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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엥겔스 주요 저작 읽기(2), [독일 이데올로기](1) 발제 동영상과 발제문입니다.
실천적-역사적 유물론과 공산주의
−[독일 이데올로기](1)−
1. 혁명전야
[독일 이데올로기](1845~1846)는 과학적 공산주의의 초석을 다지는 핵심 저작이다. 초석을 다지는 과정에서 맑스와 엥겔스는 독일 관념론의 유령들을 상대로 향후 혁명운동의 운명을 걸고 사상투쟁을 벌여야 했다. 그들은 한때 뜻을 같이 했던 청년헤겔주의자들, 특히 [기독교의 본질](1841)을 통해 관념론 극복의 결정적 전환점을 마련해준 L. 포이어바흐를 향해서도 비판의 날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비판의 요지는 청년헤겔주의자들이 인간의 모든 활동과 한계를 인간 의식의 산물로 보는 헤겔주의적 환상에 머문 채, 현재의 의식을 바꿈으로써 ‘한계를 제거하라’고 요구하지만, 이처럼 ‘의식을 바꾸라는 요구는 결국 현존하는 것을 다른 방식으로 해석’함으로써 ‘현존하는 것을 인정하라는 요구’이며, 따라서 이들 이데올로그들은 ‘세계를 뒤흔들겠다’고 장담하지만 ‘가장 극단적인 보수주의자’라는 것이었다.
청년헤겔파가 적극 활동하던 시기는 실제로 혁명전야였다. 후진국 독일에서도 프로이센 주도 하의 관세동맹(1834)과 철도건설(1835)을 발판 삼아 산업혁명이 본궤도에 올랐다. 자본가계급이 성장하기 시작했고, 그들의 요구가 늘어남에 따라 봉건지배세력과의 정치적 갈등은 불가피했다. 노동자민중은 봉건주의적 질곡과 자본주의적 착취라는 이중고에 시달렸다. 1844년 슐레지엔 직조공들의 봉기, 1847년 베를린을 비롯한 도처의 기아와 실업으로 인한 기아폭동 등은 1848년 혁명의 서막이었다. 그런데 D. 슈트라우스의 [예수의 생애](1835)로 촉발된 헤겔학파의 분열과 철학 논쟁들을 철학자들은 엄청난 성과를 이룬 ‘세계사적 격변’으로 날조하고 찬양한다는 것이 맑스와 엥겔스의 판단이었다.(독일41-43) 그래서 그들은 ‘자신을 늑대로 여기는 양떼’의 가면을 벗기고, 이들이 ‘내세우는 허풍이 단지 독일의 비참한 현실을 반영하는 것’일 뿐임을 폭로하고 조롱하고자 했다.(독일36-37)
맑스와 엥겔스의 비판 속으로 한 걸음 들어가면, 포이어바흐는 인간도 ‘감성적 대상’임을 간파하는 점에서 탁월하지만, 감성적 세계가 ‘역사의 산물이며, 일련의 세대가 활동해온 결과라는 사실을 보지 못한다. 그는 인간을 실제로 존재하게 만든 ‘삶의 조건 아래서 파악하지’ 못한다. 그래서 실존하며 활동하는 ‘실제 역사 속의 인간’ 대신 ‘인간 자체’라는 추상에 머문다.(독일93-97) 그에게는 인간이 ‘현재 살아가는 상황에 대한 비판’이 전혀 없으며, ‘고통받는 인간 군상’을 보는 순간 그는 관념적인 ‘유적 존재를 통한 보상’으로 도피하여 다시 관념론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독일98) 그는 자신도 ‘평범한 인간(Gemeinmensch: 공동적 인간)’이므로 공산주의자라고 선언하는데, 이렇게 ‘공산주의자라는 말을 인간 자체의 술어로 전환’함으로써 ‘특정한 혁명 당파의 지지자를 지칭하는 공산주의자’라는 말을 ‘단순한 범주로 전락’시킨다.(독일90-91)
포이어바흐가 유물론의 길로 들어서고도 추상적 ‘인간’에 머물러 다시 관념론으로 후퇴한 것에 비해, B. 바우어는 ‘처음부터 끝까지 헤겔에 의존’한다.(독일171) 그만큼 그를 향한 맑스와 엥겔스의 비판은 더욱 신랄하다. 그들의 비판에 따르면 “현실적인 문제를 표현하는 철학적 상투어가 그에게는 현실적인 문제 그 자체다.”(독일167) 그는 현실적 인간과 현실적 의식 대신 ‘자기의식’이라는 상투어를, 또 현실적 자연과 사회관계 대신 이를 지칭하는 철학 범주 모두를 총괄하는 ‘실체’라는 상투를 늘어놓는다. 그에게는 ‘자기의식과 실체의 관계’가 현시대의 ‘모든 갈등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형식’이다.(독일167) 나아가 바우어는 비판가의 ‘고된 노동’, 즉 ‘비판’이 ‘유일하게 창조적이며 생산적인 원리’이며, 비판을 통해서만 인류는 해방되고 창조된다고 주장한다.(독일193-195) 그는 ‘자신의 피조물’인 셈이다. “한 마디로 말해 그는 정신 속에 존재하는 정신의 ‘나폴레옹’이다.”(독일159)
청년독일파의 또 다른 주인공 M. 슈티르너(J. K. 슈미트)는 포이어바흐가 비판한 신만 아니라 그가 내세우는 ‘인간’, 나아가 국가, 법, 사회 등도 개인을 억압하는 ‘유령’이라고 규정하고, 이에 맞서 ‘유일자’ 내지 ‘이기주의자’를 내세운다. 이에 대해 맑스와 엥겔스는 “실제 역사 전체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그는 역사의 진행을 그저 ‘기사의 역사, 강도의 역사 그리고 유령의 역사’로 볼 수밖에 없었다”고 비판한다.(독일84) 슈티르너에 대한 비판은 [독일 이데올로기] 가운데 상당한 분량을 차지한다.(역서 215-904) 그의 개인주의 내지 무정부주의, 혹은 유명론적 사유방식은 맑스와 엥겔스 시대만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끈질긴 생명력을 보이고 있다. 맑스와 엥겔스가 슈티르너를 집요하게 비판한 것은 당시 맹아상태에 있던 이러한 흐름의 근본적인 위험성을 이미 본능적으로 예감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그에 대한 비판은 현대의 이데올로기와 관련지어 별도로 다루기로 한다.
