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적인 여유가 생기면 어쩌다 한번씩 '클라우드'를 열어본다.
가족들이 그동안 정리해 둔 수많은 추억의 보고, '클라우드'.
특히 아들이 남겨 놓은 아름다운 대자연의 영상들은 여전히 감동이 뚝뚝 떨어지는 가슴 뛰는 두레박이다.
그런 사진들을 보고 있자니 다시금 과거의 편린들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결혼하고 두 자녀를 얻었다.
첫째는 딸이었고, 둘째는 아들이었다.
자녀들의 性이 다른 것, 그 자체가 부모에겐 큰 축복이었다.
어려서는 잘 몰랐지만 성장하면서 여아와 남아는 여러 면에서 매우 큰 '다름'이 있었다.
천하보다 더 귀한 어린 두 생명.
예비된 양육을 위해 부모로서 더 공부하고 더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점에서 兩性의 생명을 얻은 건 우리에겐 매우 큰 선물이요 은총이었다.
딸은 딸답게, 아들은 아들답게 키우고 싶었다.
화려한 스펙이나 점수보다는 올곧은 스피릿, 건강한 심신, 균형잡힌 영혼의 형성에 더 집중하고자 힘썼다.
그런 일관된 양육방침 중 하나가 '나 홀로 떠나기'였다.
어린 딸을 혼자서 세상 밖으로 떠나 보내기란 사실상 쉽지 않았다.
그러나 아들은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고, 실제적으로도 달리 키웠다.
아들이 초등학교 5학년이 될 때까지는 이 개념을 얘기하지 않았다.
5학년이 된 봄 어느 날, 아들에게 말했다.
"울산에 혼자서 한 번 다녀오거라. 남자란 공동체 생활도 잘 해야 하지만 때때로 외롭고 거친 인생길을 혼자서도 용기있게 갈 수 있어야 한다. 12살이면 슬슬 그런 체험을 해보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알겠습니다. 아빠"
어려서부터 '가족산행'과 '트레킹'을 자주했던 까닭에 아들은 '떠남과 돌아옴'에 대해 미적거리거나 주저하지 않았다.
한 번 부딪쳐 보겠다고 했다.
울산에 있는 친구에게 아들을 하룻밤만 재워달라고 부탁했다.
이것은 훈련의 일환이므로, 일체의 조력과 도움을 주지 말고 그냥 1박할 처소만 허락해 달라고 했다.
친구도 좋다고 했다.
나는 다시 아들에게 일렀다.
"인터넷은 정보의 바다다. 버스든, 기차든, 비행기든 네가 선택하고 싶은 다양한 교통편의 시간과 요금, 아저씨네 집 주소 확인, 울산에서의 시내버스 노선과 소요시간, 남의 집에 갈 때 조그만 선물 구입, 너의 식사비와 예비비 등등 일체의 자료와 비용 산출은 네 스스로가 찾아서 노트에 적어 보거라"
다음 날, 아들은 노트에 빼곡하게 적은 자료를 들고 왔다.
꼼꼼하게 훑어 보았다.
제법이었다.
그 노트 안엔 1박2일간의 '나홀로 여행'에 대한 구체적인 일정과 비용 산출 근거가 표기되어 있었다.
여행경비는 정확하게 본인이 산출한 만큼만을 지급했다.
드디어 떠나는 날이 되었다.
아직 어려서 그런지 등에 멘 배낭이 그날 따라 유난히 커보였다.
아파트 현관 앞에서 어린 아들을 꼬옥 안아주는 것으로 배웅인사를 대신했다.
"위급한 비상시를 제외하곤 집에 자주 연락하지 말거라"
"예, 그렇게 할게요"
초등학교 5학년, 여전히 앳되고 조그만 아들은 그렇게 인사를 나누고 떠났다.
아내도 나의 교육방침과 다양한 시도에 원칙적으로 동의해 주었다.
하지만 '엄마'는 '엄마'였다.
아직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 아들의 '나 홀로 여정'에 대해 마음이 편치 않았던 모양이다.
애써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아들이 귀가하는 시간까지 뭔가가 계속 불안한 눈치였다.
나에게도 일말의 염려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부모가 먼저 마음을 잘 다스리며 묵묵하게 기다려 주는 것.
과거나 지금이나 '부모노릇' 중 가장 중요한 덕목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울산의 친구는 표시나지 않게 배려와 온정으로 아들을 맞아 주었다.
고마웠다.
자신이 정한 대로 1박2일 간의 여정을 잘 마치고 아들은 귀가했다.
돌아온 날 밤, 늦은 밤 시간까지 온 식구들이 아들의 체험담을 들으며 진심으로 공감해 주었고 격려도 보내주었다.
동일한 방식으로 '여수'와 '광주' 등 이곳저곳을 순차적으로 방문케 했다.
