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지 선정 이 한 편의 시 후보작
최병근 김선옥 이관묵 김기택 엄원태 이대흠 유종인 박성우 엄재국 이복규
김은 이정옥(이상 12편)
단추
최병근
아주 작은 눈길로도
오늘을 여밀 수 있다니!
붐비는 거리에서
목적지를 향해 건너가는 발걸음들 사이로
맞은편에서 건너오는 한 사람이 보인다
그의 등 뒤에서
길을 재촉하는 파란 눈이 깜박이고
어디로 가는 것인지
그의 잰걸음이
어깨를 스친다
살아야 한다는 물증인 듯
아침 햇살에
그의 가슴에 달린 눈 하나가 반짝, 빛난다
----애지 가을호에서
실직
김선옥
냉장고 티브이 세탁기가 수거차에 오른다
한때는 거실에서 주방에서 몸값을 톡톡히 하던 저들
흔전만전 내부를 파먹다가
붉은 살 군데군데 붙어있는 수박껍질처럼
내다 버린다
신제품이 출시 되면서
십 년 수명도 못 채우고 고물이 된
고장 한번 없이 아직은 쓸 만한데
차에 실려 중고센터로 가는 몸
정년이 멀었는데 누가 버렸나
끊긴 출근길에서
갈고 닦고 조여보지만
어디에서도 중고품이 된 남자
신상품에
앉았던 자리를 내어주고
어금니 거뭇거뭇 녹슬어 가는 몸
----애지 가을호에서
마당이 깊은 집
이관묵
외양간의 누런 소가
자신을 내일 읍내장에 내다 판다는 사립문의 몸 비트는 소릴 듣고 밤새 잠 안 자고 뒤척이는
그런 집을 나는 살았다
새벽녘 오줌 누러 나왔다가 소 얼굴 쓰다듬어 주고, 한참이나 목을 꼬오옥 안아주던
그런 집을 나는 살았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중절모 쓴 소 장수 손에 끌려가던 소가 뒤돌아 허공에 큰 울음 던지던
그런 집을 나는 살았다
그로부터 매일 달덩이 만한 소 울음이 몸이 되고 밤이 되는,
마당 넓이의 누런 가을을 종일 도리깨로 털던
그런 집을 나는 살았다
---애지 가을호에서
수염으로 칼날 깎기
김기택
흰 머리 흰 수염 흰 눈썹
언제 나에게 와서
얼굴이 되었니
나도 모르게
나였던 것들도 모르게
깎아도 깎아도 매일 얼굴이 되고 있었니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수만 년 수백만 년 되풀이하고 있었니
수억 년 전의 것과 같은 허공을 되풀이하고 있었니
풀에서도 땅에서도 하늘에서도 어둠에서도
그 짓을 되풀이하고 있었니
지금도 쉬지 않고 어딘가로 가서
또 누군가의 얼굴이 되고 있니
검은 머릿속에서
되풀이되는 줄도 모르는 되풀이
시야에 가득한 햇빛처럼 쏟아지고 있는 되풀이
바람처럼 불고 있는 되풀이
죽는 줄도 모르는 죽음
태어나는 줄도 모르는 얼굴
무한인 줄도 모르는 무한
거울 볼 때만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서
흰지 검은지 모르는
흰 머리 흰 수염 흰 눈썹
번쩍 한 얼굴
슬쩍 한 슬픔
그토록 무량겁 무량겁 투명했으면서도
투명인지 모르는 투명
---애지 가을호에서
균형 잡힌 식단
엄원태
왼손은 지팡이를 짚고
오른손은 아내의 손을 잡아야
내 산책은 시작된다
백 미터를 넘기기 힘들다
벤치가 없다면,
아무 데라도 걸터앉아야 한다
그렇다고 오른손과 왼손의 역할을
바꿔볼 수도 없다
오른발과 왼발을 바꿔 달아볼 수 없듯이
나아감과 물러섬을 단숨에 결정할 수 없듯이
균형이란 단순하면서도 이처럼 간단하지 않다
너무 많은 식사와 허기의
오래고 무의미한 되풀이를 지나오면서
기우뚱함과 갸웃거림을 거듭 반복해오면서,
균형이라는 낡은 전설을 무턱대고 믿어온 게 아니었던가
한 방향으로만 기울어 온 것이 아니었던가, 해찰한다
기름진 육식을 피하고 소박한 채식을 권하는
자연 식이요법 전문가의 권유는
저 도시의 수많은 외식 식당가를 돌고 돌아
오늘날
거울 앞에 선
내 앞에 도착했다
내 앞의 당신에게도 그것은 도착했다
균형이란,
얼마나 단순하고도 간단하지 않은 것인가
---애지 가을호에서
화양연화
이대흠
당신의 숨소리에 벚꽃잎 날립니다
벚꽃잎 날리며 향기가 허공으로 번질 때
당신이 안녕이라고 환한 손바닥을 보여줍니다
벚꽃잎 날리고 당신은 손을 둥글게 말아
심심한 말을 만듭니다
당신의 입은 살짝 벌어졌다 닫히고
그 순간 벚꽃잎은 펄펄 날리고
당신의 손바닥에 햇살이 반짝입니다
무너지듯 당신은
벚꽃잎 날리고 바람이 붑니다
우두커니 바위처럼 서서
날리는 벚꽃을 바라봅니다
바람이 불고 금방이라도 벚꽃잎처럼
나는 흩어질 것만 같습니다
멀어지고 나는
아주 아주 멀어져 희미해질 당신
벚꽃이 지우지 못한 허공의 남은 자리처럼
