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호의 賢問愚答] 틱 낫한 스님의 공짜 선물…그곳서 찾은 하느님의 나라
천국이 왜 가까이 있을까
코라진 유적은 이스라엘의 국립공원이다. 안내 팻말도 세워놓았다.
“코라진(Korazim/chorazin)은 기원전 3~5세기 탈무드 시대에 생겨난 마을이다.
이곳에 사람들이 계속 살다가 8세기께 황폐화했다”고 적혀 있었다.
예수는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 등 회개하지 않는 마을을 향해
“심판 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코라진 유적지의 무너진 바위 위에 앉아 가만히 눈을 감았다.
‘심판’이란 무엇일까. 사람들은 심판을 거론할 때 주로 ‘종말’ 혹은 ‘사후 심판’을 떠올린다.
그래서 천국에 가느냐, 지옥에 가느냐를 따진다. 그런데 그게 전부일까.
심판은 우리가 ‘신의 속성’에서 벗어났을 때 감당해야 하는 결과물이다. 나는 그것이 ‘심판’이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심판의 순간’은 우리가 살아가는 매 순간에 있지 않을까.
신의 속성을 등지고 에고의 속성을 따름으로 인해 삶에서 감당해야 하는 온갖 파도들 말이다.
그런 파도들이야말로 심판의 자국이 아닐까.
그런 파도들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한다. 돌아가라고, 신의 속성으로 다시 돌아가라고 말이다.
코라진 마을의 회당(시나고그) 유적지로 갔다. 현무암으로 깎은 기둥이 서 있었다.
그리스 신전과 비슷하게 생긴 지붕은 부서져 땅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예수도 코라진 마을에 왔을 때 회당으로 들어갔다.
갈릴래아 호수 주위의 산촌 마을을 돌 때도 예수는 늘 회당에서 설교했다.
그러니 눈앞에 펼쳐진 저 유적의 폐허 속에 2000년 전에는 예수가 서 있었으리라.
예수는 바로 이곳에서 사람들에게 ‘메타노이아(metanoia)’를 역설했다.
‘회개’ 혹은 ‘회심’이다.
‘회개’는 잘못을 뉘우치고 반성하는 일이다.
그런데 반성하는 데서 끝나면 곤란하다.
반성만 하고 ‘눈’을 바꾸지 않으면 똑같은 잘못을 다시 저지르게 된다.
결국 끝없는 잘못과 끝없는 회개가 반복될 뿐이다.
그래서 ‘회심’이 필요하다.
회심이란 무엇일까.
우리의 ‘눈’을 바꾸는 일이다.
‘에고의 눈’을 ‘예수의 눈’으로 돌리는 일이다.
사람들은 반박한다.
"예수의 눈’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돌릴 게 아닌가. 말이 쉽지, 그게 쉬운 일인가.”
‘예수의 눈’은 멀리 있지 않다.
신은 인간을 지을 때 신의 속성을 불어넣었다.
우리 안에는 신의 속성이 있다. 다만 우리가 모를 뿐이다.
그래서 예수는 코라진 사람들을 강하게 꾸짖었다. 그들 속에 있는 신의 속성을 보라고, 거기에 눈뜨라고 말이다.
그것을 위해 “회개하라”고 했다. 그렇게 ‘나의 눈’을 무너뜨리라고 했다.
코라진의 회당은 현무암으로 지어졌다. 이스라엘은 사막 기후로 큰 돌이 귀하다. 그래서인지 갈릴래아 일대에서는
건축물을 지을 때 현무암을 썼다. 코라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현무암은 굉장히 단단한 돌이어서 수백 번 깎아야만
조각을 할 수 있다. 코라진 사람들이 만약 현무암을 깎듯이 자신을 깎았다면 어땠을까. 수백 번씩 자신을 뚫고 부수며
‘눈’을 돌렸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예수가 그토록 절절하게 ‘회개’를 지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코라진 마을을 떠났다. 차를 몰고 산 아래 갈릴래아 호수로 내려갔다.
예수 당시로부터 지금까지 2000년의 세월이 흘렀다.
앞으로 2000년도 그렇게 훌쩍 흐를 것이다. 우리는 모두 그 속에서 잠시 머물다 간다.
긴 시간의 눈으로 보면 개인의 삶이란 참으로 순간이다.
그래서 더욱 간절한 것일까. 영원에 대한 갈망, 신의 속성에 대한 염원 말이다.
다들 멀리 있다고 생각한다.
하느님 나라와 신의 속성.
그것이 우주 저 너머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아득한 곳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신은 인간을 지을 때 당신의 속성을 불어넣었다. 신의 속성이다. 그러니 우리 안에 신의 속성이 있다.
다시 말해 우리 안에 하느님 나라가 있다. 다만 우리가 잊고 살 뿐이다.
바깥만 바라보고, 바깥만 거머쥐고, 안으로 눈을 돌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의 메시지는 이렇게 들린다.
“마음을 돌려라,
눈을 돌려라,
회개하라,
회심하라!”
그곳에 하느님 나라가 있기 때문이다.
천국이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틱낫한 스님은 깨어 있는 마음에서 나오는 다정한 웃음이 행복을 준다고 했다. 사진 플럼빌리지
저는 거기서
신의 속성을 봅니다.
깨어 있는 마음이라니,
무엇에 깨어 있는 걸까요.
그렇습니다.
내 안에 깃들어 있는
본질적 평화입니다.
그 평화를 망각한 채
살지 말고,
그 평화에 깨어 있는 채
살아가란 말입니다.
그럴 때
다정한 웃음이 올라옵니다.
우리의 입가에,
눈빛에,
마음에
다정한 웃음이 올라옵니다.
틱낫한 스님은
그것들이
나 자신을 비롯해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행복을 줄 거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게
내 안에 있는
신의 속성을 나누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안에 있는
하느님 나라를 나누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틱낫한 스님은
그것의 가치를
이렇게 매겼습니다.
“그들에게
아무리 비싼 선물을
사주어도,
그것이
너의 깨어 있음과
거기에서 나오는
다정한 웃음이 주는 것보다
더 큰 행복을
그들에게 안겨 주지 못한다.”
여기서 말하는 ‘그들’은
나를 포함한
나의 이웃입니다.
생각할수록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나 자신에게
아무리 비싼 선물을 사주어도,
내 안의 평화에
깨어 있는 마음과
거기서 올라오는
다정한 웃음이 주는 행복에는
미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맞습니다.
이런 행복에는
뿌리가 있으니까요.
그 뿌리가
깊은 까닭입니다.
짧은 생각
틱낫한 스님이 쓴
‘공짜 선물’이란
글이 있습니다.
시(詩)처럼 짧은
문구지만,
울림은 그보다
한참이나
더 달려갑니다.
틱낫한 스님은
말합니다.
“깨어 있는 마음으로
숨 쉬는 일과
다정한 웃음이
너와 네 주변 사람들에게
행복을 안겨 줄 것이다.”
틱낙한 스님은
유머 섞인 한마디도
툭 던집니다.
“게다가
이런 값진 선물을 주는 데는
돈 한 푼
들지 않는다.”
그래서
좋습니다.
돈 한 푼 들지 않아서
더 좋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걸 무궁무진하게
나눌 수 있어서
더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