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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강 창세기 11:1~9 그들을 흩으셨더라 50.52
26.09.16(수)
우리 지난 시간에 창세기 10장에 있는 노아의 세 아들 셈 함 야벳 그 족보를 우리 함께 살폈습니다.
그러니까 그 세 족보로부터 온 인류가 퍼져나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사는 어떤 사람이든지 간에 그 사람의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창세기 10장에서 만나게 돼 있단 말이죠.
왜냐하면 홍수 이후에 노아의 세 아들들로부터 인류가 퍼져나갔단 말입니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한자 문화권에 살고 있던 우리는 그러면 이 창세기와 어떤 관련이 있는가
지난 시간에 그 한자 속에 담겨있는 창세기 내용 그것을 한자 몇 글자를 통해서 우리가 함께 생각을 하면서 우리 자신들과 이 창세기 10장의 근거를 한번 연관성을 한번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렇죠 한자로 만든다. 창조할 때 지을 造자 지을 조 자를 파자를 하니까 흙土 자에 입口 자 삐칠 별 자 쉬엄쉬엄 갈 착 자 이 네 글자로 연결이 이어져 구성이 돼 있단 말이죠.
여러분 화가에게 있어서 항상 제일 문제는 모델이라고 그래요. 우리가 언뜻 생각하면 화가는 예술가고 창조하시는 분들이잖아요.
그러면 천사의 얼굴도 그냥 상상속에서 그려낼 것 같고 뭐 어떤 사람이든지 생각하는 대로 그려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실은 그렇지 못한 거예요.
화가가 상상해서 그릴 수 있는 사람의 얼굴은 몇 명 안 된다는 거예요. 반드시 모델이 있어야 모델을 보고 영감을 얻고 그림을 그려내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하나님께서 60억 인구를 다 다르게 만드셨다 심지어는 쌍둥이까지도 엄마가 보건대는 다르게 생겼다 이거 하나님이기 때문에 가능한 거란 말이죠.
그러니까 화가가 열 사람이 등장하는 그림을 모델 없이 열 사람을 그릴 수 없다는 거예요. 여러분 글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옛날에 중국 사람들이 수천 글자를 만들어내는데 뭐 이런 부호 이런 부호 이런 부호를 가지고 임의로 몇 글자를 만들어 낼 수 있겠습니까?
그 부호 하나하나 속에 의미를 담을 때에만 각각 다른 글자를 만들어 낼 수 있거든요. 그런데 지을 造 자 크리에이션 창조한다라고 할 때 왜 그 의미를 흙으로 사람을 쥐고 휙 쉼을 부니까 쉬엄쉬엄 걸어갔다라고 의미를 하고 이걸 조자라고 하자라고 했나 말입니다.
또 우리가 선자 보지 않았습니까? 배 船 자 배 舟 자에 여덟 八자의 입 口 자 여덟 사람이 탄 배가 선이다. 이렇게 해석이 됩니다.
한자로 주 자와 선 자의 차이를 아시죠.
주舟는 이거 작은 배입니다.
선船은 큰 배예요. 그래서 여객선 화물선 유조선 이렇게 하지 유조주 화물주 이렇게 얘기 안 하잖아요. 편주 작은 배 편재 일엽편주 이러지 일엽편선 이렇게 얘기 안 하거든요.
그러니까 그냥 작은 배는 주舟 자여요. 근데 큰 배는 선 자는 8사람이 타고 있으면 큰 배라는 겁니다.
여러분 이 한자가 확정될 그 은나라 시대 때 갑골 문자가 변형해서 은나라 시대에 지금과 같은 한자의 형태가 이루어져 갈 때 그 은나라는 말이죠. 무슨 부족들이 사는 동네가 아닙니다.
여러분들 혹시 외국 박물관에서 3500년 전 은나라 유물을 보신 분들 아시면 깜짝 놀래겠습니다마는 그 은나라 시대 때 만들어진 그 청동기 그릇들이요.
오늘날 사람들보다 더 정교하고 크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 당시에 그 사람들 다 전쟁 했거든요. 은나라 전 한나라 때도 다 전쟁했습니다.
그러면 전쟁을 하면 배를 타고 병사들이 수군들이 다니면서 전쟁을 했는데 병사들이 얼마나 많은 병사들이 타는 배가 있었겠습니까?
그런데도 왜 큰 배는 8사람이 타야 큰 배라고 글자를 정했느냐 말입니다. 그 8사람은 노아 식구 8명이라고 그랬죠 그죠
노아 부부 세 아들 부부 그래서 8명인데 생각을 해 보십시오. 그 당시에 사람들이 생각할 때에 가장 큰 배가 뭔가 노아의 방주에 왜 짐승까지 다 들어간 배이지 않습니까?
