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주는 당신의 느낌을 듣는다. (웨인 W. 다이어, 에스더 힉스 지음/샨티출판)
우주는 당신이 하는 말을 듣지 않는다. 우주는 오직 '이것'만을 듣는다. 당신은 지금 현실에 맞서고 있는가? 무모한 짓이다. 벌어지는 현실에 맞서려고 더 이상 에너지를 쓰지 마라. 당신은 현실과 싸우려고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당신은 현실을 창조하기 위해 태어났다. 우리가 왜 지구에 와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수많은 동물 중에서 왜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되었을까?
스스로 값진 존재가 되고, 남들을 도와 고양시키고자 하는 우리의 욕망이 아직 실현되지 않았기에 끊임없는 삶과 죽음을 반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모든 일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까닭은 우리가 그것과 같은 주파수의 진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명은 그 고유 진동수와 같은 진동수를 가진 외력을 주기적으로 받을 때 진폭이 뚜렷하게 증가하는 현상을 말한다.
그러니까 그 진동수와 같지 않으면 절대 공명할 수 없고 진폭 또한 증가하지 못한다. 공명하지 않으면 그것은 나와 연결되지 않는다. 진동 주파수는 우리가 하는 생각과 느끼는 감정에 의해 바뀐다. 당신은 어떤 진동 원반 위에 서 있는가? 오늘은 책 [우주는 당신의 느낌을 듣는다. (웨인 W. 다이어, 에스더 힉스/샨티)]의 내용 중에서 일부를 소개한다.
우리를 물질의 언어로 규명해 보려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그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가 생각이라는 것을 하면 물질 세계인 현실에서 그에 맞는 물질 언어를 찾아내는 것이다. 몸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근원 에너지]의 연장이다. 우리는 순수하고 긍정적인 에너지이다. 우리 자신이 바로 [근원 에너지]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매일 같이 이런저런 경험을 하면서 우리가 [참 자아]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진동 주파수를 만난다. 성질 더러운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으면 우리 역시 그 진동 원반 위에 서 있게 된다. 그들이 당신 주변에 있다는 이유는, 당신이 바로 그들의 완벽한 [진동 파트너]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헐뜯는 사람 주변에는 항상 그런 사람들이 모인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그 사실을 의식적으로 알 수 있느냐는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그 속에서 살고 있지는 않은가? 당신이 진동하면서 돌아가는 원반들 위에 의식적으로 자기를 세워 둘 수 있을 때, 당신은 자신한테나 다른 사람들한테 왜 이런저런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우리 모두는 가슴에 품고 있는 욕망이 있다. 그 욕망이라는 원동력에 부응하는 진동을 만들어낸다.
모든 생각은 진동한다. 끌어당김의 법칙은 모든 생각에 반응한다. 그래서 생각이 갈수록 점점 커지는 것이다. 이 때문에 당신 스스로에게 꼭 물어야 할 것이 있다. "이 생각은 내가 키우고 싶은 생각인가?" 의도치 않게 좋지 않은 생각을 키우고 있다면, 당신은 의식적으로 그것을 알아차리고 생각의 전환을 빠르게 가져오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당신이 어떤 생각에 집중하면 할수록 그 생각의 크기는 커진다. 그 만큼 진동의 세기도 강해진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그 진동과 공명되는 현실을 끌어오게 된다. 자신과 짝이 될 수 없는 진동을 갖고 있으면 절대 함께 할 수 없다. 만약 마음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좋지 못한 생각이 자꾸 떠오른다면 최선을 다해서 그것을 객관화 시키고 일반화 시켜야 한다.
어떤 느낌이 진실인지는 오직 당신만이 알 수 있다. 당신의 가슴으로 그 진실을 느낄 때 당신은 알아차리게 된다. 당신이 진심으로 무엇을 원하고 있는 것인지를 스스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몸이라는 물질의 옷을 입기 전에 모두 다 [의식]이었다. 이 시공간 현실을 나누어 쓸 다른 모든 놀랍고 다양한 물질적 존재들과 함께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출해 낼 수 있으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당신은 그 의식의 일부를 물질의 몸으로 투사하고자 열망했다. 우리가 물질의 몸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욕망을 실현하고자 했던 우리의 열망이 있었다는 말이다. 우리가 계속해서 욕망을 표출해 내는 것, 스스로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들을 발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삶의 연속이다. 창조의 과정에는 3단계가 있다. 첫 번째는 [요청]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 진동하는 요청들을 [근원이 받아들여] 곧장 그것들에 진동하는 [짝이 되어줄 때] 일어난다. 세 번째는 [허용]이다. 이것은 우리가 같은 진동으로 정렬되는 길을 발견한다. 우리가 요청한 것과 근원이 이미 응답해 준 것 사이의 진동 간격을 좁힐 수 있을 때, 그래서 그 순간 우리의 진동이 우리가 요청한 것과 같은 진동 위치에 있을 때, 우리는 영감을 받게 된다.