그에 비해 M. 헤스, K. 그륀, G. 쿨만 등의 진정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은 비교적 간명하다. 즉 진정 사회주의자들은 ‘혁명적 열정을 상실했고 그 자리에 일반적 인간애를 선포’하며, ‘프롤레타리아에 의지하지 않고’ 독일의 ‘소시민과 이 소시민의 박애적 환상’ 및 소시민의 이데올로그들에 의존한다.(독일932) 그들은 프랑스인이 ‘실제로 존재하는 사회 상태를 올바르게 의식하는 것을 비난하고’, ‘인간’이 되어 ‘자기의 본질’을 의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독일939) 그륀에게서는 독일을 ‘인간’, ‘인간 본성’의 나라로 간주하고 ‘다른 세속적 민족에 대립시키는’ 민족적 자부심이 최고도에 이른다.(독일997) 쿨만은 ‘모든 실재하는 사물을 관념으로 전환하고 자신을 그런 관념의 사변적 통일로 구성’하며, ‘관념의 통일이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고 통제한다’는 관념 속에 머문다.(독일1103) “이런 전체적 활동의 핵심은 현존하는 상태에 관해 알지도 못한 채 공상적으로 미화하는 데에 있다.”(독일1064)
청년헤겔파와 진정 사회주의에 대한 맑스와 엥겔스의 비판은, 1848년 혁명전야의 독일 철학이 ‘상투어 자체에 상투어로 응수’하고 ‘상투어와 싸우고 있을 뿐’ ‘현존하는 세계에 맞서 싸우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독일48) 이들과 달리 맑스는 [라인신문]에 참여하여(1842~1843) 현실적 불행의 물적 조건을 주목하면서 프롤레타리아트를 ‘혁명의 심장’이라고 파악한다. 엥겔스 역시 일찍부터 노동자들의 실제 삶 속에 깊이 파고들며 정치경제학 연구를 통해 노동자계급 해방의 현실적인 경로를 찾는다. 이제 그들은 세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아니라 세계의 변혁을 과제로 삼는 ‘실천적 유물론자 즉 공산주의자’가 된다.(독일93)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펼쳐지는 실천적 유물론의 풍부한 통찰 속으로 좀더 깊이 들어가 그 논리를 따라잡아 보자.
2. 실천적 유물론
실천적 유물론의 논리를 따라잡는다는 것은 맑스와 엥겔스의 주요 인식들을 자명한 원리 혹은 상투어로 박제해 놓지 않고, 우리의 실천적 힘으로 전환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그들의 주장을 당대의 맥락 속에서 파악하면서 동시에 그들이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은 의미들도 오늘의 실천적 요구에 근거해 밝혀낼 필요가 있다. 예컨대 흔히 실천적 유물론의 공리로 여겨지는 포이어바흐 11번 테제에 대해서도 잠시 생각하면 세계에 대한 해석이 변혁과 무관할 수 없다는 의문이 들 것이다. ‘혁명적 이론 없이 혁명적 운동도 있을 수 없다’는 원론에 비춰보아도 해석⋅이론⋅사상 자체와 변혁을 배타적으로 대립시킬 수는 없다. 맑스와 엥겔스의 비판은 당대 청년헤겔파 이데올로그들의 공허하고 상투적인 세계 해석이 혁명운동의 장애물로 기능하는 현상을 겨냥한 이론투쟁이었다. 이 역사적 맥락을 떠나 11번 테제가 반이론주의를 위한 상투어로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세계 해석을 둘러싼 사상투쟁은 변혁을 위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유물론의 또 다른 공리, 즉 ‘의식이 삶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의식을 규정한다’(독일60)는 테제도 청년헤겔파의 관념론에 맞서는 사상투쟁 속에서 그 실천적 에너지를 직접 강렬하게 발산한다. 그 의미는 ‘이데올로기 및 이에 상응하는 의식 형태가 자립적으로 존재한다’고 여기는 가상을 거부하고, ‘고정불변의 인간’이라는 관념이 아니라 ‘특정한 조건 아래 존재하는 인간’이 ‘실제로 살아가는 과정을 근거로’ 현실을 파악하려는 데에 있다. 이로써 ‘추상적인 경험론자가 보듯이 역사를 죽은 사실들의 더미로 보는 짓’과 ‘관념론자가 보듯이 역사를 공상적 주체의 공상적 행동으로 보는 짓’을 중단하자는 것이다.(독일60-61) 포이어바흐, 바우어, 슈티르너 혹은 진정 사회주의자들의 현란한 관념 유희를 당시 무르익어가던 현실적 모순들 및 혁명의 열기와 대조해서 파악할 때, 테제의 양자택일적 대조법은 충분히 유효적절했다고 볼 수 있다.
