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요엘 3:14~21
제목: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복을 주시다
●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복을 주신다고 믿는 신앙입니다.
신28:2.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3.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4.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5.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6.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
혹시 신비주의와 이단에게 상처받은 분들이 예민해져서 복을 받는 신앙의 개념을 기복주의로 의심한다고 할지라도 성경은 도처에서 여러 번 성도들이 복을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이단과 신비주의는 비성경적이고 현세에서 육체에 받는 복만을 강조하고 그 강조마저도 거짓과 사기로 하는 것이라서 사악한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복은 현세의 것을 포함, 더 초월하여 거룩하고 숭고한 복입니다. 아래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을 보면 그렇습니다.
마5:3.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7.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
신명기 28장의 복과 마태복음 5장의 복은 전혀 다르고 분리되는 것이기만 할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개혁주의 조직신학자 벌코프가 말한 명언처럼, 특별계시는 역사적이며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성격을 띱니다. 구원과 속죄의 위대한 진리들이 처음에는 희미하게 드러나지만 점진적으로 선명해지며 결국에는 신약성경의 계시 안에서 장엄하게 드러납니다. 신명기 28장이 말씀한 복은 마태복음 5장에 이르러서는 빛나는 진리의 복이 되는 것입니다. 신명기 28장이 유치원생이라면 마태복음 5장은 대학원생의 차원입니다. 유치원생이 받고 싶은 복이 짜장면과 햄버거를 많이 먹고 싶은 정도라면 대학원생이 받고 싶은 복은 박사 학위를 받고 진리의 상아탑에서 교수 노릇을 하고 싶어 하는 수준과 차원이 높은 복입니다. 그런데 짜장면이든 박사 학위이든 당시의 당사자에게는 복으로 여겨지고 꼭 받고 싶은 것입니다. 복은 죄의 반대 상태인데,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기 전의 상태가 복을 받은 상태였습니다. 원죄를 저지르기 전에 복을 받는 일이 먼저 있었습니다.
창1:26.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
혹시라도 창세기 1장과 2장의 사람이 다른 사람이고 아담 이전에도 사람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이단적 주장인 이중아담론은 베뢰아와 이단들이 주장하는 요설(妖說)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모든 인류의 조상이며 신명기 28장에 나오는 것보다도 더 어마뜩 하게 크나큰 축복을 받았었습니다. 자식과 기르는 가축이 잘 되고 먹을 것이 풍부한 그런 스케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유지하며 지구 정도를 다스리는 정도의 어마무시 한 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원죄를 자행함으로 말미암아 죄인이 되고 복 대신 저주와 형벌을 받아서 고난과 고생의 나날이 시작되었습니다.
● 오늘의 본문인 요엘3:14~21절의 제목은 개역개정 기준으로 ‘여호와께서 백성들에게 복을 주시다’입니다. 본문 한 문단을 보면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복을 주시고, 성도가 아닌 자들에게는 심판을 하신다는 내용입니다.
욜3:14 사람이 많음이여, 심판의 골짜기에 사람이 많음이여, 심판의 골짜기에 여호와의 날이 가까움이로다 |
사람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심판받을 대상이 너무 많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심판의 골짜기는 마지막에 온 것처럼 심판의 시행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요. 칼빈에 의하면 심판이란 단어는 예리한 타작기를 가리키기도 하기 때문에(암1:3; 사41:15) ‘타작 골짜기’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욜3:16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부르짖고 예루살렘에서 목소리를 내시리니 하늘과 땅이 진동하리로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의 피난처, 이스라엘 자손의 산성이 되시리로다 |
하나님은 성도가 아닌 자들에게는 심판을 하시지만 성도들에게는 피난처와 산성이 되십니다. 성도에게 하나님이 피난처가 되시고 산성이 되어 주시는 것은 심판 때에 성도들이 받을 복입니다. 피난처는 소망이라는 뜻도 있습니다(KJV). 시온이나 예루살렘은 궁극적으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거룩하고 영화로운 나라를 상징합니다. 여호와의 날이 올 때 심판의 대상에게는 경악할 만한 징벌이 가해지겠지만, 하나님의 성도들에게는 안전과 완전한 평강이 이루어지는 복이 임합니다. 이처럼 종말 심판의 날에는 이중성이 있습니다.
