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유익한 그릇” 役に立つ器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살펴볼 성경은 빌레몬서입니다. 이 빌레몬서는 1장, 그것도 25절까지 밖에 없는 짧은 책입니다. 그렇다고 성경적인 권위가 다른
책에 비해서 떨어진다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성경은 구약 39권, 신약 27권, 총 66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만, 각 책은 그
길이에 상관없이 모두 동등한 권위가 인정되고 있습니다.
이는 무슨 뜻이냐 하면, 이 빌레몬서처럼 짧은 책보다도 상당히 분량이 있는 창세기나 이사야서가 더 중요하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똑같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긴 책에 적혀 있는 내용이 훨씬 더 중요하고 짧은 책에 적힌 내용은 덜 중요하다는 것도 아닌, 짧은 책에 적혀 있든 긴 책에
적혀 있든 그 내용의 중요성 역시 우리에게는 마찬가지로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오늘 살펴볼 이 짧은 빌레몬서에도 보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많이 들어있는지 모릅니다.
자, 그렇다면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우리 한 번 간단한 질문부터 해볼까요? 자, 이 쪽을 봐주시기 바라겠습니다.
구약에 보면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등등이 있고, 신약에 보면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등이 있습니다.
그 책 제목은 그 책의 내용에 의해 정해진 경우도 있고, 그 책의 주요 인물 이름이 붙여진 경우, 그 책을 적은 사람의 이름, 또는
그 편지를 받는 사람이나 받는 교회 이름이 책 제목으로 붙여진 경우도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대부분 서한, 그러니까 편지 형식으로 된 책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빌레몬서도 편지형식으로 적힌 책입니다만, 그렇다면
빌레몬서에 나오는 이 <빌레몬>이라는 단어는 무슨 이름일까요. 오늘은 좀 선택지가 많습니다. 선택지는 4개입니다.
1번 이 편지를 쓴 사람 이름
2번 이 편지를 받는 사람 이름
3번 이 편지를 받는 교회 이름
4번 이 편지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 이름
자, 몇 번일까요. 평소에 성경을 읽으시는 분에게는 어렵지 않겠지요. 예, 정답은 2번, 이 편지를 받는 사람 이름입니다. 빌레몬서
1절~2절을 봅니다.
빌레몬서 1절~2절
1.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2.자매 압비아와 우리와 함께 병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
キリスト・イエスの囚人パウロと兄弟テモテから、私たちの愛する同労者ピレモンと、
姉妹アッピア、私たちの戦友アルキポ、ならびに、あなたの家にある教会へ。
이 두 구절을 보면 우리는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절 전반부를 보더라도 알 수 있듯이 이 편지는 바울이 빌레몬과 자매 압비아,
병사 아킵보 그리고 그의 교회에 편지를 썼습니다.
바울은 당시 갇혀있었다고 합니다. 신학자들은 빌레몬서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갇혀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자유롭게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고 해서 아마도 로마에 갇혀 있을 때인 서기 60년 정도에 적힌 서신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또 하나 알 수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만, 여기에 교회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네 집, 그러니까 이 편지의 수신인인 빌레몬의 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교회는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지 궁금하게 됩니다만, 이는 잠시 후에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이 빌레몬서에 있어서 주인공은 편지 수신인인 빌레몬이 아니라 다른 인물입니다. 그 이름은 바로 10절에 등장하는 <오네시모>입니다.
