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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이 저술한 사기(史記)에 패수(浿水)는 조선과 한(漢)나라의 국경이라 했는데 그것이 어느 강을 가리키는지 여러 학설이 난무하여 종잡을 수가 없다.
전국시대(戰國時代, BC 403 ~ BC 221)에 진(秦), 조(趙), 연(燕)은 북방 유목민족을 막기 위해 장성을 건설했다. 이를 진장성(秦長城), 조장성(趙長城), 연장성(燕長城)이라 한다. 진시황은 천하통일 후 장군 몽염을 시켜 수십 개의 성과 요새를 신축하고 기존의 삼국 장성을 수선하여 연결하니 그 길이가 만여 리에 달하여 후세에 이를 만리장성이라 불렀다.
[사기 진시황본기]
地東至海曁朝鮮 西至臨洮羌中 南至北嚮戶 北據河爲塞 竝陰山至遼東
땅은 동쪽으로 바다와 조선에 이르고, 서쪽은 임조와 강중에 이르고, 남쪽은 북향호에 이르고, 북쪽은 황하에 의거하여 요새를 만들어 음산(陰山)을 따라 요동(遼東)에 이르렀다.
[사기 몽염열전]
秦已竝天下 乃使蒙恬將三十萬衆 北逐戎狄 収河南 築長城 因地形 用制険塞 起臨洮至遼東 延袤萬餘里
진(秦)이 천하를 병합하고 몽염을 시켜 30만 무리를 이끌고 융적(戎狄)을 북으로 내쫓아 하남(河南)을 거두었다. 지형을 따라 험준한 곳을 이용해 요새를 만들고 장성을 쌓아 임조(臨洮)에서 시작하여 요동(遼東)에 이르렀고 길이가 만여리에 달했다.
[사기 흉노열전]
後秦滅六國 而始皇帝使蒙恬將十萬之衆北撃胡 収河南地 因河為塞 築四十四縣城 ... 因邊山険塹谿谷可繕者治之 起臨洮至遼東萬餘里
진(秦)나라가 六國을 멸하고 시황제(始皇帝)는 몽염(蒙恬)을 시켜 10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북으로 胡를 공격해서 하남 땅을 빼앗고 황하를 요새로 삼아 44현의 성을 쌓았다. ... 험한 산과 계곡을 참호로 삼고 미비한 곳을 수선해 임조(臨洮)에서 요동(遼東)까지 만여리였다.
당나라(唐) 현종(玄宗) 개원(開元) 24년(736년)에 장수절(張守節)이 사기정의(史記正義)를 저술했다.
◇ 사기정의(史記正義) :
史記 : 秦始皇 二十六年 地東至海曁朝鮮
진시황 26년 영토는 동쪽으로 바다와 조선에 이르렀다.
史記正義 注 : 海謂渤海 暨及也 東北朝鮮國
해(海)는 발해(渤海)라고 부른다. 기(暨)는 급(及 = and)이다. 발해(渤海)의 동북쪽은 조선국이다.
기원전 210년 진시황이 죽은 후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기원전 207년 12월에 진나라가 멸망하고 항우의 초나라와 유방의 한나라가 기원전 203년 12월까지 싸워 한(漢)이 승리했다. 중원의 혼란기에 사방의 이민족들은 잃었던 영토를 수복하였다.
한무제(漢武帝)를 이은 소제(昭帝) 6년(BC 81년) 염철주(鹽鐵酒)의 국가전매제 폐지를 두고 벌어진 대토론회의 내용을 30년 후 환관(桓寬)이 염철론(鹽鐵論)이라는 책으로 편찬했는데 조선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염철론(鹽鐵論) 권 38 비호편(備胡篇)]
大夫曰 往者四夷具强 竝爲寇虐 朝鮮踰徼 劫燕之東地
대부가 말하기를 옛적에 사이(四夷)가 모두 강하여 함께 쳐들어왔는데 조선은 요(徼)를 넘어 연(燕)의 동쪽 땅을 빼앗았다.
요(徼)는 요동외요(遼東外徼)를 가리킨다. 염철론은 진시황 사후의 혼란기에 조선이 과거 연나라에게 빼앗겼던 땅을 모두 수복했다고 한다. 주류학계는 진개가 조선을 침공하기 전 연나라와 조선의 국경이 태자하이고 침공 후의 국경인 만번한은 청천강이라고 주장하면서 염철론의 기록을 은폐하였다.
BC 203년 12월 항우가 해하에서 패하여 자결하고 BC 202년 1월 유방이 황제에 오르니 한(漢) 고조(高祖)라 한다. BC 202년 8월 노관이 연왕(燕王)에 책봉되었고 패수를 조선과의 경계로 정했다.
[史記 朝鮮列傳]
朝鮮王満者 故燕人也 自始全燕時 嘗略屬眞番朝鮮 為置吏 築鄣塞 秦滅燕 屬遼東外徼 漢興為其遠難守 複修遼東故塞至浿水 為界屬燕 燕王盧綰反入匈奴 満亡命 聚黨千餘人 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鄣 稍役屬真番朝鮮蠻夷 及故燕斉亡命者 王之都王険
조선왕(朝鮮王) 만(滿)은 옛 연(燕)나라 사람이다. 연은 전성기 때부터 일찌기 진번(眞番)과 조선을 공략하여 복속시키고는 관리를 두고 장새를 쌓았다. 진(秦)이 연을 멸하고 요동외요(遼東外徼)에 속하게 했다. 한(漢)이 일어나고 그 곳(요동외요)이 멀어서 지키기 어려우매 요동의 옛 요새를 복구 수리해서 패수(浿水)에 이르러 경계로 삼고 연(燕)에 속하게 했다.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반역하여 흉노(匈奴)로 들어가자 위만이 망명했다. 무리 천여 명을 모아 상투를 틀고 만이(蠻夷)의 복장으로 동쪽으로 달아나 새(塞)를 나와 패수(浿水)를 건너 진(秦)의 옛 공지(空地) 상하장(上下鄣)에 머물렀다. 점차 진번과 조선의 오랑캐 및 옛 연(燕)나라와 제(齊)나라 망명자들을 복속시키고 왕이 되어 왕험(王險)에 도읍했다.
