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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권 추첨
꽃이라는 말*이 왔다
갈기도 없는 푸른 말을 타고 달리면
꽃이 입이고 입이 꽃인 어떤 말을 만날까
맥주를 마시는 이들과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
아는 얼굴과 모르는 얼굴이 섞여 있다
인연이 되고 안 되고는 별일이 아닌 어스름을
어둑하게 바꾸는 사람들, 그러므로 함께
주머니 속 별을 꺼내 상화나무** 가지 끝에 매단다
기타 소리 노랫소리를 뚫고 스미는 이 막막함은 무엇일까
관계를 맺은 사람들끼리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馬과 말言 사이
관계없는 먼 사람들의 말이 둥둥 떠다니는 밤
나 같으면 골든벨 울리겠다는 말
눈치는 또 빨라서 얼른 그 말을 주워든다
오늘의 행운 값을 지불한 셈이다
매천시장역 입구에서 달무리에 든 초승달과 마주쳤다
곧 봄비 드시겠다
* 유건상 조각가의 작품
** 상화 생가터 라일락뜨락 1956
다음 역은 사월입니다
사월을 생각합니다
단물 덜 빠진 껌을 꿀꺽 삼켜버린 아이처럼
치약은 삼켜버리고 맹물만 뱉어낸 표정으로
꿀꺽 삼켜도 될까요? 모서리가 많은 사월을
난간에 매달린 기억을 더듬어 추억을 건져내는 일은
토끼풀 속에서 토끼를 찾아내는 일보다 어려워요
봉급날이 다가오면 출석카드가 바닥으로 흩어지곤 했죠
백이십여 장의 타로카드로 점치는 사람처럼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그 시절엔 그랬어요
나갈 돈이 많다는 표현으로도 쓰였던 시절
그조차도 추억이 된다니 우습지만
예고 없이 올라오는 예초기 소리
추억은 깎아내지 말아요
하마터면 사레들릴 뻔했잖아요
평화는 아득한데, 오긴 오나요
불만이 불만으로 자라나지 않은 건 다행스러운 일
키 큰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딱 햇살 받은 만큼만 자랐어요
해가 뜨기 전 노을을
해가 다 저문 후 다시 쓰는 하늘의 이치를
사월에 다다를 즈음에 알았어요
사월 다음 내릴 역은 미정입니다
살구가 떨어져
하늘이 가벼워진 이유는
늙은 별을 내려놓듯 밤새
볼이 불콰한 살구 몇을 버렸기 때문
밤이 툭툭 터지는 바람에
놀란 쥐똥나무 꽃이 가득 뛰쳐나온 길을 걷다 보면
고향 집 뒤꼍으로 이어질 듯
참한 살구나무가
장독대 건반의 도, 레, 미를 손가락 끝으로 짚을 때마다
반음씩 굵어지던 살구
살구가 시큼 달콤 구르고 굴러 새끼들 입으로 들어가길 바라는
할머니의 채근은 아침으로 바뀌죠
바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렸어요
떨어져 애틋한 살구를 굽어보는 오월은 다정합니다
양손 가득 공손히
모셔온 살구는 할머니와 항렬이 같고요
시큰둥해지면 어디 에이드에 댈까요
잘 친 사기처럼 뺀질뺀질하게 최대한 말랑말랑하게
그러다 보면 몇 알의 달콤한 문장이 살구를 따라 발효되고요
바람 없이도 때가 되면 살구가
나뭇가지를 건너오듯이
나를 건너온 한 편의 시가
또 다른 나를 불러 다정하더라는 것, 요즘 알아가는 중이에요
그리하여, 숲이라 말하는
고물상들이 떠나간 후 그곳이 되었다
하늘은 유월 장마를 쉽게 내려놓지 않는다
가지를 옮겨 다니는 직박구리 목청이 경쾌해지자
특별한 바람이 등 뒤로 지나간다
오솔길이 넓은 길로 바뀌고부터
길은 심심하다는 말을 잊어버린 듯했고
길 가장자리에 나란히 신발을 벗어놓는 습관이 사람들에게 생겼다
맨발로 걷는 일이 의식 같고 고해성사 같다
