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3월 17일.
목포에 사시는 기홍씨 이종사촌 형님 큰 딸이 결혼을 해서 오래간만에 목포행 기차를 탔다.
결혼 당사자인 오촌 조카는 잘 모르지만, 사촌 시아주버님이나 형님은 어머님이 목포 사실 때 가까이 계시면서 왕래가 잦은데다 사이가 돈독해서 나도 여러 번 뵌 적이 있다. 요즈음 어머님 무릎이 많이 안좋아지셔서 내려가시지 못하니 자식 중에 한 명이 대표로 가줘야 하는데, 오랜만에 기차 타고 목포에 가보고 싶기도 하고, 기홍씨의 오랜 친구인 수 선배 본 지도 너무 까마득해서 겸사겸사 우리가 가자고 펌프질을 했다. 덕분에 유진이는 하루 종일 자유의 날을 즐기기로 했다.
전 날 달걀도 삶아 놓고, 사과도 깎아서 지퍼백 안에 담아 놓고~
그걸로는 모자라 기차역에서 우유랑 빵이랑 커피도 사고~~
결혼식 음식으로 점심 먹을 걸 생각해서 더 많이 사지는 않았지만
3시간 10여분의 여정 동안 먹을 게 든든히 있어야 기차여행이 즐겁지 않겠냐는~
그나저나 책 읽는 기홍씨의 모습은 언제 보아도 아름답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내가 스물일곱 살 때 논문 진도도 안나가고 미래가 답답하여
일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찾아간, 당시로서는 거금 3만원짜리 점집-영동시장 할아버지의 말이 생각난다.
하도 사람이 많다고 해서 아침 8시 반엔가 갔는데도 두 시간 가까이 기다렸다. @.@
내 앞에 기다리던 LA에서 왔다는 아줌마, 대전에서 올라와 여관에서 하룻 밤 자고 아침 일찍부터 와서 기다렸다는 아저씨
등등의 면담은 한 사람 당 30분이 지나도 도무지 끝날 줄 몰랐다.
그러나 정작 내 순서는 고작 10분도 안되어 끝나길래 허탈하기 이를데 없었다. 무슨 말인지 선명하게 이해도 안되고, 그냥 편안한 팔자라 잘 살거라고 하며 내보내니 이거 뭐, 무슨 비싼 원서 한 권 사서 안읽고 처박아뒀다 치자고 마음을 정리하며 돌아왔다.
나중에 돌아보니 그 할아버지의 말은 우연치고는 신기하게 대부분 잘 맞아 떨어졌다.
"상품 수, 상표 수가 있어서 사람 많이 모인 곳에서 외국 의상이나 궁중 의상 입히는 일을 할 거다.(잉, 국악원에서 일을 하려나?)
공부는 오래 하지 마라.(예, 저도 그럴 생각이예요.)
그대신 선비의 책상을 닦아주면 명예는 선비의 것이고 부귀 영화는 너의 것이라.(유학 가는 남자를 찾아봐야 하나??)
결혼할 때 고민이 많을 테니(이것도 고색창연한 전문용어를 쓰셨는데) 열두 폭 말기치마를 말아서 제사를 드려라.(이런 소리를 해싸서 내 앞에 LA아줌마는 수 백 만원을 그 점쟁이가 운영하는 절에 제사 비용으로 바치는 듯한 분위기였다.)
결혼은 서른 살이면 할 거다."
마지막 한 문장 말고는 대부분의 예언은 적중한 셈이다. LG아트센터에서 일할 때 그 할아버지의 외국의상 궁중의상 운운이 생각나면 우연치고는 잘 맞네 싶었는데, 기홍씨의 책 읽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저 사람이 바로 선비가 아니더냐, 그 할아버지 하여간 용해~ 이런 생각이 절로 든다. 내가 이런 소리를 주워 섬기면 기홍씨는 쓰잘데기 없는 소리 한다고 매우 싫어한다.
그래도 또 한다. ㅋㅋㅋ

목포에 내리고 보니 결혼식까지 한 시간 반이나 남아서 결혼식장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목포 역 주변의 구 시가지를 거쳐 왔는데, 절반은 빈 집 같았다.
상권이 영산강 하구언이 있는 하당 지역으로 이동했다고는 하지만
구 도심이라고 이렇게 유령도시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는 게 참으로 씁쓸한 일이다.
지방 소도시(? 전남 도청이 있는 목포가 소도시라고라?)의 생태계는 서울과는 매우 다른 것 같다.
곧 쓰러질 거 같은 축대 위에 허름한 가정집을 가리키며 저기에 자기가 다니는 독서실이 있었다는데.. -.-;;;
불법 영업한 거 아니었나 싶은 매우 이상한 구조였다.
사진은 기홍씨의 청춘이 깃들어 있는 목포한방병원이 있던 자리.
저 빨간 간판은 기홍씨 있을 때 본인이 직접 오더해서 만든 거라나. >.<
대학을 막 졸업하고 선배의 제안으로 총 3명이 함께 세웠다는 한방병원.
나에게 기홍씨의 한방병원 시절은 첫사랑 그녀를 만났던 시절로 인식되지만,
스물여섯 일곱살 무렵의 자신의 도전과 실수, 성취와 좌절들이 기홍씨에게는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까.
생각해보니 내가 논문을 끄적이다 점 보러 다녔던 나이에 기홍씨는 이런 큰 사업에 동참을 했었네... =.=

결혼식을 마치고, 일가친척 어른들께 모두 인사 드리고,
그 와중에 사촌누이의 절친께 건강 상담도 해드리고 나니 얼추 3시쯤 되었다.
드디어 2년? 3년만에 수 선배를 만났다.
차를 가지고 나와서 목포 투어를 시켜 주겠다며 북항을 지나 새로 개통된 목포대교로 달렸다.
고하도와 목포를 잇는 다리, 목포대교.