[三國志魏志東夷傳]
及漢以盧綰爲燕王 朝鮮與燕界於浿水 及綰反入匈奴 燕人衛滿亡命 爲胡服 東度浿水 詣準降 說準求居西界 中國亡命爲朝鮮藩屛準信寵之 拜爲博士 賜以圭 封之百里 令守西邊 滿誘亡黨 衆稍多 乃詐遣人告準言 漢兵十道至 求入宿衛 遂還攻準 準與滿戰 不敵也 將其左右宮人走入海 居韓地 自號韓王
[삼국지위지동이전]
漢이 노관을 燕王으로 삼았고 조선과 연이 패수를 경계로 했다. 노관이 모반하여 흉노로 들어가자 연나라 사람 위만이 망명했다. 오랑캐의 옷을 입고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준에게 투항했다. 준에게 서쪽 경계에 살기를 구하고 중국 망명인으로 조선을 지키는 병풍이 되겠다고 했다. 준이 믿고 은혜를 베풀어 박사 벼슬을 주고 규를 하사하고 백리의 땅을 봉하여 서쪽 변방을 지키게 하였다.
史記 朝鮮列傳
元封二年 天子募罪人撃朝鮮 其秋 遣樓船將軍楊僕従斉浮渤海 兵五萬人 左將軍荀彘出遼東 討右渠. 右渠発兵距険 左將軍卒正多率遼東兵先縦敗散 多還走坐法斬 樓船將軍將齊兵七千人先至王険 右渠城守 窺知樓船軍少 即出城撃樓船 樓船軍敗散走 將軍楊僕失其衆 遁山中十餘日 稍求収散卒 複聚 左將軍撃朝鮮浿水西軍 未能破自前
天子為兩將未有利,乃使衛山因兵威往諭右渠。右渠見使者頓首謝 願降 恐兩將詐殺臣 今見信節,請服降 遣太子入謝,獻馬五千匹,及饋軍糧 人衆萬餘,持兵,方渡浿水,使者及左將軍疑其為變,謂太子已服降,宜命人毋持兵。太子亦疑使者左將軍詐殺之,遂不渡浿水,復引歸。山還報天子,天子誅山。
원봉 2년(기원전 109년) 천자는 죄인을 모아 조선을 공격했다. 그 해 가을,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이 제(齊)를 떠나 발해(渤海)를 건넜고,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는 우거(右渠)를 토벌하고자 병사 5만으로 요동을 나왔다. 우거는 군사를 일으켜 험한 곳을 막았다. 좌장군의 졸정(卒正) 다(多)는 요동군을 이끌고 선봉에 섰으나 패하여 흩어졌다. 다(多)는 달아나서 돌아왔으나 군법에 따라 목이 잘렸다. 누선장군은 제병(齊兵) 7천 명을 이끌고 먼저 왕험성에 이르렀다. 우거가 성을 지키고 있다가 누선의 군사가 적음을 탐지하고 곧바로 성을 나와 누선을 공격하니 누선의 군사들은 패하여 분산도주했다. 장군 양복은 무리를 잃고 산속에 십여 일 숨어 있다가 흩어진 군사들을 조금씩 찾아 수습했다. 좌장군은 패수 서쪽의 조선군을 공격했으나 쳐부수고 전진할 수 없었다.
천자는 두 장수가 유리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위산(衛山)을 보내 군대의 위세로 우거를 타이르도록 했다. 우거는 사자(使者)를 보고 머리가 바닥에 닿도록 절하고 사죄하며 말하기를, “항복을 원했으나, 두 장수가 속임수를 써서 신(臣)을 죽일까 두려웠습니다. 지금 믿을 만한 표식을 보니 항복을 청합니다. 태자(太子)를 보내 입조(入朝)하여 사죄하고, 말 오천필을 바치고, 군량(軍糧)를 보내겠습니다.” 하였다. 만여 명이 무기를 지니고 패수를 건너려 하자, 사자(使者) 위산과 좌장군은 변고가 있을 것을 의심하여 “이미 항복했으니 사람들에게 무기를 지니지 말라고 명해야 마땅하다.” 라고 태자에게 말했다. 태자 역시 사자(使者)와 좌장군이 속임수를 써서 죽일까 의심하여 마침내 패수를 건너지 않고 다시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위산이 돌아가 천자에게 보고하자 천자가 위산을 죽였다.
한나라 육군은 연경에서 출발하여 동진했는데 패수 서쪽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한나라 육군은 여러 달 동안 패수를 건너지 못하였다. 문맥상 패수는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왕험성은 패수에서 동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으며 발해의 동북쪽이다. 한무제는 조선을 멸하고 사군을 설치했다. 사기보다 이백년 뒤에 반고(班固)가 저술한 한서지리지는 사군이 낙랑군, 현도군, 진번군, 임둔군이라고 했다.