나도 어떤 무게인가를 벗어 저들처럼 얌전히 놓고
그늘과 햇살을 골고루 밟으며 걷는다
쥐며느리가 죽은 쥐며느리를 흘깃 보며 지나가는 일
발에 닿은 성질대로 순하기도 까칠하기도 한
이런 기분들을 신 대신 신어보는 일
사람들이 오래된 표정을 벗은 것처럼 걷는다
넝쿨장미 향기와 까치 발자국과 줄지은 개미와 떨어져 밟힌 오디는
서로 수혈을 하는 중이다
함지산 기슭에서 건너온 검은등뻐꾸기 소리와
직선으로 꽂히는 햇살이 함께 흔들어보는 나뭇가지
줄사철 아래 메꽃은 며칠에 하나씩 연분홍 식구를 늘이고
어깨너머
멀지도, 아주
가깝지도 않은
등잔불처럼 구석에서 가물거리는 말
가만히 있어도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어깨
그 너머에 있는 약간의 다정함
또는 친절함
아이들 어깨너머로 컴퓨터를 익혔다
어깨너머, 물렁한 말들을 좋아해서
자주 물렁해졌다
불린 쌀을 꼭꼭 씹어 막냇동생 입에 넣어주던 할머니의 어깨너머를 배워 할머니의 손발톱을 깎아드렸다 딱딱해진 것들은 밖으로 자라는 것 같았다
돌부리를 차 시커멓던 발톱이 빠졌던 유년이 내 어깨너머일 수도 있고
아이들에게 하나씩 물어보며 워드를 익히던 일은 아이들 유년의 어깨너머일 것이다
되짚어가는 일이 더 많아
돌아보면 늘 거기에 서 있는 사람
어깨너머일 것이다
폭풍전야, 지금은
오늘의 어깨너머가 깨질 듯 고요하다
절룩
절룩절룩 책 부치고 오는 길
접질렸던 왼발에 무게가 더 실려요
시든 장미 옆으로 유모차가 지나가요
쌍둥이 중 한 아기가 손가락을 빨아요
나의 절룩과 아기의 손가락 사이엔 결핍이라는 말이 있어요
소공원 벤치에 노인 몇 나란히 앉아
폭염보다 더 뜨거운 고독을 뜯어내는 중이에요
고독은 삼각형, 꼭짓점은 무엇이든 끌어당겨요
어디선가 달려온 소낙비 한줄기 넘어지고
절룩이 모여 여름을 견디는 풍경이라고나 할까요
신호등이 초록으로 바뀌면
절룩을 감추고 하나도 안 아픈 사람처럼 걸어요
아직 꺼내놓을 용기가 내겐 없는 거죠
절룩을 앓기 전엔 누구의 절룩도 보이질 않았어요
나의 절룩을 내가 읽었을 때
비로소 우리의 절룩이라는 문장이 완성된다는 걸
수많은 절룩 속에서 깨닫는 오후예요
화단의 치자꽃이 마지막 향기를 토해요
잠시 절룩을 잊고 그 옆에 쪼그려 앉아요
비산동 그, 집
왼쪽 머리카락이 몽땅 잘린 딸아이가 돌아왔다
웃다가 들킨 낮달 혼자만 바깥에 세워두고
문고리도 없는 미닫이문을 닫고서
집주인도 아닌, 내가 서러워 괜한 말을 마구 쏟아냈다
화난 엄마가 처음인 듯
아이는 다섯 살처럼 울었고
울던 울음을 낚아채고 주인집 여자가 자기 딸을 두들겨 패는 소리가 들렸다
주인집 아이에게 미안해졌다
집에 있는 여자들은 아이를 돌보며 마늘을 까거나 알밤을 깎거나 우산을 꿰매거나, 가만히 놀지는 않았다
비산동이지만 가난했고 날개가 없었지만 자주 모여 밥을 비벼먹기도 했다
가끔은 없는 사람의 뒷말들이 귀신처럼 골목을 기웃거리기도 했지만
온 여름 혈서만 쓰다가 열매 하나 매달지 못한 석류나무가 작은 마당을 지키던 집, 연탄아궁이 하나에 찬장 하나가 전부였던 부엌, 연탄재를 들고 청소차를 따라가다 엎어졌는데 아픈 곳 하나 없는 기억, 마당 수돗가에서 비 맞으며 설거지와 빨래를 해도 손 시리지 않던, 지금은 희미해진 동네가 있었다
오래 문밖에 세워둔 낮달에게 이제 겨우 미안하기도 한
묵호
종일 따라오던 구름이 사라졌다
숨을 멈춘 듯 잠시의 고요
하루를 마감한 바다는 벌써 취기가 올라 있었고
붉어진 하늘만큼 허기가 졌다
흔해빠진 흥정의 재미도 없이
도다리 광어 호래기가 차례로 끌려 나와
바다 속 비밀은 한 음절도 발설하지 못한 채
잘리고 저며져 세절기 안으로 던져진다
애도는 짧게, 오롯이 지켜보는 이의 몫
망망대해를 꿈꾸었던 조각조각의 두근거림들
세상이 공평해지는 밤의 창가에 앉아
