마음에 새기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잘라루딘 루미의 시 “여인숙”의 시구처럼 여인숙같은 우리 존재에 예기치 않은 손님이 찾아올 때 기꺼이 환영하고 잘 대접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