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런 일이 생긴 것일까? 작가 이병천의 장편소설 ‘신시(神市)의 꿈’ (한문화출판사,전3권) 한 대목에서 그 실마리를 풀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 소설에서 일본 식민정책의 상징적인 인물로 등장하는 ‘스즈키’ 헌병중좌는 총독부 관리들과 일본군 장성들이 모인 회의에서 기고만장하여 이렇게 제안을 한다.“이 문제는 각하들께서도 함께 지혜를 모으셨으면 하고 삼가 부탁을 드립니다. 지난 1884년 만주에서 처음 호태왕릉(好太王陵) 비석을 발견했던 육군참모본부의 사코오 중위는 왕릉 비문을 탁본하기 전에 우리 대일본제국의 역사에 누가 되는 내용은 미리 돌로 쪼아내는 치밀함을 보였습니다. 이 경우가 적절한 예가 되리라고 사료됩니다. 이 밖에도 고대사에는 우리 일본과 조선의 주장이 서로 다른 부분이 있는데, 이 기회에 바로잡지 못한다면 우리는 용렬한 역사를 후세에 물려주게 될 것입니다. 물론 그럴듯한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선인 식민지 사학자들을 별도로 키워내고, 그들을 장차 설립하게 될 조선의 대학교수로 임명한 다음 그 제자와 제자를 이어 대대로 식민사학을 가르치도록 제도적으로 만드는 일이 그 하나입니다. 만약 이 작업이 성공한다면, 그 성과는 앞으로 백 년 동안은 지속되리라 믿고 있습니다. 교육의 파급효과는 그만큼 크기 때문입니다.”이런저런 이유로 우리 현대사에서는 금기시되는 인물, 혹은 거세된 인물이라고까지 얘기되는 홍암 나철은 누구였을까? 심지어 우리 국사 교과서에서조차 그는 단군교를 개창한 인물 정도로나 기록돼 있다. 물론 그 자신은 단군교를 창시했다고 하지 않고 중광(重光)했을 뿐이라고 표현했다. 고려 말 몽고의 침략으로 맥이 끊겼던 단군교에 향화를 다시 지폈을 뿐이라고. 이렇게 단군교는 중광돼, 이듬해에 대종교(大倧敎)로 교명을 바꾸었다.나라는 멸망할 수 있으나 역사는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 홍암의 구국활동과 독립투쟁, 그리고 한민족을 위한 사상운동은 바로 이 대종교를 통해 구현되었으며 확산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존경하는 역사학자나 독립운동가, 한글학자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홍암이 끼친 영향이 실로 얼마나 컸는지 쉽게 헤아려볼 수 있을 것이다. 백암 박은식(朴殷植)과 단재 신채호(申寀浩) 등의 사학자, 서일 김좌진·이동녕·이시영·이상룡·신규식·이범석·홍범도·이상설 등의 독립운동가, ‘임꺽정’의 작가 홍명희나 가람 이병기 등 우리 역사에 등장하는 기라성 같은 인물들, 그리고 주시경 선생이나 최현배·이극로·김두봉 등의 한글학자들이 모두 대종교 신자다. ‘한글’이라는 이름도 대종교와 무관치 않고, 심지어 영화 ‘아리랑’의 춘사 나운규나 마라토너 손기정 선수 등도 대종교를 신봉했다.민족종교로서의 대종교 성격은 처음 단군교를 중광할 때의 포명서(佈明書) 등을 참고하면 어렵지 않게 살필 수 있지만, 그보다는 백암 박은식 선생의 저서 가운데 한 구절을 예시해보자. 그는 ‘한국통사’에서 이렇게 썼다.“……옛 사람이 말하기를 나라는 멸망할 수 있으나 그 역사는 결코 없어질 수 없다고 했다. 이는 나라가 겉모양이라면 역사는 정신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나라의 모양은 허물어지고 말았지만 정신은 살아남아야 할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나는 우리나라의 역사를 집필한다.”그게 곧 홍암 나철의 신념이기도 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리고 홍암은 그 정신을 우리 민족의 시조인 단군에게서 찾으려고 했다. 홍익인간(弘益人間)과 이화세계(理化世界), 또한 신시(神市)로 표상되는 우리 민족의 태곳적 문명사회가 바로 그곳이었다. 그에게 단군은 일제의 압제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 종교적인 존재이면서 동시에 절체절명의 순간에 유일하게 붙들고 매달릴 수 있는 질긴 동아줄 같은 사실적인 역사이기도 했던 것.나철은 1863년 전라도 보성 땅에서 자라나 과거에 급제한 인물이었다. 고종임금으로부터 총애를 받아 두 차례에 걸쳐 말과 관복을 하사받기도 했지만 이미 기울어지기 시작하는 조선의 정세 아래서는 자신이 할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간파하여 오래지 않아 사직했다. 그리고는 조선의 독립을 외교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모두 네 차례에 걸쳐 도일했지만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 와중에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그는 오기호 등의 동지들과 함께 을사오적을 처단하기 위한 계획을 세워 실행에 옮겼으나 실패, 유배형을 당한다. 하지만 황제의 특사가 내려지고 1909년 드디어 단군교를 중광한 후, 1916년에는 선도(仙道) 최고의 수행법이라고 하는 폐기법(廢氣法)으로 자진 순절했다. 폐기법은 스스로 호흡을 멈추고 숨을 끊는 일로서 자진하기에 앞서 유언으로 남긴 순명(殉名) 3조는 그가 생전에 이루고자 했던 바가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이제 온 천하의 형제자매와 동포가 참혹한 지경으로 빠져들거니와 내가 괴로움에 떨어지는 이들의 죄를 대신 받을지라. 이에 한 오리의 목숨을 끊음은 천하를 위하여 죽는 것이다.”지난 2002년, ‘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 등이 주축이 되어 홍암 나철은 ‘독립운동의 아버지’로 추대되기도 했는데, 이는 그의 사후 86년 만의 일이다. 중국 만주와 연해주 일대의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대종교의 역할에 대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1919년 상해 임시정부 수립 당시 의정원 의원 29명 중에서 대종교 원로가 21명이었고, 의장에 선출된 이동녕과 정부조직에 임명된 13명 중에서 11명이 대종교 원로였으니, 대종교는 상해 임정의 산파(産婆) 정도가 아니라 산모(産母)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리고 독립 운동사의 빛나는 전과인 청산리 전투의 김좌진 장군이나, 그 상급자로 총재였던 서일(徐一)도 대부분의 독립군 병사들도 마찬가지로 민족정신이 투철한 신자들.