세상을 통과하지 못한 비명을 술잔에 채우고
물컹거리는 바다와 함께 삼킨다
고깃배가 부려놓은 항구의 시간이
멀리 빛처럼 물속에 갇힌다
블랑 또는 블루홀
이 이야기는 병 속에서 태어난다
누구는 폭죽처럼 터지는 게 좋다고 했고 나는 소리 없이 터지는 게 좋다고 했다
술을 비우고 난 뒤 술병이 꺼내놓은 푸르른 세계
아무 생각 없을 때의 텅 빈 머릿속 같거나 무릎을 꺾어야 속을 내보이는 드럼세탁기와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가끔 수평이 맞지 않을 때, 이 이야기는
너무 깊고 파란 소용돌이로 아찔해질 것이다
― 아직 너를 잘 모르겠어
―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보지만 바닥을 찾지 못하겠어
창가에 놓인 빈 병을 비문非文이라 읽어도, 비문碑文이라 읽어도 좋다 그 순간 터지는 탄산의 거품이 우리를 삼킨다 물고기를 좋아해 물고기처럼 뻐끔거리는 푸른색, 입에 머금은 말들이 취기를 품고 개구쟁이 아이들처럼 뛰쳐나온다
오래전 삼켜버린 뱀처럼 대가리를 세우고 솟구치는 기억은 독을 품었다
감기는 눈을 비비면 물속 가득 나는 나비 떼의 대범람
만월은 달이 훔쳐다 단 옛사랑의 표정, 구름과 어둠 사이를 흘러가고 달아나고 짓쳐들고 자정으로 지른 문턱을 넘어 한 세계가 허물어지고 다시 일어선다
사과를 받으려면 가방에서 사과를 꺼내야 하네, 누군가 말했고 우리는 대답 대신 술잔을 부딪힌다
키보드 첼로 드럼 연주에 맞춘 재즈풍의 노래이거나 오래된 팝을 들으며 마시는 블랑의 세계 오렌지와 시트러스향의 조화로움이 한 모금의 아이스와인처럼 입안을 날아다니는
감포종점
추령재를 지나면서부터야
포구에 닿으면
나머지 몸무게 절반이 또 사라지지
온 바다가 내 것인 양 풍선처럼 들떠 읍내를 통과해야 하네
감포종점은 그렇게 있지, 문득
막 고개를 돌리면 거의 지나쳤음을 아는 곳
밤이 깊어야 했지만 분명 한낮이었고
나도 모르게 마포 종점이 입술을 빠져나왔네
있을 리 만무한, 갈 곳 없는 밤 전차를 호출하는 사이
바쁜 자동차들은 녹슨 간판이 걸린 다방 거리를 지나쳐 가네
불행하게도 비는 내리지 않았고
오가는 사람들 눈에 담긴 무수한 기다림도 읽지 못했네
차들은 수평선 쪽으로 자꾸 달아나네
― 이다음 내가 지나가는 사람이 되면 궂은비 정도는 내려주겠지
포구 맞은편,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 구석진 자리 물 날린 비로드 의자 위에 쓸데없이 명랑해지는 엉덩이를 주저앉히고 퀴퀴한 냄새 따윈 모른 체하며 늙은 마담의 주름진 손으로 건네는 칡차나 마시면서 연락선 뱃고동 소리가 얼마나 서글픈지 들어보고 싶었네*
우연히 눈에 든 종점을 생각하면
첫사랑 하나쯤은 있어야 될 것만 같았네
어디서 나처럼 늙어가지 싶은,
*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 변용
혼자 울기 좋은 시간
와글와글, 추억을 꺼내도 되겠습니까
개구리처럼, 짝을 해도 되겠습니까 둥글게 둥글게
우기雨期가 맨발로 서성이는 새벽 세 시,
여전히 지구는 토란이 품은 잎처럼 생각을 밀어내는 시간입니다
날카로운 고양이 울음을 밀쳐내는 매미 소리
풀벌레 소리를 빈 병 던지는 소리가 지워버립니다
소리가 커지는 만큼 행복해져도 되겠습니까
도시에 살아야 사람의 무늬를 갖는다고 말하는 사람들
저마다 기대거나 비빌 언덕 하나쯤은 숨기고 있어야
숨 쉬기가 조금은 나을 듯 하다던가요
그런 언덕엔 가 닿을 수 없어요
새벽 문장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갈 때
개구리는 개구리 소리에 기대고
사람들은 사람들의 소리에 기대어 살고
