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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깨어진 언약의 회복(1) - 모세의 중재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예배하며 그것에게 제물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모세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애굽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가 자기의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악한 의도로 인도해 내었다고 말하게 하시려 하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그들을 위하여 주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출32:7~14)”
가. 인격을 떠나면 우상을 숭배하게 됨
하나님과 세운 언약이 금송아지 숭배로 인하여 깨어졌다. 우상 숭배가 큰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한 인격을 버렸다는 것에 있다. 왜냐하면 생존을 위해서 능력을 구하다 보면 결국 우상을 쫒게 되고, 그러다 보면 동물적 수준으로 떨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생존을 위해서만 살게 되면 결국 우상을 숭배하게 된다.
그러면 인격이 깨어지는 것과 동시에 하나님의 목적이 깨져 버리고 만다. 하나님의 목적은 인격을 통해서 이루어지므로 인격이 없어지면 하나님의 목적도 없어지게 된다. 총이 없으면 총알이 소용없는 것처럼 인격이 없으면 하나님의 목적도 소용이 없게 된다. 그래서 언약이 깨지는 것이다.
언약이 깨진 역사는 아담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아담을 창조하실 때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창1:26).”고 하셨다. 이것은 일종의 언약인데, 하나님의 약속이다. 그런데 아담이 지식을 쫒음으로 인해서 이것이 깨졌다.
왜 선악을 아는 지식을 쫒아서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하였는가? 인격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사람의 위치, 인생의 위치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 인생의 위치를 통해서 자기를 표현하려고 하셨는데, 사람은 인격, 즉 사람의 위치를 무시하고 선악을 아는 지식을 통해서 신과 같이 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아무리 선악을 아는 지식이 있다고 해도 인격이 신격이 되는 것은 아니다. 무슨 방법으로도 인격이 신격이 될 수 없다.
만일 인격이 신격이 된다면 소가 개가 될 수 있고 개가 소가 될 수 있어야 된다. 개에게는 개의 격이 있고 소에게는 소의 격이 있다. 개가 아무리 풀을 뜯어 먹는다고 해도 개의 격이지 소의 격이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아무리 하나님 이상의 능력과 하나님 이상의 지식을 가졌다 해도 인격이 신격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인격을 무시하고 그것을 극복하려고 선악을 아는 지식을 취하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우신 첫 번째 언약이 파괴된 셈이다.
그 결과로 가인은 아벨을 죽이게 되고 라멕은 소년을 상하게 하고 보복을 선언하였다. 네피림들은 땅을 패괴하게 하여 자기 멋대로 세상을 움직였다. 바벨에 이르러서는 인간의 영광을 위해서 거대한 문화를 건설하고 성을 쌓았다. 갈대아 우르에서는 우상을 숭배하였다. 아담으로부터 시작해서 갈대아 우르까지 오는 과정에서 그 마지막은 우상 숭배가 된 것이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부름 받은 사람이다.(창4~11참조)
인간이 인격을 떠나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목적을 떠나면 결국 자기영광을 위해 살게 된다. 자기 영광을 위하다 보면 그 마지막이 우상 숭배가 된다. 그래서 신약 성경에서는 “탐심은 우상 숭배(골3:5)”라고 정의하였다. 결국 아담이 선악을 아는 지식을 통해서 신격에 이르려고 했던 것은 탐심 때문이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도 탐심이고, 라멕이 보복을 선언한 것도 탐심이며, 네피림이 땅을 패괴하게 한 것도 탐심이고, 바벨을 건설한 것도 역시 탐심이다. 결국 그것이 마지막에는 우상 숭배로 형상화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었다. 불러내신 목적은 우상을 숭배하던 인간을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아담으로부터 사람은 우상 숭배에 빠졌다. 우상 숭배에 빠진 인간을 불러내어서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으로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다. 이것이 부르심의 목적이고 구속의 목적이며 은혜를 베푸신 목적이고 모든 것의 목적이다.
