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예수는
성경의 오래된 해방전통에 이어진 열린 밥상공동체를 이루신 것과 소외되거나 차별받지 않고 모인 이들이 자연스럽게 몸과 마음과 영혼이 치유되는 사건으로 정리할 수 있다.
좀 더 안전한, 자신에게 안전한 선택을 하실 수도 있었지만 예수님은 안식일에 사람을 고치고 병자에게 손을 대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안위는 보장하지 않고 스스로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것이 예수가 이 세상을 사랑한 방식이구나 싶다.
죽음을 통해 자신의 안전과 평화를 버린 듯하지만 세상을 구하시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자들에게 온전히 전수하신 사랑과 자비의 표현같다. 자신의 십자가와 멍에는 쉽고 가볍다 말씀하신 것을 실천하신 것 같다. 십자가의 길이 쉽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세상을 구원하시어 자신의 평화도 지킨 것일테니 말이다. 그리고 이 천 년이 흐르도록 예수를 따라, 예수를 사는 이들이 이어져오고 있으니 말이다.
일터인 공방에 가끔 찾아오는 이들을 통해 여러가지 깨닫게 됩니다.
상대가 가진 고유한 모습에 감흥하고 고마워하면서도 내 관점과 내가 지향하는 바에 지극히 갇혀 있는 모습, 내 기준으로 상대를 판단하기도 하고, 아픔과 상처있는 이들이 많다는 것, 아니 누구나 겉보기엔 밝아도 아픔이 있을 수 있다는 것 등 인간과 저를 새롭게 발견해가고 있습니다. 어떤 만남은 아픔과 상처가 커서 무엇인가 당장 도와줘야 할 것 같은 부담이 들기도 합니다. 지난 주와 이번 주에도 그런 마음으로 부담감과 더불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지혜를 구하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 배운 강의를 통해 답이 멀리 있지 않다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면 되겠구나 하며 무거운 마음이 좀 풀려납니다.
지난 주에 산책길에 뜯은 쑥으로 국 끓이고 이런 저런 잎 뜯어 나물 무치고 근처에서 머위를 뜯어와 쌈을 싸서 어떤 손님과 나눠먹으며 서로 웃고 행복했던 것 다시 떠올려봅니다.
예수의 열린 밥상공동체와 전인치유 강의를 들으면서 사람을 가리지 않고 품을 수 있는 마음 주시기를, 품기 버겁다면 밀어내지는 않기를, 차별하지 않기를 기도하게 됩니다. 내가 품을 수 없는 것 같은 사람도 예수님이 함께 하시니 마음을 열고 함께 하면 되겠다 싶습니다. 그러려고 공방을 열었지, 다시 마음 다잡게 되니 감사합니다.
요 3:16절에 나오는 영생이 먼 미래의 것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이미 그 미래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라는 강의 말씀이 복음이 됩니다. 예수를 경험하여 아는 것, 그것은 예수를 사랑하는 것이며,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으로 지금 천국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새롭고 고마운 소식입니다. 강의를 듣다 보니 여전히 성경을 교리적으로, 20여 년 전에 알았던 방식으로 해석하고 있는 부분이 많겠구나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부지런히 배우며 삶에 들여 잘 해석하고 제대로 믿고, 제대로 살아내고, 제대로 전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열심히 강의해주시고, 질문해주시는 이들 통해 더 생각해보게 되니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