맑스는 10여 년 후에도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의 「서문」(1859)에서 위의 테제를 약간 변형하여 ‘인간들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그들의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규정한다’고 자신의 입장을 재확인한다. 그러나 이 공식 역시 재론의 여지 없이 자명한 것은 아니다. 이 공식은 사회적 존재 혹은 삶이 의식과 별개의 영역을 차지하면서 한쪽이 다른 쪽을 규정하는 외적 영향관계를 지니는 듯한 착각을 유발하기 쉬운데, 의식을 떼어낸 사회적 존재 혹은 삶은 자립적으로 존재하는 의식 못지않게 ‘특정한 조건 아래 존재하는 인간’과 무관한 관념일 것이다. 사실상 의식을 규정하는 사회적 존재에는 사회를 구성하는 개개인들의 살아 작동하는 의식과 의식적 활동의 산물들, 나아가 규정받고 있는 개개인 자신의 의식도 포함되어 규정에 가담한다. 의식의 역할을 관념론적으로 절대화하지 않으면서도, 실제의 적극적인 몫을 확보⋅확장해 가는 것은 특히 열악한 조건 속에서 변혁주체로 성장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같은 글에서 맑스는 의식의 영역 내지 이데올로기 영역을 수동적으로 규정되는 것으로만 보지는 않는다. 즉 ‘법률적, 정치적, 종교적, 예술적 혹은 철학적 이데올로기 형태들’을 토대에서 일어나는 ‘충돌들을 의식하고 그 싸움의 끝장을 내는’ 영역으로 파악한다.(정경478) 의식 없이 인간의 적극적인 대상적 활동도 없고, 인간의 적극적인 대상적 활동 없이 실천적 유물론도 없다. 포이어바흐 1번 테제에서 맑스는 대상⋅현실⋅감성영역을 ‘객체 또는 직관의 형식으로만’ 아니라, ‘감성적 인간활동으로서, 실천으로서, 주체적으로 파악’할 필요성을 역설했다.(독일26)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맑스와 엥겔스는 감성적 세계가 ‘역사의 산물이며, 일련의 세대가 활동해온 결과’임을 명시한다.(독일94) 그들은 ‘물론 이런 활동에 앞서 외적 자연이 존재’하지만 ‘인간의 역사 이전에 존재하는 자연’이란 ‘새롭게 생겨난 호주의 몇몇 산호섬을 제외하면 오늘날 전혀 존재하지 않는 자연’이라고 지적한다.(독일96-97) 새로 생겨나는 산호섬조차 탐사대상 혹은 관광상품으로 관리될 뿐 아니라, 인간 활동의 역사적 산물인 기후재앙과도 무관할 수 없을 것이다.
실천적 유물론에서 인간의 적극적 활동 내지 실천이 지니는 결정적 비중은 진리에 대한 맑스의 규정에서 확인할 수 있다. 포이어바흐 2번 테제에서 맑스는 진리를 ‘사유의 현실성과 힘, 현세성’이라고 파악하며, 실천을 통해 이를 입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독일26) 이로써 맑스는 구체적 실천과 동떨어진 관념론적 상투어들의 비현실성과 무기력상태를 유효적절하게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누구나 쉽게 동의할 수 있는 단순 확인의 영역이 아니라 적대적 모순들로 넘쳐나는 사회 속에서 맑스의 규정은 진리에 대한 논의를 힘의 논리가 주도하고 상대주의가 날뛸 수 있는 전쟁터로 밀어넣는다. 이와 반대로 레닌은 ‘지구가 인류 이전에 존재하였다는 과학의 주장은 객관적 진리’라는 입장에서, ‘반영자에 의존하지 않는 반영체의 존재’ 즉 ‘의식으로부터의 외적 세계의 독립성을 유물론의 근본전제로 삼고, 유물론자는 ‘인간 또는 인류에 의존하지 않는’ ‘객관적 진리’ 또는 ‘절대적 진리’를 인정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레닌은 맑스와 엥겔스가 인간의 실천 내지 역사 영역 밖으로 몰아낸 인류 이전 지구의 존재에서 ‘객관적 진리’의 논거를 찾지만, 지구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과학의 주장’을 진리라고 보고 있다. 그런데 이 ‘과학의 주장’은 레닌의 주장과 달리 ‘인간 또는 인류에 의존’한다. 물론 인류에 의존한다고 해서 ‘객관적 진리’, 즉 객체와 일정하게 일치하는 반영이 성립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레닌의 ‘객관적 진리’ 및 ‘절대적 진리’ 개념은 당대의 상대주의⋅주관주의⋅회의주에 맞선 그의 이론투쟁 맥락을 고려할 때 충분히 납득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대상과 반영물 사이의 적합한 관계 문제, 곧 일치 문제를 진리론의 중심부로 다시 끌어들이는 레닌의 역할은 무의미하지 않다. 이때 그 일치는 부분적⋅표피적 단계에서 전면적⋅심층적 수준으로 부단히 나아가는 무한한 과정을 전제한다. 이 변증법적 과정 속의 어떤 반영물도 절대적 일치를 요구하는 순간 독단론의 함정에 빠져들 것이다. 하지만 그 현실적 조건 속의 최대치만으로도 진리의 영예를 누릴 자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세계의 변혁’을 강조하는 포이어바흐 11번 테제가 실천적 유물론의 요체를 이룬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인간은 ‘환경의 산물’이지만 환경도 ‘인간을 통해 변화’한다고 밝히는(독일27) 3번 테제 역시 실천적 유물론의 존재 이유를 말하고 있다. 즉 포이어바흐가 고통받는 인간들 앞에서 관념론으로 후퇴하는 자리에서 공산주의적 유물론자 맑스와 엥겔스는 그러한 불행의 현실적 원인인 ‘산업과 사회구성을 변형하는 조건과 동시에 그 필연성’을 보는 것이다.(독일98) 이러한 ‘변형’, ‘환경의 변화’, ‘세계의 변혁’을 위해 그들은 ‘의식에 관한 상투어’를 청산하고 ‘현실적 실증적 과학’, ‘인간의 실천적 활동과 실천적 발전과정에 관한 서술’을 시작하기로 한다.(독일61) 이로써 역사는 ‘죽은 사실들의 더미’도 인간의 불행을 결정하는 운명의 사슬도 아닌, 구체적 조건 속에서 이루어진 인간 실천의 축적물이자, 변혁의 필연성과 그 힘의 원천을 담아내는 근거지로 자리매김한다.