기차, 고속버스, 식당, 거리에서 만나는 낯선 사람들과의 인사와 대화법에 대해서도 스스로 터득해 가기를 바랐다.
그렇게 뒤뚱뒤뚱 혼자 떠나고 돌아오는 법을 배우며 2년을 보냈다.
그리고 중학생이 되었다.
중학생 이후.
부자간 대화의 테마는 자연 속에서의 '부대낌'으로 정했다.
자녀들에게 뭔가를 강압적으로 지시하거나 강제해선 안 된다.
그건 오히려 역효과요 실패 요인이다.
부모가 먼저 행동으로 모범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런 도전들과 시도들이 우리네 인생에서 어떤 배움을 주고, 어떻게 정신적인 성장을 가능케하는지에 대해
솔직하게 대화하며 재미있게 안내해 줘야한다.
아이들 성장기에 나는 나름대로 일도 열심히 했지만, 다양한 영역에서의 도전과 운동에도 매우 열정적이었다.
또한 시간을 쪼개서 독서와 스크랩, 문화행사, 여행, 가족트레킹, 철인3종 경기, 울트라 레이스, 트레일 런, 봉사활동 등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리고 제 아무리 바쁠지라도 하나의 과정이 끝나면 꼭 마음을 담아 정성스럽게 '후기'를 썼다.
우리들이 매일 밥을 먹듯이 습관적으로 썼다.
쓴 글은 내 블로그에 바로 올려두었다.
자녀들은 자연스럽게 아빠의 다양한 산문집, 행사의 후기, 소망의 편린들을 보며 자랐다.
또 다른 소통의 단면이었다.
그렇게 부모의 기도와 열정의 씨앗들은 조금씩 딸과 아들에게 스며들었고, 서서히 접목되어 갔다.
또한 시간이 나는 대로 다양한 주제들을 가지고 네 식구들이 조곤조곤 대화하기를 즐겼다.
상호간의 현재의 생각이나 미래의 꿈에 대해서도 잘 알게 되었다.
이 또한 고맙기 그지 없었다.
'도전과 체험'이란 단어가 낯설지 않은 아이들.
아들은 중학생 때부터 본격적으로 한국의 名山들을 혼자서 찾아 나섰다.
나도 그렇게 권장했지만 아들도 무척이나 좋아 했다.
그냥 정상만 찍고 내려오는 당일치기 산행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수 십 킬로를 종주하는 1박2일 간의 산행이었다.
대피소(산장)를 예약하고, 기차나 버스를 타고 혼자서 산을 찾아갔다.
숙식을 스스로 해결하고, 어둠이 가시지 않은 신새벽에 일어나 다시 2일차 산행을 이어가는 방식이었다.
그것도 매번 혼자서 였다.
"친구들과 함께 가지 그러니? 외롭지 않아?" 하고 질문하면 매번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애들은 학원 때문에 시간이 안 된다고 해요, 설사 시간이 되어도 한여름엔 더워서 개고생, 한겨울엔 추워서 개고생인데,
뭣하러 그런 힘든 일을 사서 하느냐며 오히려 제게 핀잔만 해요. 친구들이 저보고 미친 놈이래요. 헤헤헤"
아들의 대답은 대개 비슷했다.
그래서 나도 더 이상 그런 뻔한 질문을 하지 않았다.
중,고교시절 매 방학 때나 중간고사가 끝나면 배낭을 꾸려 혼자서 멀리 떠나라 했고, 아들도 좋아 했다.
제주 한라산부터 지리산, 덕유산, 계룡산, 소백산, 태백산, 설악산, 두타산과 청옥산의 무릉계곡 등등 한국의 큰 명산들을 홀로 탐방했다.
혼자만의 종주산행이라 아들은 자신의 모습을 좀처럼 찍을 수 없었다.
처음부터 광대한 대자연이 유일한 피사체였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진들이 대자연을 담은 영상들 뿐이었다.
아껴 모은 용돈으로 제법 좋은 일제 '전문가용 카메라'를 구입해서 들고 다녔다.
아들이 돌아오면 우리들은 언제나 함께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찍어 온 사진들을 회람하고 풋풋한 추억의 뒷얘기들을 가족들과 함께 나누며 밤이 늦도록 얘기꽃을 피우곤 했다.
기차 안에서 만났던 사람들 이야기, 추운 겨울 산장에서 혼자 먹어 본 새벽밥 이야기, 멋진 사진을 찍기 위해 칠흑같은 산장을 떠나 랜턴 하나에 의지한 채 홀로 어두운 밤길을 산행한 이야기, 해돋이 무렵 눈앞에 펼쳐진 대자연의 웅장한 파노라마에 대한 전율 등등, 아들의 여행담은 늘 우리를 즐겁고 행복하게 했다.
