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확성의 대상으로 마주치는 시간들
---김재언의 시세계
권혁재 시인
김재언의 시 속에는 부정확성의 대상으로 마주치는 시간이 가득 차 있다. 그에게 시간은 행위의 절차나 물리적인 질서를 드러내는 것이요, 부정확성의 대상들은 시의 집중을 높이기 위해 쓰는 강조 효과나 주체자의 상대자로 나타내는 은유의 방법으로 쓰인다. 시에서 부정확성의 대상은 시를 조율하고 유지해나가는 보조적인 역할을 하며 때에 따라 시를 느슨하게 또는 조이게 하는 긴장감까지 주도하고 있다. 시인은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된 안타까움과 그리움을 들춰내면서 그것들을 부정확성의 대상과 마주치는 시간들로 길항하게끔 교차시켜 놓는다. 이러한 시인의 정열과 시를 결속해나가는 과정을 서정이 깃든 풍경의 화폭으로 행보를 넓혀낸다. 아하메트 라심이 말한 “풍경의 아름다움은 그 슬픔에 있다”는 것을 시인이 인지하고 있듯 그의 시를 읽고 나면 겉으로 드러난 풍경의 이면에 숨은 아픔과 성찰을 확인하는 신선한 고백이 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그 기저에는 김재언 자신이 겪은 많은 경험이 용해되어 있고, 또 세밀하게 관찰해온 대상을 진정성 있게 보여주는 확고한 의지가 담겨 있다. 이처럼 김재언의 시는 부정확성의 대상에서 또 다른 대상과의 새로운 친화나 이면을 들춰내며 시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특징을 가진다. 여기에는 기억과 시간을 통한 그 자신이 겪은 삶을 시의 바탕이 되는 근원적인 안타까움이나 슬픔, 그리고 그리움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형태로 잘 덧칠하여 시의 보폭을 확대해내는 그의 부단한 열정이 배어 있다.
이름 없는 도면 바닥을 문지르기도 해요. 수평을 찾고 싶을 때 누가 능선을 뛰어 넘나요. 금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짚어온 길은 잊어요. 꽃길이 아니라고 몇 번이나 우겼나요. 닳을 때까지 지우개 발명할 이유가 없었을까요. 우리의 요일을 나누지 못하고 보내는 것처럼. 접어두고 가끔 재미로 펼쳐보아요. 금, 금, 금요일 금 간 샛별로 가득한 행성 같아요. 투명한 선을 침범하진 않았어요. 누구도 선을 바꾸지는 못했지요. 버텨온 감정선을 읽어요. 일란성 쌍둥이 손금 무늬도 삼신할미가 손바닥에 그린 해석일까요. 상상 속에서 나를 건져 올려요. 뒤집으면 선명해지는 바닥에 골똘해져요.
-「손금」전문
김재언이 첫 번째로 대하는 시간은 “손금”이다. “이름 없는 도면 바닥을 문지르”거나 “일란성 쌍둥이 손금 무늬도 삼신할미가 손바닥에 그린 해석”의 시간까지 그의 시간은 “금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시간의 끝이 없는 “폐곡선”처럼 잇닿아 있다. “금요일에서 금요일까지”는 거듭된 시간의 반복으로 여기에는 “금, 금, 금요일 금 간 샛별로 가득한 행성”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누가 능선을 뛰어넘어도 누구도 선을 바꾸지 못”하는 부정확성의 대상에 대한 “손금”에 닿지 않은 한계를 드러낸다. 이러한 한계는 의식적이나 무의식적으로 노출할 수 있으나 김재언에게 “누가” 또는 “누구”는 부정적인 의미보다는 긍정적인 의미로 “우리의 요일”로 확장해내는 매체가 될 뿐, 시어나 대상에서는 문제가 될 것이 없다. 오히려 김재언이 추구하는 시작법은 과거의 시간을 돌아보는 것이 아닌 현재에서 미래의 시간을 꿰뚫는 대상들로 가득하다. 이를테면 “샛별로 가득한 행성, 투명한 선, 선명해지는 바닥” 등의 표현에서 나타나는 시간은 “손금” 본래의 속성이 지닌 은유적인 의미로 과거보다는 현재를 뛰어넘어 미래를 바라보는 “능선, 행성, 감정선”이 된다.
