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의나라 17화.PDF
우천 선생님이 들려주는 ‘기록의 나라’(17)
조선통신사에 관한 기록물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는 1607년(선조 40)부터 1811년(순조 11)까지 일본 에도막부의 초청으로 200여년간 모두 12회에 걸쳐 조선이 일본(막부의 장군)으로 파견된 외교사절단을 말합니다. 한국과 일본은 양국간의 이와 관련한 역사적인 기록물을 지난해 유네스코에 공동으로 신청, 심사 결과 세계기록유산 등재가 확정되었답니다.
조선통신사는 임진왜란으로 단절된 양국의 국교(國交)를 1617년 회복하고 양국의 평화적인 관계를 구축하고 유지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통신사의 편성과 인원은 각 회마다 300∼500명 정도였으며, 보통 5∼8개월 걸리는, 대략 3000km가 되는 대장정이었답니다. 한성(漢城‧서울)에서 부산까지는 내륙길로, 부산에서 대마도를 거쳐 오사카까지는 바닷길로, 오사카에서는 다시 내륙길로 에도(江戶‧현재의 도쿄)까지 왕래하였다지요. 부산에서부터 소요되는 통신사 파견비용은 일본에서 모두 부담했는데, 일본막부의 1년 예산과 맞먹었다고 합니다. 대마도의 한국전망대에는 1703년 배가 침몰하여 순직한 통신사절단 108명의 명단이 새겨진 위령비가 건립되어 있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조선통신사를 통한 교류는 신뢰를 바탕으로 한 조선과 일본의 평화와 선린우호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는데요. 조선통신사를 통해 양국의 외교적인 문제를 해결했고, 학술‧예술‧산업‧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활발한 교류의 성과를 거뒀으며, 선린우호 관계가 계속되었기 때문에 그 역사적 의미는 아주 크다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왜 조선의 임금에게 사절단을 파견하지 않았느냐는 의문이 들겠는데요. 이는 조선 전기의 ‘일본국왕사’의 상경로가 임진왜란때 일본군의 진격도로로 이용되었기 때문에 일본인들의 입성을 금지시켰답니다. 대신 부산에 왜관을 설치하여 무역을 통한 필요한 물자들은 교류했다고 합니다.
현존하는 ‘통신사 행렬도’ 들을 보면, 당시 조선은 일본에 비해 ‘문화 선진국’이 분명합니다. 사절단에 대한 대우가 아주 깍듯하게 그려져 있거든요. 한시(漢詩) 한 편이나 그림 한 장을 얻으려 여관 앞에 줄을 섰다는 등 크게 환대받은 기록도 있으니, 요즘말로 하면 ‘한류(韓流)의 원조’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이 기록물들은 양국의 역사적 경험으로 증명된 평화적ㆍ지적 유산으로, 항구적인 평화 공존관계와 다른 나라의 문화 존중을 지향해야 할 인류공통의 과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현저하고 보편적인 가치를 갖는다고 하겠습니다.
<더 알아보기>
임진왜란 전인 조선 전기에도 양국의 사절단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1392년 조선은 당시 막부에 왜구 단속을 요청한 기록이 있으며, 일본은 1404년 국교가 수립되어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71회에 걸쳐 ‘일본국왕사’를 파견하였답니다. 조선에서도 17회에 걸쳐 ‘보빙사’라는 명칭의 사절을 파견하다가 1428년(세종 10) ‘통신사’로 명칭을 처음 바꾸었습니다. 양국은 사신을 보내며 왜구 출몰을 막으려 노력했으나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1426년 삼포(三浦: 부산포‧제포‧염포)를 개항하여 왜관을 설치하고 무역체제를 구축하기도 했지요. 이같은 교류는 1592년 7년전쟁(임잰왜란‧정유재란)으로 단절되었구요. 1606년 승려 사명대사를 일본에 파견하여 전쟁때 끌려간 동포 3000여명을 데리고 귀국한 기록도 있습니다.
우천(愚泉) 최영록<한국고전번역원 홍보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