이 땅에 살아있는 모든 짐승 새 다 들어갔거든요.
요즘 규격으로 따져서 축구장보다 더 길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사람은 비록 여덟 사람밖에 타지 않았지만 그 여덟 사람이 탔던 그 노아의 방주가 그들이 아는 배 가운데는 제일 큰 배입니다.
그러니까 주는 작은 배 큰 배는 선이라고 한다고 하는 이 한자의 의미를 알면 알면 노아의 방주 방주 주 자가 사실 번역이 잘못된 걸 알 수 있죠. 그죠 방이라고 하는 것은 모방입니다.
그래서 노아의 방주가 일반 배처럼 유선형으로 앞은 쪽빗하고 좁고 이런 게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직육면체로 네모로 만들었다 해서 모 방자를 써서 방주라 그랬거든요.
그런데 모든 짐승이 다 들어가는 배라면 사실은 옛날 번역하는 분들이 방선이라 했어야지 맞는 거죠. 여러분 이 한자를 만들던 사람들 머릿속에는 100명이 탄 군사의 배보다도 8명 노아 식구가 탔던 배가 제일 큰 배입니다.
그래서 선 자에 8명이 탄 배라고 의미를 붙여서 글자를 만들었다 그거죠.
동굴 혈穴자 움진면에 토굴집이라는 움진면에 팔八자를 썼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듯이 사람들이 나무로 집을 건축하기 전에 어느 곳에서든 사람들은 일단 동굴에서부터 살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면 동굴 안에 왜 8명만 있느냐 말입니다.
더 많은 사람이 살 수도 있고 적은 사람이 살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노아의 홍수 이후에 노아 식구 8명이 동굴에서 살았을 것이라는 그 전제하에 동굴 혈자를 웅진면 밑에 여덟 사람 팔자를 넣었다
한자로 옳을 의義 자 의롭다 할 의 자를 나 我 자에다가 羊을 썼다 나 아자에다 인자 써도 되잖아요. 약속이니까. 이거 우리 의라고 하자 라고 하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양이 되는 것을 써놓고 이걸 의라고 하자고 약속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글자를 들여다보면 들여다볼수록 그 글자 한 자 한 자 속에 창세기가 들어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거죠.
바꾸어 말하면 중국 땅에서 한자를 만들던 그 사람들이 이 창세기의 모든 내용을 알고 있던 창세기 10장의 후예들이었다. 이렇게 해석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도 결국 따지고 올라가면 창세기 10장 족보에서 우리도 다 만나게 된다. 그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 시간에 세 가지의 결론 교훈을 얻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과 화평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왜 이 세상 모든 사람은 한 족보에서 나왔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불의와 타협하는 일이 아니라면 내가 한 사람이라도 더 사귀는데 내가 정의를 짓밟아야 된다. 그건 아닌 거죠.
내가 악을 행하는 일이 아니라면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과 화평을 누리는 것이 한 족보에서 인류를 나오게 하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이다 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생각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내 자식의 원수는 내 자식 속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노아의 아들 세 아들의 족보인데 그 족보 속에 블레셋도 나오고 니므롯도 나오고 나중에 바벨론도 나오고 앗수르도 나오고
지금은 내 자식들이 다 내 자식이고 귀엽고 다 괜찮을 것 같지만 100년 200년 300년 지나서 내 자식들의 후손 속에 내 자식들을 해치는 원수가 안 나온다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그래서 내가 정말 믿음의 부모가 되는 것이 중요하고 내 자식들에게 학력과 그 경력의 옷을 입혀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더 신앙을 중심에 심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세 번째 교훈은 우리가 믿음의 삶을 산다고 하는 것은 결국 믿음의 족보를 일구어 가는 것이라고 그랬습니다.
10:37
나 혼자 잘 믿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믿음이 대대 손손히 이어져서 나의 가계 자체가 믿음의 족보를 이루게 하는 것이라는 것이죠.
그것은 우리 힘으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가능하다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장이 우리에게 복음중의 복음이라고 그랬죠
아브라함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분명히 아들을 준다고 약속하셨는데 그 하나님의 말보다 자기 처의 말을 더 믿고 종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얻어서 불신을 뿌리잖아요.
그런 불신의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야곱 천하의 사기꾼 아닙니까 다윗은 자기 충복의 아내를 데려다가 불륜을 저지르고 그 남편을 죽이기까지 하는 패륜아잖아요. 그 자체만 내버려 놓으면 그건 망하는 인생이죠. 끝난 겁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그리스도의 선조가 되더라는 거예요.