아담과 세우신 그 언약은 두 번째로 노아와 세운 언약이 되었고 아브라함과 세운 언약이 되었으며 그리고 그 다음에는 이스라엘과 세운 언약이 되었다. 하나님은 언약을 세우시고 사람은 그것을 깨뜨리는 역사가 반복되다가 이스라엘에 와서 결국 여호와를 무시하고 금송아지를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바로의 국고성을 쌓고 있던 상황에서 이스라엘을 불러내신 것도 역시 우상 숭배에서 불러내신 것이다.
궁극적으로 사람들은 모두 우상을 숭배하고 있다. 어떤 사람을 물론하고 인격을 떠나서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 결국에는 누구든지 우상 숭배에 빠지게 된다. 어떤 형상을 만들어서 섬겨야만 우상 숭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인격을 떠나면 우상을 숭배하게 된다. 하나님을 무시하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목적에서 빗나가게 되고, 그렇게 되면 그것이 결국 우상 숭배로 돌아가게 마련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불상을 섬기는 것이나 형상을 숭배하는 것이 우상 숭배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우상 숭배가 아니라 사람의 위치를 떠나서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하는 거기서 우상 숭배가 나오는 것이다. 아담으로부터 우상 숭배는 시작되었고 결국 이스라엘까지 내려오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 사람들을 불러내서 하나님의 거처인 성막을 건축하도록 하셨다. 이스라엘을 구속하고 언약을 세우신 것은 결국 성막을 건축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금송아지를 섬겼다.
우상 숭배의 역사는 곧 인류의 역사이다. 인류는 계속해서 우상 숭배를 하고 있다. 방법은 여러 가지인데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우상을 숭배하고 있다. 꼭 어떤 형상을 만들어놓고 섬기는 것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영광과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인격을 버린 것이다. 인격은 자기의 생존과 영광에 별로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능력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능력을 찾는 것이다. 능력을 찾다 보면 결국 우상을 섬기게 된다.
옛날에는 해나 달이나 큰물과 같은 것을 섬겼다. 그런 것은 능력이다. 그런 능력을 힘입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신을 섬기게 되었다. 신을 섬기는 것도 결국 알고 보면 우상 숭배다. 왜냐하면 전부 다 자기의 생존과 자기의 영광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종교라 해서 우상 숭배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종교 안에 더 심한 우상 숭배가 있다.
오늘날 자세히 생각해보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있고 예수를 믿고 있다고 하는데 왜 믿는가 하면 하나님은 능력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능력을 보고 믿는 것은 자기에게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능력을 보고 믿는 것은 곧 우상 숭배에 빠지게 된다.
왜 예수님을 버렸는가? 그분에게 능력이 계속 있었다면 버릴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이스라엘을 구원할 능력이 있었다면 왜 버렸겠는가? 이스라엘을 구원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버렸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긴다는 사람들이 큰 오해에 빠져 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예수님은 능력이 많으시다. 그래서 우리가 믿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우상 숭배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사람의 인격을 통해서 자신을 표현하시는데 있다. 사람이 능력 있게 살게 하려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보다 능력 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천사가 더 능력이 많고 짐승도 사람보다 능력이 더 많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능력 때문에 되는 것이 아니라 인격 때문에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인격을 무시한다.
왜냐하면 자기가 사는데 별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격은 흙으로 지어 생기를 불어 넣으신 그것이다. 숨이 코에 붙어 있는 자리이다. 인격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혐오하는 자리일 뿐만 아니라 기피하고 싶은 자리인 것이다. 세상에서 말하는 인격은 높이 쌓아 올리는 것이지만, 하나님이 필요로 하시는 것은 높이 쌓아 올리는 어떤 것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어 놓으신 그 자리를 필요로 하신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싫어한다. 그것으로는 밥 먹고 못 살겠다, 그것으로는 힘 있게 못 살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능력을 찾는 것이다. 원시적으로는 해를 찾던지 달을 찾던지 큰 바위를 찾던지 했고, 그것이 결국은 신을 찾는 것이 되었다. 신중에서도 어느 신이 가장 크고 제일 강한가 하는 것을 찾는 것이다. 이것이 우상 숭배의 근본이다.
