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 2,8-14; 루카 1,39-45
+ 찬미 예수님
대림 특강 때 성경의 네 가지 의미에 대해 말씀드렸는데요, 이 중 ‘우의적 의미’는, 구약 성경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지 않고, 이 말씀이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보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해석하려 할 때 드러납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1독서의 ‘아가’입니다. 대림 3주간에 왜 난데없이 연애 시를 읽느냐고 궁금해할 수 있지만, 독서에 나오는 ‘연인’은 바로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예로니모 성인은 “산을 뛰어오르고 언덕을 뛰어넘어 오는 내 연인”이, 하늘에서 지상으로 육화하시는 ‘말씀’을 의미한다고 해석했습니다. 우리는 대림 제2주일에 “산과 언덕들은 낮아져라”라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듣고 산과 언덕처럼 교만했던 마음을 낮추려 노력해 왔습니다만, 설령 그렇게 되지 못하더라도 산을 뛰어오르고 언덕을 뛰어넘어 그리스도께서는 오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시는 이유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라고 알고 있는데, 더욱 근본적으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을, 1독서의 말씀을 되뇌며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엘리사벳은 자신을 찾아오신 성모님과 태중에 계신 그리스도께 인류의 대표로서 인사드립니다. 태안에는 아이가 참 많은가 봅니다. “태 안에 아이가 뛰놀았다”는 얘기가 두 번이나 나오네요.
“엘리사벳이 성모님의 인사말을 들을 때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가브리엘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세례자 요한이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성령으로 가득 찰 것이다.’(루카 1,15)라고 예고했는데, 과연 요한은 태 안에서부터 성령으로 가득 차 그리스도를 알아 보았습니다.
엘리사벳도 성령으로 가득 차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다”고 인사하는데요, 이 표현은 판관기(5,24)에서 ‘야엘’에게 쓰였고, 유딧기(13,18)에서 ‘유딧’에게 사용되었습니다. 성모님 역시 이분들처럼 당신을 통해 하느님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도록 자신을 내어놓으셨습니다.
어제의 복음이 성모님을 새로운 성전으로 묘사했다면, 오늘 복음은 성모님을 ‘계약의 궤’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계약의 궤는 모세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십계명 돌판을 보관하던 궤였는데요, 성전이 지어지기 전까지 하느님 현존의 상징이었습니다.
이 계약의 궤를 필리스티아인들에게 빼앗긴 이후 다윗은 그것을 되찾아 오기 위해 ‘일어나’, ‘유다의 한 고을’로 ‘갔습니다’.(2사무 6,2; 칠십인역)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께서는 ‘일어나’ ‘유다의 한 고을’로 ‘갔다’고 복음은 말하고 있습니다(원문 직역). 구약에서 다윗은 계약의 궤를 찾으러 갔지만, 신약에서 계약의 궤이신 성모님께서는 당신이 직접 오십니다.
또한 ‘세례자 요한이 태 안에서 뛰놀았다’는 구절은 다윗이 계약의 궤를 모셔 오면서 기뻐하며(2사무 6,12), 춤추었다(2사무 6,16)는 구절을 연상시킵니다. 또한 엘리사벳은 성모님을 보자 ‘큰 소리로 외쳤다’(아나포네오)고 복음은 전하는데요, 신약 성경에서 유일하게 이곳에서만 사용된 이 단어는, 구약 성경을 희랍어로 번역한 70인 역에 다섯 번 나오는데, 모두 계약의 궤 앞에서 드리는 전례적인 노래를 의미하는 말로 쓰였습니다.(1역대 15,38; 16,4-5.42; 2역대 5,13)
마지막으로,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의 집에 석 달가량 머무는데, 다윗도 계약의 궤가 오벳 에돔의 집에 석 달 동안 머무르게 합니다(2사무 6,11).
결국, 성모님을 새로운 성전으로 묘사한 어제의 복음에 이어 오늘 복음은 성모님을 참다운 계약의 궤로 묘사하고 있는데요, 루카 복음사가가 아무리 천재라 하더라도 성령의 감도 없이 인간적으로 이런 말씀을 쓸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고, 교부들을 비롯해서 이런 것을 밝혀내는 분들 역시 성령의 감도로 일하고 계심을 느낍니다.
예수님은 말씀과 성사와 사람들 안에 현존해 계십니다. 잠시 후 성체의 형상으로 오실 예수님을 아가의 말씀처럼 사랑으로 맞이하며, 오늘 하루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의 모습으로 계신 예수님께도 엘리사벳처럼 기뻐하며 찬미드릴 수 있도록, 내 안에 계신 성령의 움직임에 귀 기울여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