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서지학 분야에서 마키아벨리 연구의 권위자로 꼽히는 잔 마리오 안셀미 이탈리아 볼로냐대 교수가 국회에서 한 말이다. 지난 14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한국-이탈리아 수교 130주년과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집필 500주년을 기념해 열린 ‘동아시아 맥락에서의 마키아벨리’란 국제심포지엄에서다. 이 자리에서 박영선·김영우 의원 등 여야 정치인 10여 명이 그에게 질문을 쏟아냈다.
행사를 공동 주최한 최재천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의원들이 이념 다툼에 지쳐서인지 여야를 초월해 정치 현실주의의 선각자인 마키아벨리에게서 돌파구를 찾으려는 열의가 대단했다”며 “조만간 여야 의원들을 모아 마키아벨리 독서회를 출범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불가피한 악행은 단번에 효율적으로”
니콜로 마키아벨리(1469~1527)처럼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으면서도 양극단의 평가를 받는 사상가도 드물다. 『군주론』으로 ‘정치에서 도덕을 분리해낸 리얼리즘 정치학의 시조’에 올랐지만 냉혹한 통치와 무자비한 처세를 합리화한 ‘악의 교사’(레오 스트라우스)란 비판도 받았다.
국내에서도 마키아벨리에 대한 관심은 깊다. 『군주론』 번역본만 20종이 넘는다. 정치사상서로는 가장 많은 숫자다. 학계의 연구도 활발하다. 마키아벨리의 ‘비르투(Virtu:역량)’ 연구로 독일 훔볼트대에서 학위를 받은 김경희 성신여대 교수가 『공존의 정치-군주론의 새로운 이해』(서강대 출판부)를 낸 데 이어 역시 마키아벨리 연구로 미 시카고대에서 학위를 받은 곽준혁 숭실대 교수가 『마키아벨리 다시 읽기』(민음사)를 냈다. 중세 이탈리아사를 전공한 곽차섭 부산대 교수도 곧 마키아벨리 연구서를 낼 예정이다.
그럼에도 마키아벨리에 대한 국내의 가장 일반적인 이해는 ‘결과주의자’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명제를 만든 인물로 각인돼 있다. 그래서 권모술수형 정치인에겐 어김없이 ‘마키아벨리스트’란 딱지가 붙는다.
이에 대해 곽준혁 교수는 “마키아벨리의 저작을 아무리 뒤져봐도 ‘도덕을 무시하라’거나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말은 없다”며 “그는 단지 군주가 도덕에 얽매이다 나라를 못 지키면 끝장이며, 이념적 도덕을 정치와 동일시하거나 도덕으로 정치를 실현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위험한지 지적했을 뿐”이라고 했다.
다른 전문가들의 분석도 비슷하다. “마키아벨리에 따르면 정치인의 행동은 결과로 평가돼야 하지만, 그 행동이 무조건 사악해도 좋다는 뜻은 전혀 아니다”는 것이다. 김경희 교수는 “군주가 무질서 상황에서 단호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나라가 붕괴되는 만큼 단기적인 소악(小惡)으로 장기적인 거악(巨惡)을 막아야 한다는 게 마키아벨리의 생각”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군주가 사악한 수단을 계속 동원하면 시민들의 두려움은 증오로 변해 나라가 망하게 된다고 마키아벨리는 보았다. 따라서 군주가 정 사악한 행동을 해야 할 경우엔 ‘단번에’ ‘효율적으로’ 해야 하고, 그 뒤엔 선정을 베풀어 시민들의 존경을 사야 한다는 것”이라고도 했다.
