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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가치
18001057박정빈
비일상의 시작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여자아이에게 모자 쓴 남자아이가 다가와 말한다.
맛있나 혹쉬...? 망고맛 나나 혹쉬...? 나 혹쉬 먹어 봐도 되나...?
그 말에 여자아이는 남자아이에게 아이스크림을 준다.
고마워~ 라원아~
나는 소파에 누운 채로 과자 한 움큼을 입에 넣었다. 그리고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는 <슈퍼맨이 돌아왔다> 재방송을 보며 중얼거려 본다.
“구운 마늘 먹고 싶다. 소금하고 후추로 간 하고 나서 살짝 그을리면 맛있는데...”
“그거 구운 마늘 맛 과잔데요?”
소파 앞에 앉은 귀여운 우리 딸 혜인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이건 진짜 구운 마늘이 먹고 싶어지는 맛이야. 진짜는 이거 하고 맛이 달라.”
“그럼, 혜인이가 마늘 구워 올게요!”
혜인이는 기운차게 대답하며 부엌으로 달려갔고, 나는 고맙다고 말한 뒤, 다시 늘어졌다. 그런데 뭔가가 걸린다. 아, 맞다.
나는 7살 아이가 부엌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뒤늦게 자각하고 벌떡 일어났다. 나는 거실 바닥에 과자가 흩뿌려지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달려가 가스 불 위에 프라이팬을 올려놓는 혜인이를 막았다.
“혜인아, 아빠가 할게! 또 부엌에서 사고 치면 엄마가 아빠 게임기 버린다고 했단 말이야!”
수요일 2시 45분, 한창 일 할 시간이며, 한창 일할 나이인 나는 집에서 늘어진 채 애를 보고 있다. 부모님은 하루가 다르게 늘어지는 내 모습을 한심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일하지 않아도 될 만큼 돈이 있는데도 원하지도 않는 일을 구태여 하는 쪽이 더 한심하다고 생각한다.
“나도 할 수 있어요!”
“물론 우리 혜인이도 할 수 있지. 근데 오늘은 아빠가 만들게. 혜인이는 뽀로로 보자.”
“칫! 뽀로로 재미없어요. 카봇 볼래요.”
“카봇은 지금 안 하니까 이따가 박물관 다녀온 다음에 보자.”
“네에~”
스트레스받을 일 없이 이렇게 사는 게 행복할 것이다. 10년 전, 나는 복권 당첨금 10억을 얻었고, 김수빈 형과 함께 그 돈을 불려서 평생 일하지 않아도 될 만큼 큰돈을 손에 넣었다. 처음에는 돈 버는 재미에 미쳐있었다. 형은 수완이 좋아서 어디에 투자해야 돈을 불릴 수 있는지 전부 꿰고 있어서 재미가 붙을 정도로 쉽게 돈을 불렸으니 말이다. 그렇게 눈덩이 굴리듯이 돈을 벌었는데, 몇 년 안 가서 싫증이 났다. 뭐든 질리게 되어있고 나에게는 돈 버는 일조차 그러한 것이었다. 어쩌면 미친 듯이 부를 쫓다가 파멸하는 내용의 영화를 진부하게 느껴질 정도로 많이 알고 있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나는 모든 일에 끝을 고하듯이 한강 대교 위에서 핸드폰을 던져버렸다. 그리고 적당히 좋은 집 사서 틀어박혀 살다가 부모님의 소개로 괜찮은 여자를 만나서 결혼하고, 그리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애도 낳아서 셋이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
아내는 일을 그만두고 싶지 않다고 해서 가사와 육아는 내가 맡았다. 그게 나의 일상이며 행복이었다. 하지만 뜬금없이 도깨비가 그 일상을 망가뜨렸다. 뜬금없이 도깨비다. 만화나 드라마 얘기가 아니라 진짜 도깨비. 뿔도 없고, 피부는 살 색에, 호랑이 가죽을 두르지도 않았지만, 그것은 자신을 도깨비라고 말했다.
“고놈 참 실하게 자랐구만~”
현장 학습으로 찾은 국립민속박물관의 해상명부도 앞을 지나자, 10년 전에 들은 괴이의 목소리가 뒷덜미를 잡았다. 나는 곧바로 뒤돌아보았고, 녀석은 식은땀을 흘리고 있을 나에게 사형선고 같은 한마디를 하더니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한 달 뒤에 그 딸 아기를 데리러 가지.”
그제야 꿈으로 치부했던 10년 전 일이 믿기 힘든 현실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2. 그림 속 도깨비
그때 내가 거기서 무엇을 밟고 넘어졌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오래된 개그 만화처럼 바나나일 수도 있고, 청소가 덜 된 바닥일 수도 있고, 어쩌면 도깨비의 장난일 수도 있다. 세상이 돌고 지면과 머리가 닿자 의식이 날아갔다. 그리고 아마도 평생 기억에 남을 목소리에 의식을 되찾았다.
