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이동훈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이다. 첫 시집과 산문집에서 풍기던 인문주의자의 향기가 더 짙어지고 다채로워진 느낌을 준다. 『몽실 탁구장』이라는 제목에서 느껴지듯이 예술 작품과 문인들을 소재로 한 시집이다.
목차
시인의 말
1부_ 시인의 생가는 시일 뿐
외투 / 난쟁이 그림 / 몽실 탁구장 / 권정생과 김용락 / 평등한 집 / 말아도 / 이상과 소월 / 길 끝 보리술집 / 동피랑에 오면 / 기상도 장정 / 양 치는 시인 / 김수영을 읽는 밤 / 세관원들의 오두막집 / 수향산방 전경 / 이인성과 이쾌대 / 고목과 길 / 이생진과 커피 / 여서도 갈 때는 / 마크 트웨인! / 빵을!
2부_ 복福은 한 입 거리 수단일 뿐
소걸음 / 독락獨樂 / 일로연과도一路連科圖 / 경주 박물관에서 / 비급전관 / 조신을 만나다 / 허균에게 / 오키나와 홍길동 / 암자에서 연암을 읽다 / 흥덕왕릉 / 고산방학도孤山放鶴圖 / 상화와 고월과 목우와 고양이 / 추사의 佛光을 보며 / 정자와 연못이 있는 풍경 / 우화루 호랑이 / 돝섬에서 띄운 편지 / 이인상의 송하관폭도 / 여섯 송이 해바라기 / 식사 / 위층 아래층
3부_ 실망은 기대의 후속 편일 뿐
평행봉 고수 / 1955년 대구, 이중섭은 / 대구 르네상스 다방과 그 이후 / 김종삼과 시인학교 그리고 이후의 시인들 / 라면 혹은 냄비에 대한 추억 셋 / 숙맥과 도사 / 무협지를 읽으세요 / 양말을 곡하다 / 꿩 두고 닭 / 라일락 카센터 / 모깃소리 / 야구의 영혼에 씌다 / 마다가스카르의 웃음 / 배달 소년 / 그는 선생이다 / 미나리의 말 / 민들레 / 청도淸道 기행 / 개도와 낭도 사이 / 우포늪에서
시인의 산문 _고월 이장희를 찾아서
저자 소개
저 : 이동훈
국어교사로 일하며, 배우고 나누는 일에 애를 쓰고 있다. 2009년 월간 [우리시]로 등단하여, 시집 『엉덩이에 대한 명상』(2014)과 산문집 『천천히, 깊이, 시를 읽고 싶은 당신에게』(2019,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를 출간했다.
책 속으로
詩도
탁구도 폼이다.
걱정이라면
폼 잡다가
재미 놓칠까 하는.
--- 「머리말」 중에서
동네 탁구장에
몽실이를 닮은, 작은 체구에 다리를 조금 저는 아주머니가 있다.
상대의 깎아치기 기술로 넘어온 공은
되깎아 넘기거나 살짝 들어 넘기고
강하고 빠르게 들어오는 공은
힘을 죽여 넘기거나 더 세게 받아칠 줄 아는 동네 고수다.
하루는 권정생 닮은, 빼빼 마른 아저씨가 탁구장에 떴다.
허술해 보여도 라켓 몇 개를 지닌 진객이다.
몸 좀 풀 수 있냐는 요구에
몽실 아주머니가 아저씨의 공을 받아주는데
조탑동의 인자한 그분과 다르게
이분은 탁구대 양쪽만 집중 공략하는 극단주의자다.
이쪽으로 찌르고 저쪽으로 때리기를 반복하니
불편한 다리로 한두 번 몸을 날려서까지 공을 받아주던
몽실 아주머니가 공 대신 화딱지를 날렸다.
(중략)
이오덕처럼 바른 말만 하는 관장의 주선으로
다시 라켓을 잡긴 했지만
이전보다 눈에 띄게 위축된 아저씨는 공을 네트에 여러 번 꽂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탁구엔
이쪽저쪽을 삥 뽕 삥 뽕 넘나드는 재미가 있다.
몸 쓰며 기분 내는 일이란
사람 사이 간격도 좁히는 것이어서
탁구장 옆 슈퍼에서
몽실 아주머니와 권정생 닮은 아저씨가 우유로 건배를 한다.
아, 이 재미를
오줌주머니 옆에 찬 교회 종지기 권정생은
평생 누리지 못했겠구나.
--- p.26~27, 1부 「몽실 탁구장」 중에서
마라도 어원을 알려 드릴까요.