담쟁이에 담장이 기대어 살아도 될 텐데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를 들으며 슬픈 시 하나 읽어도 되겠습니까
당신의 이데아를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 영화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의 OST <A Love idea>
여름 저녁
마른 화분에 물을 주다가
문득 내다본 바깥이
해거름일 때
엄마 손에 잡혀 들어가는 아이의 눈빛이
그네의 시간을 흔들 때
텅 빈 그네가 혼자가 아니란 걸 알았을 때
어디든 상관없이 해거름처럼 버는 괭이밥에 괜히 신경이 쓰일 때
태복산 쪽 하늘이 먼저 붉게 글썽인다
텔레비전은 마침맞게 경포대 저녁놀을 배경으로 깔고
오렌지색 셔츠를 입은 김창완을 내놓는다
기타를 치며 부르는 너의 의미
일흔이 다 된 나이에 참 대단해 작사 작곡 노래에 기타까지
그러던 참인데 윤도현이
나의 하루를 가만히 닫아주는 너
옷을 여민다
소낙비 같다
소만과 망종 사이
센트럴파크와 더 휴 사이
숲길
바닥이 가맣다
물러터진 기억과 숲길을 걸으면
고치를 팔아서 밀린 공납금을 내던 젖은 발자국이 찍힌다
직박구리가 발자국을 물어다
칠엽수 가지 끝에 올려놓는 것을 볼 땐 이슬비가 내린다
한입 가득 오디를 머금으면 몸으로 번지던 노린재 냄새
어느새, 흩어진 기억의 발치에 서 있는 여름
쥐똥나무와 넝쿨장미 사이에서
아주 먼 한 사람이 웅크리고 있는 것을 본다
한쪽으로 기울어진 세상에서
비스듬히 바칠 추억 하나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싶어
시간을 뭉개어 발자국으로 쓰고 있다
종달리 수국을 생각하는 밤
카페인에 덜미를 잡힌 잠이 잔금 투성이다
낄낄대며 날뛰는 초침들 방안을 휘젓는다
엎드렸던 적막이 뒤채다 흩어진다
가랑이 사이의 노묘老猫
색 바랜 분홍 코를 앞발로 감싸고
뒷다리를 한껏 잠 속으로 뻗고 있다
나는 누운 채 분침처럼 천천히
등을 쓰다듬고 이마에 입을 맞춘다
짚은 손보다 이마가 싸늘하다, 나는 흘러든다
괜히 손가락이 가려운
오늘 밤을 어디에 둬야 할까 나를 스쳐간 별의 이름은 무엇일까
허기졌던 시간들을 비켜가는 방법으로 네가 왔을까
이쯤이면, 꼬리가 꼬리를 무는 꼬리의 시간
그래도, 얼마나 다행이야
나름 살아 있음을 알리는 둥근 등과 긍정적인 고요와
자정의 모퉁이를 넘어와 반비례인 쓸쓸함
문득 나에게 다가왔던 말과
내게서 멀어져간 것들을 떠올리며
비바람 치던 종달리를 생각한다
노을 전시관*
박제된 노을
저기, 한 오백 년쯤 갇히고 싶었네
꽁꽁 싸매둔 시간을
팽팽한 수평에 풀어놓고 싶었네
이미 먼 곳의 사람을 생각하며 아득해져
저물지 않는 하루였으면 했네
그 밤엔 사랑하는 사람들과 별을 두고
천 년 꿈의 빛으로 박아놓았으면 했네
누구 하나 사라져도 표시 나지 않는
세상쯤은 잊어도 괜찮겠다는 생각 들었네
노을이라는 뜨거운 말을 생각하며
먼지처럼 안개처럼 흩어져도 좋을
칠산 앞바다는 온통 바람의 독백뿐이었네
* 전남 영광 백수해안도로에 위치한 전시관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금계국 떠난 옆자리에 핀 기생초 꽃 피운 걸 보면
가뭄의 실개천에서 하루만큼의 목숨을 연명하는 왜가리와 마주치면
모노레일 위를 옮겨 다니는 까치들을 보면
큰물 지나면 허물어질 걸 알면서도 정성껏 돌탑을 쌓는 이의 손길이 느껴지면
수레국화 피었다 진 자리에 다시 수레국화 철없이 피어난 걸 보면
시멘트 담벼락을 잡고 오르는 담쟁이넝쿨을 보면
걷다가 지칠 때 이마를 만지고 가는 몇 올의 바람을 생각하면