“어허 , 네놈은 얼굴이 왜 그렇게 딱하게 변했누. 상이 아주 고약해졌구나.”
맹수가 으르렁거리는 듯한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위압감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주눅들만도 했지만, 머리가 울려 어지러운 와중에는 헛소리로 치부될 짜증스럽기만 한 말이었다. 나는 ‘헛소리 말고 빨리 구급차나 불러줘요!’라고 말하며 눈을 부릅뜨고 쏘아붙이려 했지만 내 의사와는 다르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고, 들숨과 날숨만이 거칠게 반복되었다. 목소리가 들린 곳에 있는 기이한 존재에 정신이 팔린 것이다. 나는 고급스러운 정장에 붉은 코트를 걸친 노인의 맹금류 같은 눈과 마주쳤다. 갸름한 얼굴을 둘러싼 수염과 머리칼은 은빛으로 셌지만, 사자 갈기처럼 정돈되어 있어 기품이 넘쳤다. 인상만으로도 심상치가 않았지만, 정장 차림의 노신사를 그 공간에서 더욱 이질적으로 만드는 것은 그가 구름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었다는 점이었다. 생긴 건 녹슬지 않은 노병인데 입은 건 신사복이고 하는 짓은 신선이다.
“왜 아무 말도 없어! 벌써 나를 잊은 게냐! 나다. 도깨비 왕.”
노인이 소리치자 다시 두통과 어지럼증이 엄습했다. 천지가 다람쥐 쳇바퀴처럼 굴러가자 극심한 울렁거림이 일렀고, 나는 결국 견디지 못해 고꾸라졌다.
“어허~ 그렇게 기억력이 짧아서야 어디 부모는 잘 모시겠나?”
구두 소리와 함께 자신을 도깨비라 밝힌 노인이 구름에서 내려와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세월도 지날 만큼 지났으니 그때 미룬 일을 치르자꾸나. 어디 한 번 원하는 걸 말해 보거라!”
그 우렁찬 목소리가 고막을 뚫고 들어와 뇌를 잡고 흔드는 것 같았다.
“뭔 개소리야! 빨리 구급차나 불러줘요!”
딱! 도깨비가 손가락을 튕기자, 두통과 어지럼이 말끔히 사라졌다.
“어?!”
딱! 도깨비가 손가락을 튕기자 배경이 절벽 위로 바뀌었다. 딱! 도깨비가 손가락을 튕기자 도깨비와 나 사이에 먹음직스러운 진수성찬이 나타났다.
“음~ 아무래도 참으로 기억에 없나 보군.”
도깨비는 12첩 임금님 수라상에서 노릇하게 익은 조기와 호리병을 집어 들더니 절벽 가장자리로 갔고, 그 끝에서 내게 손짓했다. 나는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해 넋 놓고 있다가 그 손짓에 이끌려 한 걸음씩 나아갔다.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커지는 웅장한 함성과 파도 소리가 느껴진다. 그리고 절벽 끝에 도착한 내게는 함성보다 더 장엄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 인간은 없었다. 온갖 짐승의 머리를 한 괴물들과 날개 달린 자들이 파도 위를 달리며 전장을 이루고 있었다. 쪽수로 밀어붙이는 괴물들과 소수정예로 대항하는 날개 달린 자들. 승세는 괴물들에게 기울고 있었다. 마치 해상명부도를 현실에 재현해 놓은 듯한 광경을 나는 그저 넋 놓고 볼 수밖에 없었다.
“잊어버렸다 하더라도 은은 은이지. 네 녀석은 우리의 기념할만한 첫 승리를 그림으로 남겨주었다.”
조기를 머리부터 씹으며 말하는 도깨비는 노신사가 아닌 해상명부도 우측 끝에 그려진 붉은 천을 두른 괴물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괴물의 옆에는 겁에 질려 벌벌 떨면서도 붓질을 멈추지 않는 조선 시대 차림의 내가 있었다.
“저 그림이 하도 마음에 들어서 말이다. 내가 보답으로 원하는 걸 들어주겠다고 하니까 네놈이 부모님이 걱정되니까 돌아가야 한다고 하질 않겠느냐? 그래서 얼른 집에 다녀오라 했더니, 그 세를 잊어버리고 인제야 어슬렁어슬렁 얼굴을 들이미는 게 아니냐. 이쯤 되니 내 역정이 나더구나. 더 늦었으면 은이 화로 바뀔 뻔했어. 인석아, 하하하하!”
