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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수업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1926~2004
[책을 시작하며]
2004년 8월 24일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Elisabeth Kubler Ross가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 “육체로부터 해방되어 이 생애를 졸업하는 날, 난 은하수로 춤추러 갈 거예요. 그러니 그날은 축하를 받아야 할 날이지요.”
내가 엘리자베와 이 책을 집필하기 시작했을 때 그녀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데이비드, 당신의 슬픔 안으로 깊이 들어가야만 해요. 그렇다면 이 책에 생기가 불어넣어질 거예요.” ~~~그녀에게 물었다. “엘리자베스, 당신도 당신 슬픔과 만날 건가요”“ 그녀는 대답했다. ”당연하죠, 난 오래 전부터 슬픔을 예감해 왔었고, 아직 만나야 할 슬픔이 더 있다고 생각해요.“ 이 순간이 바로 이 책이 탄생하는 시초가 되었다. ~~그녀는 이 책이 발행되는 걸 끝내 보지 못했다.
엘리자베스는 항상 말하곤 했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세요. 그들은 당신이 죽음을 맞아할 때 알아야 할 모든 것들을 말해줄 거예요. 그것은 쉽게 놓쳐버리기 쉬운 것들이죠.”
내가 더 이상 화를 내지 않으며 처한 상황에 불안해하지 않고 모든 걸 놓아버리는 순간이 되면, 난 내가 떠나야 할 시간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게 될 거예요. 난 지금 절반 정도 와 있어요. 내가 배워야 할 두 가지는 인내심과 사랑 받는 법을 익히는 거지요. 지난 9년 동안 인내심을 배워왔고, 내 육체가 점점 쇠약해지고 침대에 더 오래 누워 있게 될수록 사랑 받는 법을 더 많이 배우게 된답니다. 난 평생 누군가를 교육시켜왔지 내 자신이 뭔가를 배우도록 기회를 주지 않았어요. 받아들이는 법을 깨우치는 곳에 결국 이르게 되면 난 이곳을 떠날 수 있을 거고 이 생애 너머에 한계가 존재 하지 않는 곳으로 가게 될 거예요. 난 내가 겪은 이 고통을 이해하는 척하지 않습니다. 대신 내 상황에 대해 신에게 분노할 겁니다. 9년 동안 나를 한 의자에 앉혀 꼼짝없이 갇혀 있게 한 신에게 화가 납니다. 이것이 바로 여섯 단계, 즉, ‘신에게 분노하는 단계’입니다. 물론 신에게 화를 내는 것은 분노 단계의 일부입니다. 슬픔을 예감하면 다 그럴 겁니다. 물론 신에게도 뜻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신은 내게 딱 맞는 시점을 이미 계획하셔서 그때가 되면 나는 ‘네’라고 대답하며 그것을 따를 겁니다. 그리고 나비가 누에를 벗고 날아오르는 것처럼 나도 내 육체를 두고 떠날 것입니다. 그렇게 나는 오랫동안 내가 가르쳐왔던 것을 몸소 경험하게 될 겁니다.“
“사람들은 내가 소개한 많은 단계들을 좋아하죠. 하지만 그들은 내가 그 어떤 단계도 경험하기를 원하지 않아요.“ 그러나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한 인간이었다. 임종이 가까워오자 그녀는 내게 전화를 해서 간단히 한마디로 말했다. ”와주세요.“ 이후 4일 동안 그녀의 자녀들과 가까운 친구인 브룩, 그리고 나는 그녀의 침상 곁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리곤 정말 마지막 시간이 되어버릴지, 그렇지 않으면 다시 한 번 회복해서 그녀가 우리를 놀라게 해 줄지를 노심초사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몇 시간이 며칠이 되는 동안, 우리는 죽음에 관해 스무 권이 넘는 책을 저술한 한 여인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를 무척 존경하는 몇몇 사람들은 그녀의 죽음 앞에 무언가 경이롭거나 감동적인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마치 죽음의 순간을 전문적으로 다뤄왔던 엘리자베스이므로 자신의 죽음을 초월할 수 있는 힘을 가지지 않을까 기대하는 모습이었다. -2004년 11월 . 데이비드 케슬러
1. 신은 감당할 만큼만 고통을 준다.
