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수강 봄물을 산으로 퍼올려
온 산이 파랗게 출렁일 때
강에서 올라온 물고기가
처마 끝에 매달려 참선을 시작했다.
‘수종사 풍경’ 부분, - 공광규
약간의 시멘트를 덧입혀 정리가 되었다고는 하나, 수종사 가는 길은 여전히 만만치 않은 난코스의 연속이다. 30도에 이르는 급경사, 180도를 도는 급커브, 시멘트가 깨져 붉은빛 황토를 군데군데 고스란히 드러낸 길, 푸른 호수를 건너면 하늘과 맞닿은 곳에 수종사가 있다.
송글송글 이마에 땀이 맺힌 채 한고비 돌아 뒤돌아보면 강물 사이로 양수마을이 성냥갑 만하게 보이고, 다시 한고비 돌아 뒤돌아보면 등 뒤로 시린 강물 속에서 산 그림자가 일렁인다.
일주문도 입구의 부처님도 없었던 호젓했던 시절 나는 이 길을 ‘사색의 길’이라 불렀다. 지금도 수종사가 초행인 사람과 동행하면 차를 멀찌감히 세워두고 꼭 이 길을 함께 걷는다.
왜 두물머리인가를 한 폭의 그림으로 볼수 있는 곳. 격정적으로 달려온 두 강이 하나가 되어 다시 흐르기 시작하는 두물머리, 팔당댐 때문에 섬아닌 섬이 되어 버린 동네 양수리, 두물머리
첫잔은 차의 향을, 두번째 잔은 차의 맛을, 세번째 잔은 차의 색을 음미하라고 했나? 80년대 초 처음 차를 마셨을 때의 황당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니맛도 내맛도 아닌 도무지 알 수 없는 맛. 차의 맛을 아직 알지 못하나 스스로 가끔씩 마시기도하니 삶의 뒷자락을 얼핏 보긴 한걸까?
하루종일 수종사에서, 하루종일 강물을 쳐다보며, 하루종일 차를 마시며, 하루종일 삼정헌에 오가는 사람들에게 찻물을 갖다주며, 하루종일 해우소를 드나들며 보냈다. -2005.12.05
삼정헌 통유리를 통해 보는 두물머리 풍경도 멋지지만, 아직 삼정헌이 생기기 전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선불당 툇마루에 앉아 맨눈으로 보는 두물머리 풍경에는 비할 수가 없다. 넉넉한 품을 가진 남한강이 내쳐 달려온 북한강을 품고 드디어 하나가 되어, 비로소 한강이란 이름으로 흐르는 곳, 그 풍경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곳에 수종사가 있다.
수종사 선불당 마루에 앉아 가슴 속으로 파고 드는 두물머리 풍경은 말 그대로 선경이었다. 어느날부터 중창불사가 진행돼 눈쌀을 찌푸리게 하더니 두물머리 풍경을 통째로 담아낸 멋진 찻집 삼정헌이 생겼다. 게다가 찻값까지 무료이다. '詩, 茶, 禪' 삼정헌에 '酒'를 보태 늘 사정헌을 꿈꾼다.
"내 것, 우리 것만 찾고 챙기는 각박한 세상에 삼정헌을 ‘당신들의 천국’으로 만들지 않고 애써 대중들에게 나누어주신 주지 스님께 진정 고마움을 전한다. 차 마시고 목을 축일 수 있음이 납승의 자비가 아니라 본연이라니. 멋진 주지 동산 스님 만세!"
물은 세상과 다투지 아니한다. 절벽을 만나면 폭포가 되고, 평지를 만나면 속도를 늦추고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담아낸다. 인자요산 지자요수(仁者樂山 智者樂水)를 조금 알겠다. 수종사 찻집 삼정헌의 자신감은 바로 이 석간수. 다산도 반했었다는 아무 맛도 담지 않은, 그래서 세상의 모든 맛을 다 담을 수 있는 물이다.
두물머리 수종사 삼정헌에는 처마 끝에 매달려 참선을 시작한 양수강 물고기를 닮은 다모 보살이 또 다른 풍경이 되어 찻집을 지키고 있다. 자신을 한 점 드러냄 없는 수종사 석간수를 닮은 그녀는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삼정헌 속에, 양수강 속에 언제나 풍경처럼 스며 있었다.
객이 들면 드는 대로, 들지 않으면 들지 않은 채로, 참선에 든 양수강 물고기 같은 말간 얼굴로 찻물을 갖다주고, 차 마시는 법을 설명하는 그녀는 처마끝에 매달린 양수강 물고기의 환생인지도 모르겠다.
삼정헌이 생길 때부터 그곳을 지켰던 그녀가 4년 전 걸을 수 없을 만큼 건강이 악화되어 떠났다가 지난 해 가을 다시 돌아와 참선에 든 양수강 물고기가 되어 있었다. '보살님 안 계신 동안 어쩐지 차도 마시고 싶지 않았어요.' '다음부턴 그냥 가시지 마시고 꼭 들어와 차 마시고 가세요. 누가 지키든 같은 찻집인걸요.‘
삼정헌이 낯설었던 서러운 세월을 고자질하는 중생을 바라보는, 빙그레 웃는 그녀의 해맑은 얼굴이 관음보살이다. 그녀가 이제 영영 그곳을 떠났다. 이젠 자신의 의지로 삼정헌을 떠났다. 난 떠나기전 그녀를 만나러 삼정헌에 갔었다.
