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22:1-2 혹독한 대가를 의지로 바꾸면 보상이 따른다.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 선택했던 블레셋 가드로의 망명은 다윗에게 장밋빛 미래가 아니라 인생 최대의 올무였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된다(잠 29:25)는 말씀이 그대로 적용되었다. 자신을 모를 줄 알았던 가드 사람들은 다윗을 즉시 알아보았고, 환영해 줄 줄 알았는데, 환영은커녕 체포하여 폭력을 쓰고, 압제하고, 곡해했다(시 56편). 그리고 왕 아기스에게 잡혀갔을 때, 다윗은 사울에게서 느낀 두려움보다 더 큰 두려움을 느껴야만 했다. 순간 그는 살아남아야겠다는 생존본능을 따라 미치광이 연기를 시작했다. 대문짝에 끄적거리고, 침을 수염에 흘렸다. 이런다고 다윗이 아기스의 나라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다윗은 골리앗을 죽인 가드의 철천지원수(徹天之怨讎)였다. 아기스 왕이 다윗을 그냥 놔줄 것 같은가? 다윗이 정상이든 미쳤든 결론은 하나였다. 죽음!! 다윗의 인생은 여기서 끝일까?
다행히도 다윗의 인생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다윗의 연기가 아기스 왕에게 통했다. 그는 다윗을 미치광이로 판단했고, 그 다윗을 그의 나라에서 추방시켰다. 아기스 왕의 손절로 다윗은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아기스의 나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천만다행이다. 하지만 생존과 동시에 다윗은 다시 두려운 사울의 나라로 들어왔다. 숨돌릴 틈도 없이 주거지를 걱정해야만 했다. 어디로 가야 할까? 원수 사울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한 집으로 갈 수도 없었고, 친구 요나단에게로 갈 수도 없었고, 부모와 형제가 있는 고향 베들레헴으로 갈 수도 없었고, 영적 스승인 사무엘 선지자나 제사장 아히멜렉에게도 갈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귀국한 다윗을 환영해 주는 사람도 없었다. 쓸쓸한 귀국길이었다. 다윗은 혹독한 아기스의 나라에서 자유의 몸이 되었으나 여전히 사울의 나라에서도 쓸쓸하게 은둔생활을 해야만 했다. 결국 그가 선택한 곳은 광야에 있는 아둘람 굴이었다. 한때 다윗은 골리앗을 죽이고,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던 용사였다. 블레셋과의 전정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는 불멸의 다윗이었다. 왕의 사위로서 장래가 총망한 자였다. 그런 다윗이 아무도 없는 텅 빈 동굴에 덩그러니 홀로 남아 있다. 이 얼마나 처량한가! 그 당시 다윗의 심정을 노래한 시편이 있다. 142편이다. 다윗은 원통[억울]했고, 우환[憂患]으로 가득 찼다(142:1,2).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는 사람도 없었고, 피난처도 없었고, 자기를 돌보는 사람도 없었다(142:4)고 고백한다. 아둘람 굴에서 그를 맞이해 준 것은 고독이요, 쓸쓸함이요, 절망뿐이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다윗에게 어느 누가 찾아오겠는가! 역사의 무대에서 삽시간에 사라져 버린 비운의 사나이 다윗에게 누가 찾아오겠는가! 아무도 없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다윗에게 발생했다. 어떻게 알고 형제들과 부모님과 친가[아버지 쪽 집안] 어른들과 가족들이 다윗이 숨어 있는 아둘람 굴로 찾아왔다. 절망하고 있는 다윗에게 그들은 큰 위로가 되었다. 따뜻한 봄날과 같았다. 앙상한 가지에 움이 트고, 잎사귀가 나고,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하는 것 같았다. 다윗을 보기 위해 형제들과 부모가 찾아오는 것은 이해가 된다. 하지만 친가 어른들과 가족들까지 다윗을 보겠다고 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뿐 아니라 억울한 자, 빚진 자, 원통한 자들이 다윗이 있는 아둘람으로 몰려들었다. 그 수가 무려 400명이나 되었다. 어찌 된 까닭일까? 다윗이 부른 것일까? 아니다. 다윗은 그들을 부른 적이 없었고, 자신의 처지를 알린 적도 없었다. 다윗은 그들에게 자신의 처지를 알리고 소집할 만큼 마음의 여유도 없었고 능력도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은 다윗의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왔을까? 게다가 다윗은 아둘람에서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이는 그들이 아직도 다윗을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인정했다는 뜻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일까? 전능하신 하나님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 하나님은 처절한 다윗에게 가족들과 따르는 사람들을 붙여 주셨다. 왜 하나님은 다윗을 홀로 두지 않으시고 이렇게 사람을 붙여 주셨을까? 또한 붙여 주시려면 사람들을 진작 붙여 주시지 왜 이제야 가장 절망적인 아둘람 굴에서 붙여 주셨을까? -
하나님은 두려움으로 선택한 올무에서 다윗이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싶으셨다. 아무도 도울 수 없는 아기스의 나라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는지 보고 싶으셨다. 실패를 모르고 승승장구하던 다윗을 그대로 두면 자신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사울이 두려웠을 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지혜를 의지하여 블레셋 가드를 선택했다. 이참에 자존심을 다 내려놓고 대문짝을 끄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는 데까지 내려가도록 만드셨다. 자신의 힘으론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알게 하셨다. 다행히도 다윗은 그 수렁에서 사람을 두려워하여 블레셋 가드를 선택한 죄에 대해 상한 마음과 충심으로 통회했고(시 34:18),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하나님을 찾았고(34:6,15,17).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찬양하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했다(시 56:4,10,11). 하나님만 의지하는 법을 배웠다.
그 결과 하나님은 아기스 왕의 눈에 다윗을 미치광이로 보이도록 하셨고, 다윗을 추방하도록 만드셨다. 만약 다윗이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는 감정 그대로 선택했다면, 다윗은 아마 아기스의 한 마디에 혹독한 대가를 치르거나 그의 칼에 죽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둘람 굴에 와서도 마냥 좌절하지 않고 그 좌절과 원통함과 우환을 기도로 바꿨고, 부르짖었다(시 142편). 다윗은 하나님이 원하던 바를 해냈다. 따라서 하나님은 다윗의 기도를 들으셨고, 그 기도에 응답하셔서 다윗을 도울 사람을 보내 위로하신 것이다. 이제 사람을 붙여 주어도 되겠다는 판단을 하신 것이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된다. 하지만 그 올무에서도 하나님을 기도로 의지하라. 쉽지 않겠지만 의지하라. 말씀을 찬양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을 의지하라. 쉽지 않겠지만 반드시 그렇게 하자.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그 올무에서 벗어나게 해 주실 것이다. 미친 연기를 통해서도. 차가운 동굴과 같은 곳에서도 좌절하지 말고 하나님을 기도로 의지하라. 믿음의 대가를 지불하라. 하나님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고난의 광야에서 가르치신다. 불시험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 하나님을 의지할 타임이 온 것으로 받아들여라.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면 그때 하나님은 일하신다.
시 37:5-9
5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6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7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8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9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
하나님은 도울 사람을 보내 주신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께서 보상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