언젠가는 죽으리라는 것을 아는 것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든다. 우리는 삶을 채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그것을 느낀다. ~~~어린 나이에 우리는 부모를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을 순간적으로 예감한다. ~~~상실의 예감은 우리 마음속에서는 ‘끝의 시작’이다. 이제 우리는 두 개의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 지금까지 우리가 익숙해져온 안전한 세계와, 사랑하는 사람이 죽을지도 모르는 불안전한 세계가 그것이다.
상실을 예감하면서 느끼는 슬픔은 상실 후의 슬픔보다 더 조용하다. 우리는 종종 말이 없어진다. 슬픔은 우리 자신 안에 간직하는 것이다.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다. 단지 누군가가 손을 한번 잡아주거나, 말없이 옆에 앉아 있어줌으로써 위안을 받을 수 있는 그런 감정이다.
우리는 죽어가는 사람이 겪는 죽음의 다섯 단계만 생각하지만, 그를 사랑하는 이들 역시 그가 죽기 전 겪는 다섯 단계를 똑같이 통과한다.
죽음에 대비할 수 있는 시간이 여러 해에 걸쳐져 있을 경우에는 죽음 후에 그 단계들을 겪지 않을 수도 있다. ~~~장기적인 병을 앓는 경우에는 사랑하는 이를 매우 서서히 잃기 때문에 그 기간 동안 우리는 상실의 다섯 단계 모두를 겪을 수도 있다. 상실의 예감이 죽기 몇 달 전, 혹은 몇 년 전에 일어나는 경우도 있다. 상실의 예감에서 오는 슬픔은 죽은 이후에 느끼는 슬픔과는 별개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상실의 예감은 앞으로 마주해야 할 고통스런 과정의 전주곡이며, 궁극적으로는 치유되어야 할 이중의 슬픔이다.
2. 슬픔에게 자리를 내어주라
슬픔의 다섯 단계(부정, 분노 타협, 절망, 수용)는 30년 전 처음 소개되어 지금까지 이어오는 과정에서 잘못 이해된 점이 많았다. 이것은 우리 마음속에 복잡하게 뒤섞여진 감정들을 각 단계별로 깔끔하게 정리해 놓은 것이 아니다. 인간이 상실을 겪게 될 때 보이는 반응들을 나타낸 것이지만, 전형적인 상실의 모습이 정해져 있지 않듯 전형적인 반응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삶이 다양하듯 슬픔 역시 그렇다.
이 다섯 단계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지만 그 상실과 함께 삶 속에서 배우게 될 것을 한데 모아 놓은 하나의 틀이다. ~~~각 단계가 순서대로 지나게 될 슬픔의 정거장은 아니다. 모두가 이 다섯 단계를 전부 겪거나 정해진 순서대로 경험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 단계를 통해 슬픔의 영역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으므로 앞으로의 삶과 다가올 상실에 잘 대처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지난 몇 년간 우리는 슬픔의 부정을 잘못 이해했다. 나는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초점을 맞춘<인간의 죽음>에서 부정의 단계를 처음 소개했다. 이 책에서 부정의 단계에 있는 사람은 사랑한 이를 잃은 비탄에 빠져 있다. 죽음을 앞둔 이에게 부정은 불신과 같다. 아무렇지도 않는 듯 생활하며 자신이 불치병에 결렸음을 부정한다. 하지만 사랑한 사람을 잃은 사람에게 부정은 단어 뜻 그대로 더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부정은 사랑하는 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아예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당장 집에 가면 현관문을 열며 자신을 반겨줄 아내가 없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 것이다.
타협의 단계가 지나면 우리의 관심은 곧바로 현실로 이동하게 된다. 공허감이 드러나고 슬픔이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깊게 침투한다.
3 눈물의 샘이 마를 때까지 울라
목발을 한 남자는 등에도 작은 상처를 입힌 자동차 사고에 대해 얘기하며 빨리 기운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글쎄요, 그래도 당신은 두 다리가 있잖아요.” 목발을 한 남자는 답했다. “ 네 맞습니다. 하지만 난 그 사고로 아내를 잃었어요.” 상실을 비교할 때, 누군가의 상실이 자신의 상실보다 더 상황이 나아 보이거나 또는 더 안 좋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상실은 다 고통스럽다. 일흔에 남편을 잃었다면 마흔여덟에 남편을 잃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랑한 이가 죽고 나면, 말했어야 했던 것 또는 그렇게 행동해야 했던 일들이 전부 다 아쉬움으로 남는다. ~~~대개 인생은 희망했던 것보다 짧기에 우리는 상실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어떤 일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바라던 모든 것을 끝마칠 시간은 주어지지 않는다. ~~~인ㄱ나은 끊임없이 실현하지 못한 희망을 갖고 아직 응답받지 못한 소망을 품는다. ~~~~아쉬움은 늘 있게 마련이다.