하기야 총재와 장군이 신자인데 그 부하들이야 따로 말할 나위가 있으랴. 대종교를 믿는 이들로 주축이 이루어진 독립운동이 물론 여기서 끝나지는 않는다. 그들은 1919년 기미 삼일 독립선언보다 1년 앞서 무오 독립선언을 만방에 선포하기도. 하지만 이 선언 역시 우리 역사서에서는 외면하고 있다. 그 대신 무오 독립선언으로 자극을 받았으며, 대종교와 불교·기독교 등 각 종파가 고루 참여한 삼일 독립선언일은 국경일로 정해져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과 대조된다. 그런데 왜 우리 역사는 홍암 나철이나 대종교에 대해서만큼은 이렇듯 유난히 인색했던 걸까? 작가 조정래는 ‘신시의 꿈’ 추천사를 통해 나철이야말로 우리 근세사에서 가장 과소평가된 인물이라고 썼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잘 알려진 대로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의 취약한 정권 기반을 조금이라도 확고히 다지기 위해 주변에 친일파들을 등용했다. 그렇지 않아도 독립 투쟁과정을 통해 풍비박산이 되다시피 했던 애국지사들이 설 자리는 더욱 좁아지고 말았던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기도 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오늘까지 왔다. 그런 와중에 ‘친일인명사전’ 편찬문제로 나라가 시끌시끌했던 게 바로 엊그제 일이니, 하물며 이미 잊혀졌던 홍암 나철의 사적을 누가 솔선해 밝은 햇빛을 비출 수 있었으랴.
작가 이병천의 장편소설 ‘신시의 꿈’은 런던 크리스티 경매장의 매물로 등장한 ‘청자연적’ 한 점과 ‘단도’ 한 자루의 흥미진진한 경매 과정으로 소설을 시작함으로써 첫 장부터 독자들의 구미를 바짝 끌어 모은다. 그리고는 실존인물과 함께 허구적인 인물들을 등장시켜 구한말과 일제 초의 역사 현장을 생생하게 부활시키고 있다. 이 등장인물들의 사랑과 우정, 그리고 복수의 스토리를 부지런히 따라가다 보면 저절로 우리 상고사에 대한 지식들이 드러나는가 하면, 우리가 하찮게 여겼던 고유의 풍습과 놀이, 춤과 노래들의 연원이 어디에 닿아 있는지, 또한 그것들이 얼마나 가치있는 것인지를 일깨워준다. 가령 주인공이 우리 전통의 ‘줄다리기’에 대해서 자기 생각을 피력하는 이런 구절을 보자.
“양편으로 나뉘어 서로 줄을 당기는 이 단순한 놀이에는 아주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숨겨져 있는 것 같습니다. 세상의 모든 운동 경기는 서로 겨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투의 다른 이름, 즉 평화로운 시대의 전투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상대를 꺼꾸러뜨리거나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면 상대보다 더 높이 더 멀리 더 빠르게 어떤 행동을 취하는 경쟁이지요. 그런데 줄다리기의 성격은 아무래도 조금 다릅니다. 그건 상대를 밀쳐내기 위한 놀이가 아닙니다. 상대를 내 편으로, 우리 편으로 끌어안기 위한 행위입니다. 그래서 우리 서로가 ‘하나’가 되자는 것이지요.”‘자기 생애에서 신시를 다시 열고자 했던 나철은 그날에 대해서 만큼은 예언에 쓰지 않았으니 도무지 헤아릴 길이 없다. 다만 언젠가는 홍익이화의 세계가 분명 온다고 했다. 그게 그날일까? 그리하여 그건 혹시 어느 때라고 나철 자신도 못 박을 수 없었던, 우리 자신이 스스로 불러와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었을까?’ 이병천도 소설의 끝 부분을 그렇게 썼다. 홍암 나철의 사후 88년이 지난 오늘의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는 그것이다. 우리 민족의 이상향이었던 神市는 바로 우리 자신이 힘써 찾고 또 세워야 한다는 뜻에 다름이 아니라고.
- 홍암 나철이 걸어온 길 -
홍암선생은 1863년 12월 2일 전남 보성군 벌교읍 칠동리 금곡마을에서 나주 나羅씨, 나용집의 세 아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의 이름은 두영斗永이고 뒤에 인영寅永으로 바꾸었으며, 단군교를 중광한 뒤에는 철喆을 이름으로 하였다. 흔히 알려진 홍암弘巖은 단군교를 중광한 뒤부터 사용한 도호道號 이다.이어 1872년 (10세) 호남의 석학인 천사川社 왕석보王錫輔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하였고, 10세에 국문을 해득하고 한학 서당에 입학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인정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