문제는 지속적으로 사악한 행동을 하는 군주(대통령)가 “나라를 위한 조치”라고 강변하는 경우다. 이에 대해 김 교수는 “예술과 외설의 구분과 비슷하다. 지도자의 행동이 공동체를 위한 것인지, 사익을 위한 것인지는 상식을 지닌 시민이 ‘보면 안다’는 게 마키아벨리의 입장”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중시되는 게 지도자에 대한 시민의 견제 역할이다. 서울대 박성우(정치사상) 교수는 “마키아벨리는 지도자의 리더십만큼이나 거기에 속박되지 않으려는 시민의 욕구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존중한 점에서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였다”고 평가한다. 곽준혁 교수도 “마키아벨리의 사상엔 군주의 처세술과 시민의 자유를 존중하는 공화주의가 절묘하게 걸쳐 있는데, 흔히 앞의 것만 봐 오독을 초래한다”며 “그가 꿈꾼 군주국은 군주가 시민의 자유를 위해 노력하고, 시민들은 눈을 부라리며 군주를 감시하는 체제”라고 말했다. 이런 점에서 마키아벨리가 독재를 옹호한 권력정치 사상가란 주장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는 것이다.
자유·법치 강조한 공화주의자 재평가
곽 교수는 “군주가 그토록 힘을 추구하는 목적이 중요한데, 그것은 곧 마키아벨리 사상의 정수인 ‘비(非)지배’”라고 강조한다. 비지배는 지배당하지 않으려는 인민의 속성을 뜻한다. 따라서 바람직한 군주는 비지배를 실현할 역량(Virtu)을 갖추고 정치를 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군주나 귀족들은 시민의 비지배 욕구와 갈등을 빚지만 이런 갈등이야말로 건강한 공화정을 만드는 동력이 된다고 마키아벨리는 봤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 『군주론』이 정치인의 처세술서로 여겨져온 배경엔 책이 도입된 역사도 작용한다고 김경희 교수는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국내에 처음 번역된 『군주론』은 독일어본을 바탕으로 번역된 일본의 『君主論』을 중역한 것이다. 자본주의 후발주자였던 독일과 일본은 『군주론』을 부국강병의 이론적 지침서로 삼았다. 두 나라로부터 수입한 한국도 자연히 이 책을 독립과 건국, 근대화를 위한 지침서로 여기게 됐다는 것이다.
이런 토양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유신체제를 위해 사자의 용맹과 여우의 간계를 구사한 마키아벨리적 신(新)군주’로 분석한 연구(임혁백 『유신의 역사적 기원: 박정희의 마키아벨리적인 시간』)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민주화·산업화를 거쳐 신자유주의·탈물질주의 시대에 접어든 현시점에선 마키아벨리를 처세술 대신 공화주의적 관점에서 숙독할 필요가 크다는 게 학계의 지적이다.
김경희 교수는 “『군주론』은 크게 ‘건국’과 ‘치국(治國)’의 두 부분으로 나눠져 있다. 건국 과정에선 처세술과 냉혹한 현실정치가 필요하지만, 나라를 다스리는 과정에선 지도자가 시민에게 권력을 나눠주는 ‘공존의 정치’가 요구된다는 게 마키아벨리의 강조점”이라며 “신자유주의 물결 앞에 국민들이 무력한 개인으로 전락한 한국 상황에서 ‘공존의 정치’는 지도자와 국민이 함께 추구해야 할 의무”라고 말했다. 곽준혁 교수도 “좁은 의미의 민주주의는 확대됐지만, 시민은 정치권과 언론이 띄우는 이슈에만 간헐적으로 반응하는 소극적 집단으로 전락한 만큼 자유와 법치를 강조한 마키아벨리의 공화주의가 다시 주목받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국내의 마키아벨리 연구 바람은 서울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열리고 있는 ‘르네상스형 인간, 마키아벨리’ 전시회(3월 27일~4월 20일)로 이어지고 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마키아벨리의 친필 서신과 아들 구이도에게 보낸 편지 필사본 및 외교관 신분이던 그에게 10인 위원회가 보낸 암호화된 편지 등이 로마의 베네치아 궁전, 피렌체의 우피치 박물관 등의 협조로 전시된다. 총괄 큐레이터인 마리아 조반나 메르쿠리(52)는 “마키아벨리는 르네상스형 인간의 완전한 전형이며 그의 이론은 유럽에서 국가 개념이 막 형성되던 당대 상황이 녹아 있는 사고의 산물”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