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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드온 찬양대 귀한 찬양 감사합니다.
바울 일행이 아가야와 마케도니아 방문을 마치고 이제 소아시아를 거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가는 길에 드로와라고 하는 도시를 들렀습니다. 사도바울이 소아시아로 가려고 하던 계획을 돌려서 유럽으로 방향을 바꿨던 곳 드로와이입니다. 6절에 보면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를 배로 떠나 닷새 만에 들어와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 여기서 일주일을 머물고 이제 떠나게 됩니다.
일주일 뭐 했을까? 아마 그들은 거기서도 선교했을 것입니다. 복음을 전했겠죠. 떠나기 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7절에 보면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이 주일을 지키기 위해서, 주일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함께 모였습니다.
그 주간의 첫날은 주일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날 그날을 초대 교회가 지키기 시작했습니다. 떡을 뗀다는 것은 예배를 의미해요. 단순한 교제가 아니라 떡을 떼면서 성만찬을 거행한 것입니다. 성만찬을 거행한 주일 예배, 그것을 위해서 들어와서 바울과 함께 성도들이 모였습니다.
여러분 주일 성수는 초대교회에 서서히 자리매김을 해갑니다. 처음에는 안식일을 지켰어요. 예수님께서 오신 곳이 유대 땅이고 또 그곳에서 모든 기독교의 역사가 일어났기 때문에 예수님도 안식일을 지키셨고, 초대교회 사도들도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교회가 유대교와 차별을 두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유대인들이 생명처럼 여기던 안식일 대신에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는 주일을 지켜 지키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서서히 안식일에서 주일 예배로 주일로 넘어가는 기간이 초대교회 1세기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목숨 걸고 안식일을 지켰어요.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우리 주님을 기억하면서 구속의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주의를 지키게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 우리를 의롭게 하기 위해서 부활하신 주님 그분을 기억하면서 주일을 지켰습니다.
주일은 초대교회 기독교인들의 아이덴티티와 같습니다. 사람들은 이날부터 이날을 주의 날, 오늘도 우리가 일요일 이렇게 부르기도 하지만 크리스천들은 주의 날 이렇게 부릅니다.
누가 방송에 나와서 일요일을 주의 날이라고 부르는 걸 보면 우리가 압니다. 저 사람은 과거에 교회를 다녔거나 아니면 지금 크리스찬이다.
일요일을 우리는 주일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게 나중에 1세기 말에는 그리스도인은 주일을 지키는 것으로 일상화가 됩니다. 기독교인의 정체성이 됐다. 이 말씀, 저 사람이 기독교인이냐 아니냐 하는 것을 어떻게 우리가 분별합니까? 주일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는 거 나는 예수님 믿어요.
나는 확실히 죽으면 천국 갈 줄 알아요. 나는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했어요라고 하면서 그러나 나는 교회는 안 가요라고 하면 대개 사이비에요. 아이덴티티가 분명하지 않은 거예요. 초대교회부터 지금까지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나를 소중히 여기면서 주의 날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시대부터 그렇게 된 거예요.
요한계시록 1장 10절에도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와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사도 요한 가장 오래 살았죠. 요한계시록을 쓸 때 1세기 말쯤에는 주의의 날이 일상화된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주일을 잘 지키는 교회입니다. 그게 정말 아름다운 전통이에요. 한국교회 성도들은 일단 예수 믿으면 주일날 교회 가는 걸 당연히 알아요. 얼마나 귀한 전통을 우리 조상들로부터 받았는지 몰라요. 최소한 주일날 무슨 일로 못 가면 죄스러워하거나 미안스러워하고 이러다가도 어떤 무슨 일이 일어나면 어떡하나 찝찝한 마음이라도 가져요. 그리스도인의 기본 양심입니다.