後漢代에 상흠(桑欽)이 하천지리서 수경(水經)을 저술했고 그 뒤에 여러 사람이 한서지리지에 주석을 달았다. 그 후 북위(北魏 386~534)에서 역도원(酈道元 , 466년 ~ 527년)이 한서지리지 주석 등을 인용하여 수경(水經)에 방대한 주석을 달아 515년에 수경주(水經注)를 완성했는다. 수경(水經)과 수경주(水經注)는 과거 연나라의 하천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水經
㶟水 出鴈門陰館縣 東北過代郡桑乾縣南 過廣陽薊縣北
루수(㶟水)는 안문군 음관현에서 나와 동북으로 흘러 대군 상건현 남쪽을 지나 광양군 계현(薊縣) 북쪽을 지난다.
注 : 㶟水 又東逕薊城北 又東南流
루수(㶟水)는 다시 동쪽으로 흘러 계성(薊城) 북쪽을 지나고 다시 동남쪽으로 흐른다.
水經
濕餘水 出上谷居庸闗東 東流過軍都縣南 又東流過薊縣北 又北屈東南至狐奴縣西入于沽河.
습여수(濕餘水)는 상곡군(上谷郡) 거용관(居庸闗) 동쪽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군도현(軍都縣) 남쪽을 지나고 다시 동쪽으로 흘러 계현(薊縣) 북쪽을 지나고 다시 북쪽으로 굽었다가 동남쪽으로 흘러 어양군 호노현(狐奴縣) 서쪽에 이르러 고하(沽河)로 들어간다.
※ 거용관(居庸關) : 북경시 중심부에서 60 km 북쪽에 있다. 춘추전국시대 연나라(燕)가 이곳에 거용새(居庸塞)를 건설했다.
水經
沽河 南過漁陽狐奴縣北 西南與濕餘水合為潞河
고하(沽河)는 남쪽으로 흘러 어양군 호노현(狐奴縣) 북쪽을 지나고 서남쪽으로 흘러 습여수(濕餘水)와 합하여 로하(潞河)가 된다.
注 : 漁水又西南入沽水 沽水又南與螺山之水合 水出漁陽城南小山 魏土地記 曰 城南五里有螺山 其水西南入沽水 沽水又南逕安樂縣故城東 晉書地道記 曰 晉封劉禪爲公國 俗謂之西潞水也 濕水入焉 俗謂之合口也
어수(漁水)는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고수(沽水)로 들어간다. 고수는 다시 남쪽으로 흘러 나산수(螺山之水)와 합친다. 어수는 어양성 남쪽 작은 산에서 나온다. 위토지기(魏土地記)에 이르기를 어양성 남쪽 5리에 라산(螺山)이 있다. 어수(漁水)가 서남쪽으로 흘러 고수(沽水)로 들어간다. 고수는 다시 남쪽으로 흘러 안락현(安樂縣) 옛 성의 동쪽을 지나간다. 진서지도기(晉書地道記)에 이르기를, 진(晉)이 안락현에 유선(劉禪)을 봉하여 안락공국(安樂公國)으로 만들었다. 세간에서는 서로수(西潞水)라 한다. 습수(濕水)가 (고수로) 들어가는데 세속에서 말하기를 합구(合口)라 한다.
水經
鮑丘水從塞外來 南過漁陽縣東 又南過潞縣西 又南至雍奴縣北 屈東入于海
포구수(鮑丘水)는 새(塞) 밖으로부터 와서 남쪽으로 흘러 어양현 동쪽을 지나고 다시 남쪽으로 흘러 어양군(漁陽郡) 로현(潞縣) 서쪽을 지난다. 다시 남쪽으로 흘러 어양군 옹노현(雍奴縣) 북쪽에 이르러 동쪽으로 굽어 바다로 들어간다.
水經
濡水從塞外來 東南過遼西令支縣北 又東南過海陽縣西 南入于海
유수(濡水)는 새(塞) 밖으로부터 와서 동남쪽으로 흘러 요서군 영지현(令支縣) 북쪽을 지나고 다시 동남쪽으로 흘러 해양현 서쪽을 지나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注 : 濡水又東南逕盧龍塞 濡水又東南至絫縣碣石山 文穎曰 碣石在遼西絫縣 王莽之選武也 絫縣并屬臨渝 王莽更臨渝為馮徳. 地理志曰 大碣石山在右北平驪成縣西南 王莽改曰掲石也
유수(濡水)는 다시 동남쪽으로 흘러 노룡새(盧龍塞)를 지난다. 유수(濡水)는 다시 동남쪽으로 흘러 루현(絫縣) 갈석산(碣石山)에 이른다. 문영(文穎)이 말하기를 갈석산(碣石山)은 요서군 루현(絫縣)에 있다고 했는데 왕망이 선무(選武)로 고쳤다. 루현(絫縣)은 임유현(臨渝縣)에 병합되었고 왕망(王莽)이 임유현(臨渝縣)을 풍덕현(馮徳縣)으로 바꾸었다. 지리지에 이르기를 대갈석산(大碣石山)은 우북평군(右北平郡) 여성현(驪成縣) 서남쪽에 있으며 왕망이 게석(掲石)으로 고쳤다고 했다.
※ 계현(薊縣) : 춘추전국시대 연나라(燕)의 도읍이다. 수경(水經)은 루수(㶟水)가 계현(薊縣) 북쪽을 지나간다고 했는데 루수(㶟水)는 지금의 영정하(永定河)이다. 학계에서는 계현(薊縣)을 지금의 북경(北京) 자금성(紫禁城) 일대로 보고 있으나 자금성은 영정하의 북쪽이므로 이는 낭설이다. 필자는 영정하의 남쪽인 북경시 방산구(房山區)를 계현(薊縣)으로 본다.