욜3:18 그 날에 산들이 단 포도주를 떨어뜨릴 것이며 작은 산들이 젖을 흘릴 것이며 유다 모든 시내가 물을 흘릴 것이며 여호와의 성전에서 샘이 흘러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 대리라 |
복을 받은 자, 즉 구원받을 자와 심판 받을 자의 모습은 극명하게 대조되는데요. 욜3:18은 복을 받은 성도들이 얻는 은혜를 문학적인 시(詩)처럼 묘사한 것입니다. ‘싯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아카시아나무를 의미한다고 하는데요. 아카시아 나무 정도나 자랄 수 있는 척박한 땅이 비옥한 땅으로 변화된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모든 땅이 비옥하게 될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과 은혜의 풍요로움을 그렇게 묘사한 것입니다.
욜3:19 그러나 애굽은 황무지가 되겠고 에돔은 황무한 들이 되리니 이는 그들이 유다 자손에게 포악을 행하여 무죄한 피를 그 땅에서 흘렸음이니라 |
애굽이나 에돔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고 죽인 이방인이나 교회의 성도들을 박해하고 죽인 악한 세력들입니다. 여호와의 날에 그들은 멸망하고 소멸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원수이며 또한 무죄한 성도들의 원수입니다.
욜3:20 유다는 영원히 있겠고 예루살렘은 대대로 있으리라 |
여기서 유다와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하는데요. 이 나라를 보고, 신약교회의 성도들은 주기도문 마지막 부분을 연상하시면 좋겠습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6:13).
욜3:21 내가 전에는 그들의 피 흘림 당한 것을 갚아 주지 아니하였거니와 이제는 갚아 주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온에 거하심이니라 |
위 말씀은 칼빈의 조언을 들으면 해석이 편합니다(수많은 죄로 인하여 파멸에 빠진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이다). 성도가 세상과 악에게 고난 받고 공격을 당해 피 흘린 이유는 죄를 짓고 죄에 예속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죄를 지은 자들 중에 자기 백성들을 선택하여 구원하시는 왕의 이름이 ‘예수’입니다(마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최고의 복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신 예수를 우리에게 주신 겁니다. 이 최고의 복을 믿고 찬양하며 감사를 드립시다.
첫댓글 욜3:16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부르짖고 예루살렘에서 목소리를 내시리니 하늘과 땅이 진동하리로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의 피난처, 이스라엘 자손의 산성이 되시리로다 ---> 피난처는 소망이라는 뜻도 있습니다(KJV).
... but the LORD will be ///the hope/// of his people, and the strength of the children of Israel.
피난처가 소망이고, 하나님이 그런 분이시라는 것이 너무나 감사합니다.
@노베 아멘!
초신자나 시간이 없는 분들은 위 묵상 본문만 읽어도 충분합니다. 더 다양하고 깊은 이해를 위해서 주석 등을 첨부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GODpia 성경사전: 아가페출판사>, 피난처
위험이나 고통으로부터 피난이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곳. "피난"으로 번역될 수 있는 히브리어들의 주된 개념은 안전이다. 이러한 용어들은 구약에서 비(욥24: 8), 바람(사32: 2), 적의 군대(14: 32;나3:11 )로부터 보호를 구하는 자들을 위한 육체적인 피난처에 적용되었다. 강한 지도자나 동맹자는 '피난처'(삿 9: 15;.사30: 2), '거짓된 피난처'(사28: 15)로 상징적으로 불리워 질 수 있었다. 하나님은 여러 번(예. 시 7:1 ;46: 1;59: 16;94: 22;렘 16: 19) 그의 백성들의 '피난처'로 묘사되어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를 피난처로 삼는 것은 분명한 위험이 있을 때였다. 이 위험은 자주 대적들(예. 시 17: 7;37: 40), 또한 가난한 자가 당하는 압제(시 14: 6;사25: 4;참조.룻 2: 12)로 묘사되어 있다. 부나 권력 등 하나님 이상으로 다른 어떤 것에서 피난처를 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시 52:7) . (→도피성 )
하나님만이 유일하고 진정한 나의 피난처라고 고백합니다. 아멘!
@노베 아멘!
<매튜 헨리 주석>, 심판과 자비(요엘 3:18-21)
이 예언의 종결 부분을 형성하고 있는 약속들은 은혜의 나라에서 부분적인 성취를 보게 된다. 그 나라에 속한 모든 신실한 백성은 위로와 은혜를 얻는다. 그러나 이것은 영광의 나라에서 완전히 성취하게 된다. 왜냐하면 유대 교회에 대해서는 여기의 약속에 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이 평강과 번영으로 축복받은 사례가 있다는 것을 알지만 여기에 나온 약속과 일치하는 것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들 약속은 과장법에 의한 표현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즉 이들은 우리를 위하여 예비된 좋은 것의 예표에 불과하며 그것은 가장 좋은 상태에 있더라도 우리가 아니면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신 것이다(히 11:40).