막막한 나는 벚꽃잎 날리는 길에 서 있습니다
아주 오래도록 안녕
말하지 않는 나는 칠흑처럼 어두워서
더 까맣게 어두워져야 당신을 환하게 맞이할 것입니다
당신은 흰 손바닥을 보이고 나는
벚꽃잎 날리는 바람 속에 서 있습니다
---애지 가을호에서
내 마음
유종인
무궁화 기차는 야트막한 산야를 지나네
비가림을 한 포도밭을 지나
모내기 달포쯤 넘긴 논을 한참 보여주네
오늘따라 눈시울이 붉은 해를
자작하게 차오른 논물에 비춰주네
열광의 해를 담담히 식혀주네
공중의 해를 수중의 해로 환승해 주고
논물의 벼들은 숨 고르고 천천히 자라네
겉보다 속으로 자라는 벼들
그대여 하지(夏至) 가까운 무논의 벼들같이
내 마음 너무 우거지지 않으려네
저무는 그대의 하루를 어스름 비출 수 있게
아늑한 슬픔도 번질 수 있게
내 안의 생각들 너무 우거지지 않으려네
일몰 후에도 여전한 그대의 얼굴이
내 맘에 밤물결 소리로 비춰 오르라고
내 마음 너무 우거지지 않으려네
---애지 가을호에서
풍물 수업
박성우
마을 어르신들과 함께 풍물을 배운다
작년 늦가을부터 마을회관에 모여
가락을 익히기 시작했는데
지난 정월대보름에는 지신밟기를 하기도 했다
장단이 좀 맞지 않으면 어떤가
당산 할머니께 문안 인사드리고는
집집을 돌며 잡귀를 쫓고 복 빌었다
주인 주인 문여소 나그네 손님 드가요,
골목골목을 돌다가 막걸리로 목 축였다
정월대보름이 지난 후에도 우리는
매주 목요일에 모여 풍물을 쳤다
갱갱 개개갱 갱갱 개개갱,
상쇠인 전 이장님이 나오지 않은 날에는
부쇠인 내가 얼떨결에 상쇠가 되어야 했는데
여간 진땀 나는 일이 아니었다
시인 양반 나 좀 봅시다,
하루는 북을 치시는 팽나무집 할머니가
풍물 수업을 마치자마자 나를 불렀다
뭐가 잘 못 되었나?
할머니는 밑단이 터졌다면서
겉옷을 벗어달라 하셨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말끔히 수선해오셨다
마음 씀씀이를 덤으로 배워가기 좋은
오월 첫째 주 맑은 오후였다
---애지 가을호에서
백비탕
엄재국
누가 불 지폈을까?
부글부글 살구꽃 한 세상이 담장을 넘쳐 흐른다
건더기 없으면 넘치지 않을 맑은 물의 봄
사람들은 봄빛에 지쳐 쓰러지는데
약 없는 세상
누가 저 담장너머
지독한 봄을 여태 끓이고 있을까?
---애지 가을호에서
저음
이복규
거제에서 다리 건너 육지 통영, 육지도 바다에 떠 있는 섬, 섬에서 섬으로 통영으로 간다 통영, 아르세니 문 피아노 리사이틀에 간다
러시아 출생인 그의 피 안에 섬처럼 고려인의 피가 떠돈다
희망은 언제나 저음으로 바다 밑에서, 시련은 고음으로 공기 방울처럼 빛을 향해 떠오른다,
카타콤
앞에 앉은 대머리 아저씨의 피아노를 치고 싶다, 빛나는 흰 음반, 몇 가닥 남지 않은 검은 건반
다시 다리 건너 거제, 어제, 그제, 며칠이 지나도 좀처럼 저음이 사라지지 않는다
늙은 비바리의 숨비소리, 호랑지빠귀의 울음이 생각을 찢는다
희망에게 말한다, 이토록 간절하니?
잠을 자지 않으려 했던 어머니와 잠을 자지 못하는 아들, 사이의 갯벌
맹그로브 나무는 뿌리를 허공에 올려 숨을 쉰다 비명도 없이, 나는
좀처럼 웃지 않는 돌 하나, 호주머니에 넣어 집으로 돌아와, 파도처럼 웃는다
강물들이 숨겨둔 저음들이 낮게 낮게 고음들을 밀어 올린다
오늘은 하늘이 맑아?
---애지 가을호에서
詩로 쓴 DMZ 투어
김은
촉촉한 봄날
시의 발화점에 성냥개비 같은
統 자 올려놓으니
화르르 一 자로 불붙는 언어들
한반도 허리쯤
길이 248㎞에 폭 4㎞
철조망 지퍼가 쩌억 열리고
통일공원 한복판 금강송엔
흰두루미와 검은목두루미가 붙어서서
제 새끼들의 부화를 지켜본다
그러나 이내
녹슨 경의선 철로가 가슴팍을 누르고
죽순처럼 자라던 서정의 문장엔
DMZ 2㎞ 밖, 군홧발 그림자가 덮인다
우린 언제쯤이나
해남에서 온성*까지
새들처럼 오갈 수 있으려나
투어를 마치는 내 마음,
북에 두고 온 딸 생각에 눈감지 못하던
한 어미의 임종에 가닿는다
*해남은 남쪽 땅끝이고 온성은 북쪽 땅끝이라 함
---애지 가을호에서
간월도
이정옥
그는 물수제비를 잘 뜬다고 하였다
간월도에서 걸어 나오며
그에게 물수제비 한 그릇 먹고 싶다고 말할걸
아직도 입덧처럼 허하다
목울대에서 머뭇거리던 말말
한 삽 그 섬에 심어 놓는다
얼마만큼을 배워야 모국어를 반짝이게 빚을까
간월도에서 물수제비 한 그릇 탁발한다
바다에 뜬 간월도
한 대접 후루루 마신다
---애지 가을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