깊이 있는 공감은 이미 그 자체로 추억의 공유였고, 우리가 아들에게 보내는 최고의 격려였다.
또한 아들은 자신이 촬영한 사진들과 직접 쓴 후기들을 블로그에 올리며 여러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했다.
짧은 시간에 누적 방문자 수가 20만, 30만 명을 넘었다.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호응해 주었고 좋아했다.
언젠가는 어느 잡지사에서 연락이 왔다.
"학생의 블로그를 보았는데, 동틀 무렵 높은 산정을 넘어가는 짙은 운해의 장관이 매우 아름다우니 몇 컷을 사용하게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아들은 당근 허락했다.
며칠 후 잡지사의 초대를 받아 전시회에도 다녀왔다.
도전, 사진, 글쓰기, 블로그, 남다른 추억들과 체험, 많은 여행과 트레킹 그리고 그만큼 깊어진 자아.
아들의 중,고교시절 6년을 함축해 보면 나도 모르게 이런 단어들이 떠오른다.
지금 해병대 병장인 아들.
이젠 전역을 3개월여 남겨놓고 있는 싯점이다.
이미 장성해 버린 자식 앞에서 나에게 또 다른 '애비역할'이 필요한 게 있을까?
아마도 더 이상 없지 싶다.
나는 기도한다.
더 비우고 더 낮게 임하기를.
그리하여 내 영혼의 공간이 더 넓고 깊어지기를.
부모 자식의 관계에서 인생의 동반자 관계로, 수평적이며 친밀한 관계로의 재설정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그것은 아들 몫이 아니라 전적으로 나의 몫임을 고백한다.
소천하신 내 아버지가 나에게 어느 순간 조용히 인생의 걸상을 비워주셨듯이
나도 장성한 자녀들에게 인생의 의자를 슬그머니 물려줄 날이 그리 멀지 않았음을 자각하고 있다.
주체적인 선택과 결정 그리고 당당한 책임이면 된다.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군복을 입고 있는 두 녀석들.
그리움이 쌓이면 늦은 밤에 어쩌다 한 번씩 '가족밴드', '클라우드'를 열어본다.
네 식구들이 알콩달콩 엮어온 우리들의 사랑과 추억의 샹그릴라, 그것은 뭐니뭐니 해도 바로 '클라우드'다.
시계열적 테마별로 정리된, 엄청난 분량의 사진들을 조금씩 복기하다 보면 아직도 탈고 안 된 숱한 스토리텔링들이 잠에서 깨어나 데굴데굴 또르르 굴러 나온다.
흐뭇한 미소가 피어난다.
나도 어쩔 수 없는 '무드셀라 신드롬' 환자같다.
그래도 감사할 따름이지만.
결혼하고, 자녀들을 양육하며 인생의 시간들이 참 많이도 흘렀다.
삶의 다양한 길들을 자식에게 안내해 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지만,
뒤뚱거리며 먼 길을 홀로 떠나는 자식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불안과 초조를 부모가 슬기롭게 제어하는 것.
그러면서 오래 오래 진득하게 믿고 기다려 주는 것.
이것이야 말로 중요하고 가치있는 부모의 역할이자 어른들의 미션임을 나는 절감했다.
살아보니 대부분의 복잡한 가정사나 가족간의 심각한 문제들은 사실 부모의 문제였고 어른들의 책임이었다.
깊어가는 한여름 밤.
갑자기 '스티븐 호킹' 박사의 눈물겨운 고백이 생각난다.
"사람은 언제든지 죽을 수 있기 때문에 난 매일 일분일초를 나의 마지막인 것처럼 생각하며 최선을 다한다."
나의 일상도 후회 없는 열정과 조건 없는 감사로 채워갈 수 있기를 기도해 본다.
아들이 전역하면 서로 짬을 내서 멋진 트레킹을 한 번 해보고 싶다.
불타는 가을, 끝없이 펼쳐진 황홀한 억새군락, 특유의 섬세함과 웅대한 자태를 뽑내는 '영남 알프스'.
그 빼어난 영봉들을 함께 종주해 보고 싶다.
가족 '클라우드'를 보다가 그런 마음이 진하게 내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그런 서정의 종이 위에 잔잔한 그리움을 담아서, 장성한 자녀들을 생각하며 글 한 편을 엮어 보았다.
육군 장교인 딸, 해병대 병장인 아들.
자신이 선택한 길이다.
모두 담대하고 씩씩하게 잘 해낼 것이라 믿는다.
파이팅이다.
사랑하는 모든 분들께 하루 하루가 정녕 아름답고, 행복이 늘 충만하기를 소망해 본다.
사랑과 감사를 전하며.
2014년 7월 17일,
일기.
심야에 글 한 편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