먼저, 소주와 맥주를 일 대 이로 말아요.
막걸리와 맥주를 삼 대 일로 말아도 좋아요.
안 말고 싶다고요, 그럼 독도 하세요.
말고 싶은 사람만 잔을 들어서
(다함께) 말아도! 마라도!
어원을 믿지 않는 건 자유지만 말리지는 마세요.
몽마르트에 온, 포의 검은 고양이는
사티의 음악을 말고, 로트레크의 그림을 말고
독주 압생트는 이들을 일찍 말았습죠.
말고 싶은 쪽을 찾아 헤매다가
위트릴로에게 사생아를 물려준 수잔 발라동은
모델을 발라당 벗고 스스로 붓을 든 화가로 나섰고요.
베를렌과 랭보, 고갱과 고흐
그 사이 팽팽한 긴장도 압생트가 대신 말았지요.
세잔과 졸라의 경우는
술 세 잔 더 말면 분명해질 거예요.
이제 서울을 말아 봐요.
구본웅의 우인상에 남은 이상은
불우한 가계와 소설을 말아 날개를 붙이려 했지만
김유정과 함께 폐병으로 주저앉죠.
이상의 연인 변동림은 김환기를 만나고
김환기는 김광섭의 시를 말아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남기더니
다들 주소지를 말고 뭇별이 되었네요.
북쪽의 소월은 꿈을 말고 후배 백석은 연애를 말고
이태준과 김용준의 우정은 전쟁이 말아버렸죠.
북의 경성, 남의 경성 오가던 김기림, 이용악, 김규동은
끊어진 길 한쪽에서 그리움만 말았는데
선 하나 말지 못한 게 평생이니 웃을 수도 없어요.
좀체 섞이지 못한 김수영과 박인환도 저 세상에선 말고 있으려나요.
--- p.32~33, 1부 「말아도」 중에서
1924년, 《금성》 3호엔
이전에 없던 고양이가 두 마리나 있다.
봄을 부르는 고월의 고양이와 함께
은행나무 아래, 졸고 있는 목우의 고양이를 누가 봤을까.
그들의 별난 우정까지를.
상화의 라일락나무 아래, 시집을 펴면
고월의 버드나무 위로
목우의 은행나무 그늘로
고양이 걸음으로 사라지는 옛 기척이 있다.
--- p.89, 2부 「상화와 고월과 목우와 고양이」 중에서
소혹성 사람들* 찾아
바오바브나무도 아닌, 어린왕자도 아닌
입성 허름한 사내와 딸을 마주했다.
널빤지 몇 장 덧댄 창틀
녹슨 못대가리에 녹물 자국이 한 뼘이어도
그 아래 즈음에선 말라 있듯이
궁기 줄줄 새는 가난이라도
창밖을 내다보는 사내의 주름 많은 웃음이 맑디맑다.
대책 없이 자식새끼 줄줄 내고도
그저 착하게 웃는 흥보 표정이랄까.
농사 지어 밥심으로 살고
가난도 웃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매품 팔러 나간 흥보처럼
마다가스카르 사내는 먹는 입을 챙길 뿐
돈 주는 자의 주문에 따라
천 년 아름드리나무를 넘어뜨릴 뿐
망가져 가는 숲에 대해선 침묵한다.
소혹성을 망친 것은 한 그루 나무라고
어린왕자가 말한 것은 어린왕자가 어렸기 때문이다.
* 정혜원 사진전(2018)
--- p.134, 3부 「마다가스카르의 웃음」 중에서
출판사 리뷰
예술혼의 뿌리를 찾다
이 시집은 크게 보면 그림 관련 숨은 이야기와 문인 관련 뒷이야기다. 여기에 이동훈 시인 특유의 시각과 생활 주변 상황이 함께 녹아 있다. 시인은 화폭 밖으로 말을 걸어오는 그림에 꽂혀 있다. 스케치와 붓 터치와 물감 자국 등에서 농담과 부침과 결기 같은 작가의 감정선이 사리어 있음을 시인은 예민하게 감지한다. 그림을 그리게 된 배경이나 화가의 개인적 이력까지 더하면서 시인은 그림을 풍성하게 감상하는 길을 안내한다.
