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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323
3월3일 [사순 제1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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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멸(死滅)할 것을 위해 기도하지 마십시오!>
이천년 교회 역사 안에는 수많은 교부들과 신학자들이 탁월한 업적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교회를 빛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후학들에게 얼마나 인기가 많았던지, 추종자들 가운데 책을 저술했는데,
자신의 이름으로 내지 않고 존경하는 스승의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런 경우 저자명에는 위(僞)라는 접두어를 붙였습니다. 위(僞) 아타나시오, 위(僞) 요한 크리소스토모 등등.
위(僞)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기도에 대한 강론을 읽고 오래도록 묵상했습니다. 사용하신 단어 하나 하나 문장 하나 하나가 오랜 세월을 건너와서도 영롱하게 빛을 발합니다.
단순하면서도 명료하게 기도가 무엇인지 가르치고 있습니다. 기도에 대해 아직도 감을 정확히 못잡고 있는 우리에게 그의 가르침은 좋은 길잡이가 되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 기도 드리고 그분과 대화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은 없습니다. 기도는 영혼의 빛이고 하느님께 대한 참된 인식이며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입니다. 기도로써 영혼은 천국에 오르고 또 애정 넘치는 포옹으로 주님을 포옹합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통교하는 귀중한 통로이기에 영혼을 기쁘게 하고 영혼의 갈망을 채워 줍니다. 기도는 하느님께 대한 열망이고 형언할 수 없는 사랑이며 인간의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여러분은 올바로 기도를 드리며, 여러분의 영혼의 거처를 정숙한 겸손으로 단장하고 정의의 빛으로 빛나게 하십시오. 그리고 정제된 황금과 같은 선행으로 장식하고 그것을 벽과 석축으로써가 아니고 신앙과 아량으로 지으십시오.
이 모든 것 위에 기도로써 지붕을 만들어 주님께 바칠 완전한 집을 지으십시오. 이렇게 하여 그분을 이 찬란한 왕궁에 영접하고 그분의 은총으로 영혼의 성전에는 주님의 모상을 갖게 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언제나 기도의 초보자들인 우리들에게 아주 유익한 가르침을 주시면서
‘주님의 기도’를 선물로 건네십니다. 선물을 주시기 전에 한 가지 당부 말씀이 제 마음을 강하게 치는군요.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 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오 복음 6장 7~8절)
예수님 시대 당시 유다인들의 기도 관습은 차마 눈뜨고 봐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근처 이교도들로부터 유입된 기도의 풍경은 예수님 눈에 도저히 봐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우선 그들의 기도는 길고 장황하고 요란했습니다. 그들이 바치는 기도에는 진심, 진정성, 마음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지극히 형식적이고 의무적, 습관적인 기도만이 판을 치고 있었습니다.
이런 유다인들의 기도를 보신 예수님께서 기도 중의 기도, 기도의 진수(眞髓), 예수님 가르침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는 주님의 기도를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짧은 기도지만 액기스만 모은 기도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기본 가르침이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여러 순간, 여러 차례 주님의 기도를 바치게 됩니다. 관건은 그냥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것이 아니라 정성을 다해 바치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주님의 기도 한번이 입술로만 바치는 천번의 주님의 기도보다 훨씬 더 큰 힘과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사멸(死滅)할 것을 위해 기도하지 마십시오. 그대가 무언가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면 오직 하느님의 뜻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그 안에서 모든 것을 갖게 될 것입니다. 어떤 선물을 받기 위해 기도하지 마십시오. 다만 그대가 하느님께 사랑받는 존재가 되기를 청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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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주님의 기도는 다른 것도 청할 수 있는 자격증이다>
3대 독자라고 오냐오냐 키운 버릇없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들은 모든 게 자기 마음대로였으며, 말 그대로 천방지축이었습니다. 엄마는 그런 아들이 안되겠다 싶어서 이제부터는 아들에게 엄하게 대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잠시 후, 아들이 집을 나서려고 하자, 엄마는 무서운 눈초리와 말투로 다그쳤습니다.