Ⅰ. 교회의 대적들은 정복되고 전복되리라는 것이 약속되고 있다(19절). 이스라엘의 오랜 원수인 애굽과 이스라엘에게 묵은 원한과 적의를 품은 에돔은 에서의 자손들이었다. 이들은 황무지가 될 것이며 황무한 들이 되어 더 이상 사람의 거주지가 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저주하신 백성이 되었다. 바로 이두메아인들이 그러했다(사 34:5; 겔 35:15).
한 나라의 재력도 견고한 국력도 하나님의 심판을 막진 못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들 강대국들과 다투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유다 자손에게 행한 그들의 강포와 가해 행위 때문이다(겔 25:3, 8, 12, 15; 26:2 참조). 그들은 도피하기 위해 자기들에게로 도망친 유대인이나 그들의 나라를 통과하여 도피하던 유대인의 무죄한 피를 흘렸던 것이다. 하나님 백성의 무죄한 피는 하나님께서 매우 귀중하게 여기시며 한 방울의 무죄한 피를 흘려도 반드시 계산을 받게 되리라는 것에 주목하자. 마지막 날에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대한 강포로 가득 찬 이 땅은 황무지가 될 것이며 그 때에는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타서 없어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을 압제하고 핍박하는 자들은 조만간 파멸을 당할 것이며 티끌 속에 딩굴게 될 것이다. 아니, 그들은 결국 파멸을 당하며 불꽃 속에서 딩굴게 될 것이다.
Ⅱ. 교회는 매우 행복해지리라는 것이 약속되고 있다. 교회는 전투하는 상태에서도 신령한 특권을 누린다는 점에서 참으로 행복하다. 하물며 승리하는 상태의 교회가 될 때에랴! 여기서 약속되고 있는 것은 세 가지다.
1. 순결. 이것은 나머지 두 가지에 대한 이유로서 맨 나중에 나온다(21절). "내가 전에는 그들의 피흘림 당한 것을 정결케 해 주지 않았거니와 이제는 정결케 해 주리라" (흠정역).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나머지 두 가지의 기초와 근거로 해석하여 맨 먼저 참작할 수 있다. 즉 그들은 극악한 유혈의 죄를 범했다. 특히 무죄한 피를 흘렸다. 그들은 그 죄로 인해 오욕과 죄악을 얻었으며 그 죄는 그들을 하나님과의 교제에 부적합한 자로 만들었고 그의 거룩함에 오명을 남기게 했으며 그의 공의에 유해한 자로 만들었다. 하나님께서는 열린 샘에서 그들을 이 죄로부터 씻기실 것이다(슥 13:1). 의식법의 희생 제사와 정결로도 씻기지 않던 이 죄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정결케 될 것이다. 또는 우리가 만일 이것을 장래의 행복에 적용한다면 이것은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규례나 섭리로 깨끗이 씻김을 받을 수 없던 모든 부패로부터 정결케 되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거기서는 그들에게 극히 작은 죄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그들이 날마다 씻을지라도 깨끗이 씻기지 않는 것이 여전히 남는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그 나머지 것도 정결케 될 것이다.
그 이유는 여호와께서 시온에 거하시며 자기 교회와 함께 거하시기 때문이다. 여호와는 천국에서 자기 교회와 함께 더욱 더 영광스럽게 거하시며 그의 거룩하심은 그 집에 합당하여 영원하다(시 93:5). 이 때문에 그가 거하시는 곳에는 완전한 거룩함이 있어야 하며 또 있을 것이다. 교회의 순화와 개혁은 완만하게 진행되는 작업이며 정결케 되지 않았다고 불평할 만한 것이 상존해 있지만 잘못된 모든 것이 교정되고 교회는 아주 정결하게 되어 홈도 점도 없게 될 날이 오고 있다는 데 주목하자. 그리고 우리는 그 날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2. 풍족(18절). 이것이 먼저 나오는 이유는 이것이 앞 장에 경고된 심판의 정반대인 까닭에서이다.