시아버지하고 불륜을 저지른 다말이라는 여자
여리고의 기생 라합
다윗과 불륜을 저지른 밧세바 형편없는 여인들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믿음의 족보를 이룰 수 있다 라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 자신들만 보면 우리는 늘 절망할 수 밖에 없어요. 내가 어떻게 내 100년 후에 내 자식들 속에서 내 자식의 원수가 안 나오게 할 재간이 내게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만 보면 우리에게는 언제든지 소망이 있습니다. 내가 내 자식에게 그리스도만 물려주면 그 아이들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두 더불어서 마태복음 1장의 믿음의 복음의 족보를 이루어 갈 수 있기 때문이죠.
오늘 창세기 11장은 그 유명한 바벨탑 사건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1절입니다.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온 땅에 언어가 하나고 말이 하나였던 것은 당연하죠. 그죠 창세기 10장의 족보가 하나로 하나의 족보로 시작이 되니까 홍수 이후에
2절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사람들이 바벨탑을 짓는 어리석은 짓을 행한 곳이 시날 평지예요. 그런데 사람들이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에 잠시 정착을 했어요.
동방으로 옮겼다 우리말로 더 쉽게 표현하면 동쪽으로 가다가 시날 평지에 멈췄다 그 말이잖아요.
그런데 히브리말로는 민케뎀이라고 쓰여 있는데요.
이 민케뎀이라고 하는 것은 믹이라는 전치사하고 케뎀이라고 하는 동쪽을 가리키는 명사가 합쳐져 있는데, 히브리말로 민이라고 하는 전치사는 어디 어디로가 아니라 어디 어디로 부터라는 말입니다.
거기에 히브리 원전에 의하면 동쪽으로 붙어 오다가 신할 평지에 멈췄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말 번역이 완전히 틀렸는가 그 자체로서는 틀렸다고 보기가 어렵습니다.
그 자체로서는 맞을 수 있어요.
가령 제가 서울에서 강릉으로 가요
그러면 서울의 동쪽이 강릉 아닙니까 그죠
그러면 강릉에 앉아있는 사람이 보면 제가 오는데 동쪽으로 오고 있는 거예요. 그렇죠.
서울에서 동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천에 사는 사람이 보면 어떼요
인천은 서울 서쪽에 있습니다. 인천에서 보면 서울은 인천 동쪽이에요.
인천 동쪽인 동쪽에서 내가 동쪽인 강남 강릉으로 가니까 동쪽으로부터 지금 가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어디에서 보느냐는 위치에 따라서 우리 번역을 꼭 틀렸다라고는 말할 수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동방이라고 하는 의미가 뭐냐가 더 중요해요. 그래야지 우로부터이냐 아니면 우로이냐가 정확하게 드러납니다.
창세기 2장 8절 한번 보실까요?
여호와 하나님이 어디에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창세기가 동방이라고 이야기할 때 그 동방은 에덴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이 여기에 있는 이 본문을 에덴이라고 표현하면 지금 사람들이 에덴으로부터 자꾸자꾸 멀어지고 있는 거예요.
에덴 가까운 곳에 있다가 에덴으로부터 자꾸자꾸 멀어지다가 시날 평지에서 바벨탑을 짓는 그런 어처구니없는 짓을 해요.
에덴이라고 하는 곳은 우리가 되돌아가야 할 영원한 믿음의 본향입니다. 그런데 이 당시 사람들은 에덴으로부터 점점 점점 멀어지는 삶을 살았다.
이것은 단순한 공간적으로 멀어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들의 신앙의 중심이 에덴으로부터 멀어졌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죠.
또 동방을 뜻하는 히브리말 이 케템이라고 하는 것이 위치 장소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시간을 뜻하기도 해요. 시간을 뜻할 때 그 의미는 태고 다시 말하면 창조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이 사람들이 시간적으로 창조의 시점에서부터 점점 멀어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이 2절
사람들이 바벨탑을 짓는 그 어리석은 짓을 한 그들이 동방으로부터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서 거기 거류했다라고 하는 이 말이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그 깊은 의미가 뭔가 이들이 되돌아가야 할 믿음의 본향인 에덴으로부터 그들의 신앙의 중심이 점점 멀어졌는데 그것은 시간적으로 세월이 흘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면 우리는 창세기를 배워오면서부터 창세기가 계속 되풀이해서 강조하는 걸 알게 되죠.