3. 역사유물론
역사의 차원을 끌어들임으로써 이미 실천적 유물론은 역사유물론의 영역에 뿌리를 내린 셈이다. 역사유물론은 실천적 유물론을 통해 정립된 목표, 즉 세계의 변혁을 위해 ‘인간의 실천적 활동과 실천적 발전 과정에 관한 서술’의 영역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이를 위해 맑스와 엥겔스는 ‘자의도 독단도 아닌 현실적 전제들’, 즉 ‘경험적인 방식으로 확인될 수 있는’ ‘현실적 개인들, 그들의 행위와 물질적 생활조건들’에서 출발한다.(독일48-49) 맑스와 엥겔스는 그러한 출발 전제 세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 인간이 역사를 만들기 위해서는 살아가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최초의 역사적 행위는 욕구충족 수단의 산출, 곧 물질적 삶 자체의 생산’이다. 이것이 ‘모든 역사의 근본 조건’이다.(독일63) 둘째, ‘최초 욕구의 충족 자체, 충족 행위와 이미 얻은 충족 수단이 새로운 욕구들을 낳는다’는 것이다.(독일64) 셋째, ‘매일 자신의 삶을 쇄신해야 하는 인간이 다른 인간을 만들어서’ ‘가족을 만들기 시작한다는 것이다.’(독일64-65)
셋째 전제와 관련해 엥겔스는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1884)에서 모건의 [고대사회](1877), 바흐오펜의 [모권사회](1861) 등의 실증적 연구를 바탕으로 상론한다. [독일 이데올로기]는 첫째와 둘째 전제에 논의를 집중한다. 특히 둘째 전제는 인간의 삶이 단순 재생산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욕구의 발전을 통해 다른 동물들의 삶과 달리 발전해갈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 점에서 맑스와 엥겔스는 특히 생산력 발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들에 따르면 삶의 생산은 자연적 관계와 사회적 관계로 나타나는데, 사회적 관계는 ‘공동작업’을 의미한다. 또 ‘특정한 생산방식 또는 산업 단계는 언제나 공동작업의 특정한 방식 또는 사회적 단계와 일치’하며, 공동작업의 방식 자체가 ‘생산력’을 이룬다. 아울러 그들은 “인간이 이용할 수 있는 생산력의 양이 사회관계를 규정하며 따라서 ‘인류역사’는 언제나 산업과 교환의 역사와 연관해 연구되고 검토돼야만 한다”고 주장한다.(독일66)
이런 전제들에 따라 맑스와 엥겔스는 ‘실제 생산과정’을 ‘직접적인 삶의 물질적 생산에서 출발해’ 설명하고자 하며, ‘이 생산과정과 연관되어 있고 여기서 생겨나는 교류형식, 즉 시민사회의 다양한 단계’를 전체 역사의 기초로 파악한다. 또 ‘시민사회가 국가로서 작동하는 모습을 서술하고, 다양한 이론의 산물들과 종교, 철학, 도덕 등 의식의 형태들 전체를 시민사회에 근거해 설명할 뿐 아니라, 그것들에 근거해 그것(들)의 발생과정을 추적’함으로써, ‘사태를 전체적으로’, ‘따라서 이 상이한 측면들의 상호작용까지도’ 서술할 수 있다고 본다.(독일82-83) 물론 이처럼 ‘상호작용’을 염두에 둔다고 해서, ‘실천을 이념에 근거해 설명하지 않고 이념의 형태를 물질적 실천에 근거해 설명한다’는 원칙이 무효화되는 것은 아니다.(독일83)
맑스와 엥겔스는 이처럼 시민사회 내지 물질적 실천을 역사의 기초로 파악하는 것이 실제로 혁명을 추구하는 실천적 유물론자의 입장에서 불가피하다고 본다. 즉 “총체적 변혁의 이 물질적 요소들, 즉 한편으로는 현존하는 생산력과 다른 한편으로 혁명적 대중, 곧 기존사회의 개별 조건만 아니라, 지금까지의 ‘삶의 생산’ 자체 곧 기존사회가 기초하는 ‘전체적 활동’을 혁명할 대중의 형성이 없다면, 변혁하자는 생각을 이미 수백 번 떠들었다고 하더라도 이는 혁명의 실천적인 발전과 아무 상관없는 일”이라는 것이다.(독일84) 여기서 ‘총체적 변혁의 물질적 요소들’에 생산력과 아울러 ‘혁명적 대중의 형성’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 또 혁명적 대중의 ‘현존’이 아니라 ‘형성(Bildung)’을 말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 있다. 실천적 유물론자는 혁명적 대중을 혁명의 무기고에서 꺼내 들면 되는 것이 아니라, 혁명적 대중의 형성 내지 혁명의 조건을 만들어가는 일도 자신의 과제로 떠안아야 할 것이다.
