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평역은 비어있다
송 용 식
겨울 남평역은 을씨년스럽게 비어있다. 떠나는 사람도 돌아오는 사람도 없다. 처음 남평역을 만난 것은 3년 전이었다. 나주 금천이 고향이지만 남평과 인연을 맺었던 어느 봄날, 근처의 볼거리를 찾아다니다 만난 곳이 남평역이었다. 드들강을 건너 화순 쪽 지방도로를 2Km쯤 가다 보니 왼쪽에 ‘남평역 입구’라는 안내판이 서 있었다. 비어있는 집처럼 그저 쓸쓸하게 낡아가는 모습일 거라는 생각은 기우였다. 늘 사람을 기다리는 마음처럼 아늑하고 따뜻했다. 비록 열차가 멈추지 않는 폐역이 되었지만 자그마한 광장을 100년 된 벚나무가 지키고 있고 역사 뒤편 승차장으로 오르는 주변에는 아름다운 비밀의 정원이 숨겨져 있었다. 호랑가시나무 열매가 유난히 붉었다. 역사(驛舍)는 한 장의 사진처럼 예뻤다. 첫 느낌이 그대로 남아 안부 묻듯이 가끔 찾아가곤 한다.
내가 오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열차의 무거운 굉음이 역사를 덮치듯이 달려와 순간적으로 빠져나간다. 11시 48분. 효천역을 출발해 화순역으로 향하는 무궁화 열차다. 너에게는 이제 관심을 버렸다는 듯이 그냥 지나쳐버리는 열차의 뒷모습. 이곳이 무정차 역이라는 것을 실감한다. 사람의 마음도 한 번 떠나면 저리 냉정해질까 봐 두려워진다. 표정 없이 앉아있는 역사에게 말동무라도 해주고 싶다.
남평역은 1930년 12월 간이역으로 출발하여 1948년엔 보통 역으로 승격했으나 1950년 2월 여순반란사건 때 불에 타버리는 수난을 겪었다. 그러나 휴전 후인 1956년 7월 지금의 역사를 새로 짓고 광주 화순 순천 등을 잇는 교통의 중요 역이 되었다. 역무실 돌출 부분의 지붕이 맞배지붕이 아닌 모임지붕인 점이 특징으로 박공지붕과 기다란 차양 등 역사의 원형이 잘 보존되어 2006년 12월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299호로 지정되었다. 2011년 10월 5일 여객 취급이 중지된 후 레일바이크 시설을 설치하여 역의 기능을 살려 보려 했으나 결국 2014년 문을 닫고 말았다. 신자본주의는 효용 가치가 떨어지면 버리고 인문학적 무형의 가치에는 너그럽지 못한 시스템인가 보다. 늙은 벚나무 앞 안내 간판에는 빛바랜 남평역의 이력이 빼꼼히 적혀있다.
가을 남평역은 바람기 많은 남성도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여인 같다. 이러저러하여 멀리 떠나보낸 사람을 기다리는 여인. 무심한 듯 도도함이 지난 사연을 더욱 궁금하게 한다. 그래서 더없이 아름답고 처연하게 느껴진다. 기다림으로 봄을 가꾸고 여름을 견뎌냈을 터다. 가슴은 울지만, 표정은 웃으면서 가을을 보냈을 터다. 또 운명처럼 겨울이 왔을 테고….
노거수 앞에 서면 ‘견딤’이라는 낱말이 떠오른다. 무엇을 위한 견딤일까. 겨울을 견뎌야 봄이 오고 고난을 견뎌야 기회도 오는 것인데 폐역이 된 역사는 무엇을 위해 견디는 중일까. 마당에서는 근처 농부의 가을 고추가 더욱 붉어지고 벤치에 쉬고 있는 라이딩족을 보기도 한다.
가까이에는 폐교가 된 남평초등학교 광천분교가 있다. 잡초만 무성하다. 전국에서 아름다운 간이역 중 하나로 알려졌던 남평역과 폐교가 된 광천분교를 묶어 새로운 공간으로 만들어낼 수는 없을까.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그곳만의 공간. 아직도 온기를 놓지 않는 폐역의 견딤에는 그 탄생 예감도 한몫하고 있는 것 같다. 공간은 사람이 만들어내지만 만들어진 공간은 사람을 움직이게 할 것이다. 생각을 모으면 길이 보이지 않겠는가.
문이 잠긴 대합실 내부는 연통 없이 덩그러니 앉아있는 톱밥 난로와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 시화(詩畵)가 빛이 바랜 채 힘겹게 걸려있다. 그리움의 난로에 던져 주고 싶은 것은 한 줌의 눈물만이 아니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 눈이 쌓이고 /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
그믐처럼 몇은 졸고 /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中略)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겨울, 비어있는 역사에 송이 눈이 내렸으면 좋겠다. 톱밥 난로에 불이 지펴지고 연통에 하얀 연기가 피워 오르는 모습을 보고 싶다.
첫댓글 본 적 없는 남평역과 드들강이 선생님 글로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