아담은 선악을 아는 지식을 가지면 하나님 같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선악과를 먹었다. 우상 숭배의 근본은 어디에 있는가? 결국 인격을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여기고, 능력을 귀중히 생각하다보면 자연히 탐심이 생기게 된다. 탐심은 우상 숭배라 하였다(골3:5). 우리는 우상 숭배의 근본을 분명히 알 필요가 있다.
종교 안에서도 심지어 기독교 안에서도 얼마나 많은 우상 숭배가 있는가를 볼 수 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경배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우상을 숭배하고 있다. 그 하나님이 만일 그들의 소원을 들어줄 수 있는 능력이 없는 하나님이라면 어찌 되겠는가?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예수를 따르던 수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소원을 이루어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따랐다. 그러나 그들의 소원을 이루어 줄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때 다 버리고 갔던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나. 깨어진 언약과 모세의 중재
여기서 하나님이 세우신 언약이 깨지게 되었다. 금송아지를 만들었고 모세는 돌판을 던져서 깨뜨렸다. 아담이 깨기 시작한 그 언약을 하나님이 여러 번 다시 세우셨지만 또 다시 이스라엘이 깬 셈이다. 아담에게, 노아에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이스라엘에게 언약을 세우셨는데 그것을 깬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진노할 수밖에 없었다. 네피림에 대해서는 홍수로 멸하시고 노아를 구원하셨고, 바벨의 시대에는 허물어뜨리고 아브라함을 불러내신 것이다.
여기서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출32:10).” 라고 하셨다. 이 때 모세가 중재하게 된다. 하나님께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출32:11).” 라고 하였다. 요즘 믿는 사람들이 중보 기도라는 말을 많이 한다. 잘 알고 하는지 잘 모르고 하는지 모르겠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이렇게 말했는데 이것은 ‘이들은 당신의 백성이다.’ 라는 말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안 것이다. 하나님이 그 백성이 필요해서 부르셨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말하기를 “어찌하여 애굽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가 자기의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악한 의도로 인도해 내었다고 말하게 하시려 하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출32:12).” 라고 하였다. ‘대적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비난하게 하려 하십니까?’ 한 것이다.
그리고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그들을 위하여 주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출32:13).” 라고 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시켰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출32:14).”고 되어있다. 모세의 중재적인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신 것이다.
모세는 그럴지라도 내려와서 우상 숭배자들을 처리하고 자기의 생명을 걸고 다시 사죄를 간구하였다.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32:31~32).” 이것이 중재의 기도다. 자기의 목숨을 걸고 한 그런 기도였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가나안으로 출발하라고 말씀하시면서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길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출33:3).” 하셨다. 만일 같이 가다가는 이 백성들이 목이 곧은 백성이니 언제 또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고 그 때 내가 진노하여 그들을 멸할까 염려하여 같이 가지 않겠다는 말이다. 그리고 사자를 앞에 보내시겠다고 하셨다. 이것은 사람이 중재 없이 하나님을 직접 대하면 죽는다는 원칙이다.
그리고 “너희는 장신구를 떼어 내라(출33:5)”고 하셨다. 그들은 단장품으로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것이다. 단장품을 왜 제하라고 하는가? 그것으로 또 금송아지를 만들 것이므로 제하라고 하신 것이다. 단장품이 있으면 그것으로 또 금송아지를 만든다. 단장품이란 자신을 보다 돋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영적으로 생각하면 하나님이 주신 내 인격, 하나님이 주신 내 자리보다 더 크게 보이게 하려고, 더 돋보이게 하려고 단장품을 만든 것이다.