※ 안락현(安樂縣) : 조백하(潮白河)의 상류 조하(潮河)가 장성과 만나는 곳이다. 한(漢) 어양군(漁陽郡) 안락현(安樂縣)이고 서진(西晉) 연국 안락현(燕國 安樂縣)이다. 지금의 북경시(北京市) 밀운구(密雲區)에 속한다.
※ 노룡새(盧龍塞) : 지금의 하북성(河北省) 당산시(唐山市) 천서현(遷西縣)이다. 서기 207년 후한(後漢)에서 조조(曹操)가 노룡새를 지나 오환(烏丸)을 정벌하였다. 요나라(遼)의 송정관(松亭關)이다. 명나라(明) 영락제(永樂帝, 재위 1402년 ~ 1424년) 때 희봉구(喜峰口)로 개명하고 1452년에 관문을 축성하여 희봉구관(喜峰口關)이라 칭했다.
※ 습여수(濕餘水)는 훗날 온여수(溫餘水)라 했다.
◇ 漢書地理志注
上谷郡 軍都, 溫餘水東至路南入沽
상곡군 군도현(軍都縣) : 온여수(溫餘水)가 동쪽으로 흘러 어양군 로현(路縣)에 이르고 남쪽으로 흘러 고수(沽水)로 들어간다.
고대 연나라의 주요 하천과 그 현대 이름은 다음과 같다.
루수(㶟水) : 영정하(永定河)
상건수(桑乾水) : 상건하(桑乾河)
습여수(濕餘水) = 온여수(溫餘水) : 온유하(溫楡河)
고하(沽河) : 조백하(潮白河)
포구수(鮑丘水) : 계운하(薊運河)
유수(濡水) : 난하(灤河)
◇ 晉書地理志
燕國 漢置,孝昭改爲廣陽郡。統縣十,戶二萬九千。
薊 安次 侯相 昌平 軍都 有關 廣陽 潞 安樂 國相 蜀主劉禪封此縣公 泉州 侯相 雍奴 狐奴
안락현 : 촉주(蜀主) 유선(劉禪)을 안락현에 안락공(安樂公)으로 봉했다.
◇ 隋書地理志
冀州 漁陽郡, 開皇六年 徙玄州于此,並立總管府。大業初府廢。統縣一,戶三千九百二十五。
기주 어양군, 개황 6년(586년)에 현주를 이곳으로 옮기고 아울러 총관부를 세웠다. 대업초에 총관부를 폐지했다. 다스리는 현은 하나이고 가구수는 3,925다.
無終 後齊置 後周又廢徐無縣入焉 大業初置漁陽郡。有長城。有燕山、無終山。有泃河、如河、庚水、灅水、濫水。有海。
무종현 : 후제(後齊)가 설치했고 후주(後周)가 폐하여 서무현에 편입시켰다. 대업초에 어양군을 설치했다. 장성(長城) , 연산, 무종산(無終山) , 구하, 여하, 경수, 루수(灅水), 남수(濫水)가 있고 바다가 있다.
冀州 安樂郡. 舊置安州, 後周改為玄州. 開皇十六年 州徙, 尋置檀州. 統縣二, 戸七千五百九十九.
기주 안락군(安樂郡) 옛날에 안주(安州)를 설치했는데 후주(後周, 557 ~ 581)가 현주(玄州)로 고쳤다.
개황(開皇) 16년(596년)에 주(州)를 옮겨 다시 단주(檀州)를 설치했다. 다스리는 현은 2개이고 가구수는 7,599이다.
燕樂. 後魏置廣陽郡, 領 大興 方城 燕樂 三縣, 後齊廢郡, 以 大興 方城 入焉. 大業初置安樂郡. 有長城. 有沽河.
연락현(燕樂縣). 북위(北魏)가 광양군(廣陽郡)을 설치하여 대흥현(大興縣)과 방성현(方城縣)과 연락현(燕樂縣)을 다스렸고, 북제(北齊, 550 ~ 577)가 광양군을 폐하고 대흥현(大興)과 방성현(方城)을 연락현에 편입시켰다. 대업(大業, 605 ~ 618) 초에 안락군(安樂郡)을 설치했다. 장성(長城)이 있고 고하(沽河)가 있다.
密雲. 後魏置密雲郡, 領 白擅 要陽 密雲 三縣. 後齊廢郡, 及二縣入密雲. 又有舊安樂郡, 領 安市 土垠 二縣, 後齊廢土垠入安市, 後周廢安市入密雲縣. 開皇初郡廢. 有長城. 有桃花山 螺山. 有漁水.
밀운현(密雲縣) : 북위(北魏)가 밀운군(密雲郡)을 설치하여 백단현(白檀縣) 요양현(要陽縣) 밀운현(密雲縣)을 다스렸고, 북제(北齊)가 밀운군을 폐하고 백단현(白檀縣)과 요양현(要陽縣)을 밀운현에 편입시켰다. 또한 옛날에 안락군(安樂郡)이 있어 안시현(安市縣)과 토은현(土垠縣)을 다스렸는데 북제(北齊)가 토은현을 폐하여 안시현에 편입시켰고, 후주(後周)가 안시현을 폐하여 밀운현에 편입시켰다. 개황(開皇) 초(581년)에 안락군을 폐하였다. 장성(長城)이 있고 도화산(桃花山)과 라산(螺山)이 있고 어수(漁水)가 있다.