도깨비의 말을 듣다 보니 어렸을 적에 할아버지가 조상님이 그려주신 거라면서 애지중지 간직한 그림이 생각났다. 지금 생각해 보니 여기 있는 도깨비를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자~ 이제 좀 그때 일이 생각나느냐. 그럼, 어서 원하는 것을 말해봐라.”
꿈속에서 사람은 자신의 욕망을 표출한다. 꿈이라는 자각이 생기면 더더욱 태연하게 자신의 욕망을 표출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사양하지 않고 내 욕망을 말했다. 어차피 꿈이니까.
“그럼, 평생 놀고먹을 수 있는 돈하고 몇 번을 안아도 질리지 않는 여자를 줘.”
내 말에 도깨비는 아무 말 없이 내 얼굴을 유심히 관찰했다. 부리부리한 붉은 눈이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나를 품평하고자 서서히 가까워지니 꿈이라는 걸 알아도 거리를 두고 싶었다. 그렇게 잠시 후 도깨비는 짧은 침묵을 깨며 말했다.
“좋다. 대신 네놈의 첫째 자식이 7살이 되면 내가 받아가는 것이 조건이다.”
어차피 꿈이다.
“좋아.”
어차피 꿈이고, 나에게 아이의 가치란 있으면 짐이고 없어도 그만인 존재였기에 그렇게 가볍게 말할 수 있었다.
딱! 도깨비가 손가락을 튀기자 천지가 일그러지고, 몸이 수면 위로 상승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니 정신이 각성했다.
“학생! 괜찮아?”
딱! 딱! 딱! 눈을 뜨니 경비원이 코앞에서 손가락을 튕기며 볼을 토닥이고 있었다. 나는 비교적 생생한 꿈이었다는 감상에 젖은 채 박물관을 뒤로했다.
3. 여자가 두 줄 그어진 것을 보여줬을 때처럼.
‘아무리 도깨비라도 바다 건너 해외로 도망치면 못 쫓아오지 않을까?’
혜인이를 안고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온 나는 명안이라 생각하고 곧장 가방에 짐을 쌌다.
“아빠, 여행 가요?”
혜인의 물음에 나는 평소처럼 웃으며 말했다.
“응, 혜인이하고 아빠하고 셋이서 여행 가는 거야.”
“와~”
내 말에 혜인이는 기뻐하며 인형과 옷을 모아오기 시작했다. 어지르는 것처럼도 보이지만, 혜인이의 표정은 진지했다. 나는 그 귀여운 모습을 잠시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머리를 흔들어 제정신을 차렸다.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다. 집은 부모님에게 맡기면 될 것이다. 아내는 일 때문에 못 간다고 하면 어쩔 수 없이 둘이서만이라도 가면 된다. 나는 무직에 혜인이는 유치원을 다니지 않으니 더 신경 쓸 것도 없다. 나는 대충 필요한 짐을 쌓아두고 핸드폰으로 비행기 표를 예약하려 했다.
“다녀왔어~ 어!? 오빠 이게 다 뭐야?”
퇴근한 아내, 혜은이가 어질러진 거실을 보며 말했고, 나는 준비해둔 말을 했다.
“혜인이도 내년이면 초등학교 들어가잖아. 학교 들어가기 전에 해외에서 몇 달 있다가 오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준비하고 있었어.”
“지금 이 시국에?”
“시국이라니?”
‘그게 그렇게 갑자기 결정해도 될 일이야?’라든지, ‘나 지금 하는 일은 어떡하고?’라든지, ‘해외에 의지할 사람도 없이 가서 어떻게 지내려고?’라든지 아니며 의외로 흔쾌히 ‘그래. 그러는 것도 좋겠네.’라던지, 할 말은 그 밖에도 더 있었겠지만, 혜은이는 시국을 말했다. 시국이 어쨌다는 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던 나는 고개를 모로 꼬았고, 그런 내 모습에 혜은이는 리모컨을 들었다.
“뉴스 좀 보고 살아, 이 양반아~”
뉴스에서는 코로나 사태의 심각성이 보도되고 있었다.
도피가 안 된다면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하면 된다. 나는 수소문 끝에 용하기로 소문난 무속인의 집을 찾아갔다. 붉은 한복차림의 무속인은 귀신 같은 인상을 귀신 같은 화장으로 덮은 50대 정도의 여성이었다.
“평생 걱정 없이 살다 갈 팔자인데 여긴 왜 왔어!”
무속인은 나를 노려보며 대뜸 그렇게 말하더니 병풍 앞에 앉았고, 손짓으로 내게 앉기를 권했다.
“저기, 다름이 아니라, 제가 도깨비를 만났는데-”
나는 도깨비가 내 딸을 노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나 좋을 대로 각색된 설명에 무당은 벌떡 일어서더니 병풍 뒤에서 흉흉한 칼 두 자루를 챙겨 나왔다.