“너, 어디 가니?” “나 가고 싶은 데!” “그럼 언제 돌아오는데?” “오고 싶을 때!”
그러자 잠깐 머뭇거리던 엄마가 말했습니다.
“좋아, 하지만 단 1분이라도 늦으며 혼날 줄 알아!”
자녀를 천방지축으로 내버려두는 것이 결코 좋은 엄마라고는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자녀가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훈육하는 것이 부모의 역할입니다. 하느님 아버지도 우리가 당신 자녀의 올바른 자세로 성장하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는 기준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기도’입니다.
하느님께 무언가를 청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로만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전혀 그렇게 믿지 않고 살 수도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자녀란 기본적으로 어떠해야 하는지 주님의 기도를 통해 알려주십니다.
가장 단순한 질문입니다. “당신의 아버지는 누구입니까?”라고 사람들이 물을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합니다. 우리 아버지는 항상 하늘에 계신 하느님이어야 합니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 사십니까?”라고 물을 때 항상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고 대답해야합니다.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산다면 스스로 자녀로서의 자격이 없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어디에서 행복을 찾으십니까?”라고 할 때,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참다운 자녀는 부모의 기쁨을 자신의 기쁨으로 삼습니다. 하느님 나라란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의로움과 기쁨과 평화입니다.
“당신은 누구의 종입니까?”라고 물을 때,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대답하며 우리는 항상 아버지의 뜻을 따라야하는 신분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자신의 뜻을 더 우선하는 자녀는 하느님 자녀로서의 지위를 잃게 됩니다.
“당신은 삶의 에너지를 어디서 얻습니까?”라고 하면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해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과 성체, 즉 진리와 은총의 힘으로 삽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양식인 것입니다.
“당신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을 때,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하느님 본성이 사랑이신데 같은 본성을 지닌 자녀가 이웃을 미워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 유혹을 이길 힘을 청합니까?”라고 물을 때는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라고 말해야합니다. 하느님 자녀는 겸손해야 합니다. 유혹에 빠져서 이길 힘을 청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유혹거리를 미리미리 끊어 유혹에도 빠지지 않도록 해 달라고 청해야합니다.
“그러면 당신에게 악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을 때, 오상의 비오 성인처럼 “내 자신이 악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합니다. “악에서 구하소서.”의 악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그분이 참으로 나의 주인이 되시려면 이전의 나는 십자가에 죽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기도로 내 자신을 살펴보고 진정 주님의 기도만으로 충분하다면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주님의 기도를 통해 자녀로 인정받았으니 그 다음부터 청하는 것은 모두 주님께서 들어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를 넘지 못하면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르며 아무에게나 이것저것 청하는 이상한 아이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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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6,7-15 : 기도할 때에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7절) 말을 많이 할수록 하느님께로부터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더 잘 들어주실 것이라는 생각으로 기도를 길게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라고 하신다.이런 기도는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기복적인 기도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믿음의 기도를 바치기를 바라신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더 잘 아시며, 우리가 말하기도 전에 우리가 무엇을 청할지 아시는 분이시다.