연락현은 지금의 고북구(古北口) 일대이고, 고하(沽河)는 지금의 조백하 상류 조하(潮河)다.
밀운현은 지금의 북경시 밀운현이다. 어수(漁水)는 호수이며 밀운호를 가리킨다.
◇ 신당서지리지(新唐書地里志)
漁陽郡 玉田縣 中 本無終 武德二年置 貞觀元年省 乾封二年復置 萬歲通天元年更名
어양군 옥전현 , 본래 무종현으로 무덕 2년 (619년)에 설치했다. 정관 원년에 폐지했고 건봉 2년에 다시 설치했다. 만세통천(萬世通天) 원년(696년)에 옥전현(玉田縣)으로 개명했다.
혹자는 지금의 난하(灤河) 또는 조백하(潮白河) 또는 영정하(永定河)가 고조선의 패수(浿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터무니 없는 낭설이다. 패수(浿水)에 관한 대목은 다음과 같다.
◇ 수경(水經)
浿水出樂浪鏤方縣 , 東南過臨浿縣 , 東入于海
패수는 낙랑군 누방현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임패현을 지나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 낙랑군에는 임패현(臨浿縣)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이런 해석은 불가하다. 낙랑군에 패현(浿縣)도 없고 다만 패수현(浿水縣)이 있다. 수경(水經)은 패수(浿水)에 대한 근거로 삼을 수 없으나 유수와 패수가 별개의 강인 것은 분명하다.
수경주(水經注)
許慎云 浿水出鏤方 東入海 一曰出浿水縣
十三州志 曰:浿水縣在樂浪東北,鏤方縣在郡東。蓋出其縣南逕鏤方也。
허신(許慎)이 말했다. 패수는 누방현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일설에는 패수현에서 나온다고 한다.
13주지에 이르기를, 패수현은 낙랑군 동북쪽에 있고 누방현은 낙랑군 동쪽에 있다. 아마도 패수는 패수현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 누방현을 경유할 것이다.
酈道元 注 : 昔燕人衛滿自浿水西至朝鮮 朝鮮故箕子國也 箕子教民以義 田織信厚 約以八法 而不知禁 遂成禮俗 戰國時 滿乃王之 都王險城 地方數千里 至其孫右渠 漢武帝元封二年 遣樓船將軍楊僕左將軍荀彘討右渠 破渠于浿水 遂滅之 若浿水東流 無渡浿之理 其地今高句麗之國治 余訪番使 言城在浿水之陽 其水西流逕故樂浪朝鮮縣 即樂浪郡治 漢武帝置 而西北流
故《地理志》曰:浿水西至增地縣入海 又漢興以朝鮮為遠 循遼東故塞至浿水為界 考之今古 於事差謬 蓋經誤證也
역도원(酈道元) 주석 : 옛날에 연나라 사람 위만이 패수 서쪽에서 조선에 이르렀다. 조선은 옛 기자(箕子)의 나라이다.... 전국 시대에 위만이 왕이 되어 왕험성에 도읍해서 땅이 사방 수천 리였다. 손자 우거왕에 이르러 한무제가 원봉 2년(BC 109년)에 누선장군 양복과 좌장군 순체를 보내 우거를 토벌했다. 우거를 패수에서 격파하고 마침내 조선을 멸했다. 만약 패수가 동쪽으로 흐른다면 패수를 건너지 않아야 이치에 맞다. 그 땅은 지금 고구려의 도읍이다. 내가 고구려 사신을 방문했더니 (고구려 사신이) 말하기를, 성은 패수의 북쪽에 있고 패수는 서쪽으로 흘러 옛 낙랑군 조선현 즉 낙랑군의 치소를 지나 서북으로 흐른다고 했다. 옛 지리지(한서지리지)에 이르기를, 패수는 서쪽으로 흘러 증지현(增地縣)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했다. 또 한(漢)나라가 일어서고 조선이 멀어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여 패수에 이르러 경계로 삼았다고 했다. 고금의 역사를 고찰하면 사실에 차이와 오류가 있는데 대체로 수경(水經)이 틀렸음을 증명한다.
※ 역도원은 위만조선의 도읍 왕험성이 지금 고구려의 도읍이라고 했는데 역도원이 수경주를 저술할 당시 고구려의 도읍은 평양이었다. 수경주(水經注)는 패수의 북쪽에 있는 성(城)의 이름을 명기하지 않았으나 앞뒤 맥락을 보면 평양성을 가리킨다. 고구려 사신이 말하기를 패수는 평양성 남쪽을 지나 서쪽으로 흘러 낙랑군 조선현 즉 낙랑군의 치소를 지나간다고 했다는 것이다. 패수가 조선현을 지나서 서북으로 흐른다고 한 것은 서쪽을 잘못 기술한 것으로 보인다.
수경(水經)에는 패수(浿水)가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했다. 역도원은 패수가 동쪽으로 흐르면 서쪽 연나라에서 동쪽 조선으로 간 위만이 패수를 건너지 않아야 이치에 맞으므로 수경(水經)이 틀렸고 패수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른다고 했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강은 건너갈 필요가 없고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강은 건너야 한다는 것이니 이 무슨 궤변인가? 아래의 사기(史記) 조선열전(朝鮮列傳)에도 패수(浿水)가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것이 분명히 드러난다.