“흥. 당신 행실이 글러 먹어서 그런 잡귀가 끼는 거야. 그래도 걱정 말어. 내가 쫓아 줄 테니 앞으로는 조상님께 기도 열심히 하고, 주기적으로 굿을 치면 돼. 수진아, 짐 챙겨라!”
“네, 선생님.”
무속인의 말에 방 한구석에서 존재감 없이 앉아있던 소녀가 조용히 일어나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나는 아르바이트 같은 것으로 생각하며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런 나에게 갑작스럽게 불호령이 떨어졌다.
“뭐해! 얼른 앞장서!”
“아, 네, 가요!”
소녀는 휴관한 국립민속박물관 안의 해상명부도 앞에서 접이식 테이블을 펴놓고 보따리에서 랩이 씌워진 음식들을 차례로 꺼내어 기계적으로 나열했다. 한두 번 해보는 것이 아닌지 금세 상을 다 차린 소녀는 보따리에서 작고 검은 무언가를 꺼내어 접이식 테이블 아래에 두었다. 그 검은 색 물체가 궁금하여 자세히 들여다보니, 놀랍게도 스피커였다. 소녀가 리모컨을 조작하자 스피커에서는 장구와 꽹과리 소리가 노인의 목소리와 함께 흘러나왔다. 그리고 준비가 끝났는지 소녀는 살며시 구석으로 빠졌고, 교대하듯이 무속인이 나와 굿을 시작했다. 무속인은 폴짝폴짝 뛰기도 하고, 이리저리 돌기도 하고, 양손에 쥔 칼을 허공에 휘두르기도 했다. 그렇게 두 시간 정도였을까, 박물관 측에는 미리 허가를 받았기에 무속인은 아무런 방해 없이 굿을 끝냈다. 도깨비도 노인도 괴물도 안 나온 채 말이다.
“이걸로 해치운 걸까?”
내가 그렇게 중얼거린 직후, 딱! 손가락 튕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스피커에서 태평소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가락은 빨라지고, 노인의 목소리는 젊어졌으며, 가사도 바뀌었다.
[흐싸 흐싸 흐싸 흐싸, 의쌰 의쌰 의쌰 의쌰, 우쨔 우쨔 우쨔 우쨔, 앗싸 앗싸 앗싸 앗싸.]
“도깨비 앞에 서려면 이 정도 흥은 낼 수 있어야지!”
그림 속 도깨비는 노신사의 모습으로 그림에서 나와 전시관 유리를 통과해 우리 앞에 나타났다.
“도... 도깨비!”
진짜 도깨비를 본 무속인은 아까보다 더 힘있게 굿을 하기 시작했다. 창백한 얼굴로 땀에 젖었으면서도 열심히 뛰어다닌다. 도깨비는 테이블 위에서 메밀묵을 집어 먹으며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혀를 차며 도리질했다.
“쯧쯧, 그것도 춤이라고 추냐!”
그렇게 호통치고 딱! 소리 내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박물관 천장에 미러볼이 돌기 시작한다.
“보는 사람은 많을수록 좋지.”
딱! 도깨비가 손가락을 튕기자 십 대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박물관 안을 가득 채웠다. 어두운 실내에 색색의 빛이 감돌고 그 안에서 젊은이들이 춤을 춘다. 그 가운데서 노신사는 정장 재킷을 벗어 던지고 춤사위를 뽐냈다. 갖은 멋은 다 부리고 마지막에 보인 것은 막춤이었기에 조금 의외였지만, 박자를 잘 타는 현란한 움직임 덕분에 박수갈채가 끊이질 않았다.
“네 이놈! 어디 요괴가!”
자신을 가지고 논다고 생각했는지 버럭 화를 낸 무속인은 양손에 칼을 쥔 채 도깨비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도깨비는 이에 대항하기는커녕 칼을 쥔 무속인의 양손을 잡고 듀엣 댄스를 추기 시작했다. 역시 이것도 즉흥적인 막춤이었지만 관객들은 소리 지르며 환호했다. 나도 질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소녀와 함께 그 속에 끼어들었다.
그렇게 우리는 도깨비에게 홀려 클럽으로 변한 박물관에서 아침이 밝을 때까지 춤추게 되었다. 무속인은 녹초가 되어 실신하였고, 나와 소녀는 겨우겨우 무속인을 밖으로 옮겨 택시에 태웠다.
“나쁜 도깨비는 아닌 것 같으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택시가 출발하기 전, 기가 다 빨린 것처럼 축 늘어진 무속인과는 반대로 멀쩡해 보이는 소녀는 그런 말을 남기고 갔다. 내가 대꾸하기도 전에 택시가 출발해버렸기에 나는 허공에 대고 말하는 꼴이 되었다.