수 선배와 같이 사진을 하나 찍을 걸.
이 때가 기홍씨 얼굴에도 살이 좀 붙었을 때인가 보다.
훨씬 나이 든 아저씨처럼 보이넹~
수 선배는 목포대교에서 여자친구한테 어필하려고 자살 소동을 벌이다 떨어져 죽은 남자의 얘기를
웃지 못할 슬픈 이야기라며 전해주었다.
드라이브 중간중간에도 요즘 몇 권 읽고 있다는 지젝 논평을 삽입해주시면서~

여기가 유달산의 일등 바위인가?
유진이가 1학년 체험학습 때 여기까지 올라갔다고 자랑, 자랑을 했었는데.
일등 바위는 아니고 노적봉 되시겠다.
이순신 장군의 지략으로 유명한 전설이 깃들어 있는 봉우리이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이엉으로 바위를 엮어 아군의 군량미처럼 가장해 왜군의 전의를 상실케 했다는 내용이다.
ㅋㅋ 산처럼 쌓아놓은 쌀 가마니라..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왜놈들이 그렇게나 멍청하단 말인가.
지금 다시 찾아보니 일등 바위는 더 위로 한참 올라가야 하던데,
거기에서 바라보는 목포 앞 바닷가와 전경이 장관이다.
다음엔 시간 내서 꼭 올라가봐야겠다.

유달산에서 바라보는 목포 시내 전경.
바다든, 산이든 전망 좋은 곳에서 친구에게 술 한 잔 사고 싶다는 기홍씨의 바램에도 불구하고,
수 선배는 자고로 전망 좋은 곳은 맛이 없다며, 뭘 모르는 외지인? 관광객들은 전망 좋은 곳에서 먹지만
현지인은 그런 곳은 먹을만한 집으로 안쳐준다며 산에서 내려와 한참을 달리더니, 우리를 어느 음식점으로 데리고 갔다.

병어회와 함께 마시는 잎새주.
지젝에 대한 알 듯 모를 듯한 다양한 논평에 이어 수 선배 특유의 친구 점검 시간,
넌 요즈음 뭘 읽냐, 뭐에 관심이 있냐,
네가 말하는 진화심리학을 통해 더 많이 알게 되었다는 지식과 이해의 실체가 뭐냐..
등등을 거쳐,
결국 네가 나를 노사모를 거쳐 현실 정치로 발을 담그게 해 놓고,
이제와서 너는 탈정치화된 삶을 살고 있다는 거냐,
그렇다면 너 배신이다? 혹은 실망이다?가 요지인 다양한 형태의 시비를 걸으셨다.~.~
그런 질문과 문제 제기가 선배의 매력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 특유의 곤조가 심해서
토를 달아도 안되고, 반박해도 잘 듣지도 않고, 암튼 매우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는 대화였다.
잎새주가 없었으면 바로 잠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연애할 때 내가 자라던 동네, 내가 일했던 극장, 나의 추억이 담긴 곳들을
기홍씨와 함께 지나갈 때면 '송지순례'를 하는 마음으로 의미있게 다가온다며 좋아했었는데
나야말로 오랜만에 기홍씨가 태어나고 자란 목포에 가서, 처음 일했던 병원 자리에 가 보기도 하고,
일가친척을 일시에 만나고, 함께 놀던 절친까지 만나 술 잔을 나누었으니
만 하루 동안 완벽한 '홍지순례'를 완성한 셈이다.
첫댓글 비싼 원서"가 읽지 않아도 책장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그리하여 장식이지만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듯한 이야기에요. 재밌어요.
(촘촘한 병어회에 잎새주..도 좋구요~)
촘촘한 병어회를 알아보다니, 눈썰미도 좋아라~ 비싼 원서의 장식 기능 비유 또한 멋진 걸요. 기홍씨는 싫어해도 이런 호응을 얻다니~ 보람 있어요!ㅋㅋ
나도 대학 때 점보러 간 적이 몇 번 있어요.
내 미래가 궁금해서가 아니라 도대체
점집에서 무얼 어떻게 말해주길래 사람들이 그리도 찾아가나 궁금해서였죠.
결론은.. 흠.. 여러 번 말해서 잘 알 터이고~ㅋ (인간적으로 긍정적 역할 하기도 하다는 것도 기억하죠?ㅎ)
그러고 보니 그때 목포행이 '홍지순례'가 된 셈이네요. 흐흐.
돌아봐도 좋겠다 싶은 곳이 몇 군데 더 있긴 한데..
딱히 꼭 가고 싶은 건 아니고.. 언제 더 나이 먹고 여행 다닐 때 한번 들러보도록 하죠~
그나저나 송지순례 핵심지 중 하나인 사북엔 언제 갈까나~
나중에 한 번에 묶어서 가볼까요? ㅎㅎ
그리고 일등바위가 아니라 그 유명(?)한 노적봉 되겠슴다
사북에 가는 건 내가 두려워요. 카지노 때문에 마을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대요.. 생각만 해도 끔찍.. ㅠ.ㅠ
그 유명한(!) 노적봉을 몰라보다니~ 어쩐지, 저기에 1학년 꼬맹이들이 올라갔을 거 같진 않더라구요. ^^;;
재미있게 잘 읽었어요
홍지순례라
고전틱하고 정감어린 향수가 전해지네요
단우 얼굴도 잘 보았어요
감사해요
딸기버스
짧지만 댓글의 행갈이가 여운을 줘요. 종대님의 말투?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 해요.
조만간 만날 거라 생각하니 더욱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