근데 요즘은 조금 달라졌어요. 코로나 이후에 주님의 날에 성도들이 함께 모이는 교회라고 하는 현장에 모여서 예배드리는 것을 피하거나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아는 희한한 시대가 펼쳐졌어요. 예배드렸냐 주일 지켰냐 그러면 지켰다고요? 어디서 집에서 인터넷으로 그건 비상시국에 하는 거예요. 모일 수 없었을 때 전쟁이 났을 때, 병원에서 내가 중환자실에 있을 때 움직일 수 없을 때 내 발로 움직일 수 있으면 성도들은 주님의 날에 함께 모여서 예배하는 것이 여러분 정상입니다.
아멘 좀 해보세요. 우리 그러셔야 되는 거예요. 그게 크리스찬이에요.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크리스찬인지 아닌지 어떻게 압니까? 내 혼자 마음으로 믿는 거 가지고는 몰라. 저 사람 예수쟁이구나. 주일날 성경책 들고 나는 오늘 주일날은 다른 일 안 해요. 예배드려야 돼요라고 말하고 가면 저 사람 크리스천이구나 그렇게 아는 거예요. 최소한 그 사람이 얼마나 거룩하게 살고 뭐 그건 그다음 일이에요.
일단 크리스천이냐 아니냐 눈에 드러나는 거 일단은 주일을 성수하는 건 기본이에요. 그게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는 크리스천의 아이덴티티예요.
근데 주일 예배도 안 드리면 주일도 안 지키면서 혼자 믿는다. 요즘은 가나안 교인이다. 우리 말을 어떻게 뒤집어가지고 안나가 교인을 가나안 교인이다 하면서 막 스스로 위로하는데 그 위로가 됩니까? 그게 성령이 내 안에서 괴로워하시는 걸 느끼지 못해요.
오늘 여기 나오신 분들은 사실 이런 얘기 안 들어도 되는 분들인데 그래도 결심하셔야 됩니다. 주일을 지키지 않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크리스천의 아이덴티티가 뭉개져요. 무뎌져요. 한 몇 개월 1년 지키지 않다 보면 이게 예수 믿는 사람인지 아닌지 나 자신도 몰라 그렇게 되는 거예요. 일주일에 미니멈 한 번씩은 나와서 예배드리고 성도와 교제하고 훈련받고 위로받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돌아가야 우리의 정체성이 우리 내면에서부터 지켜지는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뭐 신학적인 지식이 있었어요. 무슨 성경을 바삭하게 알아요 그렇지 않아요. 근데 그분들이 우리보다 훨씬 더 경건하게 살았어요. 그리고 자손들에게 신앙을 물려줬어요. 성경 공부시켜서 그랬나요?
첫째는 주일을 지켰어요. 예수 믿으면 일단 죽게 돼서 누워 있지 않는 한 하나님 전에 나가서 함께 예배하는 모습을 보여준 거예요. 그래서 자기 신앙도 지키고 그 신앙을 후손들에게 물려준 것입니다.
사실 한국교회는 제가 세계를 다녀보지만 한국교회만큼 그래도 주일 성수를 하는 교회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준 미국 장로교회만 해도 우리만큼 하지 못해요. 좋은 전통이에요. 이게 한국교회의 정체성이기도 해요. 제가 볼 때는 한국교회 교인 그러면 주일성수하는 사람들 이걸 뺏기면 안 됩니다.
파리에 여행을 오시는 분들 사업차 오시는 분들 또 유학생으로 오는 학생들 보면 제일 먼저 교회를 찾아 훌륭한 일입니다. 14시간 비행기 타고 가가지고 어떤 분은 그날 하루 일 보고 돌아가야 되는데 그 짧은 시간에 에펠탑도 올라가고 유람선도 타고 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그 시간에 교회를 찾아와서 주일 예배를 지키고 가는 걸 여러 번 봅니다. 특히 1부 예배는 많이 오셔 어떤 분은 여기 본당에서 일부 예배가 있는 줄 알고 왔다가 그러면 우리는 보통 그러잖아요.