“자기 딸 목숨이 걸렸는데 잘도 그런 속 편한 소리가 들리겠다.”
무속인은 그녀 말고도 많았지만, 도깨비의 춤사위에 농락되지 않는 무속인은 없는 것 같았다. 나는 3주나 흘러서야 그렇게 단념할 수 있었고, 무의미하게 3주가 흐른 지금, 딸의 7살 생일은 열흘 밖에 안 남게 되었다. 그렇게 지나간 시간을 후회하며 생긴 조바심은 날 삼킬 듯이 불어났고, 결국 감당할 수 없게 되자 극단적인 생각으로 이어졌다. 그날 나는 도깨비를 집으로 불렀다.
“족발 맛이 괜찮구나~”
나는 도깨비가 좋아한다는 막걸리에 돼지고기, 그리고 수수떡과 메밀 떡으로 상을 차리고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집으로 도깨비를 데려왔다. 도깨비는 차림새는 바뀌어도 속은 옛것 그대로인 듯했다. 거실에 편 10인용 밥상의 상석쯤 되어 보이는 자리에서 도깨비는 정장이 아닌 계량 한복을 입고 앉아있다. 그리고 주방에서 아내가 차려오는 음식을 아무런 의심도 없이 입에 들이붓는다. 참고로 아내에게는 예전에 신세 진 어르신이라고만 말해두었다.
“입에 맞아서 다행이네요.”
“자아~ 그럼, 이제 슬슬 날 부른 이유를 한번 말해봐라.”
맛있는 식사와 술로 기분을 좋게 하고 이쪽의 요구를 말하면 그냥 말하는 것보다는 좋게 들어줄 것이라는 김수빈 형의 말은 도깨비에게도 적용되는 것 같았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도깨비는 우리 둘 사이에서 거론될 하나뿐인 화제를 재촉한다. 뭐든 이루어 줄 것 같은 얼굴이었기에 나도 쉽게 말을 꺼낼 수 있었다.
“딸 이야기인데, 제 딸 말고 다른 아이를 데려가면 안 되겠습니까? 원하신다면 몇이든 준비하겠습니다.”
“안 된다. 난 약조한 대로 네 녀석의 딸을 데리고 갈 것이다.”
“그... 그러지 마시고 한 번만 더 생각해 주십시오. 원하신다면 뭐든 준비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오만방자한 놈일세. 이놈아! 네 놈이 무엇을 준비하던 난 그 곱절에 해당하는 물건을 바로 만들 수 있다.”
딱! 도깨비가 손가락을 튕기자 마침 텔레비전에 비치고 있던 트럼프 대통령이 화면에서 튀어나왔다. 이러한 기행은 도깨비를 찾아갔을 때마다 봤었다. 그렇기에 주변을 살피며 ‘Where am I.’를 외치는 미국 대통령과 ‘이게 무슨 일이야’라며 소리치는 아내를 개의치 않고 도깨비에게 계속 간청했다.
“그럼, 딸 대신 절 데려가시면 안 되겠습니까?”
국립민속박물관에서 넘어졌을 때 정도로 머리를 조아리며 도깨비에게 빌었다.
“딱한 놈, 그러게 왜 그렇게 변해가지고는. 쯧쯧쯧.”
도깨비는 동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혹시 내 부탁을 들어주는 건 아닐까? 나는 기쁜 마음을 감춘 채 고개를 들었지만, 도깨비의 말은 내 머리를 다시 조아리게 했다.
“미안하지만 우리 이매망량들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약속을 어길 수는 없다. 그러니 약속이 건재한 이상 네놈 딸아이를 데려가지 않을 순 없다.”
딱! 도깨비가 손가락을 튕기자 도깨비와 미국 대통령이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절망한 나는 그 자리에서 흐느끼고 그런 나를 아내는 아무 말 없이 달래주었다.
다시 해외로 나가 볼까?
안전안내문자가 왔다.
아니다. 괜히 병에 걸릴 수도 있다. 그러면 또 다른 무당을 찾아볼까?
안전안내문자가 왔다.
아니다. 그건 시간 낭비일 뿐이다. 그냥 다시 한번 빌어 볼까?
안전안내문자가 왔다.
아니다. 그놈이 그렇게 딱 잘라 말한 이상 더 이상의 간청은 오히려 화를 부를 수 있다. 차라리 녀석이 사는 그림을 없애 버릴까?
안전안내문자가 왔다. 안전안내문자가 왔다. 안전안내문자가 왔다. 안전안내문자가 왔다.
나는 핸드폰을 집어 던졌다.
“시끄러! 씨발!”
살짝 열린 방문 밖에서 아이의 인형이 사라지고 작은 발소리가 멀어진다.
“혜인아!”
문을 박차고 달려나가자 혜은이의 뒤에 숨은 혜인이의 모습을 보인다.
