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설하는 일기
백승우
남사스럽다. ‘발설하는 일기’라니. ‘발설’과 ‘일기’가 어울릴 수가 있는 단어인가. 일기란 지극히 개인적인 글이거늘. 발설하란다. 일기를 발설한다는 것에는 몇 가지 떠오르는 부정적인 측면이 있다. 그 중에서도 내게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 반복되는 사적인 일상을 타인에게 발설하기 위해서는 본인에게는 하지 않아도 될 부수적인 설명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귀찮은 것이다. ㅋㅋ (여기 이런 표현 써도 되나요? 이 글은 일기니까 상관 없겠죠. ㅎㅎ)
나는 보통 7시에 일어난다. 그리고 샤워를 하려고 욕실로 들어 간다. 떨어지는 물 속에서 덜 깬 잠을 쫓아본다. 난 두 가지 직업이 있다. 흔히 말하는 투잡인생이다. 하나는 양재동에 있는 한 지역교회의 청소년부 담당 파트타임 전도사이다. 교회와 담임목사님의 배려로 주중에는 특별히 교회에서 맡은 일이 없다. 그래서 주중에는 다른 일을 하나 더 하고 있다. 이제는 이 두 번째 일을 하려고 출근을 준비하는 것이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면 아내가 이미 식사를 차려 놓았다. 26개월 그리고 이제 곧 6개월이 되는 아들과 함께 식사를 한다.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은 큰 행복이다. 식사를 마치면 셔츠와 바지로 갈아입고 핸즈프리 이어폰을 차고 두 개의 휴대폰을 들고 나갈 준비를 한다. 밖은 이미 어둡다. 큰 아이는 잘 다녀 오라며 꾸벅 인사를 하고 뽀뽀를 해 준다. 아내도 둘째를 안고 뽀뽀를 하며 잘 다녀오라며 그리고 조심하라며 인사한다.
그렇다.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졸면 안 된다. 그래서 낮잠을 조금 자고 나가는 것이다. 난 요즘 한창 이슈가 되고 있는 대리운전 기사이다.
대리운전 기사를 시작한 것은 약 3개월 정도 된다. 우리 청소년부 교사 가운데 한 분이 대리기사셨는데 신학교 졸업 후 주중에 일할 곳을 찾고 있던 내게 소개해 주었다. 낮에는 두 아이 육아에 정신 없는 아내를 도울 수 있고 교회 사역은 주말만 하면 되어서 주중에 할 수 있는 일로서는 가장 안성맞춤이었다. 특히나 운전하는 것을 좋아하고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는 내게는 좋아하는 일도 하며 돈도 벌 수 있으니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하지만 항상 좋은 일만 생기는 것은 아니다. 오늘 일어난 일이 바로 그런 경우다. 첫 콜로 양재동에서 방이동까지 이동을 했다. 다음 콜을 잡기 위해 시내버스를 타고 잠실에서 신천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때 신천동성당에서 용인 보정동까지 가는 콜이 떴다. 버스 안에서 신천동성당을 얼른 검색해 보니 송파구청 사거리에 있었다. 콜을 잡고 서둘러 버스에서 내렸다. 그리고 고객과 통화를 하며 왔던 길을 거슬러 뛰어가며 신천동성당까지 이르러 고객이 알려준 주차장을 찾아 보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잘못 왔나 싶어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 찾아 보았지만 역시 찾을 수 없었다. 다시 고객에게 전화해 보았다. 송파구청 사거리에 있는 것이 맞냐고 물어 보았다. 아니란다. 신천역쪽에 있는 성당이란다. 아니, 그건 신천동성당이 아니라 잠실성당이잖아. 결국 30여분을 헤매며 뛰어 다닌 콜을 취소했다. 뛰어 다니느라 숨은 헐떡이고 땀은 셔츠에 흥건히 베이고 화는 머리끝까지 솟았다.