가인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예배를 열납하시지 아니할 때 왜 하나님께서 안 받으실까 자기를 되돌아보지 않고 왜 내 건 안 받으시는가 하나님께 낯을 붉히고 화를 낼 정도로 그 하나님 앞에서 영혼이 무디어진 이유가 세월이 흐른 뒤에요 예전엔 안 그랬다는 거잖아요. 그죠
하늘의 사람이던 노아가 홍수 이후에 땅의 사람으로 전락해서 꼭지가 돌도록 술을 마시고 자기 몸도 가누지 못할 정도가 된 것 왜 그랬습니까? 세월이 흘러서
여러분 이 노아의 세 아들들이 다 방주에 있던 사람들이잖아요. 그죠 그들이 나와서 얼마나 하나님을 열심히 섬겼겠습니까?
그러나 세월이 흘러서 한 아들 함은 엉뚱한 짓을 하고 그리고 세월이 더 흘렀더니 그들의 후손이 에덴에서 그 중심이 점점 점점 더 멀어지면서 하나님을 외면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말씀드리지만 세월은 우리에게 양약이 될 수도 있고 세월은 우리에게 독약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도 세월은 흘러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은 오늘 이 시간을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를 반듯하게 세우는 은혜의 시간으로 건져 올린 사람도 있고 오늘 하루 때문에 하나님과 더 멀어진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누가 지혜로운 자이겠습니까?
에베소서 5장 16절 말씀처럼
세월을 아끼는 사람 아낀다는 말은 절약하다는 말이 아니라 건져 올린다는 뜻이라 그랬죠 엑사고라죠
그 세월을 진리로 건져 올려서 그 세월의 흐름이 나로 하여금 녹익은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게 할 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 아니냐 말이죠.
우리가 세월이 흘러가면 자칫자칫 교만해지고 하나님과 멀어지기 쉬운데 세월이 흘러가면 흘러갈수록 우리가 더더욱 하나님 앞에서 깨어있고 그 세월을 영적 양약으로 만들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게 뭐겠습니까?
20:17
인간들이 언제 최초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요.
에노스 때 에노스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 그랬죠 자기의 죽음을 인식할 때 인간들이 비로소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비로소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었단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월이 흘러갈수록 그 세월을 더욱더 나를 바로 세우는 양약으로 삼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내가 에노스라는 사실을 날이면 날마다 인식하는 거예요.
왜 그렇죠 하루가 흘렀다는 것은 내 죽음의 날이 하루 가까워진 겁니다. 어떻게 교만해져요 어떻게 하나님을 멀리해요.
내가 이 땅에서 내 생이 끝나는 날이 하루하루 지날 때마다 하루하루 가까워진다는 걸 알면 어떻게 세월의 흐름이 교만의 강물이 될 수 있겠습니까?
나를 더 겸손하게 세워주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되는 것이죠.
3절 보십시다.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어떻게 하자고요.
견고히 굽자 견고히 굽자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했다.
이 이전까지 사람들이 집을 만들 때에 쓰는 재료라고 하는 것은 돌이라든가 아니면 진흙을 이겨서 햇볕에 말린 벽돌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이 뭘 할 줄 알게 되었는가 진흙으로 이긴 그 진흙덩이를 불가마에 넣어서 불로 구워서 구워내는 벽돌을 만들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또 뿐만 아니라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자 역청이라고 하는 것은 당시 중동 지방에 흔히 나던 아스팔트죠 그 이전 사람들은 진흙을 이겨서 네모로 만들어서 햇볕에 말린 다음 마른 진흙 벽돌을 위에다가 쌓는데 무너지잖아요. 그죠
그러니까 햇볕에 말은 그 벽돌과 벽돌 사이를 진흙을 놓고 쌓아 올렸으니까 얼마나 높이 쌓을 수 있겠습니까? 못 쌓는 거죠.
그런데 벽돌을 불에 구울 줄 알았을 뿐만 아니라 아스팔트를 이용할 줄 알았단 말입니다. 아스팔트를 불에 끓여서 불에 구운 벽돌과 벽돌 사이에 넣어서 접착제로 사용하니까 마음먹은 대로 계속 쌓아 올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보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이 당시 사람들이 볼 때에는 정말 탁월한 발명이요 과학적 쾌거였습니다.
그것을 발견하고 난 다음에 뭘 하자고 했는가
4절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자
여러분 불에 구운 벽돌과 아스팔트로 아무리 높은 탑을 쌓아도 몇십 미터나 올라가겠습니까? 그런데 하늘에 닿는 탑을 쌓자는 거예요.
큰 도시 성읍을 짓고 그 한가운데에 하늘에 닿는 탑을 만들자 겨우 벽돌 구울 줄 알고 아스팔트 쓸 줄 안다고 인간이 이렇게 교만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하늘에 닿는 탑을 왜 만들려고 했는가
4절
자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첫째 우리 이름을 내자
하늘에 닿는 탑을 만들려고 하는 첫 번째 목적이 우리 이름을 내자는 거예요.