사기 조선열전에 의하면 한나라(漢)는 동쪽에 있는 조선과 패수를 경계로 정했고 위만이 서쪽 연나라에서 패수를 건너 동쪽 조선으로 망명했다. 한무제가 조선을 칠 때 패수 서쪽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우거왕의 태자가 병사 만여 명을 이끌고 패수를 건너려고 하다가 되돌아 갔다. 이 모든 기록은 패수가 북에서 남으로 흐른다는 것을 말해준다. 역도원이 사기(史記)를 읽어보기나 했는지 의심스럽다.
역도원은 고구려 사신의 입을 빌려 자신의 생각을 말했는데 평양 일대가 낙랑군이라는 주장은 논란의 여지라도 있지만 한(漢)나라와 고조선의 경계인 패수가 왕험성 남쪽을 지나간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사기에 왕험성은 패수에서 동쪽으로 한참 떨어져 있으니 패수에 임해 있는 평양은 왕험성이 될 수 없다. 고구려에서 대동강을 패수라 부르니까 대동강을 한나라와 고조선의 국경인 패수로 생각하고 억지를 부린 것이다. 역도원의 주장은 어불성설임에도 불구하고 후세의 역사가들은 그대로 받아들였다.
당(唐)나라에서 사마정(司馬貞, 679 ~ 732)이 편찬한 사기색은(史記索隱)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 사기색은(史記索隱)
應劭云 玄莬本眞番國
응소가 이르기를 현도군은 본래 진번국이라 했다.
◇ 사기색은(史記索隱)
王險 應劭注地理志 遼東險瀆縣朝鮮王舊都 臣瓚云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也
왕험성 : 응소(應劭)가 한서지리지에 주석을 달아 요동군 험독현은 조선왕의 옛 도읍이라고 했다. 신찬(臣瓚)이 말하기를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고 했다.
한서지리지는 낙랑군의 하천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浿水縣 : 浿水西至增地入海
패수현에서 패수가 나와 서쪽으로 흘러 증지현(增地縣)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含資縣 : 帶水西至帶方入海
함자현에서 대수가 나와 서쪽으로 흘러 대방현(帶方縣)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呑列縣 : 分黎山列水所出, 西至黏蟬入海, 行八百二十里, 列亦作洌
탄렬현 분려산(分黎山)에서 열수가 나와 서쪽으로 흘러 점제현(黏蟬縣)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는데 길이가 820리다. 列은 洌로 쓰기도 한다.
당(唐 618~907) 왕조에서 636년에 편찬한 주서(周書)와 수서(隋書)는 평양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周書 異域列傳
高麗者 治平壤城 其城東西六里 南臨浿水
고려(고구려)는 평양성에 도읍했는데 그 성은 동서 6리(里)이며 남으로 패수(浿水)에 닿아 있다.
◇ 隋書 東夷列傳
高麗 都於平壤城,亦曰長安城,東西六里,隨山屈曲,南臨浿水 , 每年初,聚戲於浿水之上
고려(고구려)는 평양성에 도읍했는데 장안성(長安城)이라고도 한다. 동서가 6리이며 산을 따라 구불구불하고 남쪽은 패수에 닿아 있다. 매년초 패수에 모여 논다.
괄지지(括地志)는 당태종(唐太宗)의 네째 아들 이태(李泰)가 642년에 편찬한 지리서이다.
◇ 括地志
髙驪治平壤城 本漢樂浪郡王險城 即古朝鮮也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은 본래 한 낙랑군 왕험성으로 옛 조선이다.
오대(五代) 시대 후진(後晉 936년 ~ 946년)에서 945년에 구당서(舊唐書)를 편찬했다.
◇ 舊唐書
高麗者,出自扶餘之別種也。其國都於平壤城,即漢樂浪郡之故地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에서 나왔다. 그 나라는 평양성에 도읍했는데 한(漢) 낙랑군의 옛 땅이다.
북송(北宋)에서 1060년에 신당서(新唐書)를 편찬했다.
◇ 新唐書
高麗,本扶餘別種也。地東跨海距新羅,南亦跨海距百濟,西北度遼水與營州接,北靺鞨。其君居平壤城,亦謂長安城,漢樂浪郡也,隨山屈繚爲郛,南涯浿水,王築宮其左
고(구)려는 본래 부여의 별종이다. 그 군주는 평양성에 거처하는데 장안성이라고도 하며, 한 낙랑군이다. (평양성은) 산을 따라 구불구불 성곽을 쌓았고, 남쪽으로 패수에 닿으며 왕은 그 왼쪽에 궁궐을 축조하였다.
평양을 낙랑군의 옛 땅이라고 한 것은 평양을 왕험성으로 본 것이다. 한(漢)과 고조선의 경계는 패수인데 평양은 대동강의 북쪽 기슭에 있으니 대동강이 패수이면 왕험성은 한(漢)나라에 속하게 된다. 이래서는 말이 안 되니까 평양성의 대동강 남쪽 건너 토성리(土城里)가 왕험성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사기(史記)를 보면 왕험성은 패수(浿水)에서 동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 이런 까닭에 조선왕조에서는 평양을 왕험성으로 보고, 고조선의 패수를 압록강으로 보고 대동강은 또 다른 패수로 보았다.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51권 평양부(平壤府)
평양은 왕험성으로 단군(檀君)조선, 기자(箕子)조선, 위만(衛滿)조선의 도읍이고 한무제(漢武帝)가 설치한 낙랑군이다. 대동강은 일명 패강(浿江) 또는 왕성강(王城江)이다. 패수(浿水)는 셋인데 사마천의 사기(史記) 조선열전에 한(漢)과 조선의 경계라고 한 패수는 압록강이고, 당서(唐書)에 이르기를 평양성은 낙랑군이고 남쪽이 패수에 연해 있다고 했는데 이는 대동강이다. 또 고려사(高麗史)에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북쪽으로 패하(浿河)를 경계로 삼았다고 했다. 세 곳 패수 중에 누구나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대동강뿐이다.