“소리 질러서 미안해. 아빠가 잘못했어.”
혜인이 앞에 무릎 꿇고 다시 한번 말했다.
“미안해. 아빠가 모자라서 미안해.”
“무슨 일인지 말해줘.”
내가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자 혜은이는 기대고 싶은 목소리로 말하며 날 안아주었다.
“혜은아, 나... 이제 더 못하겠어.”
“할 수 있어. 내가 도와줄게.”
도깨비의 요술을 실제로 본 혜은이는 기독교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겪은 일을 전부 믿어주었다. 혜은이는 살며시 혜인이를 끌어안았고, 그 모습은 당황한 자신을 진정시키려는 것 같았다. 나와 혜은이의 행동에 놀란 혜인이었지만 자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혜은이를 마주 안아주었다. 그렇게 잠시 후 아내와 아이에게서 힘을 얻은 나는 내가 가장 처음 생각해낸 가장 확실한 방법을 아내에게 털어놓았다.
4. 인생을 좀 먹는 것
7년 만에 만난 정인의 등에 가까워질수록 칼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통화에 정신이 팔린 정인은 나를 눈치채지 못한 듯하다.
“너 때문에 모든 걸 망쳤어.”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 원망하고 증오할 대상이 필요했고, 마침 그때 정인이에게 연락이 온 것이다. 박정인, 10년 전, 복권에 당첨되고 나와 함께 돈을 벌었던 친한 동생. 네가 밉다. 어둠 속에서 나는 정인이가 눈치채지 못하게 서서히 다가갔다. 그리고 두세 걸음이면 닿을 거리에 들어서게 되었다.
“형, 째자.”
10년 전, 택배회사 식당에서 야식을 먹으며 복권 번호를 맞춰본 정인이는 나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뭐야 당첨됐어? 몇 등인데?”
“1등. 어때 쩔지?”
“쩌는데? 야, 나도 돈 좀 줘.”
“이 형이 뭐 보태준 게 있다고!”
택배 상하차 아르바이트에서 우연히 만난 정인이와는 10살 이상의 나이 차가 있었는데도 죽이 잘 맞았고, 금세 친형제처럼 가까워졌다.
“그래서 그 돈으로 뭐할 건데?”
“전부터 꿈이었던 돈 많은 백수가 될 거야.”
“에휴~ 모자란 놈.”
날짜가 바뀌는 시간에 물류창고를 탈출한 우리는 차도를 몇 시간 동안 걸어서 겨우 외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탈주는 생각보다 긴 여정이었기에 지치고 허기진 우리는 곧장 순대국밥 집에 들러 배를 채우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지 말고 내 말 좀 들어봐.”
거기서 나는 돈이 생겨도 쓸 줄 모르는 한심한 동생을 설득했다. 가질수록 기회가 주어지는 세상인데 그 기회를 썩히는 건 너무 답답한 일이다. 물론 조금의 위험은 감소해야 하지만 그 결과가 번쩍이는 외제 차에 강남 한복판에 있는 건물이라면 도전해볼 만할 것이다.
순대국밥 집에서 나는 정인이를 끈질기게 잡고 늘어졌고, 결국 내 꼬임에 넘어온 정인은 내 지시하에 돈벌이를 시작했다. 부동산, 주식, 펀드, 비트코인까지 돈 될만한 일은 전부 손댔고, 어째서인지 녀석은 항상 성공했다. 반면 나는 녀석에게 빌붙어서 콩고물이 떨어지는 것을 받아먹는 신세로 전락했다. 아니지. 내가 벌게 해준 돈이다. 일, 이 할 정도 받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일이다. 나는 분명 정인이가 잘 되는 것이 배알이 꼴려서 한 몫 챙기고 나서는 3년간 줄곧 밑 빠진 독에 붓도록 만들었는데, 녀석은 그 밑 빠진 독이 넘쳐 나도록 수확을 걷으니 말이다. 가망 없는 제약회사의 주식은 원인 모를 질병이 돌 때 신약을 개발해서 오르게 되고, 떨어지기만 하던 외지의 땅값은 정인이가 사자마자 대기업이 들어서면서 몇 배로 불어났다. 놀랐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열불이 났다. 애당초 그날 정인이가 복권을 산 것도 내가 권해서 산 것인데, 내가 굽신거리지 않으면 땡전 한 푼 주려 하지 않는다. 형 덕분이라면서 2~3억 정도는 주는 게 당연하지 않나? 나에게는 부양할 가족도 있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냔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부당하다고 생각한 나는 정인에게 따지기 위해 전화를 꺼냈다. 하지만 통화를 걸려던 나보다 먼저 누군가가 전화를 걸어왔다.
“김수림씨 보호자 되시는 김수빈씨 맞으시죠?”