10절을 봅니다
빌레몬서 10절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獄中で生んだわが子オネシモのことを、あなたにお願いしたいのです。
사실 이 10절이야말로 이 빌레몬서의 핵심 내용입니다. 빌레몬서에는 주요 인물이 셋이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우선 편지를 쓰고 있는 바울이 있고, 수신인인 빌레몬, 그리고 이 편지에 등장하는 수수깨끼의 인물 <오네시모>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편지하기를 이 오네시모에 대해서 간구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슨 간구인지 한 번 바울의 말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좀 길지만 11절~18절까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빌레몬서 11절~18절
“11.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12.네게 그를 돌려 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
13.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14.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
15.아마 그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너로 하여금 그를 영원히 두게 함이리니
16.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17.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18.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彼は、以前はあなたにとって役に立たない者でしたが、今は、あなたにとっても私にとっても役に立つ者となっています。
そのオネシモをあなたのもとに送り返します。彼は私の心そのものです。
私は、彼を私のもとにとどめておき、獄中にいる間、福音のためにあなたに代わって私に仕えてもらおうと思いました。
しかし、あなたの同意なしには何も行いたくありませんでした。それは、あなたの親切が強いられたものではなく、自発的なものとなるためです。
オネシモがしばらくの間あなたから離されたのは、おそらく、あなたが永久に彼を取り戻すためであったのでしょう。
もはや奴隷としてではなく、奴隷以上の者、愛する兄弟としてです。特
に私にとって愛する兄弟ですが、あなたにとっては、肉においても主にあっても、なおのことそうではありませんか。
ですから、あなたが私を仲間の者だと思うなら、私を迎えるようにオネシモを迎えてください。
もし彼があなたに何か損害を与えたか、負債を負っているなら、その請求は私にしてください。
여기서 핵심 구절은 12절과 14절, 그리고 16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빌레몬서 12절
“12.네게 그를 돌려 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
そのオネシモをあなたのもとに送り返します。彼は私の心そのものです。
여기서 <너>는 빌레몬일 것이며, <그>는 오네시모입니다. 즉,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단순히 보낸다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돌려보낸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이는 무엇을 뜻합니까. 이는 오네시모는 본래 빌레몬 쪽에 있었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네시모에 대한 기록 중에서 14절을 봅니다.
빌레몬서 14절
“14.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
しかし、あなたの同意なしには何も行いたくありませんでした。それは、あなたの親切が強いられたものではなく、自発的なものとなるためです。
이 글을 보면 참으로 묘합니다. 바울이 오네시모에게 무엇인가 해줄 일이 있으면 그냥 하면 될 것인데, 그 이전에 이를 위해서 빌레몬의
승낙을 구하고 있습니다. 빌레몬 당신의 승낙 없이는 오네시모에게 아무것도 안 하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대단히 이상하게 느껴지는
부분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이를 푸는 열쇠가 바로 16절에 있습니다.
빌레몬서 16절
“16.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もはや奴隷としてではなく、奴隷以上の者、愛する兄弟としてです。特
に私にとって愛する兄弟ですが、あなたにとっては、肉においても主にあっても、なおのことそうではありませんか。
이게 무슨 뜻입니까. 바울이 빌레몬에게 말하기를, 오네시모를 다음부터는 종처럼 대하지 말고 사랑 받는 형제로 대우하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17절에서는 마치 나 바울에게 하듯이 오네시모에게도 해달라고 간구를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내용을 종합해본다면 신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추정합니다.
우선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종입니다. 그런데 그가 무슨 이유 때문인지 도망을 나온 것 같습니다. 바울이 11절에서 “전에는 네게
무익했다 (以前はあなたにとって役に立たない者でしたが)” 고 쓴 것으로 짐작을 하자면 그는 무슨 문제를 일으키고 도망쳐 나온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가 무슨 문제를 일으켰는지, 그리고 어떻게 해서 바울을 만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오네시모는 바울을 통해서 자신의
<아들>이라고 불릴 만큼 새 사람, 믿음의 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신분은 빌레몬의 종입니다. 그것도 주인에게서 도망쳐 나왔다고 한다면 당시로서는 문제가 보통 심각하지 않습니다.
주인 마음 먹기에 따라서는 끔찍한 형벌을 내릴 수도 있었고, 하물며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는 권한마저도 있었습니다.
주인은 자신의 종을 죽일 권한도 가지고 있었습니다만, 그를 해방시켜줄 권한, 즉 그를 자유인으로 만들어줄 권한도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오네시모를 자신 곁에 두고 싶었음도 불구하고 우선 빌레몬에게 보낸다는 것도 그와 같은 이유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자, 이제 오네시모에 대해서는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궁금한 사람은 빌레몬이지요. 여러 책에 보면 이 빌레몬은 골로새
시민이었다고 기록합니다. 골로새는 지금 현재 터키에 있는 호나스라고 하는 지역입니다.
