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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걸음
성경본문 : 잠언 20: 24
24.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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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원태 목사
- 우연인가, 필연인가?
어떤 경우든 하나님 자기 창조의 최절정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이었습니다(창 1:26, 28). 하나님은 사람과 모든 다른 피조물, 특별히 동물들과 사람이 다른 점을 엄격히 차별화하였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언어(말)를 사용하게 함이요, 불(火)을 사용하게 함이요, 또 두 발로 걷게 하는 직립보행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하나님과 관계하는 이성과 영혼이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3000이 넘는 솔로몬의 잠언들 가운데 ‘사람의 걸음’에 대한 그의 영감의 교훈을 생각하기 원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 16:9)고 한 사실입니다.
‘걸음’(walk)이란 발을 옮겨 놓는 동작을 뜻합니다. 어떤 때는 길이를 측정하는 데도 사용하였습니다(삼하 6:13). 활동 영역의 범위를 나타내기도 하였습니다(삼하 22:37). 오늘 주어진 본문의 큰 의미는 도덕적인 면이 아닌 인생의 행로, 혹은 생로(生路)를 나타내는 말이 됩니다.
Ⅰ. 사람의 걸음은 작정되고, 섭리되는 걸음이라는 뜻입니다.
잠언 16장 1절에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고 한 말과 유사합니다.
잠언 16장 33절에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의 계획이나 노력은 결코 인간 그 자체의 의지의 산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시편 37편 23~24절에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예정하신 사람의 걸음에도 넘어지는 실족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넘어짐은 영원한 넘어짐(멸망)이 될 수 없고, 결국 하나님의 손이 그를 넘어짐에서 일으킨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일을 통하여 사람은 실족하는 인생 됨을 느끼게 되고,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10장 23절에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늙은 종의 손을 자기 환도뼈 밑에 넣게 하고 단단히 맹세시킨 일이 있습니다(창 24:2). 그것은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들 이삭의 배필을 택하게 하신 일에 심부름을 하게 한 때입니다.
그는 가나안 족속의 딸이 아닌 자기의 친척 중에서 이삭을 위한 배필을 구하려고 그 종을 먼 곳으로 보냈습니다.
그 아브라함의 종은 자기가 목적하고 가는 걸음에 축복이 임하기를 기도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그의 소원대로 우물가에서 밀가의 아들 브두엘의 소생인 심히 아름다운 딸 리브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창 24:45~48). 그때 그 늙은 종은 머리를 숙여 하나님께 경배하고, 여호와께서 길에서 자기(걸음)를 인도하사 자기 주인의 동생 집에 이르게 하셨다고 감사하였습니다(창 24:26~27).
그리고 그 아브라함의 늙은 종은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를 바른 길(걸음)로 인도했다고, 그 처녀의 아버지 브두엘에게 간증하고 있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애굽의 왕 바로의 딸(공주)은 목욕하러 하수로 내려왔다가 하수가를 거닐 때에, 모세가 담겨있는 갈대 상자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일 때문에 모세는 애굽 궁실에서 자라나게 되었습니다(출 2:5~10). 이런 경우 그녀의 걸음은 먼 앞날에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아브라함가의 축복을 집대성한 자 요셉의 걸음이 그러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심부름을 가던 걸음이, 형들에게 잡혀 애굽 상고에게 팔려가던 걸음이, 누명을 쓰고 왕실 궁에 갇혀버린 걸음이 결국 장차 애굽 총리대신이 되러 가던 걸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총리대신이 되어 형들을 맞이하는 자리에서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창 45:5)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 45:7~8)고 하였습니다.
사울은 그 아비의 잃어버린 암나귀들을 찾아 헤매던 중, 선지자 사무엘에게 암나귀 찾는 길을 물으러 갔다가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삼상 9:3~27). 정말 뜻밖의 걸음에 뜻밖의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저 아하수에로 왕의 악한 신하 하만은 유대인 모르드개를 달기 위해 자기 집에 오십 규빗이 되는 높은 나무를 세우고, 그날 밤 먼저 모르드개를 달아 죽이고 왕후 에스더가 초청한 잔치에 참석하고자 왕의 허락을 받기 위해 왕궁을 찾아 총총히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마침 그때 왕은 궁중서기관에게 궁중역사를 기록한 궁중일기를 읽게 하고 듣고 있던 중에, 언젠가 자기를 모반한 역적이 있었는데 궁중 문지기 모르드개로 말미암아 살게 된 기록을 듣게 되었습니다. 왕은 심중에 모르드개에게 상을 베풀어주고 싶었는데, 마침 그 시간에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품신(稟申)하러 왕에게 나아온 하만이 도착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날 밤에 역사는 역전하여 이미 하만의 악한 계교에 의하여 죽음의 법이 선포된 유대인과 모르드개는 살고, 저들을 죽이려던 하만과 그 일족은 죽임을 당하였습니다(에 2~9장).
기독교회를 박해하러 가던 다메섹 도상의 박해자 사울의 걸음은, 결국 예수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러 가는 복음 전도자의 걸음으로 바꾸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행 9:1~22).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했던 예수님의 제자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 때문에 정배지 밧모섬으로 옮겨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정배지를 향한 걸음은 결국 반드시 속히 될 세계종말의 계시를 받으러 가던 영광의 걸음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사람의 걸음은 하나님이 작정하신 걸음이요 하나님의 섭리의 걸음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우연이 아니고 필연입니다.