수화기 너머에서 낯선 남자의 목소리로 아들의 이름이 들려오니 갑자기 목이 잠기는 것 같았다. 전에도 몇 번인가 있었던 일이다.
“네. 맞습니다.”
“지금 서에 와 주셔야겠습니다.”
수화기 너머로 아들이 오토바이 사고를 냈다는 말을 듣고, 그래서 합의금이 필요하다는 말을 들은 뒤에, 아들이 사고 낸 차의 기종이 세계에 몇 대 없는 기종이라는 얘기로 이어지면서, 끝으로 그 액수를 듣고 주저앉고 말았다.
서에서 돌아와 집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겁에 질린 아들의 면상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잘못 했어요. 잘못 했어요. 잘못 했어요.”
“여보, 그러다 애 잡아요! 수림이도 반성하는 것 같으니까 대화로. 끼야야악!”
나는 말리려는 아내도 밀쳐버리고 계속해서 아들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아내는 어디에 머리를 찌었는지 피를 흘리고 있었지만, 나는 아들을 패는데 눈이 돌아가 있어서 보이지 않았다. 내가 저런 왠수새끼를 기르기 위해 그렇게 고생했다는 사실을 생각하자 화를 주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날 나는 분이 풀릴 때까지 아들을 폭행했고, 몇 시간 후 나는 다시 서로 가게 되었다.
평생 갈 일 없던 경찰서를 아들놈 때문에 두 번이나 왔다 갔다는데, 더 웃긴 건 이번에 신고한 사람이 다름 아닌 아내였다는 것이다. 아내는 내가 아들을 죽일 것 같아 무서워서 그랬다고 한다. 나는 어쩌면 정말 그랬을지도 모르는 일이었기에 아내를 마냥 나무라지는 않았다. 다행히 징역을 사게 되지는 않았지만 이젠 정말 돈이 없게 되었다. 그렇게 돈이 필요해진 나는 다시 정인이에게 연락해보았지만 어째서인지 통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다음 날, 점심이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그날도 전화는 이어지지 않았고, 대신 아내와 통화하게 되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아내는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이 암이라고 말했다. 이번엔 아내가 암이란다. 하하하하.
나는 정인이를 찾아 녀석의 집으로 가 보았다. 하지만 정인의 부모도 정인이 어디로 갔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저녁이 되어서 집에 돌아오니 아들은 방에 없었다. 대신 책상 위에 있는 손편지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가출합니다. 찾지 마세요.]
이유는 없고 저 한 문장이 전부였다. 죄책감 때문인지 아니면 나에게 더 맞는 것이 두려웠는지는 모른다. 그저 나간다고 하며 찾지 말라고 한다. 하하하하.
돈이 필요하다. 술이든 여자든 뭐든 이 기분을 가라앉혀 줄 돈이 필요했다. 하지만 여전히 정인은 전화를 받지 않는 상태였다.
5. 아름답게 보이던 것
저녁 식사 후, 나는 혜은이와 함께 한강을 걸었다. 날이 저문 뒤, 강물에 야경이 반사되는 것을 보자 온기가 필요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랑 처음 만났을 때 기억나?”
그럴 때 혜은이는 내 손을 잡으며 대뜸 물어왔다.
“소개팅으로 만났었지. 그때 너는 다른 사람하고 약속이 있었고, 나도 다른 사람하고 약속이 있어서 마냥 기다리고 있다가 내가 먼저 말을 걸었었지. 저기요. 그쪽한테 관심 있어서 그러는데 연락처 좀 알려주시겠어요? 하고.”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도 도깨비가 이어준 것으로 보인다. 몇 번을 안아도 질리지 않는 여자라는 말대로 혜은이는 몇 번을 보아도 아름답게만 보이니 말이다. 솔직히 몇 년을 함께 지냈는데 아직도 손만 잡아도 마음이 콩닥거린다.
“아닌데~”
“뭐?! 아니야. 우리 분명 그때 처음 만났어!”
“아니라니까요. 이 양반아~”
“그럼, 언제 만났는데?”
“정말 기억 안 나? 음~ 알려줄까 말까.”