그렇다면 인격을 무시하는 것이다. 자기 자리를 무시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자리를 무시한 것이다. 여기서부터 우상 숭배가 생겼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본분, 분깃, 분수 그것을 무시한데서 나를 단장하려고 생각했고. 키우려고 생각했고. 위대해지려고 생각했고 그러다가 그것이 마침내는 금송아지를 만드는 데까지 온 것이다. “너희는 장신구를 떼어 내라(출33:5)” 하신 말씀에서 우리 자신의 위치에서 조금이라도 무엇을 더하려고 하는 것은, 조금이라도 무엇을 돋보이게 하려는 것은 결국은 우상 숭배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장품은 귀걸이와 같은 것으로 별 것 아닌 것 같다. 그렇지만 영적으로는 그것이 중대한 길로 빠져 들어가게 한다. 아담이 ‘선악을 알면 어떻겠는가?’ 라는 것은 귀걸이와 마찬가지다. 물질적으로 말한다면 ‘귀걸이 좀 한들 어떠한가?’ 라는 것이다.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 같이 된다고 하니까 아담은 그 말을 듣고 ‘선악을 알면 좋은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계속 자라고 자라서 결국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숭배하는 데까지 오게 되었다. 우리 자신의 본분, 하나님이 주신 그 자리가 비록 적게 보인다고 해도 그 적은 것을 순수하게 지켜야 한다. 그래야 우상 숭배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
다. 모세는 진 밖으로 나와 회막에 거함
모세는 진속에서 이스라엘 백성 속에 같이 천막을 치고 있다가 이 이후로 자기의 천막을 끌고 나와서 진 밖으로 나와 따로 천막을 치고 그 곳을 회막이라고 이름 하였다. 이것은 우상을 숭배하고 있는 백성 속에서 자신을 구별하기 위한 것이었다. 히브리서에 보면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히13:12).”고 했다. 영문 밖은 예루살렘 성문 밖이다. 서울로 말하면 사대문이다. 사대문은 종교의 영문을 이야기한다.
예루살렘, 유대종교의 영문 밖으로 나가셨다. 십자가는 어디에 세워졌는가 하면 사대문 밖에, 영문 밖에 세워졌다. 조선시대에도 죄인을 처형할 때는 사대문 안에서 처형하는 것이 아니고, 사대문 밖에서 처형했다. 서대문 형무소는 사대문 밖에 있는 것이다. 서대문 밖 영천동 쪽에 있다. 영문 밖은 히브리 종교의 밖, 유대 종교의 밖이다. 우상 숭배 밖으로 나간 것이며 크게 보면 종교 밖으로 나간 것이다.
우상 숭배와 종교는 무슨 연관이 있는가? 종교가 우상 숭배에 빠져 있는 현장이 이스라엘 진이었다. 그들은 분명히 하나님의 인도를 받은 백성이고 구속함을 받은 백성들이었다. 홍해를 건넌 백성이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은 백성이다. 엘림에서 열두 샘과 칠십 종려나무를 경험했다. 그들은 많은 종교적인 체험을 한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 속에 어떻게 우상 숭배가 있겠는가?
그런데 바로 그 곳이 우상 숭배의 진이 되었다. 왜 그러한가? 그들이 지금까지 필요로 했던 것은 여호와의 능력이었다. 그들은 애굽에서 나올 수 있는 능력, 홍해를 건널 수 있는 능력, 광야를 통과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들은 오직 능력의 신만을 믿고 있었다. 그 속에서 금송아지를 만들 가능성은 항상 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모세가 산에 올라가서 사십 일 동안 내려오지 않자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출32:1).” 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자 하면서 결국은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들은 한 시도 능력이 없으면 살지 못하는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광야에 나와 있는 그들에게 모세는 산에 들어가서 40일 동안 오도가도 안하고 자기들은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고, 그래서 자기들을 인도할 신을 만들자 라고 하게 된 것이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타당한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대에 어그러지는 일이었으므로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었다.
모세는 영문 밖으로 나옴으로써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출33:11).” 라고 하였다.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이 말은 아주 친해졌다는 것이다. 진 속에서는, 영문 안에서는 하나님과 친할 수 없다. 하나님의 능력만을 필요로 하는 속에서는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는 친밀한 대화가 오갈 수 없다.
