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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애굽으로 들어간 요셉의 형들
창세기 43장 16-34절
야곱은 스스로 움켜쥐려다가 많은 것을 놓쳐버린 인생을 살았습니다. ‘비울 때 채우시고, 내맡길 때 더 큰 것을 얻는다’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면서도 신뢰하지 못하고 자신의 욕심만으로 살았습니다. 주저하다 결국 상황에 몰려 겨우 믿음의 걸음을 내듣습니다. 그의 삶을 통해 우리를 비춰보시길 바랍니다.
형제들이 총리의 접견실로 들어올 때 요셉은 베냐민을 가장 먼저 찾았을 것입니다. 그는 베냐민으로 생각되는 청년이 그들 중에 있음을 확인한 뒤 청지기에게 그들을 자신의 관저로 모시고 짐승을 잡아 오찬을 준비하라고 지시했습니다. 형제들은 가나안의 식량난과 장기간의 여행으로 허기지고 지쳐 있습니다. 그들의 모습을 본 요셉의 마음속에서는 연민이 북받쳐 올랐을 것입니다.
요셉과 형제들이 다시 만남(16-22)
말이 신뢰할 만하면 우리도 신뢰를 받을 수 있습니다. 반면 우리말을 신뢰할 수 없으면 자신도 신뢰를 받을 수 없습니다. 말은 곧 자신이라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말은 우리의 성품과 일치하며 성품은 말과 일치합니다. 생을 변화시킬 수 없는 방법 중의 하나는 자신의 말이 변화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16요셉은 베냐민이 그들과 함께 있음을 보고 자기의 청지기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을 집으로 인도해 들이고 짐승을 잡고 준비하라 이 사람들이 정오에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니라 17청지기가 요셉의 명대로 하여 그 사람들을 요셉의 집으로 인도하니 18그 사람들이 요셉의 집으로 인도되매 두려워하여 이르되 전번에 우리 자루에 들어 있던 돈의 일로 우리가 끌려드는도다 이는 우리를 억류하고 달려들어 우리를 잡아 노예로 삼고 우리의 나귀를 빼앗으려 함이로다 하고 19그들이 요셉의 집 청지기에게 가까이 나아가 그 집 문 앞에서 그에게 말하여 20이르되 내 주여 우리가 전번에 내려와서 양식을 사가지고 21여관에 이르러 자루를 풀어본즉 각 사람의 돈이 전액 그대로 자루 아귀에 있기로 우리가 도로 가져왔고 22양식 살 다른 돈도 우리가 가지고 내려왔나이다 우리의 돈을 우리 자루에 넣은 자는 누구인지 우리가 알지 못하나이다(16-22)
형제들을 다시 접견한 요셉은 가장 먼저 베냐민을 확인했습니다. 그는 청지기에게 형제들을 위한 특별한 오찬을 준비하도록 지시합니다. 청지기는 요셉의 명령대로 그들을 요셉의 관저로 데려갔습니다. 그러나 형제들은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예상치 못한 총리의 환대에 어리둥절해하면서, 그가 관저로 자신들을 끌어들여 돈 꾸러미를 훔쳐간 절도범으로 체포하려 한다고 서로 웅성거렸습니다. 자신들이 이미 지불한 식량 구매 대금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자신들의 자루에 되돌아왔습니다. 그러나 필연적으로 절도 혐의는 자신들에게 씌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첫 번째 접견에서 그 총리가 환대는커녕 자신들에게 정탐꾼 혐의를 씌우고 결국 시므온을 볼모로 잡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절도 혐의까지 추가되었을 자신들에게 오히려 극진한 환대라니, 이것이 어떻게 납득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자신들이 체포되어 모두 노예가 되고 나귀와 모든 물품들은 몰수당할까 봐 걱정합니다. 과거 그들은 요셉을 질투하고 괘씸하게 여긴 끝에 노예로 팔아 넘겼습니다. 이제 그들이 요셉의 노예가 될까 봐 두려움에 떱니다. 상황의 섭리적인 반전입니다.
그들은 그 집에 들어가기를 두려워합니다. 그리하여 관저 마당에서 자신들이 받고 있을지 모를 범죄 혐의를 상세히 소명합니다(19). 이것은 마치 무고한 피의자가 즉결 심판으로 철창살에 갇히기 직전에 자신의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귀국 도중 여관에 머물 때 각자의 자루에서 돈 뭉치를 발견했는데, 그 돈을 그대로 가져왔으며 추가적인 식량을 살돈은 별도로 준비해 왔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그 돈뭉치를 누가 넣었는지를 알 수 없다면서 자신들의 결백을 입증하려 애씁니다. 그런데 실상 그들은 여관에서 자루 하나에서만 은전 뭉치를 발견했고, 나머지는 집에 돌아가서 짐을 풀 때 발견했습니다. 이것을 묶어서 간략히 설명한 것입니다.