혜은이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웃으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만 알고 있는 것도 바보 같으니까 특별히 알려줄게. 우리가 처음 만난 건 내가 스무 살 때 일이야. 그때 나는 학교 졸업한 직후였는데, 전문대라도 가든가 빨리 취직하라고 닦달하는 부모가 싫어서 가출했거든. 그리고 갈 곳이 없어서 사귀는 오빠 가게에서 숙식하면서 살았지. 그때 우리 박정인씨가 대학등록금 벌어야 한다면서 아르바이트로 왔고. 히히히. 우리 둘은 평일 야간에, 그러니까 손님도 없는 새벽에 둘이서 가게를 지키고 있었지. 오빠나 나나 평소에는 일 이외에는 별로 말 섞는 일 없었는데, 그날은 왠지 내가 좀 우울했었거든. 그냥 가만히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데 불현듯이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나는 이렇게 살다가 사귀는 오빠하고 결혼해서 애 낳고 늙어가겠구나. 그냥 막연히 그런 생각이 들었어. 그랬더니 갑자기 눈물이 나는 거야. 어렸을 적에는 분명 아나운서가 꿈이었는데 성적은 안 따라주고 점점 뒤처지는 게 싫어서 그냥 손을 놔버렸는데 그게 그제 서야 후회가 된 것 같아. 후회해 봤자 너무 늦었는데 말이지. 하여튼 그때나 지금이나 좀 눈물이 많았지. 그때 오빠가 내가 우는 이유를 듣고 뭐라고 했는지 알아?”
“사람이 전문가가 되는 데에는 7년 정도의 시간이면 충분하다. 너는 인제 20살 겨우 넘겼으니 아직 10번은 더 남지 않았겠냐. 그러니 남들 시선 신경 쓰지 말고 자기 하고 싶은 거 찾아서 하라고.”
“뭐야~히히히. 다 기억하고 있었네~ 그 말을 진짜로 믿은 건 아니었는데, 뒤처지진 걸 지적하는 부모님들의 말보다는 훨씬 와닿더라. 그 뒤로 그 오빠하고는 헤어지고 5년 만에 학교 졸업해서 꿈에 그리던 아나운서가 되었지~”
“그리고 소개팅에서 날 만난 거고.”
“응. 나한테 그렇게 말해놓고 백수라니까 어이가 없어서 갱생시켜주려고 만나기 시작한 게 여기까지 와버렸네.”
혜은이는 도깨비가 이어주기는 했어도 나와 결혼 한 것은 본인 의지였다. 이 사실이 내가 결심을 세울 수 있게 해주었다.
“혜은아.”
“응.”
나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것 같은 그 감미로운 미소를 보고 나는 다시 한번 반하게 되는 것 같았다.
“이혼하자.”
“1년 만이야. 재혼 안 해주면 죽을 줄 알아.”
6. 없어도 되는 것.
한강 대교 위에서 도깨비는 정인과 수빈이 만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만약 정인이 재물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여기서 수빈에게 등을 찔릴 것이다. 도깨비는 정인에게 마지막으로 말했다. 약속이 건재한 이상 네놈 딸아이를 데려가지 않을 순 없다고. 그 말은 딸을 지키고 싶다면 약속을 파기하라는 뜻이었다. 그건 정인이 도깨비에게 받은 것을 포기하라는 뜻이기도 하다. 돈과 아내, 이 둘을 포기한 정인은 돈 때문에 형의 원한을 사서 등을 찔릴 일도 없고, 집에 강도가 들어서 아내와 딸이 흉한 꼴을 볼 일도 없어졌다. 도깨비는 처음 정인의 관상을 봤을 때부터 오늘을 봐왔었다. 평생 걱정 없이 살다 갈 팔자인 정인은 말 그대로 놀고먹다 갑자기 죽을 팔자였다. 그렇기에 도깨비는 딸을 데려간다는 둥 은을 갚겠다는 둥 말하면서 실제로는 아무 일도 벌이지 않았다. 그저 정인에게 평생 안 했을 걱정을 하게 했을 뿐이었다. 그 결과가 이거다. 정인은 아내와 이혼하고 재산을 반으로 나누었다. 아내와 딸은 그 돈으로 별 어려움 없이 살 것이다. 정인은 반으로 나누어진 재산을 모두 사회에 환원했다. 그 결과 수술비가 없어서 죽어가는 수빈의 아내 또한 살리게 되었다. 지금 정인의 통화를 엿들은 수빈이 칼을 떨어뜨리고 주저앉는 것이 보였다. 저 둘은 다시 친형제처럼 지낼 것이다.
“이 정도면 은은 다 갚았다고 봐도 좋겠지. 이제 돌아가자!”
도깨비의 말에 도깨비 주변에서 수십 개의 도깨비불이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에~이. 형님! 오랜만에 춤 좀 치러가는 거 아니었습니까!”
““““옳소! 옳소! ”“”“
도깨비불들이 울부짖지만, 그 모든 소리를 도깨비는 일축한다.
”옳기는 무슨! 시대가 너무 많이 바뀌었어. 이제 우리가 하는 일이 무작정 옳다고 보기도 힘들단 말이다. 집에나 돌아가자!“
딱! 도깨비가 손가락을 튕기자 막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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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늦어서 죄송합니다. 날짜를 헷갈렸습니다.ㅠㅠ
코로나 때문에 힘든 상황 속에서도 좋은 강의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