4 떠나간 이가 해왔던 것, 그것을 하라
우리는 종종 누군가 우리 삶 속에서 맡고 있는 역ㅎ살의 자리가 얼마나 큰지 실감하지 못한다.
인간은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의 대부분은 그의 죽음과 함께 소멸할 것이다. 그런데 전부는 아니다. 인간은 항상 누군가에게 전수 한다.
죽음을 두려워하며 어느 날엔가 그것이 자신에게 다가올 거라는 사실을 아는 건 지구상에서 인간이 유일하다.
원한은 죽음과 함께 사라지지 않는다. 원한은 결코 다룬 적이 없고 다룰 기회도 없었던 오래된 분노이다. 그것은 다음에 소개될 토니처럼 침착하고 또는 드러나지 않는 상태에서도 생겨난다.
토니의 아내 캐롤은 아이들이 아버지 토니의 말을 듣지 않을 때마다 항상 분노가 치밀었다. 그녀는 토니에게 말하곤 했다. “아이들이 아버지인 당신 말을 잘 듣는 게 중요해요. 만약에 언젠가 내가 없을 땐 어떡할 거예요? 애들이 당신 말을 잘 들을 필요가 있다고요.“
5. 사랑을 위해 사랑할 권리를 내려놓으라
올바르게 살면 고통 받지 않을 거라는 믿음 아래 우리는 살아간다. 하지만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곧 죽음을 알아간다는 것이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사랑할 권리를 가졌던 것을 결국엔 놓아줘야 한다. 어떤 면에서 벌의 개념은 종교로부터, 벌을 내리는 신으로부터 나온 것일 수도 있다. 행동은 결과를 지니고 있지만 상담자의 관점에서 볼 때 상실이 벌을 받은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상실을 미루어 생각하다 보면 자신이 저지를 잘못들이 뚜렷하게 드러나 보여서 벌을 받았다고 느껴지겠지만, 모든 생명을 사랑하는 신이 인간에게 그런 고통을 내리실 리는 없다. 죽음은 탄생과 동시에 따라오는 것이지만 벌은 사랑과 보살핌을 위한 신의 결말이 아닌 것이다.
로버트는 자신이 열심히 노력햇기 때문에 암을 물리쳤다고 확신했지만 그 후 일 년이 지나 복부에 또 다른 혹이 발견됐다. 완전히 좌절에 빠진 그는 벌 받았다고 생각했다. 화학치료를 받기 시작하면서 그는 자신에게 수없이 자문했다. “내가 뭘 놓친 거지” 다 나았다고 생각했는데, 이것은 어떤 영적 가르침일까? 왜 내가 다시 벌을 받아야 하는 거지?“
살아가면서 많은 질병과 싸우면서 흔히 쓰는 말로 병을 물리치고 그 전투에서 승리 한다. 그런데 언젠가 죽기로 운명 지어진 것이 현실이라면, 질병은 승리한 것이고 인간은 항상 지기만 하는 것일까? 충분히 영적으로 성장하면 병을 치료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타협하는 것이지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다. 영적 성장은 병을 위한 치료법이 아니다. 그것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자기 자신과 영혼의 존재 그리고 삶이 다시 깊이 연결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평화를 얻는 방법이다.
내적 평화를 찾고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을 용서하며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은 몸에 이롭지만, 본래 영적 성숙이 늘 육신을 치유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병에 걸렸다는 것은 어떤 잘못을 저질러서 생긴 것은 절대 아니다. 진정한 영적 성숙은 비난하거나 단점을 찾아내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의 가장 순수한 위치까지, 그리고 사랑으로 연결되는 곳으로 도달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그것은 (신의 존재를 믿는다면) 신에게로 이르는 길과 육신과 건강 그리고 병을 뛰어넘는 어떤 존재로 다가가는 것이다. 영적 성숙은 마음과 영혼과 육신이 모두 어우러지는 것이다.