아이고 오늘 기부는 했네. 예배 없으니까 하나님도 이해하시겠지 하고 이제 자기 일정을 소화할 텐데 비가 오는 날 그 비를 맞으면서 1km를 걸어서 인터넷으로 찾아서 일부 예배 와서 드리고 가는 분들을 봐요.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우리가 파리에 살면서 편안하게 살면서도 주의를 지키지 못한다면 부끄러운 일이에요. 지금도 여기 그런 이제 여행차 오신 분들이 계실 겁니다.
유학생들도 마찬가지고 처음에 세팅하기도 얼마나 자기 여기 정착하기도 얼마나 어려워요. 자기 파리에 와가지고 낯설고 그래도 제일 먼저 교회를 찾아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대개 그런 사람들은 큰 문제없이 유학을 마치고 가요.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거예요. 저는 우리 한국교회를 보면서 뭐 이러니 저러니 뭐 이제 앞으로 추락하느니 뭐 하지만 아직은 한국교회에 소망이 있다. 최소한 주일을 지킬 줄 안다 이거예요. 주님이 오실 날이 가까운 이때에 주님 오실 길을 예비하는 그 선교의 역사를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 주일도 안 지키는 사람들에게 누가 맡겨 그러나 최소한 한국교회밖에 없는 거예요.
제가 본 바로는 그래요. 하나님은 우리 민족을 이 시대에도 쓰실 줄로 믿습니다.
이 주일 성수 이게 어느 날 만들어낸 게 아닙니다. 초대교회에서부터 있었고 2천년을 이어온 기독교인들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희생되시고 부활하신 그 주님을 기념하는 내가 주님을 정말 사랑한다면 그 주님의 날을 지키지 않겠어요
우리가 연인 관계도 마찬가지예요. 진짜 사랑하면 그날 애인과 약속한 날을 고대하고 기다렸다가 그 자리에 갑니다. 마음 변하면 대개 딴 짓해요. 안 가죠. 정말 주님을 사랑한다면 그 은혜를 기억한다면 최소한 그날 막 사랑을 남녀가 너무 많이 하면 맨날 만나 매일 최소한 일주일에 한 번은 만나야 사랑이 유지되는 거예요.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런 겁니다. 매일 우리가 뵈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러나 최소한 아무리 바빠도 주일 한 번은 주의 날만큼은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 주일날 뭘 하냐? 제일 중요한 건 예배드리는 거예요. 오늘 들어와 있어도 그런 일이 있었어요. 7절에서 12절 내용이 뭐예요? 예배드리는 거예요. 예배 예배 중에 일어난 또 사건이기도 해요.
예배를 드리되 건성으로 드리면 안 됩니다. 예배는 우리가 권성으로 드려야 할 만큼 하찮은 사건이 아니에요. 하나님과의 만남이에요. 왕과의 만남이에요. 우리가 여기 옆에 있는 마크롱 대통령에게 약속하고 초청을 받아서 엘리제 궁에 갔다고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건성으로 슬리퍼 신고 청바지 입고 오늘 여행 중에 또 청바지 저기 추리닝 입고 오신 분들은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준비하고 가서 대화하고 그 대화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애쓸 거예요. 하나님은 왕이십니다.
근데 오늘 본문에 보면 유두고가 예배드리다가 졸다가 떨어져 죽었다. 심각한 사건이 일어났어요. 3층에서 떨어졌어요. 살 리가 없죠. 바울이 가서 보니까 9절에 보니까 떨어져 일으켜 보니 죽었는지라 어떤 사람들은 이게 기절했다가 깨어났다고 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데 오늘 죽었는지라 진단을 내린 사람은 의사입니다. 누가 지금도 의사가 결정 내리면 죽은 거야. 어떤 사람들은 자꾸 딴 소리합니다. 이 기적을 부인하기 위해서 실제로 아프리카나 문화인류학에 보면 아프리카나 이런 지역에서는 이 죽음에 대한 이해를 따르게 하더라고. 그래가지고 죽었다 부활했다 하는 것을 정신을 잃었다가 정신을 되찾으면 죽었다고 하고 부활했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지역에 가서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셨다.