어떤 사람이 나를 찾아올 때 나의 능력만 필요로 하여 찾아온다면 그러면 그 사람에게 친구처럼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정치에 병든 사람들이 그렇다고 한다. 장관이나 국회의원이 되면 문전성시를 이루다가도 어느 날 그 자리에서 떨어지면 추풍낙엽처럼 한 사람도 찾지 않는다. 그러면 사는 게 너무 비참해서 다시 또 도전하고 또 도전하고 하는 것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호화롭던 생활인데 갑자기 냉랭하고 쌀쌀한 바람이 불면 어떻게 견디겠는가? 그래서 계속 도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편을 하다가 약기운이 떨어지면 또 하듯이, 이 사람들은 그 분위기가 없어지면 못 사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하고 다시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찾아오는 백성들과 친밀하게 이야기하실 수 없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그런 목적으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인간이 필요로 하는 것이 그런 능력이다. 하나님은 때때로 능력을 보여주시기도 하고 소원을 이루어주실 수도 있지만 친구와 같이 친밀하게 이야기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문 밖으로 나가야 한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히13:13).”고 한 것이다.
그 때 구름기둥이 내려 회막문에 섰다고 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이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 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출33:9)” 라고 했다. 모세는 진 밖에서 하나님과 친밀한 교통 가운데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출33:3)” 하셨으나 모세는 하나님께 같이 가시기를 구하였다. 모세가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출33:13).” 라고 간구하였다.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출33:16)”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닙니까 라고 간구하였다. 그랬더니 여호와께서 “네가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출33:17).” 라고 하셨다. 너의 간구를 들어주겠다는 뜻이다.
그랬더니 모세가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출3318).” 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가겠다는 어떤 표적을 보여 달라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출33:19).” 이렇게 말씀하시고 모세를 반석 위에 세우셨다. 그리고 쪼개진 반석 틈에 두고 얼굴을 보지 못하게 하시려고 손으로 가리고 지나가셨다고 하였다. 그래서 모세는 여호와의 등만 보았다.
라. 중재자 없이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음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람은 하나님을 정면으로 대하면 죽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등만 보았다는 것이다.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출33:20~23)” 하나님은 모세를 반석 위에 세우시고 쪼개진 반석 틈에 넣어 놓고 가리셨다.
고린도전서에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10:4).” 하였다. 쪼개진 반석 속에서 생수가 나왔다. 쪼개진 반석으로 가리셨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감추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지, 그리스도 밖에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 얼굴을 볼 수 없다. 단지 그리스도 안에서 그것을 받을 뿐이지 하나님의 얼굴은 볼 수 없다.
여기서 중재자의 중요함을 보게 된다. 아브라함은 첫 번째 중재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롯을 위해 중재하였다. “그 성 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 “삼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했는데, 그 목적은 조카 롯을 소돔에서 구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친척으로서의 중재였다. 롯은 조카였다. 조카를 살리기 위한 마음으로 하나님과 흥정을 하였다. 마지막에 “거기서 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라고 했지만 결국 소돔은 멸망하였다. 이 중재는 육신의 친척으로서의 중재였었다.(창18:22~33참)
두 번째 중재는 모세의 중재이다. 모세는 자기 백성을 중재했다. 자기가 이끌던 백성이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출32:7).” 이라고 하셨다. 네 백성, 즉 모세가 이끌던 백성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모세의 백성이라고 할 수 있다. 모세는 자기 백성의 대표자로서 중재하였던 것이다. 중재라는 것은 항상 어느 편을 짊어져야 중재가 된다. 이 중재는 모두 온전하지 못한 중재였다. 아직은 온전하지 못한 중재였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중재는 친척으로서의 중재이다. 친척이 아닌 사람에게는 중재가 될 수 없다. 만일 롯이 그의 친척이 아니었다면 아브라함은 그를 위해 중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모세의 중재도 자기 백성으로서의 중재였으므로 자기 백성이 아닌 사람에게는 중재하지 않아서 아직 완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중재가 참 중재가 되는 이유는 예수의 중재는 인류의 대표자로서의 중재이기 때문이다. 친척도 아니고 자기 백성도 아니었다. 갈라디아서에는 “율법은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갈3:19)” 라고 하였다. 율법도 하나님이 그냥 주신 것이 아니라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실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들은 산에 가서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십중팔구가 헛소리를 듣고 하는 말이다. 다른 귀신의 소리를 듣고 하는 말이다. 그런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도 바꿀 수가 없다.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다. 자기가 죄를 짓고 다니면서도 절대로 어떤 사람의 말도 듣지 않는다.