생산력과 교류형식의 변화와 관련해 맑스와 엥겔스가 일차로 주목하는 문제는 분업이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자연이 거의 개발되지 않은 단계의 개인들이 결합하여 사회생활을 이룰 때 인간의 의식은 미분화된 ‘집단의식’을 벗어나기 어렵다. 그러나 생산성이 오르고 욕구가 확대되면서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의식도 더욱 발전하며, 이로써 노동분업도 발전하는데, 노동분업은 ‘원래 성행위에서의 노동분업’일 뿐이었다. 이후 자연적 소질, 욕구, 우연 등에 따라 노동은 ‘자연발생적으로’ 분화한다. “노동분업은 물질노동과 정신노동이 분화하는 그 순간 실제로 분업이 된다.” “이 순간부터 의식은 스스로를 현존하는 실천에 대한 의식과 다른 어떤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다. 또 이 순간부터 의식은 세계로부터 해방되어 ‘순수한’ 이론, 신학, 철학, 도덕 등의 형성으로 넘어갈 수 있다.”(독일69)
노동분업과 관련해 맑스와 엥겔스는 이데올로기 형성 문제보다 소유 문제에 좀더 관심을 기울인다. 그들은 가족의 노동분업과 동시에 ‘노동과 노동생산물의 양적 질적으로 불평등한 분배와 함께 소유도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이 소유는 ‘여자와 아이가 남자의 노예였던 가족에서 이미 싹텄으며’, 이 ‘잠재적 노예제’가 최초의 소유 형식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이 가족에서의 소유가 ‘타인의 노동력에 대한 처분권’이라는 근대 경제학자의 소유에 대한 정의와도 전적으로 일치한다고 밝힌다. 또 그들은 ‘노동분업과 사적소유’의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 본다. 즉 “사적소유가 활동의 산물과 관련해 진술하는 바와 동일한 것을 노동분업은 활동과 관련해서 진술한다.”(독일71-72) 아울러 맑스와 엥겔스는 노동분업과 더불어 ‘정신활동과 물질활동, 즉 노동과 향락, 생산과 소비가 서로 다른 개인에게 귀속될 가능성’을 지적하고, 이때의 모순은 노동분업이 제거되어야 해소된다고 역설한다.(독일70-71)
한편 맑스와 엥겔스는 노동분업을 생산력의 발전 정도와 직접 관련짓는다. 또 노동분업의 상이한 발전 단계가 상이한 소유형식과 대응한다고 본다.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그들은 부족 소유, 고대 지역공동체 소유 내지 도시국가 소유, 봉건적 신분적 소유, 부르주아적 소유 등의 주요 특징들을 대략적으로 서술한다. 소유형식 개념은 1859년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서문에서 생산양식 개념으로 대체된다. 이때에는 ‘아시아적, 고대적, 봉건적, 그리고 현대 부르주아적 생산양식들을 경제적 사회구성체의 순차적인 시기들’로 제시한다.(정경478) 역사적 대상 자체의 방대함에 비춰볼 때 책 한 권에서 완성된 서술을 기대할 수는 없으며, 그 부분적 결함들은 면밀한 실증적 연구들을 통해 부단히 수정보완해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적소유의 집중, 생산력과 교류의 보편적 발전 결과로 등장하는 대공업의 의의에 대한 맑스와 엥겔스의 서술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그에 따르면 대공업은 근대 세계시장을 산출했고 모든 자본을 산업자본으로 전환했으며, 이로써 자본의 집중이 이루어졌다. 대공업은 경쟁을 일반화하고 가능한 한 이데올로기, 종교, 도덕 등을 파괴했다. 대공업 덕분에 문명국의 모든 개인은 욕구 충족을 위헤 세계 전체에 의존하게 되었으며, 개별 국가의 배타성을 타파하여 최초로 세계사를 발전시켰다. 대공업은 자연과학을 자본 아래 포섭하고 노동 내부의 모든 자연발생적 관계를 화폐관계로 해소했다. 대공업이 침입한 곳에서는 그 이전의 모든 산업단계가 예외 없이 파괴되었다. 그러나 사적소유는 대공업이 만들어낸 대규모 생산력에 질곡이 되었다. 사적소유 속에서 생산력은 일면적으로만 발전하며, 대다수 사적소유를 파괴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모순으로 인해, 대공업이 존재할 때 비로소 사적소유의 폐지도 가능하다. 대공업은 어디서나 개별 민족의 특수성을 파괴하고 하나의 계급을 창출했다. 이 계급은 구세계의 전체 질서에서 벗어나 그 질서에 대립한다. 대공업 때문에 노동자는 자본가에 대한 관계만 아니라 노동 자체도 견딜 수 없게 된다. 대공업에 속한 노동자들은 노동자계급운동의 선두에서 대공업에서 배제된 더 열악한 처지의 노동자 대중을 견인한다. 그러나 경쟁은 노동자를 고립시킨다. 이에 맞선 오랜 투쟁을 통해서만 조직된 힘은 승리할 수 있다.(독일125-127, 135)
이러한 서술은 [공산당 선언]의 예고편으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보다는 오늘의 노동자정치운동이 엄중하게 받아들여야 할 과제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특히 대공업 노동자들이 노동자계급운동의 선두에서 노동자 대중을 견인하지 못하고 경쟁으로 인한 고립 상태, 즉 차등적 착취구조 속의 각자도생을 관성화하는 데에 일조해온 상황을 돌파하고 조직된 힘의 승리를 이끌어낼 효과적 방법이 문제다. 대공업의 생산력과 사적소유 사이의 모순으로 인해 사적소유가 폐지될 가능성은 아직 불투명하다. 생산력의 일면적 발전, 예컨대 급속한 자동화⋅무인화로 인한 고용불안정과 양극화 심화 혹은 환경재앙과 제국주의 전쟁 위기의 일상화 현상 등이 폭발의 촉매가 되려면, 총체적 변혁의 물질적 조건 가운데 한 축인 혁명적 대중의 형성과 조직된 힘의 승리가 여전히 관건인 것이다.