현대 문화에서는 모든 것을 사랑하고 보살피는 신이 그의 마음대로 죽음을 좌지우지한다는 믿음에 이르게 되었다. 슬픔에 빠져 있지 않을 때는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판단할 수 있지만, 삶이 너무나 힘들 때는 신이 잔인하게 죽음을 벌로 이용한다고 믿기 쉽다. 진실로 신은 인간에게 죽음으로 거듭나는 순환적인 삶을 부여했다. 우리는 양면적인 세상에 살고 있다. 신은 낮과 밤, 빛과 그림자 그리고 삶과 죽음을 창조하였다. 신에게 분노함으로 신을 재시험해볼 수도 잇을 것이다. 신은 벌 주는 존재, 그리고 당신은 벌 받은 자라는 개념에서 해방되게 위해서 필요한 일을 행하라. 벌 받는다는 느낌이 진짜가 아니라는 의미는 아니다. 만일 아이를 잃었다면 어떻게 벌 받고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이를 잃은 것에 대해 의미를 발견하거나, 최소한 벌 받는 것은 아니었음을 느끼기 위해선 최소 일 년은 지나야 가능한 일이다.
어느 때가 되어 과거를 돌아볼 때, 죽음은 항상 인간에게는 꺼려져 왔고 아마 영원히 그럴 것이다. 그것은 연속선 위의 하나의 점이며, 영혼은 영원하지만 죽음은 항상 고통스럽고 벌을 연상케 한다. 이유를 설명한다면 죽음의 운명을 가진 인간은 삶의 결말을 이 지구에서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좋은 답변이 될 것이다.
이 삶이 끝나야 한다면 그 끝은 언제나 누군가 또는 어떤 것에 의해 외부로부터 오는 악의적인 개입을 탓할 것이다. 그래서 본래 죽음은 그 자체로 보복과 벌을 불러일으키는 나쁜 행동이나 무서운 사건과 연루되어 잇다. 그리고 만약 원시적 차원에서 인간의 죽음을 벌이라고 여긴다면 사랑한 이의 죽음으로 벌 받고 있다고 느끼지 않겠는가?
무의식은 화를 내는 것과 죽이고 싶다는, 또는 제거하고 싶다는 바람을 구별하지 못하듯이, 무의식 속에서 우리는 감정과 행동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한다.
원초적인 수준에서 신에게 불복종하는 것은 어떤 사람에게는 죽음을 의미한다. 사실상 구약성서에서는 벌을 내리는 신에 대한 긴 역사가 담겨 있다. 벌 받았다는 자책 속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용서라든가 사과 같은 개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슬픔에 잠겨 잇을 대는 자비보다는 상실과 더 연관될 수 있다. 자비 속에서 인간은 용서를 통해 관계를 회복한다. 상실의 최고 미덕은 고난은 성장을 위한 기회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는 점이다. ~~~세월이 지나 삶을 되돌아볼 시간이 되기 전까지는 자신의 성장을 깨닫거나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랜드캐니언이 수백 년 동안 폭풍으로 벌을 받았다고 할 수 있을까.
사후에 대한 믿음은 누군가의 죽어 감을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를 잘 표현한다. 만일 그녀가 천국으로 갈 거라고 믿는다면 그녀가 사라지는 것이 슬프지만 천국에서 행복할 거라는 사실에 마음이 놓인다. 만일 죽은 후에 모든 것이 사라진다고 믿는다면 그녀가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을 거라며 자신을 안심시킬 것이다. 만일 환생을 믿는다면 그녀가 다음에 무엇으로 환생할지 궁금해 할 것이다.
사랑한 이가 전하는 채널링 주파수는 인간의 귀의 역량 밖이라 들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랑한 이가 우리의 말을 듣지 못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한 척의 배가 우리 시야의 한계선을 넘어 저 멀리 흘러가지만, 그것은 여전히 바다 위에 존재한다.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다른 해변으로 이동할 뿐이다.
모두들 사후 세계가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해 궁금할 것이다. 어떤 이들은 대답에 가치를 둔다. 하지만 사실 질문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하다. 실로 중요한 것은 사랑한 이가 어떻게든 아직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남겨진 이가 그 때문에 큰 위로를 받는다는 사실이다.
6. 몸이 요구하는 대로 다 들어주라
애도는 상실의 외적인 영역이다. 그것은 우리가 취하는 행동이고 의식이며 관습이다. 반면 슬픔은 ‘우리가 어떻게 느끼는가’ 에 대한 내적인 영역이다. 슬픔의 내적 작용은 하나의 과정이며 여행이다. 그것은 어떤 특정한 날이나 날짜에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저마다 우리만큼이나 개인적이다. 상실을 경험한 후 첫 해 당신은 비탄하며 슬퍼한다. 생명과 슬픔이 행복한 날과 불행한 날을 만드는 것이다.