우리는 막 엄청난 사건이잖아요. 근데 거기는 별일이 아닌 거예요. 에이 그거 어저께 우리 옆집 아저씨도 나무에서 떨어졌다가 죽었다가 살아났는데 뭘 그게 큰일이라고 그걸 전하냐고 그래서 거기는 다른 식으로 접근해야 돼.
가령 아프리카 같은 경우는 악령의 역사 굉장히 셉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악한 용들을 제압하시고 귀신을 내어 쫓으시고 사탄을 정복하셨다. 딱 그러면 이 사람들은 그냥 확 마음을 여는 거야. 근데 하여튼 그런 지역도 있다고 그래요. 맨날 떨어졌다 죽었다 죽었다 부활한 사람이 많아 그 기적으로 보지 않아요.
근데 여기는 진짜 기절이 아니라니까 누가가 진단을 내렸어요? 죽었는지라 생물학적 죽음을 선언한 거예요. 이 본문이 우리에게 주시는 중요한 교훈이 있어요.
예배 시간에 졸지 말자 졸지 마라 멀쩡하게 막 찬양도 잘하고 사람들 만나면 눈이 반짝반짝하다가 이 설교만 시작하면 자는 분들이 있어요. 꼭 몇 분이세요? 저는 또 좀 까다로운 사람이라 그 꼴을 또 못 보네 그래가지고 왜 좋으시냐고 해가지고 이제 또 마음 상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래서 저는 최소한 그래도 그쪽을 안 보고 저쪽을 보고 얘기합니다. 여기서 저으면 저기 보고 얘기해 지금은 의자에 앉아 이런 의자에 앉아 있으니까 졸다가 혹시 떨어져도 죽지는 않습니다. 3층은 아니니까
저는 그래도 처음에 파리 와서 제일 적응하기 어려웠던 게 성당을 가든지 개신교 우리 예배당에 가면 꼭 이런 나무 의자 앉으면 엉덩이가 베기고 뒤로 앉아도 이렇게 어떻게 허리도 이렇게 하기도 어려운 이런 의자가 굉장히 불편했는데 여기서 오래 살다 보니까 사실 이 의자가 좋아요.
예배드릴 때 조금 불편하지만 불편해서 잘 잠이 안 와 여기 앉으면 근데 우리 한국교회 가면 푹신한 의자에 등에 딱 하면 확 들어간 의자에 앉아 있으면 거기다가 원풍기까지 틀어주면 정말 이 불편한 것을 감수하시기 바랍니다. 감수하셔야 돼요.
왜 졸지 말아야 되느냐 말씀이 선포되는 시간이에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목사가 말하지만 하나님께서 목사를 통해서 메시지를 주시는 시간이에요. 우리가 가장 하나님을 존중해야 될 시간은 내가 하고 싶은 거 기도하고 올려드리는 것도 잘해야 되지만 그렇게 다 다 해놓고는 어른이 말씀하실 때 자 그 어른이 마음이 좋겠어요.
하나님께서 이제는 내가 얘기하겠다 하고 하나님 말씀이 선포되는 그 시간에는 정신 바짝 차려야 돼 받아 적어야 돼요. 김정은이 그 까라가 얘기해도 막 다니 적잖아. 물론 이제 안 하면 죽으니까 그러지만 옛날에 왕이라는 건 그런 거예요. 그 이상의 권위가 있는 거예요. 우리 하나님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는 시간이에요. 그러니까 그 시간은 얼마나 우리가 집중해야 되는가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설교 시간에 졸지 말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이제 앉아 계신 분들 중에 누가 졸게 했는데, 아니 누가 나로 하여금 졸게 했는가 목사님 아니에요 그렇게 하시는 분도 있어요. 그래서 저도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굉장히 회개하는 마음으로 내가 누구를 잠들게 했다면 어떻게 내가 이 참 얼굴을 들고 얘기하겠어요 그래도 이제 해야 되니까 하는 겁니다. 졸리게 하는 설교도 있더라고 설교자는 청중들에게 듣는 재미 깨닫는 기쁨 은혜를 누리는 찬스를 줘야 됩니다.
근데 그게 안 될 때가 있어요.