한서지리지의 주석으로는 浿水, 帶水, 列水가 어느 강을 지칭하는지 알 수 없다. 대동강 북안에 위치한 평양을 왕험성으로 정하고 보니 대동강은 패수가 될 수 없었다. 사기에 浿水가 漢 나라와 조선의 경계라 했으니 패수는 사마천 생시의 요동과 왕험성 사이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요동과 평양 사이에는 압록강과 청천강이 있고 사학계도 압록강설과 청천강설로 갈라졌다. 양쪽 다 고대의 요동과 현재의 요동을 같은 지역으로 본 것이다.
평양이 왕험성이라면 대동강은 패수가 될 수 없는데 그렇다면 청천강이 사기에 기록된 패수일까? 사기 조선열전은 패수가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것을 분명히 말해주는데 한서지리지는 낙랑군의 패수가 서쪽으로 흐른다고 했다. 남쪽으로 흐르는 패수와 서쪽으로 흐르는 패수가 동일한 강일 수는 없다. 따라서 서쪽으로 흐르는 대동강, 청천강, 압록강은 사기에 등장하는 패수가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험성은 평양이고 패수는 대동강 또는 청천강이라는 거짓말이 천년 동안 정설로 통해 왔다.
위의 지도에서 붉은색은 현존하는 만리장성이고 녹색은 주류학계가 주장하는 진시황의 만리장성이다. 동부 구간이 장가구에서 요동을 지나 청천강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두 개의 연장성(燕長城)
위의 지형도에서 연장성 A는 현존하는 장성이고 연장성 B는 지도 위의 그림일뿐 실체가 없다. 사기는 만리장성이 음산산맥(陰山山脈)의 험준한 산과 골짜기를 따라 요동까지 이어졌다고 기록했다. 문맥상 요동에서도 장성이 산악지대에 건설되었다는 뜻이다. 西에서 東으로 달리는 음산산맥은 장가구를 거쳐서 북경 북쪽을 지나 발해 연안 산해관까지 이어진다. 현대의 지리학에서는 조백하(潮白河)의 발원지를 경계로 서쪽을 음산산맥, 동쪽을 연산산맥(燕山山脈)으로 구분하지만 고대에는 전체를 하나의 산줄기로 보고 음산(陰山)이라 칭했다.
연장성 A의 지형
연장성 A가 자리하고 있는 연산산맥은 대부분 해발고도 1,500 m를 넘고 흥륭현(興隆縣) 북쪽에 있는 주봉 무령산(霧靈山)의 해발고도는 2,116 m이다. 아래의 위성사진에서 짙은 녹색은 수목이 울창한 산악지대이다. 음산산맥에 녹색이 없는 이유는 수목이 자라지 않는 건조지대이기 때문이다.
燕장성 B는 대부분 광활한 평야지대에 자리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지금의 요동은 일망무제(一望無際)의 대평원이다. 사기에 기록된 만리장성의 지형과 판이하다.
구요동과 신요동 - 이광헌 설
A : BC 108년 이전의 요동
B : BC 108년 이후의 요동
위의 지도에서 A가 고조선 시대의 요동이고 B가 고조선 멸망 후의 요동이다. 오늘날 요하의 동쪽 지역을 요동, 요하의 서쪽 지역을 요서라고 부르지만 고대 중국에서는 천하의 중심지인 낙양(洛陽)에서 동쪽으로 멀리 떨어진 지역 즉 Far East를 요동이라 칭했다. 요동(遼東)은 원동(遠東)과 같은 뜻이다. 중국에서 원래 A를 요동이라 부르다가 기원전 108년에 한무제가 고조선을 정복한 후 요하 유역 B를 요동이라고 칭하게 된 것이다. 전국시대에 연나라가 동호를 몰아내고 B까지 영토를 확장했다는 주류학계의 주장이 허구라는 것은 앞에서 이미 밝혔다. 따라서 연나라가 설치한 요동군과 장성의 위치는 요동 A이고 만리장성의 종착지도 요동 A이다. 진시황의 영토는 아래와 같다.
진시황 사후 봉기한 진승의 부하 한광(韓廣)이 BC 209년에 연경을 점령하고 스스로 연왕에 올랐다. BC 207년 12월에 진(秦)나라를 멸한 항우는 다음해 1월 서초패왕에 오르고 18개 제후국을 분봉하였다. 2월에 항우는 연(燕)을 분할하여 요동국을 신설하고 무종(无終)을 도읍으로 정했다. 무종은 지금의 옥전(玉田)이다. 연의 도읍 계(薊)를 훗날 연경이라 불렀는데 지금의 북경이다. 연경과 무종(无終) 사이를 흐르는 조백하(潮白河)가 연과 요동국의 경계임은 누구나 알 수 있다.
◇ 사기 항우본기(史記 項羽本紀)
徙燕王韓廣為遼東王 燕將臧荼從楚救趙 因從入關 故立荼為燕王 都薊 ..... 臧荼之國 因逐韓廣之遼東 廣弗聽 荼擊殺廣無終 竝王其地
연왕(燕王) 한광(韓廣)을 옮겨 요동왕으로 삼았다. 연(燕) 장수 장도(臧荼)가 초나라(楚)에 종군하여 조나라(趙)를 구하고 종군하여 관중에 들어간 까닭에 장도를 연왕으로 세웠다. 도읍은 계(薊)다. 장도가 연국(燕國)으로 가서 한광에게 요동으로 가라고 했으나 한광이 듣지 않으니 장도가 공격하여 무종(無終)에서 한광을 죽이고 그 땅의 왕을 차지했다.