상실을 겪은 후에야 삶에서 얼마나 많은 기념일들이 있었는지를 실감하게 된다. 사랑한 이가 한때 가져다주었던 행복이 무엇이든, 지금은 깊은 상실만이 남아 있다. 사랑하는 이가 이 세상을 떠난 날은 우리에게 어떤 식으로든 의미가 부여된다. 한 달이 되는 날, 반 년이 흐른 날, 일 년이 지난 날...
상대방이 겪은 죽음을 기억하고 있다는 말을 하려고 연락한 친구의 전화가 그 사람을 화나게 만들것 같지는 않은데, 우리는 이런 염려들을 줄기차게 들어왔다. 실제로 정말 잊었는데도 대대 잠재적으로 기억하게 된다. 왜냐하면 인간의 몸은 감정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증상은 고아원 아이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다. 사회복지사는 아이가 주로 언제 문제가 생겼는지를 말해줄 것이다. 고아원으로 보내진 날이나 부모가 돌아가신 날과 같은 시기에 일어난다. 공교롭게도 아이들은 어떤 특정한 날이 되면 기분이 저하된다. 이런 현상에서 소름끼치는 점은 아직 달력을 읽기에는 너무 어린 아이들에게도 일어난다는 것이다.
7 슬픔에 종결은 없다는 것을 알라
명절은 우리 삶에 시간의 경과를 하나씩 표시해 준다. 그것은 서로가 공유하고 있는 중대 사건들의 일부이며, 대체로 가족과 함께 보냈던 시간들이다. 명절은 평범한 일상에 의미를 주며 우리는 그 날에 많은 의미를 심어둔다. 하지만 명절은 가장 사랑한 사람과 함께 하기 위한 날이기도 하기에, 사랑한 이를 잃은 사람은 그 시간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사랑한 이가 평소보다 더 죽도록 보고 싶을 때, 그것은 가장 견디기 힘든 슬픔이 될 것이다.
편지 쓰기는 홀로 서 있는 세상에서 외로움의 훌륭한 친구가 된다. ~~~사랑한 이가 떠나버린 후에라도 그에게 편지를 쓰라.
슬픔은 모든 것을 잃은 후 비로소 다시 자신의 존재를 찾아가는 시간이다.
8 상실의 밑바닥까지 발을 디뎌보라
아이가 사랑할 수 있을 만한 나이면 충분히 슬퍼할 수 있는 나이다. 문제는 어린아이가 느끼는 슬픔은 소홀히 다뤄진다는 것이다.
아이에게 삶에 대해 가르치는 것은 부모와 학교, 그리고 사회가 공동으로 져야 할 의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모두들 아이의 슬픔을 다른 누군가가 다룰 거라고 여긴다. 슬픔에 대해 아이와 대화를 나눠보는 건 실은 모든 이의 책임이다. 아이는 어른들이 대수로운 감정을 다루고 있음을 감지한다. 그리고 아이는 흔히 어른을 보고 감정표현을 본받기 때문에 어른들은 슬픔에 대처하는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
9 신의 이해를 구하지 말아야 한다
사랑한 이의 자살은 그 자체로 슬픔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죄책감과 분노뿐만 아니라 치욕스러움이다. 자살을 둘러싼 크나큰 오명 속에 남겨진 가족들은 그 사실을 절대로 입 밖에 꺼내지 않는다. 어떤 이는 사랑한 이의 죽음의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거짓말을 꾸며댄다. 왜냐하면 수치스러움도 죄책감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10 상실은 가장 큰 인생 수업
[저자의 고백]
내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상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2004년 7월 17일
지금껏 내가 애통해하는 모습을 실제로 본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난 슬픔을 잘 알고 잇다. 사망과 임종을 다루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동안, 뒤늦게 나의ㅐ 슬픔이 찾아왔다. 중풍 때문에 반신불수로 지난 9년을 보내면서, 아직 내가 이 세상에 있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종종 삶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이 기간 동안 나는 두 권의 책을 더 써낼 기회가 있었다. 나를 자극했던 상실의 옛 이야기들을 회상하고 다시 돌아볼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뜻 깊은 일이었다.
그 집필은 감정을 정화시켜주었고, 데이비드와 내가 함께 작업 하고 대화를 나누며, 슬픔을 표면 위로 올라오도록 둠으로써 타인의 눈앞에 보여주는 일은 뭔가 의미가 있었다. 이 두 권의 책을 집필하는 동안 나는 여러 번 울었다. 나는 행위자와 창조자로서 항상 내 일을 경험했다. 이제는 침상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면서 지금껏 내가 참여했던 모든 이들의 삶의 고통과 상실을 실로 느끼고 있다.