히브리말 원전을 그대로 번역을 하면 우리 자신들을 위하여 이름을 새기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탑을 만드는 우리 뭐 100명일 수도 있고 천 명일 수도 있고 만 명일 수도 있고 십만 명일 수도 있죠.
우리 모두가 우리 자신들을 위해서 우리 이름을 그 탑에다 새겨 넣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 철학자 휠로는 이 구절을 해설할 때 당시 이 탑을 쌓던 사람들이 벽돌을 불에 굽잖아요. 그런데 굽기 전에 진흙에다가 다 자기 이름을 썼다는 겁니다.
그래서 불에 구워낸 다음에 자기 이름들이 박혀있는 벽돌 한 장 한 장을 쌓아 올렸다는 거여요.
가끔 그 이 절에 구경을 가면 절에 공사하는 절을 보게 되지 않습니까?
그때 기왓장 시주를 어떻게 봤습니까?
그냥 뭐 기와장 한 장에 5천 원 만 원 이렇게 안 받죠.
기왓장에 시주하는 사람 이름을 꼭 쓰게 해 줍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내거든요. 사람들은 자기 이름 내는 것을 그렇게 좋아해요.
제가 제네바에 있을 때 그 제네바에서 알프스 제일 높은 몽블랑이 한 70km 80km 떨어져 있는데요. 제가 얼마나 자주 갔겠습니까? 한국에서 오는 분들은 항상 거기 데려다 주기를 원하시거든요.
그런데 그 리프트를 타고 제일 전망대 제일 높은 데 가면 말입니다. 그 벽에 한국 사람들 이름이 쓰여 있어요. 그랜드 캐년에 가셔서 확인하신 분은 아시겠습니다마는 그랜드 캐년 전망대 나무도 나무에도 한국 사람이 나무로 이름을 새겨놨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특별히 이름을 드러내기 좋아하는 것 같아요. 교회도 마찬가지잖아요. 유명한 모 교회는 예배당을 건축하면서요 그 예배당의 모든 스테인드 글래스에는 헌금자 이름이 다 새겨져 있습니다.
스테인드 글래스는 그 유리를 전부 다 조각해서 만든 건데 커다 사람 이름 불에 구워서 다 했거든요. 또 어떤 유명한 교회는 그 예배당을 짓는데 제일 돈을 많이 낸 부부 이름으로 홀 이름이 있잖아요.
어디 그뿐입니까? 신학교 가면 어떤 교단이든지 신학교 방마다 헌금한 사람 이름 다 있잖아요. 신학생을 배출하는 신학교도 그짓 한단 말이죠. 한국 사람들은 헌금을 해도 이름을 써야 직성이 풀리지 않아요
여러분 이 뒤에 가서 보겠습니다마는 이 사람들이 자기네들의 이름을 내기 위해서 바벨탑을 지어 올렸는데 그 이름이 어디 갔습니까? 없습니다 다 사라졌습니다
성경에는 어떤 사람의 이름이 남아 있습니까?
자기 이름을 내세우려 하지 않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이름만 내세우려고 했던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님에 의해 영원히 남아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분을 위해서 내 이름을 없에는 사람들이에요. 그때 결과적으로 그분이 내 이름을 남겨주시는 것인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옛날 바벨탑을 짓던 사람들처럼 계속 자기 이름을 남기려고 합니다.
그럼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는 마지막에 가서 보면 알겠죠.
또 4절 두 번째 이유가
첫 번째 우리 이름을 내고
두 번째로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두 번째 목적은 온 지면에서 흩어짐을 면하기 위해서 바벨탑을 쌓자는 것입니다.
바벨탑을 높이 쌓아두면 아무리 멀리 가도 그 바벨탑이 보일 테니까 우리는 흩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 바벨탑이라는 게 뭐죠 인간들이 자신들의 교만을 겉으로 드러낸 거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바벨탑을 우리가 흩어지지 않는 인생 푯대로 삼자 이 이야기는 바꾸어 말하면 우리 자신 스스로 우리 인생의
푯대가 되자 이 말입니다.
인간이 과연 자기 인생의 푯대가 될 만한 존재가 되는가
시편 53편 2절에서 3절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도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의로운 자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자기 인생의 푯대가 될 수 있는가 불가능하죠.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인간이 자기 이름을 내걸고 자기 스스로 인생의
푯대가 되기 위해서 함께 모이면 반드시더러운 집단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보십시오. 일본 사람들이 일본 천황이라는 한 인간을 중심으로 그들이 모이니까 이 동남아시아 대륙에서 저지른 만행을 보십시오.
