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15년 요한복음 제9강
내가 세상의 빛이로라
말씀/요9:1-41
요절/요9: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태어나면서부터 맹인 된 자의 눈을 뜨게 하신 표적 이야기입니다. 맹인 치유 사건은 요한복음 8장 12절에 나오는 것처럼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얻게 하시는 분임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이 시간 말씀을 통해 우리도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깊이 만나므로 인생문제와 죄로 인한 어둠에서 벗어나 빛 가운데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세상의 빛, 예수님 (1-7)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된 사람을 보셨습니다. 8절을 보면 그는 걸인으로서 헌 누더기를 걸치고 거적때기 위에 앉아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에 불쌍한 사람이 많이 있지만 맹인보다 더 불쌍한 사람은 없습니다. 옛말에도 ‘몸이 백 냥이면 눈은 구십 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실제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 필요한 정보의 90% 이상을 눈을 통해 얻습니다. 태어난 후에 시력을 잃은 사람은 그래도 사물에 대한 개념이라도 있기 때문에 이것에 기초해 상상이라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날 때부터 소경으로 아예 사물에 대한 모양이나 빛, 색깔에 대한 개념조차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의 인생은 온통 어둠 자체였습니다. 더구나 집도 가난해서 구걸하지 않으면 구차한 생명조차도 연명해갈 수 없는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태아가 엄마 뱃속에서도 심각한 죄를 지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창세기 25장 22절에 나오는 에서와 야곱이 리브가의 태에서 싸운 것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그들이 단순히 다툰 것이 아니고 서로가 서로를 죽이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그들은 태어나기도 전에 살인미수라는 무서운 죄를 지은 것이 됩니다. 제자들도 이런 이야기를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이 사람의 죄 때문입니까?”
또한 많은 유대인들은 부모의 죄로 인한 연좌제를 믿었습니다. 예를 들면 출애굽기 34장 17절에 “… 나는 죄를 지은 사람뿐만 아니라 그의 삼대나 사대 자손에게까지 벌을 내릴 것이다”는 말씀을 문자 그대로 해석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아니면 그의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이들이 이 문제를 이렇게 심각히 여기는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조상들의 망령된 행실로 나라가 망하고 바벨론에 끌려가 칠십 년간 포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귀국하였으나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사백여 년 간 페르시아 제국, 알렉산더 대왕의 그리스 제국에 차례로 정복을 당했습니다. 겨우 독립하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로마 제국에 정복당해 식민통치를 받고 있습니다. 갈릴리 지역은 국경지대로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이리 맞고 저리 맞는 동네북 신세였습니다. 그들은 많은 전쟁으로 환란을 겪고 이방민족의 피가 섞이며 같은 민족인 유대인들로부터 갈릴리 잡것들이라는 천대를 받아야 했습니다. 왜 이런 환란과 고통을 끊임없이 겪어야 하는지, 하나님이 만물을 주관하신다면 왜 이런 일들을 허용하시는지 하나님이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항변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왜요? 안 믿는 헬라인들은 저렇게 잘 되는데, 왜 우리만….” 그들은 속 시원히 알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대답이 없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슬프고 운명적인 맹인된 걸인을 통해 자기 민족과 천대받는 자신들이 투영되어 울컥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제자들의 마음을 십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불행의 원인을 명확히 알고 싶습니다. 우리는 과거를 따지고 싶습니다. 우리는 과거를 되돌려 놓고 싶습니다. 죄로 인해 이 비극을 겪고 있다고 생각하면 한없이 슬퍼지고 자책감이 듭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생각하며 하나님께 쓴 뿌리가 생기기 쉽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죄와 고난과의 관계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예수님은 그가 맹인이 된 것은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처음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창조역사였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 이후부터의 하나님의 일은 생명구원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본인의 죄 때문도 아니고 부모의 죄 때문도 아니며, 인간을 구원하시고 참 생명을 주시는 생명구원역사를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나타내기 위해 그가 맹인 된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맹인의 불행에 하나님의 선한 뜻과 섭리가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맹인을 통해 자신의 사랑과 능력을 나타내셔서 그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맹인은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요, 참된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내는 표적의 핵심인물로 의미 있게 쓰임 받았습니다.