성경에 보면 <빌레몬>이라는 이름은 다른 곳에 등장하지 않고 오직 빌레몬서에만 등장하는데, 빌레몬서에 보면 골로새라는 이름이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왜 그를 골로새인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지 여러 가지로 성경을 찾아보았습니다만, 역시 바울 서신인 골로새서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골로새서 4장 9절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오네시모를 함께 보내노니 그는 너희에게서 온 사람이라 그들이 여기 일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라”
また彼は、あなたがたの仲間の一人で、忠実な、愛する兄弟オネシモと一緒に行きます。この二人がこちらの様子をすべて知らせます。
골로새서는 바울이 골로새에 있는 교회에 쓴 편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 오네시모가 빌레몬서에 등장하는 오네시모와 같은 인물이라고
한다면, <그가 너희에게서 왔다>라고 한다면 이는 골로새에서 왔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네시모가 골로새에서 왔다고
하면, 그가 골로새에서 있을 때에는 당연히 빌레몬 집에서 종으로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빌레몬은 골로새인이었다고 하는 것이고, 그리고
골로새 교회는 앞서 빌레몬서 2절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빌레몬의 집에서부터 시작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 이제서야 드디어 배경이 어느 정도 밝혀졌습니다. 오네시모는 골로새에 있는 빌레몬 집에서 종으로 살았었습니다만, 거기서 도망쳐
나왔습니다. 이는 죽음을 각오한 일입니다.
그가 어디까지 도망쳤냐 하면 당시 로마에 갇혀 있던 바울에게까지 오게 되었는데, 골로새에서 로마까지는 거리가 무려 2000킬로가
넘습니다. 2000킬로라고 하면 잘 감이 안 오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대략 일본 홋카이도 삿포로 시에서 오키나와의 나하시 까지의
거리가 2200킬로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평지만 있나요? 거기엔 산도 있고 바다도 있습니다.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는 잡히면 최소한 끔찍한 고문과 형벌을 받습니다. 어쩌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도망친 노예인데 말이나
교통수단을 이용할 수 있는 돈도 없었겠지요.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신 없이 달렸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산 넘고 바다를 건너
2000킬로나 되는 거리를 도망쳤다는 것은 얼마나 결사적인 각오였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라 하겠습니다.
그토록 힘겹게 달린 결과 도착한 로마에서 그는 바울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바울을 통해서 복음을 알게 되고 주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때까지는 무익했던 오네시모, 누군가의 노예, 그것도 도망친 노예에 불과한 그의 인생은 완전히 변해서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로부터 <아들>이라는 말까지 들을 정도로 큰 신뢰를 받았습니다.
이제 오네시모는 이 편지를 들고 빌레몬을 찾아갑니다. 그것은 결코 기쁘고 즐거운 발걸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죽음을 각오하고
달려온 그 길을 다시 돌아가는 길입니다. 자신의 목숨을 빼앗을 수도 있는 주인을 자기 발로 찾아가는 길입니다. 어쩌면 자신의 주인인
빌레몬이 이 편지를 읽기도 전에 자신을 죽일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돌아가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여전히 노예였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바울로부터 신임을 얻고 새사람이 되었다 하더라도
법적으로는 빌레몬의 노예였으며, 그의 죄를 사면해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의 주인인 빌레몬 밖에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네시모는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이 빌레몬서를 손에 쥐고서 목숨을 걸고 빌레몬에게로 갔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빌레몬서 11절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彼は、以前はあなたにとって役に立たない者でしたが、今は、あなたにとっても私にとっても役に立つ者となっています。
바울이 말하기를 지난 날의 오네시모는 무익했으나 이제는 바울과 빌레몬에게 유익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죄를
용서하고, 이제 종이 아니라, 더 이상 노예가 아니라, 믿음의 형제로서 동역자로서 대우를 해달라고 빌레몬에게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유익함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를 한 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디모데후서 2장 20절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大きな家には、金や銀の器だけでなく、木や土の器もあります。ある物は尊いことに、ある物は卑しいことに用いられます。
우리는 이 구절을 간혹 오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구절은 금 그릇과 은 그릇은 귀하고 나무 그릇과 질그릇은 천하다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경우도 있겠습니다만, 아닙니다. 여러 가지 그릇 종류가 있는데, 여기서 어떤 것은 귀하고, 어떤 것은 천하다는 구분을 하기
위한 말씀이 아니라, 자세히 보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즉 이는 금이나 은 그릇이라고 해서 귀하게 쓴다는 것도 아니요, 나무나 질그릇이라고 해서 천하게 쓴다는 것이 아니라, 금이든 은이든,
나무든 질그릇이든 이를 막론하고 귀하게 쓰는 경우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집을 보더라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저희 집의 경우를 보면, 예를 들어서 어떤 한 컵은, 이는 꽤 좀 값이 있어 보여요.