이 땅에서 36년 동안 범죄 집단 아니었습니까?
독일 사람들이 히틀러라는 한 인간을 푯대 삼아서 그를 중심으로 모이니까 온 인류에게 독일이 저지른 죄가 얼마나 큽니까?
중세 로마 천주교 교회가 교황이라는 한 인간을 중심으로 모이니까 그 자체가 부패집단이 돼 버리잖아요.
30:28
여러분 인간은 절대로 인생의 푯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인간이 고작 그 시대에 자기들 나름대로 탁월한 과학적인 발명을 했다고 벽돌을 불에 구울 줄 알고 아스팔트를 쓸 줄 알게 되었다고 우리 이름을 내고 우리 자신들이 인생의 푯대가 되자는 교만함을 보였습니다.
이 교만함은 거슬러 올라가면 인간의 원죄와 맥을 같이 하죠.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가 왜 범죄합니까? 사탄이 하나님이 먹지 말라하신 이 실과를 먹으면
네 눈이 밝아서 네가 하나님처럼 될 거야.
인간은 하나님이 되고 싶어서 범죄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 이름이 아니라 내 이름으로 살고 하나님이 푯대로 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인생의
푯대가 되겠다는 것이 원죄지않아요.
그래서 인간은 그 이후에 끊임없이 자기 이름의 노예가 되고 자기 스스로 인생의 푯대가 되려고 하는 어리석음을 반복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가만히 두시지 않죠
왜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시니까 내버려두면 그건 멸망이에요.
그 못하게 막으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5절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여기에서 사람들이라고 되어 있는데 우리말 사람들이로 번역된 히브리 말이 페네 하 아담입니다. 그러니까 번역을 하면 그 아담의 자손들이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아담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진 보통 명사이기도 하지만 첫 번째 인간인 그 아담의 이름 고유명사이기도 하잖아요.
그러니까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서 자기 이름 자기 촛
푯대가 되려고 했던 바로 그 아담의 후손들 그 말이에요.
그 후손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하나님께서 이렇게 내려오셔서 보시지 않으면 모르신다는 말인가 위에서는 전혀 안 보이시는가 그런 의미가 아니죠.
이것을 지난 몇 주 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마는 신인 동형 동성적 표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신인 하나님과 사람이 동형 같은 형상이고 동성 같은 성정을 지녔다는 표현법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에게 사람과 동형 동성적인 하나님의 모습을 표현해 주므로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더 쉽게 인식시켜주려는 표현이다 그 말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내려오셔서 이렇게 뭘 면밀히 살펴보시지 않으면 모르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처럼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서 또 다시 잘못을 저지르는 인간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조치를 취하기 시작하셨다고 이해하면 되는 것이죠.
그래서 유대교 랍비들은 지금도 유대교인들은 이 창세기 구약을 경전으로 쓰지 않습니까?
유대교 랍비들은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위에서 세상이 어떻게 되는가를 보려고 내려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비의 자리에 앉아 계시다가 심판의 자리로 내려오셨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입니다.
6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당시까지만 해도 언어가 하나밖에 없잖아요.
그리고 자기 이름을 내고 스스로 인생의 푯대가 되고자 하는 교만에 빠져 있으니까 얼마나 서로들 잘 맞았겠어요.
그래서 가만히 그 하는 일을 내버려 둘 수 없도다 이건 하나님께서 역부족이다. 그 말이 아니죠. 이미 인간이 인간다움의 자리를 넘어섰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방법대로 하실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7절
우리가 내려가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도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짓자 하셨는데 여기에서도 우리가라고 말씀하셨죠.
삼위일체 하나님이신 것이죠.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8절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하나님께서 내려가셔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시면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푸츠라고 하는 말은요 그 본래 뜻이 산산조각으로 부수다 산산조각으로 깨트린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단어를 가장 쉽게 표현할 수 있는 행동으로는 들고 있던 유리병을 탁 던지는 겁니다.
그럼 산산조각이 나잖아요.
하나님께서 그들을 온 지면에 그렇게 산산조각이 나게 하셨다 그것은 단순히 사람들을 분산시키고 싶다는 의미뿐만이 아니라 그들이 쌓던 바벨탑을 마치 유리병을 깨뜨리시듯이 산산조각 내어버리셨다는 것이어요
아까도 말씀드렸죠 그 벽돌 하나하나에 당시의 사람들이 다 자기 이름을 박았다고 하십시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유리병을 깨뜨리듯이 다 산산조각 내셨다는 것입니다
9절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어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곳 이름을 바벨이라고 하셨습니다. 바벨이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어 동사 빨랄에서 나온 명사인데 혼잡케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들을 온 지면에 또 흩으셨다
퓻츠라는 동사가 또 반복이 됩니다.