아버지의 안부를 묻는 요셉(23-28)
참된 사랑은 마음으로부터 나오며 사람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사람들은 사랑을 갈망하며 특히 가족과 친구들이 참으로 사랑해 줄 것을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참된 사랑을 보여줄 때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마음을 가지고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23그가 이르되 너희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재물을 너희 자루에 넣어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 너희 돈은 내가 이미 받았느니라 하고 시므온을 그들에게로 이끌어내고 24그들을 요셉의 집으로 인도하고 물을 주어 발을 씻게 하며 그들의 나귀에게 먹이를 주더라 25그들이 거기서 음식을 먹겠다 함을 들었으므로 예물을 정돈하고 요셉이 정오에 오기를 기다리더니 26요셉이 집으로 오매 그들이 집으로 들어가서 예물을 그에게 드리고 땅에 엎드려 절하니 27요셉이 그들의 안부를 물으며 이르되 너희 아버지 너희가 말하던 그 노인이 안녕하시냐 아직도 생존해 계시느냐 28그들이 대답하되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평안하고 지금까지 생존하였나이다 하고 머리 숙여 절하더라(23-28)
청지기는 두려워하는 형제들을 안심시킵니다. 돈뭉치를 자루에 집어넣은 장본인은 청지기 자신입니다. 청지기는 그 돈뭉치가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마트몬)일 거라며 덕담을 건넵니다. ‘마트몬’은 ‘땅에 묻어둔 보물’을 뜻합니다.
이것은 청지기가 돈 뭉치를 숨길 때 자루 깊숙이 넣었음을 암시합니다. 청지기의 덕담을 들은 형제들은 이때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까? 더구나 현재 하나님과 거리가 먼 애굽 사람이 만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는 ‘너의 아버지의 하나님’이라는 야곱 가정의 매우 개인적이고 특별한 관계의 하나님을 언급합니다. 아마 형제들은 ‘너희 돈은 이미 받았다’는 청지기의 말을 듣고 그 청지기를 수하에 둔 요셉이 자신들에게 그런 은혜를 베푼 인물이라는 생각을 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의 혼란스런 생각은 여전히 거두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청지기는 시므온을 그들에게 데려옵니다. 아마 형제들이 마당에 아직 머물러 있을 때 시므온을 데리고 왔던 것으로 보입니다. 요셉이 형제 시므온을 몇 달 동안 감옥에 가두어 놓았을지 의문입니다.
요셉의 배려로 그는 가택 연금 형식으로 애굽에 머무르고 있었을 듯합니다. 아마 형제들은 시므온의 석방과 더불어 비로소 현재 상황에 대한 의심을 어느 정도 거두고 마음을 놓았을 것입니다. 청지기는 형제들을 요셉의 관저로 들어오게 한 뒤 그들에게 발 씻을 물을 제공하고 나귀에게 꼴을 먹였습니다. 손님에게 발 씻을 물을 제공하고 음식을 대접하며 또한 그의 나귀나 낙타에게 꼴을 먹이는 것은 고대근동의 예법입니다(창 18:4-5; 19:2; 24:32; 삿 19:21; 눅 7:44). 당시 사람들은 샌들을 신고 다녔기에 외출을 다녀온 발은 언제나 먼지와 흙으로 더러운 상태였습니다. ‘정탐꾼’의 히브리어 ‘메라’은 ‘발’의 히브리어 ‘레겔’의 파생어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발’을 씻겼다는 것은 ‘정탐꾼’의 혐의가 벗겨졌음을 암시할 수 있습니다.
형제들은 발을 씻고 휴식을 취하며 요셉을 맞을 준비를 갖춘 뒤 그에게 바칠 예물을 점검했습니다. 요셉이 관저로 들어오자 그들은 집으로 가지고 들어온 예물을 그에게 드리고 예법을 따라 그에게 정중히 절을 했습니다(26).
그들이 다시 땅에 엎드려 절합니다. 이번에는 베냐민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로써 형제들이 모두자신에게 절했던 꿈이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부모님이 함께 절한 꿈은 성취되지 않고 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의 안부를 가장 먼저 묻습니다. 지금 베냐민은 건강한 모습으로 자신의 눈앞에 나타났기에 요셉은 연로하신 부모님의 안녕이 가장 궁금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대기근의 고난의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은 자신들의 아버지가 잘 계시다고 답변한 뒤 다시 한 번 절을 합니다(28). 그들이 재차 절을 한 이유는 아버지의 평안을 묻는 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일 것입니다.