그러기에 우리가 바라는 것을 하느님께 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내려주실 마음이 드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하느님은 우리가 가르쳐 드려야 할 분이 아니라 그분의 마음을 얻어야 할 분이시다. 그분께서 바라시는 것은 긴 기도가 아니라, 참된 마음이다. 참으로 우리가 그분께 항상 감사를 드리며 그분의 마음에 드는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면 그분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항상 제때에 내려 주실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래서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신다.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9절)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아들을 믿는 이들의 특권이며, 믿음의 어머니인 교회에서 우리가 받고 그분에 대해서 배울 수 있는 특권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하느님을 찬미하는 말이며 우리의 믿음을 드러내는 말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찾는 우리에게 든든한 확신을 주실 수 있도록 아버지라 불리기를 원하신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9절) 이는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로 더욱 거룩해지시기를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거룩한 이름이 우리 안에서 나날이 거룩해지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도록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흠 없이 열심히 살아 우리의 삶으로 모든 사람이 하느님을 찬미하게 되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10절) 하느님의 나라가 오기를 기도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가 먼저 우리들 안에 서고 하느님께서 그 나라에서 다스리시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이 나라의 시민들은 이미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그 안에 사는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의 삶의 모습에 따라 나와 함께 있을 수도 있고 잃어버릴 수도 있다. 또한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와 있지만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을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10절) 이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우리의 기도가 필요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는 우리의 모든 것 안에서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것을 말하며, 당신의 뜻이라는 힘과 그 뜻을 실행하는 능력을 주십사 청하는 것이다. 그분의 뜻은 그분께서 자녀로 삼으신 이들의 구원이기 때문이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11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아시는 하느님께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청한다. 이것은 구원의 양식으로 성체를 받아 모시는 우리가 죄로써 그리스도와 떨어지는 일이 없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양식으로 주님의 신성에 참여한다. 이 양식은 딱 하루에 충분한 만큼 주어진다. 이 양식은 ‘내일을 위한’, ‘영원을 위한’ 양식을 뜻하며 물질로 바뀌지 않는 양식을 말한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12절) 우리는 매일 죄를 지으며 산다. 그러기에 죄의 용서를 청하라고 하신다. 그러나 죄를 용서받기 위한 조건은 다른 사람을 먼저 용서하는 것이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는 이 청원은 우리가 우리에게 용서를 청하는 이들을 용서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전제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용서를 청하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느님 아버지께 용서를 받기 바라기 때문이다.
말로는 용서한다고 하면서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이미 용서받았으므로, 용서에는 하느님과의 확고한 계약이 담겨있다. 그것은 소홀히 할 경우 앞에서 한 청원이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을 만큼 중요한 계약이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13절) 또한 우리는 이미 저지른 죄의 용서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새로운 죄를 짓지 않도록 도와주십사고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탄에게 이끌려 가도록 두지 마십사고 청하는 것이다.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13절) 이 기도는 앞의 모든 청원과 기도를 간결하게 요약하는 기도이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해주신다면, 우리는 모든 어려움에서 확실하게 보호받을 수 있다. 이 기도를 하고나면 더 이상 청할 것이 없다. 악에 대해 하느님께 보호를 청하고 그것을 받게 되면 세상에서 하느님을 보호자로 둔 셈이니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주님의 기도를 잘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주님의 기도 중에서 용서에 관한 것을 특별히 강조하신다. 주님께서는 이 기도로 우리가 자비로워지기를 바라신다. 사실 이 용서는 주님과 계약을 맺는 듯한 말로 청하고 있다.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계약을 지키지 않는다면, 청원 전체가 헛일이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14-15절) 하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이제 나에게 잘못한 이웃을 용서하면서 하느님과의 이 계약을 성실히 지키도록 하는 사순시기가 되도록 도우심을 청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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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교무부처장)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하느님께서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이미 알고 계신다면, 기도는 왜 할까요? 많은 이들이 한번쯤 생각해 보았을 질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가장 먼저 깨닫게 되는 것은 기도가 오로지 무엇을 청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흔히 기도를 하느님과의 대화라고 하는데, 좋은 대화가 일방적이지 않듯이 혼자만의 독백이나 일방적인 청원을 좋은 기도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많은 성인들은 ‘주님의 기도’가 완전한 기도이고,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청원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는 짧지만 많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한 부분은 하느님을 향한 기도이고, 다른 부분은 우리를 위한 기도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르침과도 잘 어울립니다.