우리 인생들 중에도 저마다의 운명적인 문제로 인해 어둔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좋은 가정환경에서 태어난 반면, 어떤 사람은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고생하며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예쁜 얼굴에 다재다능하게 태어나서 모든 사람의 사랑과 관심 속에 자라나는 반면, 어떤 사람은 별 특징 없이 대충대충 태어나 무관심속에 자라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좋은 머리를 타고 나서 대강대강 공부해도 좋은 학점을 얻는 반면, 어떤 사람은 별로 좋지 않은 머리를 타고 나 몸이 고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날 때부터 불행한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뿐만 아니라 불의의 사고로 장애인이 되었거나 고난당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누가 고통을 당하면 그가 죄를 지어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때로는 인간의 죄를 징계하고 바로잡기 위해 사람들에게 고난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인간의 고난이 그들의 죄 때문에 찾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나타내기 위해 인간들에게 고난을 허락하실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의 고난은 위장된 축복입니다. 예를 들어 욥이 당한 고난이나 요셉이 당한 고난은 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고난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을 이루기 위해 허락하신 고난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변에서 고난당하는 사람을 볼 때 무조건 그들이 죄를 지어 그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하고 정죄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욥을 비난하는 욥의 친구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우리는 고난 받는 사람들을 정죄의 눈으로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께서 그 고난을 통해 일하심이 드러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운명적인 문제 속에서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는데 있어 우리 신자들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4절을 보십시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We must do the work of God).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물론 하나님은 우리가 일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일하실 수 있고 계획하신 것들을 행하실 수 있는 능력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다만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길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must”라는 강한 표현을 쓰심으로 우리가 어떤 형편 가운데서도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해야 할 하나님의 일은 죄로 말미암아 파멸해가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왜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까?
첫째, 때가 아직 낮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낮’은 생명이 있는 때를, ‘밤’은 죽음 또는 마지막 종말의 때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우리가 살아있을 때 하나님의 일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죽으면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습니다. 일에는 때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언제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을지 모릅니다. 대개 사람들은 젊을 때부터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을 어리석게 생각하고 젊어서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실컷 하고 늙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큰 착각입니다. 정말 지혜로운 자는 젊을 때 일생 감당할 사명을 발견하고 온 정열을 쏟아 그 일에 헌신하는 자입니다. 젊을 때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은 결코 후회 없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장차 주님 앞에서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5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흔히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지만 일할 상황과 형편이 되어 있지 않아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는 것은 이런 외적 요인 때문이 아니라 내 속에 강하게 역사하는 불신과 죄악의 어둠의 세력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어둠의 세력을 물리칠 수 있는 태양과 같은 강렬한 빛이 필요합니다. 바로 예수님은 이러한 태양과도 같이 강렬한 빛을 발하시는 세상의 빛이 되십니다. 우리가 빛이신 예수님을 영접할 때 내 속에 있는 모든 어둠의 세력, 불신과 죄악과 운명주의의 슬픔이 물러가고 생명력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빛이 내 안에 비칠 때 바로 그 때가 우리가 일할 수 있는 낮의 때입니다. 바로 그 때 우리는 어떤 상황과 형편 가운데서도 힘 있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할 이유를 말씀하신 후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구체적으로 일을 하기 시작하셨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예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말씀 한마디로 맹인을 고쳐 주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침과 진흙을 이겨 이상한 방법으로 고치셨을까요? 