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친 글』 아이에게 배운다 / 곽주현
날씨가 추워져 아이들을 승용차에 태웠다. 날마다 걸어서 유치원에 가는데 차를 타서 기분이 좋은지 재잘재잘 입을 다물지 않는다. 작은놈은 차에 관심이 많아 지나가는 자동차를 보고 저것은 아빠와 같은 차고, 이것은 엄마 것과 똑같다며 목소리가 높다. 큰애는 지나가는 여학생들을 보고 저 언니는 옷을 예쁘게 입었고 이 언니는 머리 모양이 어떻다 하면서 외모를 평가하며 간다. 겨우 네 살, 여섯 살인데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의 관심 차이에 놀라곤 한다. 그러다가 빨간불이 켜지면 “할아버지 멈춰, 멈춰.” 하면서 입으로 운전도 한다.
신호등에 멈추어 섰는데 할머니가 “어제 유치원에 안 가서 재미있었냐?”고 묻는다. 좋았다며 엄지 척이다. 어제 아침, 평소보다 일찍 잠이 깬 큰아이가 오늘 유치원에 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이유를 물어도 그냥 쉬고 싶다는 거다. 한 번도 이런 날이 없어서 선생님께 야단을 맞았는지, 친구와 말다툼을 했는지 꼬치꼬치 물었지만, 전혀 그런 일이 없다고 한다. 내가 결정할 일이 아니어서 엄마에게 물어보라고 돌려보냈다. 내 손주지만 어디까지나 우리는 육아도우미다. 육아를 돕다 (이 일을 하다)보면 내 역할의 한계를 분명히 해야 할 때가 종종 발생한다.(있다) 엄마가 유치원 가야 한다고 말하자 “엄마도 가끔 회사 안 가면서 그러네. 아이들도 쉬고 싶은 날이 있는 거야.” 어른들은 서로 쳐다보며 혀를 내밀었다. “그래 가지 마, 오늘 하루만이다.”
종일 집에만 있을 수 없어 점심도 먹고 시간도 보낼 겸 롯데마트로 갔다. 식사만 하고 그냥 올 수 없어 키즈카페에서 두어 시간 동안 놀고 집에 가려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는데 큰놈이 자꾸 저쪽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싶다 한다. 그러자며 그쪽으로 가는데 (발길을 돌렸는데)장난감 가게가 나오자 발길을 멈추고 이것저것 만져 보다 소꿉놀이 장난감을 들고 애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제야 이쪽으로 오자고 한 녀석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작은놈도 큼직한 굴착기를 들고 사 달라고 압박한다. 할 수 없이 지갑을 털었다.
유치원 가는 길 중간쯤 왔을 때 어제 일이 생각나서 “도은아(큰손녀), 엄마에게 할아버지 용돈 더 달라고 말했어?”라고 물었다. 대뜸 “아니, 어른이 좀 참고 기다릴 줄도 알아야지, 왜 그래요?” 뚱한 대답이다. 어제 마트에서 장난감 사느라 돈을 다 써버려서 한 푼도 없다며 놀리려고 말한 건데 심통이 났나 보다. ‘야, 이 녀석 봐라. 어디서 저런 말이 나오지?’ 이제 여섯 살 유치원생의 언어가 이래서 가끔 놀랜다. 또 한 번 아이에게 큰코다쳤다며 아내와 나는 손으로 입을 막고 낄낄 웃었다.
오후에 네 시 무렵에 두 녀석을 맞는다. 오늘처럼 날씨 좋은 날이면(날씨가 좋으면) 꼭 놀이터를(에)가자고 조른다. 종일 교실에 있으면 싫증도 나겠다 싶어 한 시간 동안 마음대로 뛰어다니게 한다. 큰놈은 할머니와 집에 먼저 들어가고 나와 작은놈 둘이 남았다. 아파트 밖에 있는 놀이터에 가자고해 그곳에서 신나게 놀고 돌아오고 있었다. 아파트 아래 후문으로 가는 천변 길과 정문으로 들어가는 갈림길에서 손자가 천변 길로 가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어찌하는가 보려고 “그래 그럼 너 혼자 집에 그 길로 가거라.” 했더니 녀석이 뒤도 안 돌아보고 막 달려가 버린다. 나는 아이가 가는 바로 아파트 안쪽 길을 따라가다가 잠깐 전화를 받고 두 길이 만나는 곳까지 갔는데 손자가 보이지 않는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 보고 이곳저곳을 찾아봐도 애가 안 보여 이마에 진땀이 나고 가슴이 답답했다. 악을 쓰듯 큰 소리로 이름을 부르면서 주변을 샅샅이 뒤졌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지나가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이런 옷을 입고 있는 꼬마를 봤냐고 물어봐도 고개를 젓는다. ‘큰일 났구나’하는 생각에 (‘큰일 났구나.’하고)점점 더 침이 마르고 숨이 거칠어지면서 머리가 멍해졌다. 그렇게 삼십여 분이 지났을까? 안 되겠다 싶어 같이 찾아보려고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자마자 저녁밥 먹어야 하는데 아직 안 들어오냐며 짜증이다. 지원이가 없어졌다고 말하니 진즉 들어왔는데 무슨 소리냐며 윽박지르듯 한다.(윽박지른다) 안도의 숨을 내쉰다.
아이에게 어떻게 들어왔냐고 물었다. 아파트 출입구 앞에 서 있는데 어떤 아저씨를 따라 들어왔다며 왜 그러냐는 표정이다. 승강기를 타고 올라와 현관문을 두드리니 누나가 열어 주었다 한다. 아내는 지원이가 혼자 왔기에 내가 현관까지 데려다주고 운동하러 갔는가 보다 했단다. 그렇게 혼자 가면 어쩌냐고 다그쳤다. 입을 삐죽삐죽하면서 “할아버지가 혼자 집에 가라고 말했잖아요.” 한다. 나무라면서도 아파트와 놀이터의 거리가 꽤 있는데 (거리가 꽤 먼데) 어떻게 찾아왔는지 기특했다. “그래 혼자 가라, 했었지(했지.)” 아유 못 말릴 녀석들. 또 한 수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