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
하면 떠오르는 것은 훈련소일 것이다.
아들이 군대를 가던 때 난 광주역에서 기차를 타고 가라하고 난 가지 않았다.
명목은 수업 때문이었지만 군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차마 돌아서 오지 못할 것 같다는 나의 걱정 때문
지난번 서울에서 가족 행사가 있었고
다녀오는 길에 논산에 들렀다.
길 찾아 가다가 점심시간이 되어 유학자인 시동생이 추천한 나름 맛집에서 점심을 먹고
명재고택을 들렀다.
잘 정돈된 장독대
집안을 살피며 장독대를 관리하던 종부는 요양원에 들어가 계신다고 했다.
동서가 종부 이야기를 하였다.
몇 년 전에 왔을 때 모습이 선하다며
그 어떤 사람도 세월 앞에는 장사가 없는 것을
장독대를 바라보며 집을 관리하던 이들을 모습이 아른거린다.
햇볕이 따가워 잠시 소나무 그늘에 모였다.
요즘 시대 마지막 유학자라고 해도 과한 표현이 아닐 시동생의 역사 스페셜이 시작 되었다.
명재고택 바로 옆에는 관찰사가 머물렀다는 한옥이 한채 있었다.
그 집과 명재고택은 바로 이웃해 있다.
그런데 이곳이 바로 노론과 소론이 갈리게 된 장소이며 사건이 발생한 곳이란다.
역사란 알고 보면 참 하차잔은 일에서 비롯 된다.
윤증은 1629년 7월 18일에 파평윤씨 윤선거의 맏아들로 태어나 1714년 3월 9일에 사망한다.
84세의 당시로서는 장수한 분이다.
그는 조선 중기의 유학자로 스승이었던 송시열과 부친의 묘갈명 문제로 대립하게 되었고, 이를 발단으로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기된다.
윤증의 부친 윤선거가 병자호란 때 있었던 일 때문이다. 부친이 돌아가시고 묘갈명에서 부친의 행실에 대해 수정해줄 것을 스승인 송시열에게 여러번 요청을 했지만 송시열은 그럴 수 없다고 수정해주지 않는다. 이에 마음이 상한 윤증은 스승과 등을 돌리게 되고 서인이었던 두 분은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게 된다.
그러니까 송시열은 노론이 되고 윤증은 소론의 영수 격으로 받들어진다.
평생 출사하지 않고 재야에서 지냈으나 높은 명망으로 선배, 동료, 후학들의 추천으로 지속적으로 관직을 받았다. 우의정까지 제수 받았으며, 임금의 얼굴 한 번 뵙지 않고 (명목상이지만) 정승에 올랐다고 하여 세간에 백의정승(白衣政丞)으로 불렸다.
스승과의 불화는 1636년 병자호란으로부터 발생한다.
윤증이 부친을 따라 강화도에 피난하였는데 청군에게 함락되자 모친 공주 이씨는 아이들을 종에게 맡기고 자결하였다. 같이 자결하기로 하였으나 윤선거는 어린 자식들을 두고 자결할 수가 없어서 겨우 목숨을 부지한다. 당시 9세에 불과했던 윤증은 모친을 가매장하여 위치를 표시하였고, 다음해에 수습하여 장사지낼 수 있었다. 윤증은 적진에서 2주 가량 머물렀으나 살아남아 강화도로 귀환할 수 있었다.
이렇게 살아 남은 그가 왜 스승인 송시열과 갈라서게 되는 계기가 되었을까?
그것은 아버지 윤선거의 묘괄비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행적에 대한 내용 때문이다.
부인이 자결을 하였는데 남자답지 못하게 남편이라는 사람이 살아 왔기 때문이라는 것이 송시열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윤증을 검색하여 보면 자세하게 나와 있다. 그런데 아버지 윤선거의 행실이 그렇게 나쁜 것이었을까? 생각해보면 어린 자식들을 두고 어찌 아비마저 죽을 수 있을까? 이는 지금 우리들의 생각이다.
요즘이야 묘괄비가 무슨 소용일까? 하지만 옛 어른들은 과거의 행적으로 이렇게 당파가 나뉘기도 한다.
백의정승이란 분으로 추앙을 받은 윤증도 이렇게 아픈 사연이 있었다.
지금의 명재고택은 노론과 서론이
무엇인지 모르는 이들이 바람처럼 오가며 구경삼아 들리는 곳이지만 내가 가장 차이나는 체험을 했던 것은 제사 문제였다.
어려서 나의 집안은 소론파로 제사를 계명전에 모셨다.
닭이 울면 철상을 하였다.
그러나 결혼을 한 시댁은 우암의 10대손인 연재 송병선선생에게 수학을 한 노론 집안이었다.
노론 집안은 제사를 계명 후에 모신다.
그러니까 닭이 울고 난 뒤 동이 틀무렵에 제사를 모시는 것이다.
왜 그러는가 봉산조부님께 여쭈니 노론과 소론의 차이만 설명을 해 주셨다.
음 그런가보다. 여길 뿐 시댁에서 하는대로 제사를 모실 뿐 별 생각은 없다.
더구나 내가 제사를 관장하면서는 잘하는 일이라 우기지는 않지만 동틀녁에 모시던 제사를 해질녁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먹고 살아야 하는 현실에서는 종부라고 제사를 고집하며 벌이 없이 제사만을 받들며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윤증 역시 제사는 훗날 가난하게 사는 후손이 있을시 부담을 줄 수 있다고 해서 전도 유과도 올리지 못하게 했으며 매우 간소하게 모신다고 했다.
나는 내 어머니께 배운대로 물 한그릇을 떠 놓더라도 정성으로 선영을 기리는 마음으로 모시고 음식은 상황이 주어지는 대로 정성껏 하라는 가르침대로 하고 있다.
첫댓글 종가집의 종부다우심을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