여기에서 혼잡이라고 하는 이 단어는 영어로 번역하면 conpusion 그러니까 혼란 혼동 이런 의미죠
여러분 인간이 자기 이름을 내고 자기 스스로 인생의
푯대가 되겠다고 할 때 인간들은 초기에는 다 짝짝쿵이 맞습니다. 일 잘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이 되어 보세요. 반드시 혼란 속에서 깨지고 맙니다. 일본이 천황을 중심으로 제국주의 했던 일본 제국주의가 어떻게 됐습니까? 산산조각으로 깨지지 않았습니까?
2차 대전 때에 그 민족이 그 지도자들로 인해서 당한 그 혼란과 그 혼동을 어떻게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히틀러를 중심으로 모였던 독일 깨지지 않았습니까? 나치제국 교황을 중심으로 모였던 로마 천주교회 중세기의 로마 천주교회 개신교가 떨어져 나갔다고 하는 것 자체가 깨어진 것 아닙니까
여러분 그뿐만이 아닙니다.
여러분들 한번 제가 드리는 말씀을 이번 주일 내로 어디 가셔서 직접 잘 한번 확인해 보세요.
우리나라에서 그동안 이름 있는 크리스찬들이 경영하는 기업들이 있지 않았습니까? 재벌그룹에 들어갔던 기업들도 있습니다.
그분들 가운데에 좋은 일을 많이 하고도 자기 이름을 전혀 안 내세운 기업도 있습니다. 아직도 건실하게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기업의 총수가 가는 데마다 자기 이름 세우고 기념비 세우신 분들이 있습니다.
어디 가든지 자기 이름 내세운 분이 있습니다.
그 기업이 남아있습니까?
있어도 명맥도 제대로 유지되지 못하고 이제 전혀 존재 가치도 없게 됐죠
여러분들 한 40~50년 된 교회에 가셔서요
그 교회에 무슨 물건을 내고 방을 지으면서 사람들 이름 다 명찰 붙어있는 것 있죠.
그분들이 지금 어떻게 됐는지 확인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깨십니다. 왜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내버려두면 그건 멸망이에요. 깨뜨려서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거예요.
40:22
스스로 하나님이 되겠다고 바벨탑을 짓고 자기 이름을 내고 자기 스스로 인생의 푯대가 되겠다고 하면 이 인간들이 얼마나 망칙합니까?
하나님 앞에서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당장 쓸어버리지 않습니다. 그들을 흩으셔 다시 기회를 주시는 것이죠.
네 이름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뭐 누가 얼마 헌금하는지 우리 다 모르지 않습니까? 우리는 누구도 이름을 쓰지 않으니까 여러분 우리 일평생을 이 신앙을 지키십시다.
이것이 하나님 안에서 우리 자신들을 영원히 지키는 길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우리 자신들을 드러내기 시작하면 하나님은 깨시겠죠.
우리는 오늘 이 본문을 통해서 두 가지의 교훈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내 자신의 것을 맹신하고 자랑하는 어리석음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거여요.
여러분 오늘날 철골로 100층 뭐 100수십 층의 건물을 짓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본다면 벽돌을 구울 줄 알고 아스팔트를 쓸 줄 알고 하늘에서 닿는 탑을 짓자 이 사람들이 얼마나 웃기는 사람들이어요
그런데 하나님 보시면 오늘날 우리도 똑같다 그거예요. 오늘날 인간들은 인간 게놈 지도를 완성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소를 복제하듯이 양을 복제하듯이 인간도 복제할 수 있다는 거예요.
인간의 과학이 다 한다는 겁니다.
우주도 정복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창세기 1장 배울 때 연세대 천문학 교수이신 윤석진 교수를 통해서도 우리가 들었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태양계라는 게 도대체 어느 정도 크기여요.
우리가 보니까 크지 하나님이 만드신 이 끝도 없는 우주에 보니까 이 태양계라는 거는 좁쌀만큼도 안 돼 그 좁쌀만큼 한 것들 중에서도 지구에서 가까운 별 몇 군데에 로켓들을 보냈다고 우주를 정복했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이때 사람이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겨우 게놈 지도 정도 만들고 세포 분열에서 육식 고기 덩어리 만들 줄 알게 되었다고 인간의 과학이 모든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하는 것 벽돌 구울 줄 알았다고 하늘에 가는 탑을 쌓겠다는 이 사람들하고 똑같죠 하나님 보시면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의 것을 자랑하는 어리석은 인간이 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 속에는 창세기 11장이 되풀이될 뿐 이어요
우리가 평생 자랑해야 될 건 뭐겠습니까?