화가는 격식을 싫어해 꽃병을 버리고/ 머무르는 것이 두려워 밑줄기도 그리지 않았네./ 거친 드로잉에 맞춤한 색채는/ 해바라기는 내 것이라고 했던 고흐에게/ 조금도 질 마음이 없었던 거지./ 그렇게 여섯 송이를 떠나오는데/ 뒷목이 잡히고 말았네./ 호박도 칸나도 여섯 송이 해바라기도 다 둥둥 떠서/ 슬픔 아닌 게 있냐고,/ 슬픔 아닌 게 있냐고, 세게 몰아세우는 거였네./ 그제야, 바람 속을 지나는 실루엣이 보여./ 내 집도, 내 친구의 집**도 먼 데만 있고/ 검은 씨, 한 톨 한 톨의 슬픔만 간직한/ 밀밭의 고흐 같은 사내가 보여.
* 정태경,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 여섯 송이 해바라기〉(2017)
** 정태경,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2015)
-p. 100, 2부 ‘여섯 송이 해바라기*’ 중에서
천재를 만드는 게 뼈저린 상실감이라면
평범은 시의 독일지도 몰라
문인 뒷이야기도 마찬가지다. 바른 생을 애써 실천하려 했던 권정생 선생을 비롯해서 그냥 지나치기 쉬운 사소한 사건이나 장면에 시인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독자들이 상황을 새롭게 인식하게끔 만든다. 작가들의 생애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작품에 대한 이해와 통독이 밑바탕에 깔려 있기에 가능한 작업이다.
의성 단촌리 출신, 스물한 살의 문청인 김용락/ 도서관에서 『까치 울던 날』(1979)을 읽으며/ 교회 종지기인 동화 작가가 고향집 인근 사람인 걸 안다./ 김용락은 자전거에 수박 한 덩이 싣고 가서/ 입성 초라하고 머리카락 듬성한 사십 대 중반의 권정생을 만난다./ 김용락이 랭보를 말할 때 권정생은 광주를 말하고/ 수박에 답하듯 『사과나무밭 달님』(1978)을 건넨다./ 동화 속 달님은/ 본 적 없는 아버지의, 소식 없는 남편의 그리운 얼굴이지만/ 김용락의 달님은 권정생 얼굴이다./ 사과나무밭 지나 조탑동 교회 문간방으로/ 오층전탑 곁을 지나 빌뱅이 언덕 오두막으로/ 혼자서도 가고 식구 데리고도 간다.
-p. 28, 1부 ‘권정생과 김용락’ 중에서
시인은 이 시집에서 그림, 시, 소설, 사진을 넘나들며 과거와 현재, 사람과 사건을 버무리며 연결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런 중에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놓지 않고,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들에 대한 애정과 연대감을 보여주는 데까지 나아간다. 고월 이장희에 관한 시인의 산문에서도 시인의 통찰력을 엿볼 수 있다.
이동훈의 『몽실 탁구장』은 인상적인 몇 점의 그림까지 얹어서 읽는 재미를 담뿍 주면서도 삶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하는 시집이다. 한 편 한 편의 시가 곳간을 이루고 결실했다. 경계 없이 여러 분야를 넘나드는 인문학의 정수 같은 시를 찾는 눈 밝은 독자들의 일독을 권한다.
추천평
이동훈 시인은 예술가들의 삶의 터전과 마음의 고향으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그리고 단층촬영하듯 근현대의 시인과 작가, 화가들을 입체적으로 투시하여 그들의 내밀한 속내와 애틋한 사연을 속속들이 보여준다. 이 시집에는 이상화, 이장희, 백기만, 이육사를 비롯한 식민지시대 대구의 시인들과 김소월, 이상, 백석, 김기림, 김유정, 박태원, 박경리, 김춘수, 김수영, 김종삼, 권정생, 홍해리, 김만옥, 이생진, 김용락 같은 작가·시인들이 등장한다.
또한 이인상, 최북, 심사정, 김명국, 정선, 이인성, 이쾌대, 이중섭, 박수근, 구본웅, 김환기, 김용준, 손상기, 김결수, 정태경, 박흥순 같은 한국의 화가들은 물론이고 로트레크, 클레, 모네, 콜비츠 등 서양의 화가들과 최민식, 정혜원 등 사진가까지 모두 한 식구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다.
어디 그뿐인가. 그의 부지런한 발걸음은 우리가 관광지로만 아는 항구와 왕릉, 절집, 정자, 섬에서도 예술가들의 흔적을 더듬어 그 예술혼의 뿌리를 찾아낸다. 시와 그림과 사진을 읽고 보면서 인문정신을 맛볼 수 있는 푸짐한 잔칫상이다.
정지창(문학평론가, 전 영남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