정말 기계로 찍어낸 것이 아니라 손으로 직접 만든 컵 같아요. 돈을 주고 산다면 적어도 몇 천엔 정도는 할 것만 같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크기가 좀 애매해요.
물이나 주스를 마시기에는 좀 작고, 녹차를 마시기에는 입이 좀 좁아요. 그렇다고 진한 커피를 마시기에는 손잡이가 없어서 불편해요.
그래서 저희 집사람이랑 이걸 도대체 어디에 쓰는 게 좋을까 하고 고민한 끝에, 지금은 저희 집에서 양치질 할 때 컵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래도 좀 고급스러운 컵이나 그릇들도 있어요. 그런데 그런 그릇은 잘 안 써지더라고요. 아무리 예쁘고 값이 나간다 하더라도 그
그릇을 쓸만한 요리를 해먹을 기회가 그렇게 많지 않잖아요. 어쩌면 찬장 저 안쪽에 들어 있어서, 솔직히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그릇들도 있지 않을까 해요.
하지만 반면에 아주 요긴하게 쓰이는 그릇들도 있습니다. 어떤 그릇은 100엔 샵에서 산 그릇들인데 이건 국을 담아도 좋고, 밥을
비벼먹을 때도 좋고, 라면을 먹을 때도 좋고, 참 편리한 그릇입니다. 요즘 100엔짜리 그릇들을 보면 얼마나 잘 나오는지 몰라요.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어서 귀하게 쓰는 그릇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죠. 내가 많이 쓰는 그릇, 내가 참 편리하게 쓰는 그릇이
그야말로 귀하게 쓰는 그릇입니다. 비슷하게 생긴 그릇이라 하더라도 어떤 것은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쓰는 그릇은 귀하게 쓰는
그릇이요, 또는 쓰레기통이나 걸레를 빨 때 쓰는 그릇들은 천하게 쓰는 그릇들입니다. 같은 그릇이라 하더라도 어떤 것은 항상 깨끗하게
닦고 보기 좋은 곳, 언제든지 꺼내기 쉬운 곳에 넣어두지만, 지저분한 그릇들, 그리고 전혀 쓰지 않는 그릇들은 제아무리 비싼 그릇이라
하더라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바울은 오네시모를 가리켜 예전에는 무익했으나 이제 유익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무익하고 유익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무익하다는 것은 도움이 안 되는 것이요, 유익하다는 것은 도움이 많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익한 그릇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유익한 그릇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유익한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유익한 그릇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이는 두 말 할 것도 없이 우리 주님께 있어서 유익한 그릇이 되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그릇이 유익합니까. 정말 돈 많고 재능 많은 사람이요? 비싼 옷에, 비싼 차에, 비싼 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유익한가요? 영화배우나 탤런트들처럼 예쁘고 늘씬하고 키 크고 잘 생기고, 그리고 배도 안 나오고……그래야 귀한 그릇인가요?
아닙니다. 귀한 그릇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시는 그릇이 귀한 그릇입니다.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에요.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결정하는 일입니다.
과거에 우리가 아무리 무익했다 하더라도, 지금까지의 삶이 아무리 형편 없었다 하더라도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고 새사람으로 거듭났다고
하면, 이제 우리는 귀한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귀하게 쓰이는 그릇이 될 수 있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울이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로 보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요? 그렇습니다. 아무리 바울이 훌륭한 사도라 하더라도 오네시모를
자유롭게 해줄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오네시모의 죄를 용서해줄 권한이 없어요. 오로지 오네시모의 주인인 빌레몬한테만 그 권한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그 머나먼 길을 다시 돌려보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목사님이나 종교지도자나 신학자라 하더라도 우리의 죄를 해결해주지는 못합니다. 오로지 우리의 죄를
해결해주실 수 있는 분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주신 예수님 뿐입니다. 그 두 손에 십자가의 못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예수님
만이 우리의 죄를 해결해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잠시 화제를 좀 바꾸어볼까 합니다.