내 삶은 언제나 죽음과 하나가 되어 있었지만, 내 개인적 슬픔에는 거리를 두었다. 나는 내 일을 통해 죽음이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다는 말을 여러 번 했었다. 물론 영적이며 상징적 차원에서 말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육체적 차원에서 죽음의 실체는 모두 너무나 현실적이다. 현실에서 이런 극적인 대조를 처음 경험했던 것은 내가 여덟 살 때였다. 부모님은 내가 감기에 걸렸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도 낫지 않자 나를 병원에 데려갔다. 그곳에서 나는 비슷한 또래의 한 여자아이가 있는 병실에 입원하게 되었다.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들 세상에서 그 여자아이가 나보다 더 아프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에게는 병문안 오는 사람이 없었다. 도자기처럼 투명한 피부를 가진 이 소녀는 말을 거의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침묵 속에서 난 많은 것을 이해했다. 며칠을 함께 보낸 어느 날 그 아이는 내게 이 밤이 지나면 떠날 거라고 말했다. 나는 사뭇 걱정스러웠지만 그 아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 괜찮아, 나를 기다리는 천사들이 있는 걸” 내 친구가 rPt고하게 될 그 여행에 난 조금의 두려움도 없었다. 그것은 마치 태양의 일몰 같았다. 그 아이는 홀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다른 행성에서 온 사람들에게서 보살핌을 받고 있다고 느꼈다. 그 아이가 가족도 친구도 없이 죽었다고 느끼면서도, 나는 그 아이가 괜찮다고 나를 안심시켜주었기에 많이 슬프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것은 차갑고 외롭고 메마른 죽음이라고 생각 했다.
몇 년 후 나는 또 다른 죽음을 목격했다. 쉰 살의 농부인, 내 부모님의 친구가 사과나무에서 떨어져 목이 부러졌다. 의사는 손쓸 방도가 없다고 말했고 그의 가족은 그를 집으로 데려와서 임종을 맞았다. 그의 침대는 정원에 핀 꽃들을 넓은 창문으로 내다볼 수 있는 곳에 놓여 있었고, 그의 가족들과 친구들의 방문을 맞았다. 병원에서 죽은 소녀와는 다르게, 이 죽음은 평온하며 정다운 느낌이라 슬프지만 따뜻함이 있었다. 자연히 내가 마지막 몇 년간 꽃과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커다란 창문이 있는 방에 있었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나의 아버지 안스 퀴블러는 내가 서기관이 되어야 한다고 결정을 내린 완강한 분이셨다. 동생 에리카는 학자가 될 것이고, 에바는 보통의 정규 교육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난 많은 의문이 남았다. 나는 왜 정체성 없는 세쌍둥이로 태어난 것일 까? 부모님은 종종 우리를 구별하지 못하셨기에 난 내가 마치 단 하나의 유일한 정체성ㅇㄹ 상실한 채로 태어난 것처럼 느껴졌다. 왜 아버지는 그렇게 엄하셨고 어머니는 다정했는지 지금도 알 수가 없다. 마치 내가 왜 취리히에서 몸무게 2파운드의 ‘하찮은 존재’로 태어났는지 결코 알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일찍부터 나 자신을 위해 슬퍼하지 않고, 울지 않고, 느끼지 않는 법을 배웟다. 어린 시절 집 주위에는 언제나 토끼들이 있었고, 나는 토끼 한 마리 한 마리를 그리고 그들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 문제는 너무나 알뜰한 분이셨던 우리 아버지가 6개월마다 저녁식사로 토끼를 한 마리씩 구워 상에 올리게 했다. 나는 그 사랑스러운 토끼를 한 마리씩 푸줏간에 매번 갖다 줘야만 했다. 그때마다 나는 내가 특별하게 생각하는 토끼 블랙키를 절대로 선택하지 않았다. 블랙키는 나의 것이었고, 오직 나에게만 소속된 사랑스런 존재였다.
