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의 여로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김 규 련사바에 태어나 바람 따라 이리저리 뒹굴다 보니 어언 팔십 여 년, 한순간의 꿈결처럼 세월은 흘렀다. 문득 지나온 시공을 뒤돌아 본다. 절벽을 넘고 협곡을 지나며 난 바다를 건너도 봤다. 봄꽃 흐드러지게 핀 들녘을 지저귀는 뭇새 소리 들으며 지나올 때도 있었다. 수시로 크게 요동치는인세(人世)의 산하를 표랑해 온 나그네의 심회는 늘 수수하고 깊고 장구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절망과 비애와 눈물도 보람이며 감격이며 기쁨 못지않게 우리 삶의 낙이요 향기요 멋이었다고 하리라.이제 황혼 짙게 깔린 여생을 고민할 때가 됐다. 큰 탈 없이 곱고 맑고 향취 묻어나는 삶을 누리고 싶다. 최후의 비원(悲願) 하늘에 고해 볼까. 먼저 나 자신의 내면을 구석구석 살펴봐야 하리라. 입으로는 경전이며 성경 말씀을 읊조리면서 노회한 위선의 탈을 덮어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렵다. 이젠 흥망이 유수한 세상사에서 멀찍이 물러나 초연해야할 터이다. 어차피 세상은 세우고 부수는 입파(立破)와 주기도 하고 뺏기도 하는 여탈(與奪)과 열고 합하는 개합(開合)을 거듭하며 발전하는 것이 아니던가.깊고 눈 푸른 안목으로 우주 자연을 응시해 봐야겠다. 우주 자연은 우리의 숙주(宿主)이다. 숙주의 품 안에는 삼라만상과 천만 종의 생명체가 살고 있다. 그들은 자기 몫을 다 하다가 곧 소멸해서 하나로 돌아간다. 하나에는 너도 나도 없고 귀천도 선악도 미추도 없다. 그 하나가 다시 만물로 태어나지 않는가. 모두가 숙주의 한 가족들이다.나는 인연연기로 잠시 결합된 존재이다. 나의 실상은 비존재요 공(空)이 아닐까. 무아(無我)인 내게 내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 내 몸도 내 것이 아니거늘 무엇이 내 것 될 수 있으랴. 일용하는 사물은 잠시 잠깐 빌려 쓸 따름이다. 참나는 내 영혼 속에 숨어있는 자성(自性) 뿐이다.숙주의 섭리에 애정으로 심취하다보면 나도 자연이 되리라.늙으면서 자연 따라 변하면 능변(能變)으로 심신이 편안해진다. 거역하면 봉변(逢變)을 맞아 크게 상한다고 했던가.다음으로 노인사고(老人四苦)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이다. 고독고(孤獨苦)는 인식의 눈을 바르게 뜰 때 초극의 길이 보일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지상에 던져진 어쩔 수 없는 외로운 길손이다. 사람만이 꼭 친구가 되는 것은 아니리라. 고독을 즐기면서 사람 아닌 친구도 찾아야 하겠다. 항시 나와 함께 있는 책이며 수석이며 분재며 화초도 친구가 아니던가. 산책길에서 노상 만나는 초목도 바위도 텃새들도 정을 주면 영감(靈感)으로 화답해 오는 친구이리라. 떠가는 구름, 스쳐가는 바람, 흘러가는 강물도 무언의 설법으로 나를 깨우쳐 주는 친구가 될 것이다.병고(病苦)는 늙으면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자연현상이다. 해서 몸에 병이 없기를 바라지 말아야할 터이다.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다. 오히려 병을 양약으로 삼고 살아야 하겠다. 작은 병은 즉각 다스리고 큰 병이 찾아오면 조용히 받아들일 것이다. 철없는 아이 달래듯 병을 달래가며 사는 데까지 함께 살아갈 것이다.(팔순이 넘었으니까)빈고(貧苦)는 예부터 나라도 구제 못 한다고 했다. 노계(老計)는 본인 스스로가 세워야만 한다. 나는 다행히 연금의 혜택으로 늙은 아내와 둘이 사는 데 부족함이 없다.이만하면 족하다는 만족감이 늘 부족해서 허덕이는 졸부보다 더 넉넉함을 느끼게 한다.무위고(無爲苦)는 현대 감각으론 이해하기 어렵다고 할까. 건장한 노인이 할 일 없어 괴롭다는 것은 나태의 극치이다. 무언가를 해서 스스로 보람을 찾아야 하리라.나는 수필을 정인처럼 아끼고 사랑하며 가꿔나갈 것이다.언젠가는 화향천리 문향만리(花香千里 文香萬里)의 진수를 흠향하고 싶다. 수필가는 영혼의 화가이다. 자신의 내면 풍경을 언어로 그려내는 화백이 아닌가. 스스로의 정신세계가 그윽하고 깊고 아름답고 향기로우면 그대로 작품에 투영된다. 따라서 늘 독서와 사색, 명상과 성찰이 있어야 하리라.수필가는 마침내 구도자의 자세로 깨달음을 얻어야 되지 않을까 싶다.벌써 이내가 깔려온다. 요란한 귀뚜리 소리가 적막을 흔들고 있다. 행복한 하루를 보내며 숙주 앞에 두 손을 모은다. 불현듯 떠오르는 선시(禪詩) 한 수.봄에는 꽃이 피고 가을엔 달이 밝다여름에는 시원한 바람 겨울엔 하얀 눈 한 생각 바꾸면 지금 여기 내 마음이 극락인 것을 황혼의 길은 인품의 완성이요 깊어감이요 신의 경지에 다가가는 거룩한 행보이리라. 글쓴이 : 지안 큰스님출처 : 반야암 오솔길 카페,http://m.cafe.daum.net/zee-an
통도사 반야암 오솔길 (지안스님)
불교를 통해 좋은 인연을 맺고, 새로운 만남의 장을 열어 신행을 닦는 지안스님의 인터넷 전법도량입니다. 불교를 공부하며 아울러 인문학적 소양을 높여 불교의 지성화를 도모하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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