(1) 이 풍요의 시냇물이 그 땅을 흐르며 부요하게 한다. "그 날에 산들이 단 포도주를 떨어뜨릴 것이며 작은 산들이 젖을 흘릴 것이다." 그들은 젖먹이와 용사에게 다 알맞은 양식을 매우 풍족하게 얻을 것이다. 이것은 포도원이 풍부하고 매우 비옥하며 초장에는 소떼가 충만하여 우유로 가득 채우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경작지를 비옥하게 하기 위해 유다의 모든 시내가 물을 흘릴 것이어서 국토는 에덴 동산같이 어디에나 물의 공급이
어디에나 물의 공급이 풍부하고 부요하게 될 것이다(시 65:9). 그러나 이것은 영적인 의미를 갖는 것 같다. 새 언약의 위로와 은혜는 포도주와 젖에 비유되며(사 55:1), 성령은 생수의 강에 비유된다(요 7:38). 그리고 이런 은사들은 구약 교회보다 신약 교회에서 훨씬 더 풍성하다.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충만한 데서 은혜를 받으며 영원한 위로로 부유하게 되고 믿음 안에서 희락과 평강으로 가득차게 될 때는 산들이 단 포도주를 떨어뜨리며 작은 산들이 젖을 흘린다고 할 수 있다. "사랑하는 자여, 풍족히 마시라." 성령의 은혜가 풍성히 흘러나올 때는 유다 모든 시내가 물을 흘리고 우리 하나님의 도성뿐만 아니라 온 땅을 기쁘게 한다(시 46:4).
(2) 이 풍족의 샘은 하나님의 집에 있다. 그 시내는 에스겔서 성소의 물들처럼(겔 47:1) 그 집 문지방 밑에서 흘러나오며 생명의 강이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에서 흘러나온다(계 22:1). 시편 기자는 시온에 대해 말하기를 "나의 모든 근원이 주께 있나이다" (시 7:7)라고 18절 전반부를 현세적 축복으로 해석하는 자들도 여호와의 전에서 흘러나오는 이 샘만큼은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더 필요로 하게 된다.
이는 우리가 그 축복을 남용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이 샘은 곧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의 공로와 은혜는 우리를 깨끗이 씻기시며 우리에게 원기와 새 힘을 주시며 우리로 결실을 많이 맺게 한다. 이 샘은 싯딤 골짜기에 급수를 한다고 한다. 싯딤 골짜기는 예루살렘에서 매우 멀리 떨어져 있고 요단강 왼편에 있었다. 그곳은 건조한 볼모지였다. 이것은 그리스도께로부터 흘러나오는 복음의 은혜가 멀리 이방 세계에까지 미치며 극히 먼 지방에도 찾아가 오랫동안 황무지처럼 놓여 있던 자들로 하여금 의의 열매를 풍성히 맺게 하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이 은혜는 넘치게 흐르며 사시사철 끊이지 않고 흐르는 샘이어서 우리는 거기서 부단히 끌어 쓸 수 있고 그 샘이 고갈될까봐 염려할 필요가 없다. 이 샘은 여호와의 전에서 흘러나온다. 왜냐하면 약속된 은혜와 위로에 동참하려는 자들은 부지런히 그리고 끊임없이 신앙의 규례에 참여해야 하는 때문이다. 그리고 위에 있는 여호와의 전에서, 천국에 있는 그의 성전에서는 우리가 여기서 날마다 맛보고 있는 온갖 선한 것이 흘러나온다. 우리는 그 시냇물의 발원지에서 곧 마시게 되기를 소망하며 영원히 마시기를 희망한다.
3. 영속성. 이것은 여타 모든 약속을 능가하는 가장 빼어난 약속이다(20절). 유다는 영원히 있을 것이다. 애굽과 에돔이 황무지가 될 때에도 유다는 영원히 거하게 될 것이며, 예루살렘은 대대로 존속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귀중한 약속을 나타낸다.
(1)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 세상에서 시간의 종말까지 존속할 것이다.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의 한 세대가 사라지면 또 다른 세대가 나타날 것이며 그들에게서 그리스도의 보좌는 영원히 머물러 있을 것이고 음부의 권세가 결코 그들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2) 그 교회의 모든 산 지체들은(유다와 예루살렘은 지명이 아니라 그 거민을 나타낸다. 마 3:5), 영원무궁토록 그들의 행복이 확립될 것이다. 이 새 예루살렘은 대대로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도성은 사람의 손으로 기초를 짓지 않고 그 기초를 영원한 천국에 둔 도성이기 때문이다.
@장코뱅 수준 높고 풍성한 해설이네요. 잘 참고하겠습니다.
<비전성경>, 요엘
이름의 뜻: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
주소: 알려져 있지 않음
직업: 선지자
가족관계: 아버지 - 브두엘(욜1:1), 다른가족 - 알려져 있지 않음
약력 : 소선지서의 두 번째 책인 요엘서를 기록한 선지자이다. 브두엘의 아들로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이름의 뜻을 가졌다(욜1:1). 브두엘이 ‘하나님의 설득자', 또는 ’하나님의 성실성'을 뜻하는 것으로 보아 그의 가문이 경건한 가정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브두엘은 제사장이었을 것이다.