Ⅱ. 사람의 걸음은 하나님을 믿고 가는 걸음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본문 잠언 16장 9절이 말하기를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잠언 20장 24절에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라고 하였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사람은 자기 걸음의 미래를 알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만이 사람 걸음의 미래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을 길을 모르는, 길을 잃은 양에 비하고 여호와는 자기의 길을 인도하는 목자에 비하면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라고 노래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걸음을 푸른 초장, 잔잔한 시냇가로 인도하신다고 하였습니다. 그 길은 영혼이 소생하는 길이요, 의의 길이라고 하였습니다(시 23:2~3). 그래서 다윗은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지 아니하였나이다」(시 17:5)라고 하였습니다. 「그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 걸음에 실족함이 없으리로다」(시 37:31)라고 하였습니다.
시편 40편 2절에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시편 44편 18절에는 「…우리 걸음도 주의 길을 떠나지 아니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욥은 욥기 14장 16절에서 「이제 주께서 나의 걸음을 세시오니…」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기를 「그가 내 길을 감찰하지 아니하시느냐 내 걸음을 다 세지 아니하시느냐」(욥 31:4)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사람의 걸음은 믿고 가야 되는 미로입니다. 저는 저의 생애 가운데 여러 극적인 변화들을 많이 겪은 사람입니다.
저는 1953년 1월에 입신(入信)하게 되고, 그해 4월 수난주간 수요일 밤 예배 중에 극적으로 주님의 방문을 받아 그분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저의 삶은 송두리째 변하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목사가 되어야 한다는 소명(召命)까지 받게 되었습니다(1954년 1월). 그리고 신학교를 졸업하게 되고(1964년), 경북 대구 서문로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1967년 11월 2일). 그 후 다시 부산제일영도교회로 이동하여 시무하게 되고(1969년 2월 11일), 고신대학과 대학원 강의를 겸하여 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부흥되어 예배당을 신축하게 되고, 목회사역과 가르치는 사역이 저에게 큰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항상 저의 마음에는
① ‘사람이(내가) 경남 창원에서 출생하여 진해에 살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에서 대학과 신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에서 목사사역을 하다가(1969년 11월 27일, 부산제일영도교회 위임목사) 세상을 떠나게 되는구나! 나의 활동 범위가 참 좁구나!’ 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② 그런 생각과 함께 ‘복음은 로마로…’ 하는 마음이 자주자주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넓은 곳인 서울로…?’ 하는 생각을 하곤 하였습니다. 복음운동의 넓은 무대(?)가 저를 자극하고 있었습니다.
③ 그러던 중 1972년 11월에, 부산 동광동 소재 남교회당에서 부산 도(都) 제직연합총회에서 제가 연합제직회 회장이 되었습니다. 이 일은 당시 39세였던 저에게 너무나도 충격적이었습니다. 보통 당시 연합제직회 회장은 6~70세에 가까운 원로 목사님들이 교회간의 친교와 화합의 상징으로 맡는 것이 상례였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결국 하나님께서 전도자로서의 제 걸음을 새로운 궤도로 진입시켜 주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날 총회를 끝내고, 저는 버스를 타지 않고 동광동에서 영도다리를 건너서 집에까지 오면서 “주님, 나는 내 인생을 3~40년이나 앞당길 수 없습니다. 나는 부산을 떠나야 되겠습니다.”라고 걸으면서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동기가 되고, 얼마 후에는 서울 마포 성원교회당에서 개최된 전국학생신앙운동(S.F.C.) 동기수양회(1973년 1월) 주강사로 서울에 왔던 것이 저의 서울행 걸음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현재도 있는 서울 마포 혜성맨션아파트의 숙소에서 서울 개척의 불이 타오르고 말았습니다. 그 후에 사단은 저 자신과 밖으로부터 저의 서울개척걸음에 많은 장애를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저는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시 31:15) 하는 확신을 가지고, 아무런 사전계획이나 보장이 없는 개척자의 걸음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1973년 4월 12일, 서울 도착(걸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저에게 완공된 부산제일영도교회당 신축 헌당을 앞에 두고, 오늘의 새로운 경향교회당 헌당을 위하여 저의 걸음을 결단하게 하였습니다. 시편 37편 5절에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 걸음을 이미 정해놓고 계시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시 37:23). 결코 그 믿음의 걸음에는 실족함이 없고(시 37:31), 성취함만이 있게 됩니다(잠 16:1, 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종종 저희 교회에 등록하는 새 신자들을 영접하고 기도하는 시간에 저들의 두 다리를 잠시 어루만지면서, “당신의 이 두 다리가 이제 그 본래의 창조적 기능을 발휘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두 다리를 만들어 걷게 하신 것은 하나님을 찾아 나와 예배하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이것이 그 본래의 목적입니다.”라고 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의 걸음은 하나님이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진행하고, 또 하늘에 이르도록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걸음을 인도하신다! 이 말은 모든 유의 무신론, 운명론, 허무론, 미신론, 자연신론, 불가지론을 배격하는 말씀입니다. 결코 인생과 인생의 걸음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란 말입니다. 맹목이 아닌 목적적이란 말입니다. 허무나 허실이나 허상이 아닌 실상이란 말입니다. 결코 무의미의 반복이 아닌 의미와 내용이 알찬 행동적 삶이란 뜻입니다. 사람의 걸음은 하나님의 작정된 섭리의 걸음이요, 그 걸음을 주신 하나님을 믿고 가는 걸음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결코 우연이 아닌 필연의 걸음입니다. - 아 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