물론 모든 사람을 다 만족시킬 수는 없지만 최소한 한 80% 정도의 성도들에게는 다 이유가 있겠죠. 어떤 분들은 그러나 나머지는 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교수님들이 설교하면 그렇게 졸립더라고 혹시 여기 교수님들 계시면 미안합니다. 옳은 얘기예요. 정말 옳은 얘기를 하는데 정말 졸려 그래서 제가 기숙사 생활을 하는데 그분들 다 은퇴하셨어요. 돌아가신 분도 계시고 얼마나 졸린지 군대 가기 전이니까 20세 초반이니까 그때 잠이 많을 때기도 하지만 졸려 그래가지고 그 졸음을 겨우 참고 나서 예배 끝나고 기숙사로 들어가면 그 졸음이 연장돼가지고 1교시를 빼먹을 때가 많았어요. 무슨 수면제를 먹은 것처럼 그래서 그때 우리 교수님들처럼 설교하면 안 되겠구나 그 생각을 했어요.
근데 그걸 자율로 안 맡기고 경건 카드라는 것을 갖다 넣어야 돼요. 그거 몇 번 빠지면 기숙사에서 퇴출돼요. 오갈 데가 없어. 그러니까 가 어떨 때는 미안한 얘기인데 회개하는 마음으로 대출도 시켰어요. 도무지 욱하 주님께서 용서하실 줄로 믿고 진짜 어떤 분은 너무 열정적으로 말씀하시는데 문장은 맞는데 연결되는 게 하나도 없어. 그게 뭔 얘기인지 뭔 얘기인지 막 소리만 지르고 어떤 분은 너무 좋은 얘기를 하는데 너무 지루하게 얘기해요.
이게 이제 우리 설교자들 그래서 조는 경우가 있다 이거예요. 그래도 마음으로 내가 그래도 한 말씀이라도 받아야 되겠다 그러면 집중할 수 있어요. 피곤하면 또 졸립더라고. 제가 시골교회 출신인데 우리 충청도는 농지가 많았어. 그래서 하루 종일 일을 하고 일주일 내내 노동하고 주일 섬기고 또 하루 종일 일하고 수요기도회를 와.
근데 그때는 이런 의자도 아니고 바닥이었어요. 우리가 바닥에서 의자로 올라오는데 교회가 얼마나 시끄러웠는지 몰라 우리가 교회에 의자를 놔야 되느냐 참 한국교회 참 재밌는 일들이 많아요.
근데 이제 그때는 바닥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데 제가 이렇게 신학생 때 이제 내려가서 여름에 이렇게 보니까 한 집사님이 지금도 기억나요 윤 집사님이라고 이름까지는 안 밝히겠는데 이렇게 앉아서 위태위태 뒤에서 조는데 그러더니 한 번은 뒤로 확 넘어갔어요.
근데 정신 차리고 또 일어났는데 한 번은 옆으로 쿵 떨어지더라고 쿵 떨어졌는데 그대로 코골면서 자는 거예요. 진짜 별일이 다 있어요. 하여튼 근데 목사님도 못 깨우고 뒤에 있는 나도 어쩔 수가 없어 그냥 너무 피곤하니까 아마 하나님께서는 거기서 그냥 자는 그 모습도 귀하게 보셨으리라고 봐요.
그건 조는 게 아니고 자는 거니까 그렇죠 아예 자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그 피곤한 몸을 이끌고 나와서 예배드렸다는 자체만으로도 참 귀하다. 정말 감동적인 시간이기도 해요.
그런 경우는 예외로 치더라도 토요일 날 밤 새벽까지 파티하고 막 춤추고 놀다가 와인 마시고 이러다가 덜 깬 상태로 주일날 왔는데 안 졸릴 리가 있냐고 유학생들 토요일날 몸 관리를 해야 돼요.
예배 잘 드리려면 진지하게 말하는 거예요. 그리고는 왜 이렇게 설교가 졸립냐? 아니요. 뒷 문제 운동 선수가 경기장에 올라가기 전에 최상의 상태를 유지해요. 왜 그 시간이 중요하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들이 오기 전에 최상의 몸과 마음의 컨디션을 유지해야 돼.