팅팅 불은 오뎅과 떡볶이를 사가지고 가서 창살이 아름다운 그녀 방에서 오뎅과 떡볶이와 오백년된 수종사 은행나무 열매를 커피포트에 삶아 먹었다. 전날 눈이 온 탓인지 일찍 객이 끊어진 삼정헌에는 그녀와 나 둘 뿐이었다. 삼정헌 유리 너머로 꽁꽁 언 강물 위로 빨갛게 노을이 내리고 있었다.
조금 더 있으면 더 붉어진답니다. 공양간에서 콩나물밥을 간장에 맛있게 비며먹고 그녀는 나를 배웅했다. 그녀는 새해 첫날 떠난다고 했다. 인연이 되면이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이제 삼정헌에 영영 돌아오지 않을 생각인지도 모르겠다.
생각해보니 그녀의 나이, 고향, 사는곳, 법명조차 물은 적이 없다. 이제 삼정헌을 생각하면 두 강이 합쳐지는 장엄함과 함께 그녀의 작은방, 방바닥이 절절 끓던 그녀의 방에서 먹은 오백년된 은행의 말랑말랑한 맛이 떠오를 것이다. 잿빛 법복을 입는 그녀에게 빨간색 장갑을 선물한 것이 맞는건지 잘 모르겠다.
일기예보대로 강풍이 가로등을 넘어뜨리고, 교회 철탑을 넘어 뜨린 날이었다. 한국 여행이 처음인 미야자키에서 온 사카모토 미츠코상만 아니었더라면 엄두도 내지 못할 수종사행이었다. 경사를 오르던 스타렉스 승합차의 뒷바퀴가 심하게 요동치며 검은 연기를 낸다. 멀찌감치 떨어져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아직 만키로도 달리지 않은 타이어를 믿기로 했다. 견인차가 시멘트 길을 벗어나 좀처럼 길로 진입하지 못하는 차들을 끌어올린다. 무사히 주차장에 도착했다. -2009.12.05
삼정헌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데, 초파일 음식 준비에 눈코 뜰새 없었던 공양간 보살이 삼정헌에 올라와 바쁘지 않으면 열무를 다듬어 달라고 부탁했다. 공양간으로 내려가 쪼그리고 앉아 두시간쯤 열무 다듬고, 맛있는 공양을 대접받았다. 서로 미스킴, 미스리라고 부르며 깔깔 거리는 주름살 많은 노보살들의 수다도 구경하고.. 벌렁 누워 두물머리 풍경도 질리도록 바라보고 돌아온 날로부터 수종사는 놀러가는 절이 아니라 사람을 만나러 가는 곳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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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길산 수종사
수종사 남양주시 조안면의 운길산 중턱에 있다. 한강이 바라다보여 전망이 시원한 곳에 지어져 있다. 신라 시대에 처음 지어진 것으로 전해지나 자세한 연혁은 알 수 없으며, 조선 세조와 관련된 일화가 있다.
세조가 지병 치료를 위해 강원도에 다녀오다가 양수리에서 하룻밤을 보내던 중, 은은한 종소리가 들여오는 곳을 찾아가 보니 토굴 속에 18 나한상이 있고 바위 틈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종소리를 내더라는 것이다. 이에 세조가 18 나한을 봉안해 절을 짓고 수종사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전설이다. 그러나 사찰에 세조의 고모인 정의옹주의 부도가 남아있는 것은 그 이전에 이미 상당 규모의 절이었음을 시사해, 이 전설이 얼마나 정확한지는 알 수 없다.
19세기에 중건한 기록이 있으며, 한국 전쟁 때 피해를 입어 지금 남아 있는 건물은 현대에 다시 지은 것들이다. 전망대가 있어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류하는 지점인 양수리 풍경을 볼 수 있도록 되어 있고, 삼정헌이라는 이름의 다실에서는 차를 마실 수 있다.
아담한 규모의 절이며 경내에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2호로 지정된 팔각오층석탑과 제157호인 조선 세종 21년에 세워진 부도가 있다. 세조가 중창할 때 심은 것으로 전해지는 은행나무도 두 그루 남아 있다.
첫댓글 수종사에 다녀오셨군요..
오랜만에 수종사에서 내려다보는 풍광을 보니
번뇌의 마음들이 다 날아가 버리는 것 같네요..^^
다시 한번 사진 속의 시원하게 탁트인 산아래
두물머리의 풍경을 보며 마음을 반조해봅니다..()
생각해보니 십년도 더 지나갔는데도 여전히 푸른 강물도 좋고, 진청의 산들의 중첩도 좋고, 은행나무도 좋았어요. 다만 삼정헌을 열지 않아 친구에게 차맛을 뵈주지 못한게 아쉬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