나 자신의 상실을 돌이켜보면, 내가 어떻게 그것을 이겨냈는지를 알 수 있다. 에마뉴엘 로스(매니)와의 결혼생활 동안 나는 유산을 했지만, 내 삶과 일을 계속해 나가기 위해 더 큰 힘으로 내 믿음을 이용했다. 그 당시 나는 두 번째 유산을 했었다. 두 번씩이나 내가 그렇게도 원했던 소아과 수련의로 인정됐지만, 임신을 이유로 두 번 다 자격을 박탈당했다. 결국 정신과 수련의가 유일한 선택이었다. 나는 언제 E#h 아이를 유산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두려움이 있었지만, 삶은 나를 위해 또 다른 계획이 있었다. 1년 후 나는 첫 아이 켄을 가졌고 그다음엔 둘째 바바라를 가졌다. 이제 와서 보면 만일 이런 운명의 슬픈 우여곡절이 아니었더라면, 내 생명의 작품은 불가능했을 거라고 본다. 이런 상실과 탄생의 혼합은 내 삶의 일부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또 한 번의 어마어마한 상실은 전남편 매니의 죽음이었다. 이혼 후에도 우리는 친구관계를 유지하며 매주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우리는 실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함께 발전하고 있었기에, 그가 죽었을 때 나는 망연자실했다. 그는 내 아이들의 아버지였고, 나는 그와 함께했던 시간을 멋진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어느 날 장성한 아들 켄이 아버지의 양복을 입었을 때 나는 매니를 다시 보는 것 같았다. 딸 바바라와 손자들에게서도 매니의 모습을 발견한다. 앞으로 나의 모든 상실이, 심지어 나의 죽음을 포함해 계속 삶을 살아갈 그들에게 얼마나 복잡하게 뒤엉켜 있을지를 앞서 상상하고는 슬픔에 빠졌다.
몇 해 후 1994년, 나는 버지니아에 300에이커의 농장을 구입했다. 그곳에서 사람들을 치유하고 에이즈에 걸린 아이들을 돌보고 싶었지만, 그 지역에서는 나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죽음과 그것을 둘러싼 오명에 익숙해져 있었다. 나는 에이즈 환자로 낙인찍힌 채 죽어가는 사람들을 사회에 낙인찍히기 훨씬 이전의 모습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동내 사람들이 내 농장을 미워한다는 사실을 과소평가했고, 결국 농장은 방화범들에 의해 불타버렸다. 농장이 불타버렸다는 것을 부인하려 해도 그것은 엄연한 현실이었기에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여러 모습의 삶을 겪었지만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그건 사실이었다. 불평이 결코 아니다. 고난 이는 기쁨도 없고 고통 없이는 즐거움도 없다는 사실을 배웠기 때문이다. 죽음이 없다면 과연 삶의 진가를 평가할 수 있을까? 나는 이곳에서 ‘인간의 목적은 사랑하고, 사랑받고, 성장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이 점을 감안한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은 없는 것이다. 삶을 지켜보면서 인간은 모두 고난을 겪는다는 걸 알았다. 역경은 단지 자신을 더 강인하게 만든다. 삶은 힘들고, 하나의 몸부림에 다름 아니다. 마치 많은 배움을 주는 학교에 가는 것과 같다. 배우면 배울수록 그 배움은 더 어려워진다.
몇 년 동안 난 슬픔을 예감해왔다. 삶 속에서 매 순간이 진정한 자신을 위한 시간이 되어야 한다. 타인 또는 의료 체제에서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슬프고 또는 화가 나더라도...
죽음을 가까이 앞둔 지금, 나는 내 방을 둘러본다. 오랜 시간이 지났다. 몇 년 전 나는 곧 죽을 거라고 생각했고 거의 그럴 상황이었다. 하지만 나는 인내와 사랑받는 법을 배워야 했기에 아직 이 세상에 남아 있다. 9년 동안의 병마는 내게 인내를 가르쳤지만, 아직도 사랑받는 것엔 여전히 서투르다.
뇌졸중 이후 9년 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고 나는 죽음을 갈망하고 있다. 나는 지금 간절히 졸업을 갈망한다. 나는 이제 내 인생의 목표가 이 단계 이상의 것이라는 것을 안다. 나는 결혼했고, 자녀를 가졌고, 손자가 생겼고, 책을 썼으며, 여행을 했다, 사랑을 했으며, 상실을 경험했고, 다섯 단계보다 훨씬 많은 단계를 겪었다. 그대도 그럴 것이다. 이 책은 단지 단계들을 알기 위함이 아니다. 단지 삶을 잃는 것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
[Review]
“난 내가 겪은 이 고통을 이해하는 척하지 않습니다. 대신 내 상황에 대해 신에게 분노할 겁니다. 9년 동안 나를 한 의자에 앉혀 꼼짝없이 갇혀 있게 한 신에게 화가 납니다. 이것이 바로 여섯 단계, 즉, ‘신에게 분노하는 단계’입니다.”<본문>
1994년 10월 그녀는 평생의 숙원사업이었던 에이즈 환자들을 위한 수용시설 건물이 마지막 준공을 앞두고 방화범들에 의해 불타버렸을 때 스스로 이것은 새로운 성장의 기회라고 다짐했다. 평생 모아둔 모든 원고가 잿더미로 변했고. 그곳 부지는 또 다른 사회복지 재단에 기증했으며. 다시 새로운 출발을 하겠다고 다짐도 했다.