4. 계급, 혁명, 국가
노동분업이 사적소유와 동전의 양면인 한에서 사적소유로 인한 문제들은 노동분업으로도 나타날 수밖에 없다. 맑스와 엥겔스는 ‘물질노동과 정신노동의 분업가운데 도시와 농촌의 분리가 가장 큰 것’이며, 도시와 농촌의 대립은 야만에서 문명으로 이행하면서 시작되어 ‘문명의 역사 전체를 관통하여’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 대립은 도시에는 ‘인구, 생산수단, 자본, 향락, 욕구 등이 집중’되며, 반대로 농촌은 ‘고립화와 개별화’를 드러낸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맑스와 엥겔스는 이 대립이 개인을 노동분업에 따른 특정 활동에 종속시켜, ‘어떤 개인은 도시 동물로, 다른 개인은 농촌 동물로’ 만들어 ‘이 양자의 이해관계를 나날이 새롭게 대립시킨다’고 비판한다. 그들은 ‘도시와 농촌의 대립을 지양하는 것은 공동체의 일차 조건들 가운데 한 가지’라고 보지만, 이는 단순한 의지로 충족되지 않는 여러 전제들에 의존한다고 인정한다.(독일108-109) 이 대립은 노동분업 및 사적소유의 지양 없이 해결될 수 없다는 점에서 맑스와 엥겔스의 시대를 넘어서는 오늘의 당면문제이기도 하다.
한편 맑스와 엥겔스는 도시와 농촌의 분리를 ‘자본이 토지소유에서 독립된 존재로 발전하는 단초’로도 파악한다.(독일109) 또 봉건적 속박에서 벗어난 시민들이 공통의 조건, 공통의 대결, 공통의 이해, 공통의 도덕을 형성하면서 점차 계급을 형성하며 ‘기존의 소유가 산업자본이나 상업자본으로 전환되는 정도’에 따라 기존의 다양한 계급을 흡수하며, 그 반대편에서 새로운 계급인 프롤레타리아트가 발전한다고 설명한다.(독일114-115) 아울러 그들은 계급의 주요 특징들을 밝힌다. 그에 따르면 ‘개인들은 다른 계급에 대항해 공동의 투쟁을 수행해야 하는 한에서 하나의 계급을 형성’하며, 계급은 ‘개인들을 넘어서 자립적인 존재가 된다’. ‘계급의 자립성은 개별 개인이 노동분업 아래 종속되는 것과 같은 현상’이며, ‘사적소유와 노동 자체의 지양을 통해서만 제거될 수 있다.’(독일115) 그러나 맑스와 엥겔스는 특정 계급에 속하는 개인들이 ‘인격체이기를 그친 것처럼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단지 ‘그들의 인격성은 철저히 특정한 계급 상황을 통해 규정되고 결정된다’는 것이다.(독일153)
계급이 다른 계급에 대항한 공동의 투쟁을 전제한다는 측면에서 맑스와 엥겔스는 계급과 지배관계의 문제를 밝힌다. 그들은 계급이 ‘특정한 방식으로 나누어진 인간 집단’으로 ‘그중의 한 집단이 다른 집단 모두를 지배한다’는 사실에 근거해, ‘민주제, 귀족제, 군주제를 둘러싼 투쟁이든 선거권 등등을 위한 투쟁이든 국가 내부에서 벌어지는 이런 투쟁은 상이한 계급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진짜 투쟁을 감추는 환상적 형태’라는 결론을 끌어낸다.(독일74) 맑스와 엥겔스는 정신노동과 물질노동의 분업이 지배계급 내부에서도 이루어져, 지배계급 내부의 한 분파는 지배계급의 사상가로서 ‘지배계급 자신에 관한 환상을 형성하는 일을 생계의 주된 분야로’ 삼는다는 점을 지적한다.(독일101-102) 그렇게 생산되는 ‘지배계급의 사상’에 대한 맑스와 엥겔스의 다음 설명은 부단히 상기할 필요가 있다. “어느 시대나 지배계급의 사상이 지배 사상이다. 곧 사회를 지배하는 물질적 힘을 가진 계급은 동시에 사회를 지배하는 정신적 힘이다. 물질적 생산을 위한 수단을 장악한 계급은 이를 통해 정신적 생산의 도구 또한 통제하게 되며, 이로써 평균적으로 이 계급은 정신적 생산 도구를 갖지 못한 계급의 사상 역시 지배한다.”(독일101)
각별한 반성을 거치지 않는 한 일상적 사고가 대체로 지배계급, 즉 자본가계급의 사상에 빨려들어간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예컨대 경제학 교과서에 기업의 목표가 ‘이윤추구’라고 못박혀 있어도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학생은 별로 없다. 인류의 풍요로운 삶을 위한 물적 조건 창출 따위의 사용가치에 대한 고민이 끼어들 자리는 상식의 영역 바깥인 것이다. 그러나 ‘지배적’이라는 말에 절대적이라는 의미를 부여해야 할 필연성은 없다. 맑스와 엥겔스는 ‘특정 시기 혁명사상의 현존은 이미 어떤 혁명계급의 현존을 전제한다’는 말로 지배가 불가침의 성역이 아님을 시사한다.(독일102) 레닌은 지배에 명확한 경계선을 설정한다. “모든 민족문화 내에는 미발달된 형태일지라도 민주적이고 사회주의적인 문화의 요소들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모든 민족 내에는 노동하고 착취당하는 대중들이 있으며, 그들의 생활조건이 필연적으로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이념을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대중들의 현재 의식상태를 근거로 절대적 지배를 상정하는 이데올로기들은 ‘노동하고 착취당하는 대중들’의 ‘생활조건’ 앞에서 자체의 존재이유를 해명할 수 없다.