첫 번째로 아까 말씀드렸듯이 내가 에노스임을 자랑해야 합니다.
평생 나는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어요 그때만이 나는 생명인 하나님과 더욱더 깊은 관계를 맺게 됩니다.
두 번째 내가 평생 자랑해야 될 것이 있다고 하면 나의 죄인 됨을 사도바울이 뭐라고 얘기합니까?
디모데전서 1장 15절입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사울은 한번도 예수 믿고 자기 자신을 스스로 홀로 의인이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의롭다고 얘기할 때는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분으로 말미암아 의로워졌다라고 얘기했을 뿐이죠.
그걸 어떻게 깨닫고 잊지 않는가 죄인 중에 괴수 죄인인 것을 잊지 않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은혜 속에만
거하는 것이죠.
또 나의 약함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되겠죠. 고린도후서 11장 30절입니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내가 로케트를 쏠 줄 알아도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지금이라도 나는 가는 존재입니다.
질그릇 같은 존재여요 그 사실을 깨달을 때에만 나의 것을 더 맹신하는 교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죠.
또 사도바울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1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날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삶이 자랑이 되어야 합니다. 왜 내가 죽으면 날마다 그분이 사시니까 날마다 그분의 생명이 역사하니까
두 번째 얻을 수 있는 교훈은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매일 성령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1장에서 이처럼 분열되었던 인간의 언어가 언제 통합이 됩니까?
오순절날 성령님의 역사가 일어났을 때 갈릴리 출신의 무식한 사도들은 전부 자기네들이 사용하는 모국어 히브리어로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모인 16개국에서 온 사람들은 전부 자기 나라 언어로 알아들었습니다. 베드로가 언제 헬라
말을 배웠겠어요. 언제 외국어 학원을 다녔겠습니까?
그런데 평소대로 이야기하는데 다 상대들이 자기 말로 알아들었습니다.
성령 안에서만 가족이 분열되지 않습니다.
성령 안에서만 어떤 공동체든지 혼란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성령의 역사 속에서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좋습니다. 그 속에 더 큰 생명의 역사와 하나님의 더 큰 섭리가 그 공동체를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령님 안에서 날마다 새로운 사람이 된다. 성령님 안에서 변화받은 사람이 된다.
오늘 이 본문에 비추어 볼 때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겠어요.
내 이름을 내세우는 것 백해무익하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는 것만이 지혜라는 것
나는 절대로 내 인생의 푯대가 될 수 없고 내 자식의 인생 푯대가 될 수도 없고 오직 하나님만 우리 인생의
푯대가 된다는 것을 매일 깨닫고 사는 사람 그 사람이 새로워진 사람이잖아요.
그 사람이 거듭난 사람이잖아요. 그 사람이 진정한 변화된 그리스도인이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 이와 같이 변화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때 우리의 가정도 우리의 일터도 우리의 교회도 우리로 인해서 이 땅도 진정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하나님의 통로가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21세기를 사는 우리의 관점으로 볼 때 겨우 진흙을 불에 구울 줄 알게 되었고 아스팔트를 끓여서 접착제로 사용할 줄 알게 되었다고 하늘에 닿는 탑을 쌓으려고 했던 창세기 11장의 인간들이 참으로 어리석고 미련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이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 자신들의 모습임을 일깨워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는 창세기 11장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이 알고 훨씬 더 많은 것을 가졌고 훨씬 더 큰 과학적인 혜택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창세기 11장 사람들보다 우리는 더 교만해졌고 우리의 이름을 더 내세우려 하고 내 자신이 내 인생의 푯대가 될 수 있다는 더 큰 착각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버려두시지 않고 이 시간 이 귀중한 사실을 일깨워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내 이름을 내세우고 내가 내 인생의 푯대가 되어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 할 때 그 삶의 결과는 혼란이요. 분열이요. 흩어짐을 잊지 아니하도록 도와주옵소서
오직 하나님 안에서 나의 에노스됨을 자랑하게 하시고 나의 죄인됨을 자랑하게 하시고
나의 약한것을 자랑하게 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죽는 삶을 자랑하게 도와주옵소서
그리하여 영원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살고 하나님만을
푯대로 삼는 생명의 사람들이 되게 도와주옵소서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 있으므로 이 일이 가능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우리가 이 땅을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오직 예수 이름으로 예수만을 푯대로 삼는 삶을 살아가는 것임을 잊지 않게 도와주옵소서
그 주님을 위해서 우리의 이름을 버릴 때 역설적이게도 주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높여주시고
그때에만 우리의 이름이 진정으로 존귀해질 수 있음을 잊지 않는 겸손한 그리스도인들이 되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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