성경 요한 삼서 2절, 여러분들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요한 삼서 2절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愛する者よ。あなたのたましいが幸いを得ているように、あなたがすべての点で幸いを得、また健康であるように祈ります。
이 말씀이 무엇입니까. 요한 삼서는 빌레몬서보다도 짧습니다. 15절까지밖에 없어요. 그리고 이는 대체적으로 사도 요한이 썼다고
신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만, 이 15절 중에 2절이니까 두 번째 나오는 글입니다.
글 내용은 특별할 것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들의 영혼이 잘 되는 것처럼 모든 일이 항상 잘되고 건강하기를 바랍니다.”
이게 특별한가요? 그냥 이 편지를 쓴 사람이 읽는 사람한테 하는 안부인사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영혼은 당연히 잘 되지만, 그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도 모든 일이 잘되고
건강하기를 하나님께서 원하고 계시는구나. 이렇게 받아들이고 교회를 세운 분이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님 아니십니까.
사도 요한은 하나님도 아니고 예수님도 아닙니다. 우리와 똑 같은 인간입니다. 그러나 이 성경말씀을 2천년 전에 누군가가 누군가한테 쓴
편지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 하나님께서 내게 하신 말씀으로 받아들였을 때, 안부인사 하나로라도 세계 최대의
교회를 세울 수 있는 능력이 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말씀의 능력인 것입니다.
빌레몬서 18절~19절을 보시겠습니다.
빌레몬서 18절~19절
“18.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19.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네가 이 외에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은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もし彼があなたに何か損害を与えたか、負債を負っているなら、その請求は私にしてください。
私パウロが自分の手で、「私が償います」と書いています。あなたが、あなた自身のことで私にもっと負債があることは、言わないことにします。
이 글을 직접적으로 해석하면 이렇게 되겠지요. 오네시모가 만약 빌레몬 당신에게 잘못을 저질렀거나 손해를 끼친 것이 있으면 내가
물어주겠다. 그러나 빌레몬 당신도 나한테 빚진 것이 있다는 것은 굳이 내가 말하지 않더라도 알고 있지요?
이 말씀, 어떻습니까. 그저 사도 바울이 빌레몬이라고 하는 사람한테 한 말이요?
이 말씀을 보면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 같이 않습니까.
이 구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이나 예수님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빌레몬이 하나님이나 예수님이라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나 바로
이 말씀이 하나님께서 지금 이 시간 우리에게 해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였을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과 이웃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도 이웃한테 억울한 일을 당한 적이 있으시지요. 예, 있을 것입니다. 저도 억울한 일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왜
없겠습니까.
만약에 우리 이웃이 나를 괴롭혔습니다. 나에게 잘못을 저질렀어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주시겠대요?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다
갚아주시겠대요. 걱정하지 마시래요.
그러나, 동시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도 나를 괴롭힌 적이 있다는 것, 기억하지? 너도 너를 괴롭힌 사람 못지 않게 누군가를 괴롭힌
적이 있다는 것, 내가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기억하지 않니?
지금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 같지 않으십니까.
우리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졌습니다. 우리는 이제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구원을 받아서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특권을 얻었습니다. 할렐루야!
그렇다면 우리 이웃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나만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이웃을 위해서도 십자가에 못 박혀서
피를 흘려주셨던 것입니다.
누군가가 너를 괴롭혔냐. 그래. 내가 갚아줄게. 내가 너의 그 상처를 치료해줄게.
그리고 너무 미워하지 말아라. 자, 내가 그 녀석을 대신해서 이렇게 채찍에 맞고 피를 흘리면서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러니 나를
봐서라도 용서해줘라.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 예수님의 사랑을 알아야지만 우리는 귀하게 쓰임 받는 그릇으로 거듭날 수가 있습니다. 유익한 그릇으로 거듭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고, 주님으로부터 귀하게 쓰임 받는 유익한 그릇으로 거듭남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부어주시는 폭포수와도 같은 축복을 모두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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