왜 우리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시간이니까 그게 예배입니다. 몸 관리를 잘하세요. 컨디션 관리 청중의 마음의 자세가 또 중요해요. 몸 관리 잘하고 와도요. 여기 앉아가지고 딴 생각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러면 절대로 예배에 집중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 중심을 보시는데 그런 예배를 어떻게 또 받으시겠어요? 온 마음을 하나님께 집중해야 돼요.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되게 설교가 안 들립니다.
그리고 크리틱을 위해서 여기 공부하다 보면 자꾸 이제 크리틱을 해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설교도 은혜받으려고 안 듣고 크리틱 하는 게 습관이 되는 사람들은 설교가 잘 안 들어. 그리고 무슨 얘기하면 저게 진짜가 아닌가 검색해 난 그게 제일 무서워요.
요즘은 설교 듣다가 갑자기 숙이고 이렇게 하면 그래서 내가 통계나 연도나 숫자를 얘기 안 하잖아 진짜입니다. 완전히 확인하기 전에 얘기 안 해요. 나도 수가 있다고 진짜로 마음 순수한 마음 자세를 가지고 예배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문제는 사실 청중의 문제였어요. 유두구가 피곤한 상태로 와 있거나 아님 집중하지 않았습니다. 천하의 바울이 설교해도 좋다. 그게 우리한테는 위로가 돼요. 천하의 바울도 졸리게 할 수 있다. 사실 바울이 유언 같은 설교를 하는 겁니다. 바울은 알아요. 지금 이 길로 가면 돌아오지 못한다. 예루살렘에서 체포 구금 그리고 로마에서 그는 사형을 당합니다. 그걸 성령이 알려주시는 거예요. 유언 같은 설교를 하고 있어요.
얼마나 진지한 설교입니까? 얼마나 중요한 순간입니까? 그런데 이 설교를 듣고도 요도고는 졸았다. 꼭 한 번 한두 번 졸은 분을 제가 죄의식을 드리는 게 아니에요. 최선을 예배가 이만큼 중요하다는 겁니다.
한국교회 초대교회 시절에 송창근이라는 목사님이 계셨어요. 탁월한 신학자면서 목회자면서 그리고 민족 지도자였어요. 예배를 드렸는데 지체 높은 장로님이 졸고 계신 거예요. 그래서 장로님 설교를 멈추고 장로님께 이렇게 세웠어요. 장로님 졸리시면 나가셔서 마당 한 바퀴 돌고 오세요. 장로님이 또 주섬주섬 알겠습니다 하고 나가서 돌고 오셔서 예배를 드려 얼마나 멋집니까?
요즘 같으면 장로인 나에게 목사가 무슨 소리야 그날부로 이제 난리가 날 수가 있어요. 초대교회는 그런 모습을 가지고 있었어요. 만약 목사님이 그게 두려워가지고 아니면 좋게 좋은 게 좋은 거지 뭐 좋을 수도 있지 그래가지고 그냥 놔둬 잘한 건가요?
아닙니다. 그건 너무 인간적인 생각이에요. 그 시간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시간이고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을 위하여 말씀하는 시간이니까 깨워서라도 욕을 먹더라도 깨워서라도 그래서 제가 개척하고 초창기는 많이 깨웠어요. 졸면 설교를 멈추고 꼭 졸지 못하게 했어요. 그래서 요즘은 거의 조는 분들이 없어요. 불가피하게 조는 분들이 있어요.
