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곡 사랑과 자유의지, 열정적인 삶의 예와 태만의 예
선생님이 나의 소심함을 알고 말해 보라고 용기를 주셨습니다.
그제야 나는 입을 열었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의 뜻을 명확히 알겠으나
그러나 사랑이 선과 그 반대되는 것 양쪽에
뿌리내린다고 하신 데 대해서는
좀 더 설명이 필요합니다.
사랑은 선과 악의 근원이라 했는데 베르길리우스는 17곡에서 ‘자연적인 사랑’과 구별되는 ‘이성적인 사랑’만을 말했습니다. 즉 사랑의 본질을 아직 말하지 않았으므로 단테가 질문한 것입니다.
영혼은 금세라도 사랑하도록 태어났기에,
미가 깨워 움직이게 만드는 즉시
즐거워하는 모든 것에 응답한다.
인간 영혼의 본성은 사랑을 하도록 되어있습니다.
사랑의 힘은 생득적입니다. 인성 중에 뿌리내려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쾌락에 자극을 받자 실제로 깨어나 작용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대상을 향해 움직이는 것입니다.
너희들의 지각력은 외부의 실제 대상에서
이미지를 끌어내고 자기 내부에 펼쳐
영혼이 그 이미지를 향하도록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심개념인 ‘질료와 형상’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너희들의 지각능력이라는 질료에, 외부의 실제 대상에서 이미지를 끌어내어 형상화시켜서 영혼이 그 이미지를 향하도록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이미지가 확고해지면 그 확고해짐이 사랑이다. 사랑은 자연스럽게 미를 통해 언제나 새로워져 너희들 내부의 영혼에 다시 결합된다. 사랑에 젖은 영혼은 욕망으로 나아가고 욕망을 즐길 때까지 쉬지 않는다.
즉, 사랑이 욕망으로 진행된 것이 본성인데 그런데 악은 욕망으로부터 비롯한다. 악은 욕망으로부터 비롯한데 욕망의 근원은 사랑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이란 어떤 것이든 모든 선한 것은 아니다.‘
사랑이란 어떤 것이든 모두
선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피쿠로스 학자들)이 진정
어떻게 눈이 멀어 있는지 이제 잘 알겠지!
선생님께서는 '사랑은 반드시 선한 것만은 아니다'를 설명하신 것입니다.
사랑은 대체로 선을 지향하기 때문에 대개의 사랑은 선해야 한다는 주장은 잘못입니다.
여기에서 에피쿠로스의 학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에피쿠로스는 그리스가 힘을 잃은 헬레니즘 시대의 개인이 느끼는 소외와 무기력이 지배했던 때에 스토아철학과 함께 했던 학파입니다. 두 철학은 물과 기름처럼 서로가 적대적이었습니다.
에피쿠로스는 고통도 불안도 없는 영혼의 절대적 평온함을 가리켜 아타락시아(ataraxia)라고 불렀고 스토아철학자들은 모든 정념으로부터 해탈하여 정념이 없는 상태를 아파테이아(apatheia)라 불렀습니다.
에피쿠로스는 베르길리우스나 호라티우스의 로마 시인에게 영향을 주었고, 스토아 철학은 세네카나 마르쿠스 아루렐리우스 등 로마의 지도자에게 지지를 얻었습니다.
에피쿠러스 학파, 아타락시아
에피쿠로스-구름 한 점 없는 밝은 태양 아래 눈부시게 빛나는 잔잔한 바다에 비유
스토아 철학, 아파테이아
스토아 철학-폭풍이 몰아치는 바다의 배 위에서 태연하게 잠을 청하는 예수의 모습에 비유
선생님의 말씀과 저의 강렬한 관심 덕분에 이제 사랑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만약
사랑이 우리 외부에서 온다면
선택의 여지가 없는 영혼으로서는 어떻게
좋은 사랑인지 나쁜 사랑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사랑이 밖에서 주어진 것이라면 혼은 선택의 여지가 없고 도덕적 책임은 인간에게 없지 않은가? 사랑이 밖에서 주어진 것이라면 자유의지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하는 질문입니다.
인간의 영혼은 본능적으로 이성적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실체적 형상은 물질과 떨어져 있으나
동시 물질과 결합되어 있기도 하며,
자체 내에 이성적 능력을 함유한다.
실체적 형상(영혼을 의미)은 인간 안에 있는 혼입니다. 그것은 결과를 보고서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혼의 구성요소는 직접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성의 근본 규칙이, 원초적 욕구들이 어디서 오는지 알지 못하며 그 근본적인 의지는 칭찬이나 비난의 대상이 아닙니다.
다른 의지들은 이 근본적인 의지에 부합하고, 사람들은 충고하는 이성의 타고난 능력을 지녔으니
이것이 좋고 나쁜 사랑을 자유롭게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도록 사람들이
이성적 판단을 내리는 기본 원리다.
라파엘로의 유명한 '아테나학당'입니다.