그런 사람을 만나봤다. 기도하다가 그렇게 된 사람인데 그 사람은 남의 아내를 데리고 살면서도 절대로 자기가 죄를 짓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이 계시로 그 사람을 자기의 배필로 정해주셨다고 하였다. 얼굴 하나 붉히지 않으면서 이야기를 했다. 그것을 보면서 직접적으로 음성을 들었다는 사람들은 100% 사단의 말을 들었다거나 자기의 착각 속에 빠진 것이라고 알아졌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으려고 생각하면 안 된다. 반드시 중보를 통해야 한다. 누구가의 중보를 통해서 오지, 결코 직접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늘에서 음성이 났다는 말을 보고서 자기들도 그렇게 들어보려고 한다. 그렇다면 지금도 하늘에서 음성이 나면 될 것이고 더 쉬운 방법은 하늘에서 온 세상을 향해서 말씀하시면 모든 인류가 회개하지 않겠는가? 왜 그렇게 하시지 않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중보를 통해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 사람이신 예수께서 완전한 중보가 되심
디모데전서에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2:5).” 하였다. 그러므로 참 중보는 한 분이시다. 옛날에는 중보가 천사였지만 지금은 참 중보는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다. 천사의 중보는 온전치 않다. 사람으로서 중보 해야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완전한 중보가 되지 천사가 와서 중보가 된다면 완전한 중보가 될 수 없다. 참 중보는 한 분이신데 그 분은 신이 아니라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시다.
히브리서 8장 6절에는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 라고 하였고, 9장 15절에는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다. 누가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완전한 중보인가? 왜 예수님은 완전한 중보자이신가? 그가 그냥 사람이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 분은 사람이면서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접점에서 만나는 자리가 되셨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사람의 접점을 위해서 필요했던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은 그 자리밖에는 만날 데가 없다.
율법으로도 하나님을 만날 접점이 없고 천사로도 만날 접점이 없다. 하나님과 사람이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접점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다. 그 자리에서만 하나님과 사람이 만날 수 있다. 십자가에 달린 자리에서 흙으로 지어진 나의 운명이 드러났다. 숨이 불어 넣어진 나의 운명, 인생이라는 나의 운명이 드러났다.
어쩌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니까 비참하다고 할 수 있는 자리다. 그런데 비참하게 보이는 그 자리가 가장 순수한 자리이며 가장 완전한 자리다. 그 완전한 자리만 하나님이 접해질 수 있는 자리인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이 만드신 자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거기 계실 수 있는 자리이고 거기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첫 번째 관문은 번제단이다. 번제단은 십자가의 상징이다. 번제단을 거치지 않고는 어떤 방법으로도 지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다. 기도로 지성소로 바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있으나 절대로 있을 수 없다. 번제단이 없이는 그 자리에 갈 수 없다. 접점, 중보자, 완전한 중보자는 누구인가? 접점이신 분이 완전한 중보자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만 하나님을 만난다는 말이 그 말이다.
다른 데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전부 가짜다. 다른 데서 하나님을 만난 것은 전부 사술이다. 기도하다 만났다고 하거나 꿈속에서 만났다고 하거나 음성을 들었다고 하는 것은 사술에 불과하다. 만일 그런 것들이 사실이라면 십자가는 무용지물이 되고 말 것이다. 왜 십자가가 필요하겠는가? 하나님을 만나는 유일한 접점은 십자가다. 그 자리는 만나는 자리, 중보점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실 때마다 산으로 부르셨다. 하나님은 산으로 내려오시고 모세는 산으로 올라갔다. 내려오시고 올라가는 것이다. 이것이 십자가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내려오시고 사람이 올라가는 자리다. 접점이다. 그 자리에서만 만날 수 있다. 그 자리 이외에서는 만날 수가 없다. 이 자리가 확실하게 되면 세상의 모든 헛것들이 다 사라지게 될 것이며 사술이나 우상 숭배가 사라질 것이다. 종교 안에 있는 많은 술책들이 사라지고 거짓말이 사라지며 백일하에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 한 자리밖에는 하나님과 사람이 만날 자리가 없다.