먹은 밥을 또 먹는다.
하얗게 쏟아지는 이팝꽃이다.
누구의 배를 채우든
먹으면,
불러올 것 같은 꽃이다. 꽃은 어떻게 이 많은 밥을 다 피워냈을까?
허기를 움켜쥐고 비틀거리는 모습이 보인다.
저만치 부서지는 얼굴이다.
가까워질수록,
-「배꼽시계」 부분
“배꼽시계” 역시 시간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먹은 밥을 또 먹는” 연속적인 시간의 표현은 “누구”에게서부터 “누군가”에 이르기까지 생의 질곡을 “이팝꽃과 밥”으로 전이시켜 대상자를 은유적으로 추적해낸다. “먹은 밥을 또 먹는” 대상은 “배꼽시계”에 버금가는 시간의 존재자로 “부서지는 얼굴, 비틀거리는 모습, 배를 숨긴” 표현에서 나타나듯 그 대상이 온전치 않음을 감지하게 해 준다. “배꼽시계”의 대상은 허기를 느낄 때 먹는 밥의 의미보다는 “먹은 밥을 또 먹는” 시간을 의식적으로 잊어버리며 “누구”로 대체되는 부정확성의 대상이자, 실제적으로 “허기를 움켜쥐고 비틀거리는” 대상이 되기도 한다.
김재언에게 부정확성의 대상은 시를 이끄는 주체자의 상대방으로, “그들이 누군지” 알게 해주는 역할을 해 준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부정확성의 주체자로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이러한 데에는 그가 부정확성의 대상을 의도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시작품을 하나의 연결고리로 엮다가 자연스럽게 사용한 결과라 볼 수 있다. 그러면서 더 나아가 “누구”라는 대상을 사용함으로써 “먹는다, 보인다, 피운다, 달려간다”의 행위를 드러내며 시간의 교착점을 부정확성의 대상으로 향하게 하여 교직적인 형태로 시를 엮어내는 비의가 엿보인다.
박달소에 던진 돌은 물수제비가 아니다
잠긴 물살이
물비늘을 익사 시킨다
<중략>
운문댐이 삼킨 물비늘
자라바위가 이끼를 숨겼다
수박향 은어는 점점 멀어지고
그리움은 더 이상
고기가 오는 길로 오지 않는다
-「은어는 폐곡선을 그리지 않는다」 부분
시간의 흐름은 부정확성의 대상을 더 명확하게 부각시켜낸다. 아니면 부정확성의 대상이 시간을 더 정확하게 짚어낼 수도 있다. 시간과 부정확성의 대상은 길항작용을 하여 시를 더 견고하게 하고 긴장하게 만든다. “물살이 물비늘을 익사 시킨” “동창강 하류”는 시간을 비워낸다. “은어가 흰 뱃살을 뒤집는” 시간 사이로 “누가”라는 부정확성의 대상이 개입하면서 시는 “태풍에 고립된 마을, 깨진 물그림자”로 긴장을 유지하며 “그리움은 더 이상/ 고기가 오는 길로 오지 않는다”는 단호한 상태를 견지한다. 어떻게 보면 정체되어 있는 듯한 시간으로 볼 수 있으나 “폐곡선을 그리지 않는다”의 여운에서 암시하듯 완전히 닫힌 곡선이 아닌 열려 있는 곡선을 반어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언제든지 역동적으로 전환할 수 있는 여백을 남겨 준다. 그리고 “그리움은 더 이상/ 고기가 오는 길로 오지 않는다”의 마지막 행과 작품 제목이기도 한 “은어는 폐곡선을 그리지 않는다”의 부분에서 그리움과 은어의 대상이 부정확성의 대상으로, “폐곡선을 그리지 않는다”와 “고기가 오는 길로 오지 않는다”의 시간은 “폐곡선”처럼 시작점과 끝나는 점이 일치하고 있음을 시사해 준다.