어떤 사람은 고대 사회에는 사람의 침에 약효가 있다고 믿었기에 그렇게 했다고 설명하려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치료방법을 생각해볼 때 예수님의 일하시는 방법이 너무나 엉뚱합니다. 비위생적이고 비합리적입니다. 한마디로 엽기적입니다. 그러나 이 일이 생명이 살아나는 역사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은 일할 도구가 없다고 또 일할 환경이 되어 있지 않다고 포기하거나 낙심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주위에서 일할 수 있는 꼬투리를 찾으시고 있는 것으로 일하셨습니다. 요즘 같으면 장애인 인권 침해로 바로 고소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일하심으로 보지 못하는 그에게 주님의 사랑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할 때 우리의 상황과 형편은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연약하고 부족하더라도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하는 소원만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특별한 자격과 도구들이 있어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에게 도구가 없다면 우리 주위에 있는 것들에 눈을 돌려야 합니다. 흙과 침은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그런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말씀이 있고 우리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전도나 심방, 격려와 상담, 1:1성경공부, 식사섬김, 또한 실제 필요한 도움을 주므로 우리는 사랑을 표현하고 나눌 수 있습니다. 이것들이 비합리적이고 비효율적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한 영혼에 대한 깊은 사랑과 관심을 가지는 그 자체, 이것이 하나님의 일의 시작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이후 예수님이 그에게 요구하신 것은 바로 순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순종하는 것입니다. 맹인은 자의식과 자존심을 극복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단순히 순종하여 실로암 못에 가서 눈을 씻었습니다. 그때 그의 눈이 밝히 떠졌습니다. 실로암 못에 비친 잘 생긴 자기 얼굴도 보게 되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잘 생겼다니, 와!” 감탄사가 절로 나왔습니다. 지금까지의 어둡고 운명적인 생각이 물러가고 생명의 빛으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맹인이 눈을 뜬 장소가 실로암 못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못의 이름은 ‘보냄을 받았다’라는 뜻을 가진 ‘쉴로아’에서 왔습니다. 인공적으로 수로를 파서 그곳에 물을 끌어왔기 때문에 이런 명칭이 붙었습니다. 주전 8세기 말 히스기야가 앗수르의 포위 공격에 대비해 예루살렘 성에 충분한 물을 확보하기 위해 이 못을 만들었습니다. 성읍 밖에서부터 약 530m 가량이나 암반을 뚫어 터널을 파서 성읍에 물을 공급하도록 했습니다. 이 실로암은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으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으셨고 세상에 오셔서 인류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셨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실로암 물이 이 사람의 눈을 밝게 해준 겁니까? 실로암은 안과 병원이 아닙니다. 실로암 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곳으로 가라고 하신 예수님이 중요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한 사실이 중요합니다. 맹인의 눈을 뜨게 해주신 이 여섯 번째 표적을 통해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세상의 빛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까만 밤, 앞 못 보는 나에게 세상은 언제나 까만 밤이다 그러나 내 마음 속 빛이 있기에 내가 보는 세상은 오늘도 까맣지만 내 안의 세상은 눈부시게 밝다”라는 시를 쓴 실로암 안과 원장 김선태 목사님이 있습니다. 6.25전쟁 중에 폭격으로 그의 집이 날라가 버렸습니다. 일순간에 전쟁고아가 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친구들과 수류탄을 갖고 놀다가 터져 두 눈을 잃었습니다. 그는 물어 물어서 경기도 양주에 있는 친척집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친척들은 그를 무시하고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밤에 자는데 이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선태가 먹는 밥에 독을 넣어 죽이고 뒷산에 묻고 내일 피난 갑시다.” 그는 너무 무서워 야반도주를 했습니다. 2년 동안 거지생활을 하면서 숱한 고생을 합니다. 다리에 동상이 걸려 썩기도 하고 썩은 음식 먹고 식중독에 걸리기도 합니다. 옻나무 옆에서 자다가 온 몸에 옻이 올라 나병환자같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절망하지 않고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희망이 있습니까? 희망이 없다면 바다에 몸을 던져 죽겠습니다.” 그때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선태야,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희망이 있다. 너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한 나를 믿으라. 내가 너를 도와주겠다. 너는 장차 목사요, 박사가 될 것이다.” 그가 이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믿음으로 도전했을 때 누구보다 밝고 환한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고아원에서 점자로 공부하여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까지 졸업했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가 목사가 되고 박사학위를 세 개나 받았습니다. 나중에 실로암 안과 병원을 설립해서 24년간 3만 4천명에게 무료로 개안 수술을 해주었습니다. 