로마 바티칸 시국 바티칸 박물관 라파엘로의 방에 있습니다.
라파엘로의 방이 네 곳이있는데 그 중 '서명의 방(Stanza della segnatura)'에 있습니다.
아테네 학당, 로마 바티칸 박물관 라파엘로의 방 중 서명의 방
- 2012년 로마, 바티칸 시국 여행 중에서
아테나 학당,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라파엘로는 아테나학당으로 나란히 걸어 들어오는 플라톤은 하늘을 가리키는 백발의 노인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땅을 가리키고 있는 젊은이로 그렸습니다.
라파엘로는 플라톤을 이상주의자로 아리스토텔리스를 경험을 중시한 철학자로 그리고 있습니다.
이성의 깊이를 실증한 사람들은 이러한
타고난 자유를 알았기에
세상에 윤리를 남겼다.
플라톤과 아이스토텔레스와 같은 고대 철인들은 의지의 자유와 이에 대한 도덕적 책임, 영혼의 건강함과 온전함을 인정했습니다. 고전기 그리스 철학자들이 공유했던 일관된 신념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란 필연적인 생득입니다. 이것을 자연적 사랑이라고 단테는 말합니다. 그러나 이를 다스릴 능력은 인간 안에 있다고 합니다.
생득인데 인간이 다스린다고? 난해한 문제입니다.
이러한 고귀한 힘을 베아트리체는
자유의지라고 알고 있을 터이니, 그분이
너에게 이런 말을 하거든 잘 명심 하여라!
이 이성적인 판단을 통해 좋고 나쁜 사랑을 자유롭게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는 기본 원리 이것이 바로 인간의 자유의지를 의미합니다. 하느님을 닮은 속성으로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입니다. 즉 인간의 이성적 능력을 통해 사랑을 조절해야 합니다. 선한 사랑을 받아들이고 악할 수 있는 사랑은 이성을 통해 조절하고 통제해야 합니다.
내 질문에 명료하고 쉬운 대답을
거둔 나는 배회하는 태만한
영혼처럼 졸면서 서 있었다.
단테의 수준에서는 명료하고 쉬운 대답입니다.
베르길리우스는 사랑과 자유의지에 대해 강론하는데 이 강론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가르침에서 따온 것이며,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에피큐리언 그리고 스토아철학을 인용하였습니다.
덕분에 이 철학들의 이야기를 나도 다시 확인하여야 했습니다.
바티칸 시국 베드로 성당 돔에 올라서
- 2012년 로마 바티칸 시국 여행 중에서
자신의 궁금증을 해소한 단테가 졸면서 스승과 걸어가는데 등 뒤에서 영혼들의 소리가 들립니다.
그 영혼들은 고대 그리스의 디오니소스(박카스)신의 축제에 신도들이 광란의 춤을 추는 모습처럼 채찍질에 몰려 무섭게 달려오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디오니소스의 축제에서 디오니소스를 믿지 않은 이들에게 일어난 일은 그리스 비극에서 참 무서운 이야기였습니다. 그 축제의 신도들이 광란의 춤을 추는 모습처럼 이 망령들의 달리기가 광폭하게 보인다고 합니다.
그러자 다른 망령들이 뒤에서 소리쳤다.
“더 빨리! 시간이 사랑이니, 조금도 허비할 수 없다.
선을 행하려는 노력에 은총이 다시 피어날지어다!“
이승에서 선을 행하는 데 미적지근했던 사랑이 저지른 게으름과 미루는 버릇을 정죄하기 위해 이곳에서 바쁘게 달리고 있습니다. 이들이 연옥에서 받은 벌은 바삐 그리고 서둘러 달려다니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저 위로 올라가려고 길을 알려 달라고 하니 망령 중 하나가 뒤를 따라 오라고 합니다. 그는 달리고 싶은 욕망이 우리를 이렇게 계속 달리게 하니 우리의 행동이 무례해도 용서하라 합니다.
그는 베로나에 있는 산 제노의 수도원장이었답니다.
밀라노를 파괴한 바르바로사와 베로나의 군주 알베르트 델라 스칼라가 사악한 자신의 아들을 목자의 자리에 앉힌 이야기를 하고 곁을 스쳐 멀어져 갔습니다.
뒤에서 또 다른 망령 무리들이 소리치며 달려옵니다.
두 망령이 뛰어가며 유대민족의 40년 출애급 이야기와 아이네아스와 고난을 함께 하지 않은 이들에 대해 소리칩니다. 자신들이 태만했던 것을 힐책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다른 이들 뒤에서 그들이 말했다. “바다에
길을 트고 이집트에서 탈출한
유대 민족은 요르단에 이르기 전에 죽었다.
그리고 안키세스의 아들과 함께
끝까지 고난은 함께하지 않은 사람들은
삶을 불명예스럽게 마쳤다.“
단테는 새로운 생각들에 잠기다 몽롱해져 눈을 감았습니다.
단테는 꿈에 빠져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