요엘은 다른 구약 선지서들과 마찬가지로 오직 회개만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는 것이라고 여겼다(욜 2:12-14). 요엘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당장 지금" 그리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욜 2:12)고 외치면서 "그때에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실 것이라"(욜 2:18)고 선언하였다.
본인과 아버지의 이름에 이미 하나님을 경외하는 뉘앙스가 강하게 풍기네요.
@노베 공감합니다.
<IVP 성경주석>
요엘3:18-21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축복
이 보충적인 축복의 신탁은 전형적인 도입문구 '그 날에'로 시작된다. 이 신탁은 하나님이 시온에 임재하시는 의미(21b절)를 그 땅과 백성들에게 풀어 준다. 2:28-29은 이스라엘이 누릴 영적인 복을 예견하지만, 여기서는 물질적인 복이 뒤따를 것이라고 약속한다. 구약에서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은 축복의 이중적인 증거다. 여호와의 임재는 성전에서 흐르는 신비로운 물을 공급하여 그 땅에 풍요를 가져다줄 것이다(참고. 겔 47:1-12; 계 22:1-2). 그 물은 아카시아['싯딤'이란 히브리어로 '아카시아'를 뜻한다. 그래서 NIV는 싯딤 골짜기를 '아카시아 골짜기'(valley of acacias)라고 번역한다-역주〕가 자라는 마른 곳까지 흐를 것이다. '단포도주'(new wine)의 약속은 이전의 기도응답(2:24)을 훌륭하게 재현한다. 농업의 축복은 땅을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의 언약적 친교의 표식으로 간주하는 땅 중심(land-based)의 구약 신학의 일부다. 이 약속은 유다인의 땅에 저지른 죄에 대한 징벌로 '애굽'과 '에돔'이 황폐해질 것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까지 포함한다(참고. 왕하 23:29-34; 옵 10). 1-8절에서 두 나라가 선발되었듯이, 여기서도 두 나라가 선발된다. 이들 두 나라는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전형적이고 영속적인 대적의 역할을 한다. 하나님이 그들을 처리하시는 것은 자기 백성의 무죄를 완전히 입증했다는 확신의 의미를 담고 있다. 애굽과 에돔의 파괴는 18절과 20-21절의 유다의 축복과 소극적인 대조를 이룬다. 하나님과 유다의 연합은 영원한 소유의 서약으로 봉인된다. 21a절은 난해하다. 이 절은 19절의 '무죄한 피'를 되받는 것처럼 보인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번역은 NIV의 기초가 된 '나는 내가 지금까지) 결백함을 입증하지 않았던 그 피가 결백함을 보여 줄 것이다(참고. REB)'이다. 이 절은 요한계시록 6:10 과 평행을 이루면서, 상처 입은 백성을 고쳐 주겠다고 약속한다(참고. 시 9:11-12).
레슬리 알렌(Leslie C. Allen)
@장코뱅 좋은 설명을 첨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특별계시는 역사적이며 점진적으로 발전한다는 벌코프의 설명이 인상적으로 다가옵니다.
신 28장의 복이 마 5장에 이르러서 영광의 고차원의 복으로 찬란하게 드러난 것도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우리에게 오심으로써 이루어진 일이요, 가장 큰 복이 임한 것이라는 것을 강조해주셔서 복에 관한 정의를 잘 알게 되니 유익하군요.
본문의 요엘서가 종말에 있을 심판을 말씀하는 것인데, 애굽과 같은 이방인, 그리고 에돔과 같이 형제를 핍박한 부류의 사람들에게 심판이 임할 때, 예수로 인해 죄 용서함을 받은 복 있는 자들에게는 반대로 큰 축복이 임할 것이라는 말씀에서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는 것을 봅니다. 죄인에게는 벌을, 의인에게는 상을 주는 것이 정의이죠.
오늘 묵상을 통해서 요엘서 주석 전체를 본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믿는 자들에게 완전한 고차원의 복을 주시는 예수님을 더 의지하고 사랑하며 충성을 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감사합니다.
요약과 추가적인 풍성한 분별을 더하여 주셔서 정말 도움이 되고 감사합니다.
@노베 공감합니다.
주일 전 주말에 깊은 은혜의 묵상을 읽고 영혼에 힘을 얻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