그냥 집에 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 일은 진상 고객을 만나는 것에 비하면 별 일 아니다. 감사하게도 난 아직까지 진상 고객을 만난 적은 없었다. 그 후 몇 개의 콜을 더 잡아 석촌동까지 갔다. 시간은 벌써 새벽 1시가 되어 간다. 외대 앞에서 N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글쓰기학교 19기 카톡방에 글이 올라온다. 정예림님이 채팅방을 잘못 찾아와 글을 남겼다. 뿜었다. (푸하 ^^) 화가 나 기분이 안 좋았던 것이 한 순간에 풀려 버렸다. 한창 카톡에 열중하고 있는데 옆에서 함께 버스 기다리시던 다른 대리 기사분이 말을 걸어 왔다. 내게 외모만으로는 대리 기사가 아니라 선생이나 교직원 같아 보인다고 했다. 내가 지어낸 것이 아니라 정말 그렇게 말했다. ㅋㅋ 기분이 더 좋아졌다. 난 참 단순하다. 그 대리 기사님과 함께 버스를 타고 강남까지 함께 왔다.
강남까지 오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해 주셨다. 외대에서 강남까지 그 긴 시간을 끊임없이 이야기 하셨다. 그런데 지루하지 않았다. 이야기꾼이셨다. 낮에는 대포차와 관련된 일을 하신단다. (이거 불법 아닌가?) 그리고 예전에는 태권도를 하셨는데 몇 번의 싸움으로 인해서 교도소도 다녀오신 전과가 있으신 분이셨다. 그분은 작년 12월부터 대리 기사를 시작하셨는데 본인이 터득한 노하우도 전수해 주셨다. 강남까지 오면서 우리는 꽤 친해졌다. 그리고 서로 좋은 콜 타길 바라고 다음에 또 보자며 헤어졌지만 우리는 안다. 다음에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을.
서울의 밤은 대리 기사들의 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금 과장을 하자면 새벽에 다니는 차들 중 택시를 뺀 절반 이상의 차들이 대리 기사들이 운전하는 차들일 것이다. 대리 기사들의 집결지 강남 교보타워 사거리는 조그만 야시장을 방불케 한다. 대리 기사들을 위한 의복과 휴대폰 관련 물품들, 먹거리들, 그리고 셔틀이라고 불리는 각 지역에서 대리 기사들을 실어오고 실어 나르는 승합차들의 무리, 낮에는 결코 상상할 수 없는 모습들이다. 수년 전에는 없었을 풍경들이 서울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어디에서 흘러 들어 왔을까?
짧은 시간 이 일을 하면서 아주 소수의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해 보았을 뿐이지만, 모두가 나름의 스토리를 갖고 있었다. 비록 사회에서는 비주류이고, 열등한 부류이고, 열살 이상 손 아래 사람에게 쉽게 반말을 들을 수 있고, 너무나 쉽게 다른 사람으로 대체될 수 있는 직업군(정식 직업으로 분류되지도 않아요)이지만 한때는 잘 나가는 직장인이었고, 전문 분야의 기술자였고, 산업의 역군이었고, 성실한 학도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또한 자신의 가족의 생계와 미래를 위해서 매일매일 스토리를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보통 3시쯤 집으로 들어 온다. 아내는 나를 위해 거실 불을 항상 켜둔다. 내 서재에 들어오면 가끔 아내는 포스트 잇에 사랑한다느니, 수고했다느니, 푹 쉬라느니 이 따위 말들을 적어 놓는다. ㅎㅎ ^^ 모아둔다. 오늘은 모니터에다가 책갈피용 포스트 잇으로 ‘사랑해’를 적어 놓았다. 모니터 사용하려면 저거 떼어야 되잖아. 아~~ 귀찮아~~~~ ^____________^
첫댓글 우와! "사랑해" 예뻐요! 센스있으시네요^^ 사진 감사! 무거울 수 있는 이야기를 이렇게 재미있게 쓰시다니!
에고~ 잘 봐주셔서 감사해요 ^^;;
울 와이프님도 보여드려야겠다는
포스트잇 많이 사두세요 ㅎㅎ
제가 이야기했는데 듣는 척도 안 하신다는 ㅋㅋㅋ
아픔들을 밝은 햇살로 바꾸는 특별한 재능, 많은 이들이에게 힐링의 장이 될 것 같아요. 와우! 사모님도 전도사님도 센스가 만점이시네요^^
에고~ 감사합니다. 전 센스가 꽝인데 아내가 좀 있는듯 해요. (이런 팔불출~~) ^^
진심 너무 감동했어요. 웃다가 울다가. 이런 글을 언젠간 쓸 수 있길 기대해봅니다
저도 그런 글 쓰고 싶어요~~ ^^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