2주 전에는 제 아내가 졸았어요. 알아가지고 그래가지고 이제 집에 와가지고 이실직고를 하더라고. 근데 요즘은 제가 잘 안 깨웁니다. 저도 인기 관리를 해요. 이제 말년에 조심해야지. 근데 하여튼 졸음은 안 돼요. 아멘 진짜로 그 예배가 그만큼 그 예배 시간을 우리가 많이 모이든 적게 모이든 아주 진지하게 드려야 돼요. 그래야 하나님의 역사가 있는 거예요. 그 예배를 받으실 거 아니에요
제가 교회를 처음에 개척해서 몇 년 안 됐을 때 교회가 많이 부흥했어요. 그때 그래서 저쪽 지금 여기 말고 지금 뽕레프가 쓰는 그 예배당에 있을 때 제 친구 목사님 자녀들하고 친구 목사님이 왔는데 같이 예배를 드리는데 이 아이가 화장실을 가고 싶었나 봐요. 그래서 막 끙끙거리고 이렇게 저렇게 얘기하니까 옆에 계신 나이가 많으신 권사님이 한 분 계셨는데 막 얘기하고 애를 이제 어쨌든 도와주려고 데리고 나가는데 거기가 이렇게 철장으로 정문으로 나가면 조용히 나갈 수 있는데 뒤에 이렇게 저런 문이 있어가지고 열었다 닫았다 하면 쾅쾅쾅 소리가 나요. 텅텅 그러고 안 열려 그 시간에 또 그냥 막 여러 번 하고 이렇게 하니까 예배 분위기가 깨지고 이렇게 집중이 안 돼요. 그래서 내가 설교를 멈추고 이렇게 돌아서 가시라고 말씀을 드렸어요. 그냥 다 이해하고 교인들 예배 거기 와 있는 교인들 예배 시간에 은혜 받으려고 왔는데 받든 말든 그렇게 지나가면 안 된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딱 나름대로 저는 정리의 은사가 있거든요. 상황 정리 그래가지고 이렇게 하고 이렇게 하고 이렇게 하면 됩니다. 그래서 이제 하고 예배 은혜롭게 드렸어. 그날 밤 10시에 전화가 왔어요. 목사님 내가 대사 부인이라면 나에게 그렇게 했겠어 그러시 무슨 말씀이냐 막 쏟아놓는 거예요.
그 초창기 교회가 막 개척됐을 때 교인 한 명이 소중해요. 얼마나 소중하냐면 그 빈자리에 지나가는 개라도 와서 앉아서 채워주면 좋겠다 할 정도로 간절한 시간이 근데 막 그렇게 하는데 어떻게 그런 게 아니라고 말씀을 드려도 안 되더라고 지금 살아계신지 잘 모르겠는데 이제 연세가 많이 드셨습니다.
내가 이런 교회 다니지 못하겠다 떠나겠다 그 그래서 그러시라고 그랬어요. 그냥 그건 내가 양보할 수가 없어 내가 조금 더 잘했으면 좋았을 가서 모시고 이렇게 해서 할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하여튼 그런 일들이 있더라고 그게 서로 이 예배를 거룩하게 드리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됩니다.
지금 가슴 아픈 일이에요. 저로서도 그러나 여러분 예배는 우리가 그런 것들을 양보하고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갈 만큼 하찮은 일이 아닙니다.
이 시간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시간이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는 시간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이것이 인생의 마지막 순간일 수도 있고 가장 소중한 시간이고 가장 영광스러운 시간이고 가장 거룩한 시간입니다. 우리가 그 마음을 회복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시고 역사하시고 귀하게 보십니다.
하여튼 오늘 유도고가 죽었어요. 10절에서 11절에 보면 바울이 달려가서 보니까 죽었어요. 그런데 보니까 하나님이 그 안에 생명의 기운이 있는 거예요.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살리실 의도가 그 속에 있는 걸 보고 기도했더니 그만 그가 살아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기적이 대개 언제 일어나느냐 그 일을 해결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때, 그 일이 일어나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때 하나님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이건 잘 잘못의 문제도 아닙니다. 유도고를 하나님이 살려주셨어요.
만약에 그냥 예배드리다가 떨어져 죽었다 그러면 얼마나 이게 초대교회의 스캔들이 되겠어 근데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그 일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기적의 원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주일날 바쁘신 시간에 그래도 주님 전에 잘 나오셨습니다.
여러분 평생 다른 건 몰라도 주님의 날은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