베냐민을 보고 눈물을 쏟는 요셉(29-34)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상황들과 위치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상황들과 위치를 개선시키기 위해 애쓰고 노력해야 합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대로 노력해야 하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먼저 현재 처해 있는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29요셉이 눈을 들어 자기 어머니의 아들 자기 동생 베냐민을 보고 이르되 너희가 내게 말하던 너희 작은 동생이 이 아이냐 그가 또 이르되 소자여 하나님이 네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노라 30요셉이 아우를 사랑하는 마음이 복받쳐 급히 울 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고 31얼굴을 씻고 나와서 그 정을 억제하고 음식을 차리라 하매 32그들이 요셉에게 따로 차리고 그 형제들에게 따로 차리고 그와 함께 먹는 애굽 사람에게도 따로 차리니 애굽 사람은 히브리 사람과 같이 먹으면 부정을 입음이었더라 33그들이 요셉 앞에 앉되 그들의 나이에 따라 앉히게 되니 그들이 서로 이상히 여겼더라 34요셉이 자기 음식을 그들에게 주되 베냐민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다섯 배나 주매 그들이 마시며 요셉과 함께 즐거워하였더라(29-34)
요셉은 베냐민을 쳐다보았습니다. 요셉은 그 낯선 청년을 이미 베냐민으로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는 확인을 위해 그 청년이 그들의 막냇동생인지를 묻습니다.
저자는 여기서 베냐민을 요셉과 그의 특별한 관계를 나타내는 ‘자기 어머니의 아들 자기 동생’으로 표현합니다. 다른 형제들은 이복형제지만 베냐민은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친형제입니다. 이 두 형제의 특별한 관계가 여기서 처음으로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는 독자들로 하여금 이어지는 요셉의 격한 감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준비시킵니다. 요셉은 베냐민을 ‘내 아들아’(베니 개역개정 ‘소자여’)라고 부릅니다. 호칭 ‘내 아들’은 지위가 매우 높은 신분의 사람이 아끼는 아랫사람에게 관례적으로 사용했던 애정 어린 표현입니다(수 7:19; 삼상4:16; 삼하 18:22; 딤후 2:1). 따라서 다른 형제들에게 이 호칭은 이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총리가 그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한 것은 형제들을 다소 놀라게 했을 것입니다.
베냐민을 축복한 요셉은 끓어오르는 감정을 누를 수 없어서 자리를 잠시 떠나 자신의 안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들 앞에서 눈물을 쏟아 신분이 들통 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 감동적 장면에서 창세기 서사의 문장은 놀라울 정도로 간결합니다. 저자는 표현의 공백들을 독자들의 감정이입에 맡깁니다. 요셉은 격한 감정을 추스른 뒤 얼굴을 씻고 나와 오찬을 차리라고 지시했습니다. 오래전에 그를 구덩이에 던져 넣고 함께 둘러앉아 냉정하게 음식을 먹었던 형들에게 요셉이 성대한 음식을 대접합니다.
식탁은 요셉, 형제들, 그리고 애굽 사람들로 나뉘어 준비되었습니다. 관례적으로 이집트인은 부정하게 여겨진 히브리인과 겸상을 하지 않았습니다. 애굽인들이 외국인들과 겸상을 하지 않는 전통에 대해서는 로마의 역사가 헤로도투스(Herodotus)를 비롯한 여러 자료들에서 확인이 가능합니다. 이러한 금기는 이집트의 문화적 우월 의식에서 기인했을 수 있습니다. 형제들은 따로 마련된 식탁에 나이순대로 배석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을 크게 놀라게 했을 것입니다. 순간 그들은 요셉이 자신들의 뒷조사를 했다는 생각을 했을 수 있습니다. 가나안 땅의 어느 가정에 대한 은밀한 뒷조사는 애굽 총리에게 언제든 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베냐민에게 다섯 배나 많은 음식을 제공하면서 노골적인 편애를 드러냅니다. 이것 역시 형제들이 의아해할 만한 요셉의 행동이었지만 형제들은 그것에 대해 전혀 반응하지 않습니다. 아마 이것은 형제들이 술이 동반된 즐거운 연회 분위기에 몰입했기 때문일 수 있지만, 단순히 베냐민이 막내이기 때문에 그가 더 큰 배려를 받는 것을 당연시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술기운에 흠뻑 젖은 흥겨운 연회 속에서 그들은 요셉이 서열대로 자신들을 앉게 한 이상한 일도 잊은 듯합니다.
우애와 사랑이 가득한 공동체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커다란 축복입니다. 어리석게도 인간은 시기와 질투, 미움과 다툼으로 그 축복을 놓치지도 합니다. 이기심을 버리고 정직과 책임감, 상호 인정과 존중, 사랑에 기반한 용서와 섬김이 있을 때, 연합의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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