중보의 역사는 아브라함부터 시작되어 예수 그리스도에게 와서 완성되었다. 모든 것이 다 그러하듯이 언약의 성취도 예수 그리스도에게 와서 성취되었다. 시작은 아담에서 시작되었지만 결국은 다 파괴하고 다 버리고 또 파괴하고 깨지고 해서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에게 와서 완성되었다. 우리는 완성되어진 자리에서 그분을 만났으면 다시 옛날로 돌아가면 안 된다. 다시 아브라함의 자리로 돌아가서는 안 되고 모세의 자리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미 완성된 자리에 왔다.
지금 구두를 신고 다니고 나이키를 신고 다니는 시대에서 다시 옛날 짚신을 신고 다니면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칼라 TV 보다가 다시 흑백 TV로 돌아가면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흑백 TV가 먼저 나와서 칼라 TV가 나왔지만 칼라 TV 시대에서 다시 흑백 TV로 돌아가는 것은 멸망이다. 아브라함의 중재는 그 때는 아주 중요한 중재였고 모세의 중재도 그 때는 아주 중요한 중재였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가 나온 이상 우리는 다른 중재를 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중재를 잘못 알고 있다. 젊은 학생들을 만났는데 중보의 기도에 대해서 말하기에 무엇을 보고 중보의 기도라고 하느냐고 물었다. 대답하기를 자기가 누군가를 위해서 대신 기도해 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중보 할 자질이 있냐고 되물었다. 기도를 하면 중보가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해주면 그 기도가 응답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마치 천주교에서 연옥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면 그들이 천당에 간다는 사상과 같다. 죽기 전에 예수를 안 믿었다고 하더라도 죽은 후에 연옥에 있을 때 49제를 지내면 그 영혼이 다시 천당으로 올라간다는 사상과 비슷하다. 아무나 기도한다고 될 것 같으면 누가 안하겠는가?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접점이 완전하게 드러난 이상 그런 헛된 일을 해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해주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지만 그것을 중재의 기도라고 할 수는 없다. 중재하려면 하나님과 그 사람 사이에 십자가를 내놓는 사람이라야 중재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중재자가 될 수 없다.
하나님과 사람을 화해시키려면 이 접점에서 밖에는 화해시킬 수 없다. 여기서만 화목제가 가능한 것이다. 이 화목제의 접점이 내게 있으면 그 사람과 하나님을 중재할 수 있다. 이 접점이 없는데 내가 정성으로 기도해도 하나님과 그 사람의 화해가 되겠는가? 절대로 불가능하다.
중재는 그 사람도 내 안으로 오고 하나님도 내 안으로 오셔야 중재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 위치가 십자가에 있어야 중재가 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도 오실 수 없고 사람도 내 속으로 들어올 수 없다. 중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오늘 모세가 자기 백성을 위해서 중재의 기도를 하는 것을 보면서 참 중재자이신 그리스도, 한 분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우리가 만난 것이 얼마나 축복인가를 다시 기억하게 된다.
[기도]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갈 길도 없고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실 길도 없었는데 그리스도 예수의 중재를 통해서 하나님이 오시고 우리가 올라가는 산꼭대기, 십자가, 하나님과 우리가 만나는 접점을 마련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올라갈 수 있는 아무 힘도 없지만 주님이 부르시기 때문에 우리가 갈 수 있게 해주시고 아브라함이나 모세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이런 일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완성된 것을 보게 하시고 오늘 우리가 이 완성된 시대 안에서 은혜를 입게 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서 우리가 중재자가 될 수 있기를 원하고 믿지 않는 자와 하나님 사이에 중재자가 되기를 원하고 형제와 하나님 사이에서 중재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