‘미발달된 형태’의 혁명사상이나 사적소유로 인한 고통과 주관적 극복 의지만으로 지배적인 교류형식을 변혁할 수는 없다. 맑스와 엥겔스는 ‘역사의 모든 충돌’이 ‘생산력과 교류형식 사이의 모순’에 기인한다는 공식을 내놓는다.(독일148) 즉 생산의 조건이었던 교류형식이 족쇄로 되면, 이 ‘족쇄로 된 과거의 교류형식을 대신하여, 좀더 발전한 생산력과 함께 개인들의 진보한 자주적 활동에 상응하는 새로운 교류형식이 정립되지만’, 이 교류형식도 다시 생산력 발전의 족쇄가 되면 ‘다른 교류형식으로 대체된다’는 것이다.(독일146)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에서 맑스는 같은 내용을 좀더 간명하게 ‘생산관계들이 생산력들의 발전 형식들로부터 그것들의 족쇄로 바뀌면’ ‘사회 혁명의 시기가 도래한다’고 표현한다. 여기서 맑스는 부르주아적 생산관계를 ‘사회적 생산과정의 마지막 적대적 형태’라고 보면서, ‘부르주아 사회의 태내에서 발전하는 생산력들’이 이 ‘적대의 해결을 위한 물질적 조건들을 창출’하며 이로써 ‘인간 사회의 전사는 끝을 맺는다’고 결론짓는다.(정경478)
소련과 동구 현실사회주의체제의 운명을 감안할 때, ‘마지막 적대의 해결’은 직선적이지도 불가역적이지도 않다고 보아야겠지만, 오늘의 고도 생산력과 인류절멸 위기는 이성적 존재들에게 이 ‘마지막 적대의 해결’을 절박하게 요구한다.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맑스와 엥겔스는 이 마지막 적대의 해결을 위한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떠맡을 일차적인 역할을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우선 프롤레타리아의 지배는 낡은 사회형식 전체와 지배 자체의 지양을 조건으로 하지만, ‘우선 정치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독일74) 프롤레타리아에게는 ‘자신의 인격과 그에게 강요된 생활조건인 노동 사이의 모순’이 자명하며, 그래서 프롤레타리아들은 인격으로 인정받으려면 ‘지금까지 그의 현존 조건이자 지금까지 사회 전체의 현존 조건인 노동을 지양’해야 한다. 이로써 프롤레타리아들은 ‘국가와 직접 대립’하게 되며, ‘자신의 인격을 관철하려면 국가를 전복해야 한다’.(독일155)
물론 맑스와 엥겔스에게 국가는 사회 구성원 전체를 위한 것도, 신성한 것도 아니다. 그들에게 국가는 ‘지배계급의 개인들이 공통의 이익을 실현하고 일정 시기 시민사회 전체를 총괄하는 형식’이다.(독일130) 특히 프롤레타리아들이 전복해야 할 근대 국가는 ‘근대의 사적소유에 상응’하며, 점차 ‘조세를 통해 사적소유자들에 의해 매수되며 국채제도로 인해 사적소유자들의 수중에 완전히 떨어진다.’ 근대 국가는 ‘부르주아들이 대내외적으로 자신의 소유와 이익을 서로 보장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으로 입증된 조직 형태’일 뿐이다.(독일129) 현대 국가의 다양한 기능들에 근거해 이러한 규정을 지나친 단순화라고 거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양한 기능들이 궁극적으로 지배계급의 이익에 복무하는 것은 아닌지 확인할 때, 그리하여 형식적 민주주의 하의 자본독재국가가 그 본질적 업무인 효율적 착취구조의 지속을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대중들의 자발적 동의를 얻어낼 만큼의 공익업무도 떠맡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맑스와 엥겔스의 규정은 문제의 본질을 짚어내고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5. 공산주의
프롤레타리아들이 기존 부르주아들의 국가를 전복하고 권력을 장악한 이후의 사회를 맑스와 엥겔스는 공산주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그들이 제시하는 공산주의는 그들의 자의적 독단적 상상물이 아니라, ‘현재 상태를 지양하는 현실적 운동’이며, 또 ‘이 운동의 조건들은 현재 존재하는 전제에서’ 나온 것이다.(독일78) 그 현재 상태는 무엇보다 분업과 사적소유로 인해 누구나 생활수단을 얻기 위해 ‘강제로 부여된 특정 배타적 활동범위’에 묶여 있는 상태다. 이 상태에서는 인간 자신이 생산한 것이 인간을 지배하는 어떤 ‘사물적 권력’으로 굳어버려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며, 인간의 기대와 예측을 무효화한다. 반면에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사회가 전반적인 생산을 조절하여, ‘누구나 배타적인 활동 범위를 갖지 않고 각자가 임의의 분야에서 발전’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오늘은 이것을, 내일은 저것을 할 수 있다. 또 늘 사냥꾼, 낚시꾼, 양치기 혹은 비평가로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즐거움을 느끼는 대로 아침에는 사냥을, 오후에는 낚시를, 저녁에는 목축을, 저녁식사 이후에는 비평을 할 수도 있다.”(독일72-73)
이처럼 분업의 폐해를 지양한 사회 상태를 극적으로 예시함으로써 [독일 이데올로기]가 제시하는 공산주의 사회의 모습이 비현실적 목가상태라는 인상이 강하게 남는다. [자본론]에서 맑스는 어느 사회든 필요노동은 불가피하다고 본다. 그리고 이 필연의 영역에서 자유의 영역으로 넘어가기 위한 현실적 방안으로 생산력의 증대를 통해 최소의 노력으로 인간성에 적합한 자연과의 물질대사를 수행함으로써 노동일을 축소할 것을 제안한다.(자본3,1041) 그러나 생산을 자연발생적인 상태로 방임하지 않고 사회가 합리적으로 규제해야 한다는 생각은 두 경우 동일하다. 또 분업의 폐해를 극복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고타강령 비판] 가운데 높은 단계 공산주의의 특징을 서술하는 대목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다.(고타377)
[독일 이데올로기]가 제시하는 공산주의 운동의 조건들은 충분히 현실적이다. 그에 따르면 우선 생산력의 발전이 기존 생산관계와 충돌하는 가운데, ‘기존 사회의 이익을 누리지 못하면서 그 사회의 모든 부담을 짊어져야 하는 계급, 그 사회에서 배척당하면서 모든 다른 계급과 대립할 수밖에 없는 계급’, 즉 노동자계급이 ‘사회 구성원 가운데 다수를 이루면서, 이 계급에서 근본적 혁명이 필연적이라는 의식 곧 공산주의 의식’이 나오며, 또 ‘다른 계급 구성원도 이 계급의 지위를 관찰함으로써 이 의식을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독일141-142) 또한 이 공산주의 의식이 광범위하게 발생하고 실현되려면 ‘인간의 광범위한 변화가 필요’한데, 이러한 변화는 혁명을 통해서만 일어날 수 있다. “그러므로 혁명이 불가피한 이유는 지배하는 계급이 다른 방식으로는 전복될 수 없기 때문만 아니라 전복하려는 계급이 오직 혁명을 통해서만 과거의 잔재를 일소하고 사회를 새롭게 건설할 능력을 얻기 때문이기도 하다.”(독일143) 이 대목에서는 실천적 유물론의 힘을 새삼 절감할 수 있을 것이다.