무엇에 쓰일까 싶어도 나비에게 무당벌레에게 꽃술을 내주는 꽃에 비하면
병아리는 자라서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가
병아리를 내려놓네요
종종걸음치다 병아리가 미끄러지면
쪼르르, 아이도 미끄러집니다
흰 비닐봉지 속 모이는 거실을 돌아다녀요
병아리를 지나 찍-찍- 물똥으로 바뀝니다
앵무새가 쓰던 빈집에 박스를 깔아줍니다
리모델링 같은 거랄까요
그러기를 며칠, 앵무새처럼 말을 합니다
겨드랑이에서 날개가 돋아납니다
아! 날개 있는 것을 새장에 가두다니
뒤늦은 후회를 화단이 받아줍니다
병아리는 병아리
앵무새가 될 꿈은 애초에 꾸지 말아야 했나요
화단은 모든 것을 가꾸나 봐요
병아리를 지나 햄스터를 빠져나와 기니피그로
이젠 열아홉 고양이와 열세 살의 강아지로 진화했어요
해국
날도 추워지는데
그 자리에 그냥 앉혀두고 왔습니다
입술 깨물던 모습 밟혀 아픈데
차마 손목 붙잡고 돌아오질 못했네요
파랑이니 격랑이니 하는 것들이 떠오르고
아득히 먼 돌밭길과 가시넝쿨 보여도
신발 한 짝 벗어 주질 못했습니다
해파랑길,
울컥이는 그녀 곁에 쪼그리고 앉아
눈시울 붉어진 얼굴만 종일 들여다보고 싶다는 말
호주머니에 구겨 넣고 돌아왔지요
때로는 출렁거림보다는 고요라는 말이
마음 구석구석 물살을 일으키기도 한다는데
나는 그 물살에 떠밀려 주춤거리기만 할 뿐입니다
눈을 감아도 수평선이 보이고
귀를 닫아도 바다의 노래가 들리는
당신의 나라가 늘 궁금할 것 같습니다
나비가 날아갔다
안개 잦은 구역이 붉은 얼룩으로 흥건했다
야옹, 둥근 울음까지만
그의 생이었을 것이다
두개골이 으스러지는
찰나를 목격한 길은 더 낮게 엎드렸다
채 몸을 쫓아가지 못한 감각들이
달리는 자동차를 뒤쫓다 돌아온다
밤의 붉던 페이지에 핼쑥해진 낮달
가을이 지나간 길을 지나는 중이다
야옹, 대신 울어도 되겠니
나비야
너는 이미 지나갔고
더 붉어진 붉나무를 밀치며 내가 지나간다
더 이상 슬퍼하지 않기로 했다
한 뼘 햇살의 조문이 있었고
젖은 날개를 간신히 편 나비 한 마리
달빛고속도로를 벗어나고 있었고
붉은 구름은 서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비명도 없이 저문 작은 생명을 위하여
오늘도 가속을 붙이는 흉기를 위하여
자, 우리 모두 박수
그래서, 내가 있습니다
물고기가 자라납니다
팔거천은 어제보다 오늘 더 자랐습니다
어린 새가 나뭇가지를 건너다니며 지저귈 때마다
꽃은 피고 세상은 더 환해집니다
한 뼘씩 그늘을 넓혀가는 칠엽수를 안은 햇살을 사랑합니다
건듯 건듯 어깨를 지나는 바람을 사랑합니다
오후 볕을 핥는 열여덟 살 고양이를 사랑합니다
사랑이 범람이면 팬데믹을 건널 수 있을까요
안에서 바깥을 내다보는 간절함처럼
별빛을 당겨오는 일도 오래도록 간절해서
늘, 우리를 꿈꿉니다
기다림이란 말에 이미 익숙하지만
꽃 울고 새 피면 다시 주저앉고 싶어져서
더 그래서, 뜨거워지는 가슴으로
낯선 길엔 내가 있기도 가끔은 사라지기도 합니다
돌담에 기대어 가물거리는 산 너울을 보면 눈물이 나서
이화우梨花雨 흩날리는 돌배나무 그늘이 하 좋아서
오늘도 어느 골목길 모퉁이에 나는 있습니다
첫댓글 수고많으십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
낭송하겠습니다^^
수고하십니다
제목/그래서,내가 있습니다-
김지선님 낭송 신청합니다!
수고 많으십니다
다음역은 사월입니다
신청하겠습니다
"행운권 추첨"
차남순님 신청합니다
"행운권 추첨"은 시민시낭송입니다
회원님들의 관심과 신청부탁드립니다
수고많습니다 여름 저녁 해보겠습니다
수고 많으십니다. <비산동 그, 집> 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