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P “전두환 재산 환수해야” 그의 감옥행은 반대한 까닭 (87)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관심
1988년 4월 26일 제13대 국회의원 총선 결과로 한국 정치는 새로운 판이 열렸다. 이른바 여소야대(與小野大), 4당 체제가 등장했다. 언론에선 1노3김(노태우·김대중·김영삼·김종필) 체제라 부르기도 했다. 집권당인 민정당은 과반의석(150석)에 크게 못 미치는 125석을 차지했다. 내가 이끈 신민주공화당은 국회 교섭단체 기준 의석(20석)을 크게 상회하는 35석을 얻었다.
1989년 12월 16일 새벽 1시 노태우 대통령이 야 3당 총재와 함께 밝은 표정으로 청와대 회담장을 나서고 있다. 전날 오후 6시에 시작해 7시간에 걸친 마라톤 회담에서 1노3김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국회 증언과 TV 중계 등 연내에 5공 청산을 마무리하기 위한 11개 항에 합의했다. 왼쪽부터 김대중 평화민주당 총재, 노 대통령,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87년 12월 대선에서 3등을 했던 김대중 총재의 평화민주당은 70석으로, 김영삼 총재의 통일민주당(59석)을 제치고 제1 야당으로 올라섰다. 정권교체의 실패로 자책과 침체에 빠졌던 야권의 분위기는 활기를 띠었다. 야 3당이 하기에 따라선 정국을 주도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졌다. 야대(野大) 상황이기에 전두환 5공 정권의 잘잘못을 가려내 청산할 수 있는 환경도 조성됐다.
하지만 김영삼(YS)·김대중(DJ) 양 김씨의 불신과 앙금은 깊었다. 두 사람은 만나서 악수를 하더라도 손을 꼭 쥐는 법이 없었다. 그냥 잡는 둥 마는 둥 손바닥을 살짝 갖다 대는 정도였다. 악수라는 게 꼭 쥐면서 스킨십을 해야 친밀감을 전달할 수 있는 것이지만 두 사람은 그러길 싫어했다. 가까이에서 보면 찬 기운이 느껴질 만큼 냉랭했다.
나는 싸울 땐 치열하게 싸우더라도 인간미 흐르는 정치를 하고 싶었다. 상대방은 나를 자극하는 경쟁자일 뿐 죽기 살기로 싸워 없애야 할 적은 아니다.
나는 그런 정치문화를 만들려고 나름대로 노력했다. 나는 제4당의 총재지만 정상의 자리에 대한 야망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과 접촉에 부담이 작았다.
물고기의 움직이는 방향은 꼬리지느러미가 잡아가는 법이다. 여소야대 4당 체제의 흐름은 의석수가 제일 적은 신민주공화당이 조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누구도 독주(獨走)할 수 없는 4당 체제에서 캐스팅보트를 행사했다. 당시 김재순 국회의장은 4당 구조를 ‘황금분할’이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