운동의 일차 전제인 생산력 발전의 절대적 필요성을 맑스와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밝힌다. “생산력의 발전 없이는 단지 결핍만이 일반화되고 이 결핍과 함께 필수품을 둘러싼 투쟁도 다시 시작되며 따라서 갖가지 낡은 해악이 부활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독일76) 아울러 생산력의 보편적 발전을 통해서만, 인간의 보편적 교류가 확립되고, 모든 민족에서 무산자 대중이 발생하며, 지역적 개인이 세계사적이고 보편적인 개인으로 대체되기 때문이다. “실질적으로 공산주의는 주요 민족들의 행위로서 ‘일거에’ 그리고 동시적으로만 가능하며, 이는 생산력의 보편적인 발전 그리고 이와 연관된 세계적 교류를 전제한다.”(독일76-77) 이 구절은 소련의 존립과 세계혁명의 필요성을 놓고 벌어진 일국사회주의론과 영구혁명론 간의 충돌 논거가 되지만, 맑스와 엥겔스라면 자신의 이론이 아니라 현실적 조건에 따를 것을 권장했을 듯하다. 또 파리코뮌의 의의에 대한 그들의 평가에 비춰보면, 현실사회주의체제 유지에 절대적 비중을 두면서 소비에트의 근본민주주의를 최대한 살려내자고 했을 것이다. 아울러 제국주의세력과의 사활을 건 전쟁에 직면해 국제주의의 성장⋅강화의 필요성을 역설했을 것이다.
맑스와 엥겔스의 ‘세계사적 전제전환’은 자본주의를 불변의 자연상태가 아니라 역사적 산물로 보고 인간의 실천을 통해 바꿀 수 있다고 전제하는 데에 머물지 않는다. 분업과 사적소유 및 계급과 함께 지배관계 자체가 소멸하는 사회를 구현할 수 있다고 보는 것도 ‘세계사적 전제전환’의 핵심요소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까지의 모든 운동과 달리 공산주의 혁명은 ‘계급 자체와 더불어 모든 계급적 지배도 폐지한다’고 본다.(독일142) 또 그들은 이제까지의 모든 운동과 공산주의를 구분하는 특징을 “공산주의가 지금까지의 모든 생산관계와 교류관계의 토대를 전복하고, 모든 자연발생적인 전제들이 이제까지의 인간이 창조한 것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의식하며, 그 전제에서 자연발생성을 벗겨내면서 단결된 개인들의 힘에 복종시킨다”는 사실에서 찾는다.(독일144) 공산주의에서는 ‘개인들의 현존 조건 및 모든 사회 구성원들의 현존 조건이 개인들 자신의 통제 아래 있다’는 것이다.(독일150)
공산주의 혁명을 통해 프롤레타리아들은 ‘보편적 단결’의 힘으로 ‘기존 생산력 전체를 전유’하고 이를 위해 ‘물질적 생산수단에 상응하는 개인적 능력을 발전’시킴으로써 ‘자주적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된다.(독일133) “프롤레타리아들의 전유에서 하나로 통합된 거대 생산수단은 각 개인에게, 소유는 만인에게 포섭돼야만 한다.”(독일139) 또한 프롤레타리아트는 “지금까지 그가 처해 있던 사회적인 지위로 말미암아 그에게 아직 남아 있는 모든 것을 벗어던진다”.(독일139) 그리하여 “각 개인들은 상이한 민족적 혹은 지역적 제한들에서 벗어나, 전 세계에 걸친 생산활동(정신적 생산까지도 포함한)에 실천적으로 관계하며, 전지구의 모든 종류의 생산(인간의 창조물들)을 향유할 능력을 획득할 수 있게 된다.”(독일81)
맑스와 엥겔스가 혁명전야에 인류의 발전과정에 대한 역사적 실증적 관심과 나름의 현실적 판단에 따라 설정한 이러한 목적들은 향후의 과학적 연구 성과들에 근거해 좀더 명확하게 구체화되거나 부분적으로 수정되기도 하지만, 그 기본 취지는 그들의 이론 전체를 지속적으로 규정한다. 혁명의식으로 무장한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단결을 통해 정치권력과 함께 생산력 전체를 전유하는 것, 모든 자연발생적 전제들을 인간의 창조물임을 의식하여 단결된 개인들의 힘에 복종시킨다는 것, 프롤레타리아 각 개인이 자신의 능력을 발전시킬 뿐만 아니라 민족적 지역적 편협성을 떨쳐버리고 인류의 모든 유산들을 향유할 수 있게 되는 것, 분업 및 사적소유와 함께 계급지배 자체를 소멸시키는 것 등이 그 궁극 목적의 영역을 구성한다. 이를 한마디로 노동자국가를 경유한 풍요로운 평등사회 건설이라고 요약해도 좋을 것이다.
(2부에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