단잠 걷어찬 할머니
끼니마저 거르고
빗소리에 논두렁을 끌고 온다
미끄러진 엊저녁이 무논에 첨벙댄다
<중략>
누구를 먹이려
발자국은 붉은 길을 달리는가
-「단물」부분
시에서 부정확성의 대상은 “나, 너, 우리”를 아우르는 불특정 다수의 개념으로 막연하지만 막연하지 않는 관계를 형성하기도 한다. 이 시에서 “누구”는 할머니가 무논에 물의 씨를 단비에 적셔 키워낸 것을 받아먹는 대상으로, 할머니의 사랑스러운 손자나 육친의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다. 여기서 인식할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은 부정확성의 대상이 단순히 부정확성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이해할 수 있는 어떤 개연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개연성은 시를 보다 진정성 있고 감동 있게 만들어 준다. 김재언 시인은 이러한 시적 효과를 충분히 알고 있고, 시적 내공도 만만치 않아 시를 주조해내는 실력이 남다르게 여겨진다. “미끄러진 엊저녁이 무논에 첨벙”대거나 “할머니가 외우는 몇 겹 주술, 붉은 길을 달리는 발자국”들은 할머니가 단잠을 걷어차고 “모가락에 불”을 지펴 밥을 안치는 시간이 부정확성의 대상자와의 시간과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김재언이 할머니라는 대상이 시간을 이끌어가며 부정확성의 대상에게 스며들면서 시를 지극히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하늘로 솟는 불기둥
부추기는 바람에 산은
점점 먹힌다
산불을 끄고, 유튜브를 끄고, 줌을 끄고, 증시를 끄고. 휴대폰을 끄고,
‘끄다’는
거두는 마음에 물꼬를 트는 일
<중략>
자리 욕심 끄고, 멍에를 끄고, 손과 손을 끄고
오래 묶은 의문을 끄고
하루에도 몇 번씩 끄고 끈다
-「끄다」부분
“끄다”는 시간을 움직이지 않게 하는 것이다. 불을 끄는 순간 불의 시간은 멈추고, 증시를 끄는 순간 또한 증시의 시간은 멈춘다. 그래서 화자는 “끄다”를 “거두는 마음에 물꼬를 트는 일”로 정의한다. “거두는 마음”은 중지된 시간으로 “물꼬를 트는 일”은 시간이 계속 진행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중지된 시간과 중지되지 않은 시간이 공존하는 공간에서 시인은 시간이 공간을 가역성으로 변환시키면서 나타낸 “끄다”의 시간적 의미를 문명의 발달로 각종 폐해를 입은 현대인의 “욕심”과 그로 인한 “멍에”를 반추시킨다. “끄다”는 멈춤이자 비움이다. 요란한 물음과 수시로 오는 스팸문자로부터 “고요를 지고 핸드폰 속으로” 넣어 버리는 “끄다”의 의미는 멈춤이자 비움이다. 이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 끄게 만드는 “오래 묶은 의문”으로 파악해내는 김재언에게 “끄다”는 부정확성을 멈추고 묵은 시간을 중지시키려는 따뜻한 바람이 내재되어 있다.
시에서 부정확성의 대상을 표현한다는 것은 시인에게 단점이자 장점이 되는 갈림길이 되는 중요한 요인이다. 그래서 부정확성의 대상을 쓸 때는 신중히 고려해서 써야 하고, 어쩔 수 없이 쓰게 될 경우는 시의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여 써야 한다. 이는 시의 완결이나 주제를 끌고 가는 집중력하고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재언에게 부정확성의 대상은 「배꼽시계」나 「단물」에서 보여주었듯이 그 대상자가 온전치 않거나 살가운 육친으로 표현되어 신산하고 산뜻한 대상자로 일치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을 볼 때 김재언은 그의 기억과 시간을 더듬어 삶을 성찰하고 안타까움을 그려내는 과정을 부정확성의 대상이라는 어려운 형태를 잘 극복하고 그만의 시로 독특하게 직조해낸다.
김재언의 시세계는 풍경과 아픔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가 지적하고자 하는 시의 방향은 풍경과 대상을 미리 노출 시켜 놓고 밑바탕에 시간으로 숙성시켜내는 아픔이 존재한다. 다시 말해 부정확성의 대상을 전면에 내세워 두고 대상자가 맞닥트리게 되는 삶이나 경험의 각종 이면을 시간으로 움직여 놓는다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독특한 시작법은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닌 일상적인 관찰에서 자연스럽게 체득한 사유의 결과에서 비롯된다. 다음에 또 그가 어떤 대상으로 마주치는 시간을 가지고 엮은 시를 가지고 나올지 기대를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