자신은 시신경을 잃어버려서 끝내 육신의 눈을 뜨지 못하지만 다른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었습니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복지관, 교회를 세우고, 수많은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어 박사들을 배출했습니다. 그를 가리켜 남자 헬렌켈러요, 아시아의 성자로 부릅니다. 이 분이 <인생은 아침 태양처럼>이란 에세이를 쓰셨습니다. 거기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저는 절망의 구덩이에서 인간 최하의 거지생활을 하며 살았습니다. 그때 꽁꽁 얼었던 몸을 따뜻하게 녹일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은 오직 아침의 태양볕 아래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아침의 태양볕이 바로 예수님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시편 43편 5절을 인용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실로암 되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낙심하지 않고 일어서서 운명을 개척하는 위대한 인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실로암 되신 예수님을 만날 때 영적인 눈이 떠지며 개척하고 도전하는 희망의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Ⅱ. 한 가지 아는 것 (8-41)
맹인이 예수님을 통해 눈을 뜨고 미남이 되어 돌아오자, 이웃 사람들이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이때까지 자기보다 못한 맹인을 보며 동정을 하면서 위안을 받아왔는데 이제는 그럴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맹인 되었던 자를 가운데 두고 그 사람이라, 혹은 아니라, 혹은 그와 비슷하다하며 논쟁했습니다. 이때 그는 “내가 그라” 분명히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행하신 예수님의 아름다운 역사를 담대하게 전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를 바리새인들에게 데려갔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맹인을 고쳤다는 이유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했습니다. 그들은 권위주의와 율법주의로 영적인 눈이 먼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맹인 되었던 자는 그들 앞에서도 담대하게 예수님이 선지자이심을 증거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제 그의 부모를 불러 사실을 확인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출교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진실을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이에 바리새인들은 맹인 되었던 자를 다시 소환하여 예수님을 부인하도록 압력을 가했습니다(24). 그는 눈은 떴지만 공권력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예수님을 부인하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맹인 되었던 자는 조금도 겁먹지 않고 담대히 말합니다. 25절을 보십시오.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그는 예수님을 잘 몰랐습니다. 또 많은 말씀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고 있습니다. 즉 자기가 과거에는 보지 못했지만 지금은 본다는 fact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눈을 뜨게 해주셨다는 fact입니다. 이것은 부인할래야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구원의 은혜였습니다. 그는 이 한 가지 아는 은혜를 굳게 붙잡았습니다. 이때 그는 핍박과 불신과 회의와 두려움을 물리치고 믿음의 중심을 굳게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둔 세상에 빛이신 예수님을 전하는 빛의 사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용기가 어디서 났을까요? 맹인 생활의 고통이 이렇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출교를 당해서 아무리 고난을 당한다 한들 맹인 시절의 고통만큼이나 하겠습니까? 사람들에게 모욕과 천대를 받으며 남은 인생을 살아야 한들 맹인거지 시절에 받던 천대만큼이나 하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 당할 수 있는 고통이나 고난의 정도는 예수님을 알기 전, 우리의 상태가 어떠했는지를 얼마나 아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을 알기 전에도 내가 그럴듯하고 잘났고 괜찮은 존재였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위해 고통당하기를 거부합니다. “내가 왜 예수님을 위해 고통당해야 합니까?”하며 억울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알기 전, 내가 얼마나 비참한 죄인이었는지를 깊이 아는 사람은 기꺼이 예수님을 위해 고난을 당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구원받기 전의 상태를 늘 기억하며 감사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은 맹인 되었던 자의 말을 듣고 화가 나 그 맹인을 출교시켜버렸습니다(34). 예수님은 바로 이때 그를 찾아와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네가 인자를 믿느냐?” 믿음을 물어보셨습니다. 그는 “주여, 믿나이다”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는 육신의 눈만 뜬 것이 아니라 영혼의 눈까지 뜨게 되었습니다.
결론입니다. 오늘날 세상에는 운명에 우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운명을 극복할 수 없고 또 운명에 우는 자들을 도울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어둠을 밝힐 수 있는 태양과 같은 큰 빛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세상의 빛이 되십니다. 빛이신 예수님을 영접할 때 우리 마음속에 역사하는 모든 어둡고 운명적인 요소가 물러가고 생명의 빛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운명을 극복하고 어둔 세상에서 빛의 역할을 하며 빛의 증거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빛 안에 거하므로 어둔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비추는 빛의 자녀들로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