그때야 비로소 우리가 요청해 온 것들을 구체적으로 실현해 내기 시작한다. 우리 자신에게 [오는 모든 것]이 우리 요청 신호에 대한 [응답]이란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생각조차 못하고 있다. 우리의 감정은 우리가 가진 욕망과 그 일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신념들 사이에서 진동수가 어떠한 지를 명확히 보여주는 지시계이다. 우리에게는 감정 안내 시스템이 있다. 그 감정이 어떠한지에 따라 진동의 불일치와 일치를 알 수 있다.
우리 모두에게는 끌어당김의 포인트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컨트롤 할 수 있다. 저항이 일어나지 않는 감정, 그것이 진동의 세기를 높여 준다. 그 진동의 세기를 높여 주는 것이 끌어당김의 포인트이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게 잘 살기를 원하면서 그와 대비가 되는 생각을 같이 한다. '여기서 돈을 더 잃으면 어쩌지', 이러다 외롭게 늙어가면 어쩌지', 인간의 생각은 계속해서 더 상위의 생각을 끌고 온다.
아주 작은 성냥불을 큰 산불로 만든다는 얘기다. 아무런 저항 없이 그 불안한 생각을 계속하고 있다면 산불에 기름을 붓고 있는 것이다. 그 산불을 의식적으로 끄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감정을 컨트롤 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감정과 생각을 조절해서 큰 산불도 아주 작은 성냔불로 만들 수 있다. 주파수는 늘 거기에 있다. 당신은 언제든지 느낌의 조절을 통해 원하는 주파수에 맞출 수 있다.
당신이 그 주파수를 알아차리려면 높이 올라가야 한다. 그래야 그것과 속도를 맞출 수 있다. 당신이 그렇게 할 때, 당신이 말하는 그 명료함이, 그 깨달음이 당신한테서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우주는 당신이 하는 생각에서 느낀 그 느낌을 계속해서 듣고 있다. 이 세상의 모든 현실은 느낌의 결과물이다. 우주에는 [나중이 없다]. 언제나 [지금], 지금, 지금 뿐이다. 당신은 지금 정렬해야 한다.
우주와 당신을 정렬할 시간은 오직 지금 뿐이다. 막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 때가 순수하고 긍정적인 에너지에 정렬될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한다. 매일 아침, 우주와 당신을 정렬한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그 느낌 속에 머문다. 그 느낌이 진실이라는 것은 오직 당신만이 알 수 있다. 당신이 원하던 [그 느낌의 앎] 속에서 하루를 살아보라. 그 느낌이 현실 세계에서 공명하여 물질로 나타나는 것은 시간 문제다.
기쁨에 넘쳐 두근거리는 느낌은 바로 그 순간 당신이 경험하는 것에 최대한 열중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당신이 당신 자신을 신뢰할 때, 당신은 자신을 창조한 지혜를 신뢰하고 있는 것이다. 꼭 기억하라. 그 느낌의 진실됨을 스스로 알 수 있다면, 우주는 당신의 느낌을 정확히 듣는다. 그리고 그대로 당신 눈 앞에 오차없이 그 현실을 보여줄 것이다. 바로 지금 자신의 느낌에 귀 기울여라. 그것이 곧 현실이 된다.
당신은 지금 당신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어떻게 인지하고 있는가? 정말로 세상이 존재하긴 하는 것인가? 내가 바라보고 있는 이 세상의 본질은 무엇인가? 인생이란 본질은 대체 무엇인가?
아인슈타인이 이런 말을 했다. "신은 정말로 주사위 놀이를 하는가?" 아인슈타인의 이 말은 자연의 법칙이 정말 결정론적이지 않은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는 인과 관계의 법칙이 있다. 어떤 씨앗을 심으면 그 씨에 맞는 열매가 달린다.
씨앗이 처음부터 불량 씨앗이라면 당연히 튼실한 열매는 맺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정말 양질의 씨가 모든 튼실한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 우리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날씨나 토양의 질, 거름 등 수많은 변수에 의해 결과 값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양자역학은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한다"에 무게를 두고 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은 예측 불가능한 세상이라는 것이다.
[확률로서 존재]하지만 '결과는 확정적이지 않다'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양자역학은 파동과 입자에 대해 다룬다. 우리가 전자를 입자로 관찰하기 전까지 그 전자는 입자가 아닌 파동으로써 존재한다. 우리가 무언가를 관찰하려면 그것이 놓인 위치와 시점이 필요하다. 하지만 닐수 보어는 전자가 파동으로써 존재할 때는 특정 위치에 존재할 수 없다고 했다.
우리가 볼 수 없는 파동으로 존재하는 전자를 과연 없다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야 하는 것일까? 양자역학이 뭘 말하든 그것이 우리 인생이랑 무슨 상관인지 의문점이 드는가? 듣다 보면 깨닫는 것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