그러나 그 일이 있고 얼마 되지 않은 1995년 5월 13일 밤, 그녀는 몸에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머리는 움직이라고 명령했지만 몸이 따르지 않았다. 뇌졸중, 그 후 그녀는 2004년 7월 마지막 숨을 거두며 이 책의 말미에 있는 글을 쓰기까지 병원 침대를 떠나지 못했다. 그때의 심정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죽음을 갈망하고 있다. 나는 지금 간절히 졸업을 갈망한다.” <본문>
사람들에게 평생 죽음에 대한 강연을 하고 책을 써서 유명인이 된 저자가 정작 자신의 죽음은 어떻게 맞이하고 있을까 궁금했다. 이 책은 그녀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9년간의 투병 생활의 마지막 시기에 쓰인 책으로 그녀의 조력자인 ‘데이비드 케슬러’에 의해 출판되었으나 그녀는 이 책의 출판을 끝내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 책에서 상실은 죽음을 맞는 사람이 느끼는 상실이 아니라, 그 죽음을 옆에서 지켜보거나 경험한 사람들이 이 느끼는 상실이다. 부부를 먼저 떠나보내는 사람도 있고 부모나, 자식, 사랑하는 친구가 곁을 떠나는 상실감은 누구에게나 고통스러운 일이다.
“전형적인 상실의 모습이 정해져 있지 않듯 전형적인 반응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삶이 다양하듯 슬픔 역시 그렇다.” <본문>
또 그 대상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기도 하지만 장기간에 걸쳐 남겨진 사람들을 힘들게 투병 생활을 하다가 떠나는 사람도 있다. 겪게 되는 슬픔은 사람에 따라, 또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를 것이다.
“상실을 비교할 때, 누군가의 상실이 자신의 상실보다 더 상황이 나아 보이거나 또는 더 안 좋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상실은 다 고통스럽다. 일흔에 남편을 잃었다면 마흔여덟에 남편을 잃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본문>
이런 다양한 슬픔의 모양에서 그녀가 제시한 다섯 단계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는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라는 그녀만의 논리는 오늘날 죽음에 대한 정설로 인정되고 있다. 이 책에서 그녀는 이 다섯 단계는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이 갖는 슬픔인 동시에 죽음을 보내는 사람들에게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슬픔이며, 다섯 단계가 순차적으로 다가오는 것도 아니며 복합적으로 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슬픔은 개인적인 감정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그 슬픔을 제어할 수는 없다. 다만 그 사람의 상황에 맞추어 가는 것이 최선일 뿐이다. 이 책에서는 저자가 오랜 세월 다양한 사람들의 슬픔을 맞는 모습을 보며 그동안 마음속에 남아 있던 생각을 담았다. 슬픔의 사정은 각기 다르지만 어떤 면에서는 크게 공감할 수 있는, 또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그런 내용들이다. 인생을 살아보면 타인이 죽음을 맞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하고, 또 그 일로 슬픔을 당해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도 본다. 또한 자신의 삶이 어렴풋이 그런 상황에 맞닥뜨리게 될 것이라는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사람들에게 어떤 해결책을 준다기보다는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것, 다시 말하면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할 슬픔이라면 그 슬픔을 다른 것으로 승화시키는 길이 있음을 말해주는 책이다.
저자는 정신의학자이자 호스피스운동의 선구자. 타임지에서 20세기 100대 사상가 중 한 명으로 선정될 만큼 20세기 정신의학 분야에서 선구적인 인물이다. 모국인 스위스에서 정신과 의사가 되어 1958년 미국으로 건너왔으며 여러 어려움을 딛고 그 자리에 오르기 까지 그녀의 삶은 끝없는 도전이었다. 그 삶의 모습은 저자의 다른 책 <생의 수레바퀴>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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