◇ 사기 진초지제월표(史記 秦楚之際月表)
義帝元年 二月 燕國王臧荼始 故燕將 都薊 遼東國王韓廣始 故燕王 都無終 八月 臧荼擊廣無終滅之
의제(義帝) 원년(기원전 206년) 2월 옛 연나라 장수 장도가 연국왕이 되었다. 도읍은 계(薊)다. 옛 연왕 한광은 요동국왕이 되었고 도읍은 무종(無終)이다. 8월에 장도가 한광을 공격하여 무종(無終)에서 멸했다.
◇ 사기 한고조본기(史記 漢高祖本紀)
項羽燕將臧荼為燕王 都薊 故燕王韓廣徙王遼東 廣不聽 臧荼攻殺之無終
항우는 연나라 장수 장도를 연왕으로 삼았다. 도읍은 계(薊)다. 옛 연왕 한광을 요동왕으로 옮겼으나 한광이 듣지 않으니 장도가 공격하여 무종(無終)에서 죽였다.
※ 무종현(無終縣)은 전한(前漢)과 후한(後漢)의 우북평군(右北平郡), 서진(西晉)의 북평군(北平郡), 수(隋)와 당(唐)의 어양군(漁陽郡)에 속했다. 수양제( 隋煬帝) 대업(大業) 3년(607년)에 현주(玄州)를 어양군(漁陽郡)으로 고치고 696년에 무종현(無終縣)을 옥전현(玉田縣)으로 고쳤다.
◇ 수서지리지(隋書地理志)
漁陽郡 無終縣 大業初 置漁陽郡 有長城 有燕山 無終山 有海
어양군 무종현 , 대업초 어양군을 설치했다. 장성, 연산, 무종산, 바다가 있다.
※ 연산(燕山) : 거용관(居庸關)에서 임유관(臨渝關)에 이르는 산맥
만리장성의 조백하 동쪽 구간은 요동국 북쪽을 가로지르는 연산산맥에 건설되어 사기에 묘사된 지형과 일치한다. 여기가 만리장성의 종착지라고 사기에 기록된 요동이다. 만리장성은 秦, 趙, 燕 삼국의 장성을 기반으로 해서 건설되었으므로 燕長城은 장가구에서 진황도까지 현존하는 만리장성과 동일한 경로에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연장성(燕長城)의 종착지 양평은 지금의 진황도다.
진개가 조선을 침공할 당시 연나라와 조선의 국경선은 현존하는 만리장성의 동쪽 구간이었다. 연나라는 진번을 정복하고 조선의 서쪽 땅 이천리를 빼앗아 만번한을 경계로 삼았다. 만번한은 어디인가? 삼국지 왜인전을 보면 천 리는 대략 80 km에 해당한다. 연나라의 동쪽 관문은 진황도(秦皇島) 앞에 있는 산해관이다. 산해관에서 동쪽으로 160 km 전진하면 대릉하(大凌河) 못미친 곳에 소릉하(小凌河)가 동남쪽으로 흘러 금주시(錦州市)를 지나 바다로 들어간다. 필자는 이곳을 만번한으로 본다.
BC 295년 燕의 조선침공 직전 형세 - 이광헌 설
[史記 朝鮮列傳]
朝鮮王満者 故燕人也 自始全燕時 嘗略屬真番朝鮮 為置吏 築鄣塞 秦滅燕 屬遼東外徼
조선왕(朝鮮王) 만(滿)은 옛 연(燕)나라 사람이다. 연은 전성기 때부터 일찌기 진번(眞番)과 조선을 공략하여 복속시키고는 관리를 두고 장새를 쌓았다. 진(秦)이 연을 멸하고 요동외요(遼東外徼)에 속하게 했다.
패수는 산해관과 만번한 사이에 있는데 앞에서 말했듯이 소릉하의 하류가 만번한이다. 산해관과 소릉하 사이에는 북에서 남으로 또는 서에서 동으로 흘러 발해로 들어가는 강이 10개도 넘는다. 산해관에서 멀어지는 순서로 나열하면 Jiujiang, Shihe(石河), Qiangliuhe, Gouhe, Maoyanhe, Changtan, Dongsha, Xingcheng, 육고하(六股河), Yantal, Lian 등 11개 다음에 소릉하(小凌河)가 있다.
그 중에 백랑산(白狼山)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육고하(六股河)가 가장 커서 漢과 조선이 국경으로 삼을만 하다. 위만 일행이 토벌군에게 붙잡히지 않고 국경인 패수를 건너간 것으로 보아 패수는 산해관에서 그다지 멀지 않았을 것이다. 필자가 육고하(六股河)를 패수로 보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점이다.
BC 195년 위만 망명시 형세 - 이광헌 설
단재 신채호는 패수로 태자하를, 왕험성으로 해성(海城)을 지목했고, 비교적 근자에 이덕일이 란하와 창려현을 지목하여 세간의 이목을 끌고 있다. 필자는 세 가지 학설 모두가 틀렸음을 입증하고 육고하(六股河)와 북진(北鎭)을 새롭게 제시하고자 한다.
패수와 왕험성의 위치 비정
이마니시 류(今西龍) : 청천강, 평양
신채호 : 태자하, 해성
이덕일 : 란하, 창려
이광헌 : 육고하, 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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