사실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더 구체적으로 더 많은 말로 무엇인가를 청하는 것은 우리의 불안과 약함 때문일 것입니다. 부족함에만 관심을 두는 사람은 절대로 감사할 수 없습니다. 점점 더 당연한 것이 늘어나고 부족한 것은 많아지니 청할 것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감사하며 사는 사람에게는 감사할 일이 더 많아집니다. 사실 우리는 많은 것을, 거의 모든 것을 받으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청원보다 감사를, 감사와 함께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이미 알고 계시는 하느님께서 그것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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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주님의 기도 - 삶의 기도>
신앙인은 ‘믿음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믿음’을, 세상을 향해서는 ‘증언’으로 드러내고, 하느님을 향해서는 ‘기도’로 표현합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기도의 힘’으로 살아가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의 믿음을 증언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인의 ‘증언’과 ‘기도’는 ‘말’로만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말’로 하기 전에 먼저 ‘삶’으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만일에 ‘삶’은 세속 사람들과 다르지 않으면서 ‘말’로만 믿음을 증언한다면, 그 증언은 위선자의 ‘거짓 증언’이 되고, ‘말’로만 기도한다면, 그 기도는 ‘빈말’이 됩니다. ‘빈말’을 되풀이하는 기도는 ‘거짓 기도’입니다. ‘거짓 기도’로는(‘빈말’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마태 7,21) 우리는 ‘삶’과 ‘증언’과 ‘기도’를 모두 하나로 일치시켜야 합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7-8)
이 말씀에서 ‘다른 민족 사람들’이라는 말은,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과 미신을 믿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들의 기도는 생명력이 없는(듣지 못하는) 우상에게 바치는 기도이기 때문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빈말’입니다. 또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생활을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현세적인 복을 누리는 것만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자기의 소원을 비는 기도만 바치기 때문에 그들의 기도는 ‘빈말’입니다. 만일에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우상을 숭배하거나 미신을 믿는 사람들처럼 기도하고, 그들처럼 살고 있다면, 그 사람의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빈말’이 됩니다. 그리고 그의 삶은 신앙생활이 아니라 그냥 미신을 믿는 생활이 됩니다.
제1독서 말씀에서,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 55,10-11)
하느님(예수님)의 말씀들 가운데에는 단 한 마디도 ‘빈말’이 없습니다. 헛되게 흘러가는 말도 없습니다. 모든 ‘말씀’은 곧 하느님의 ‘뜻’이고, 하느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만일에 한 마디라도 빈말이 있다면, 우리는 말씀을 믿을 수도 없고, 말씀과 함께 살 수도 없습니다.) 그처럼 우리가 바치는 기도도 우리 자신의 삶과(실천과) 일치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바치는 기도가 혹시라도 ‘빈말’이라면, 그것은 ‘빈말’이 하나도 없으신 하느님께 죄를 짓는 일이 됩니다. (무엇인가를 청하는 기도의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나? ‘청원기도’는 주시는 은혜를 ‘잘 받으려는’ 노력과 일치되어야 있어야 합니다. 만일에 청하기만 하고 받을 준비를 안 하고 있다면, 그 기도는 빈말입니다. ‘은혜를 잘 받을 준비’라는 말은,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충실한 신앙생활을 뜻합니다. 자기는 신앙인답게 살지 않으면서도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청하는 기도만 열심히 하는 것은, 참으로 염치없는 일이기도 하고, 받을 준비도 안 하면서 청하기만 하는 어리석은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라는 말씀은, “기도란, 아버지께서 주시는 은혜를 잘 받기 위한 준비다.”라는 가르침입니다. 하느님은 아무것도 모르고 계시다가 사람들이 기도를 하면 그때서야 사람들의 사정을 알게 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간청하고 애원하기도 전에 이미 우리의 사정을 세세하게 알고 계시는 분이고,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좋은 때에 우리에게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시는 하느님께 우리 사정을 알려드리기 위해서 기도를 바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계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제때에 주신다는 것을 믿고, 그것을 잘 받기 위해서 기도를 바칩니다. 그래서 기도하지 않는 것은 주시는 은혜를 거절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말은 청원기도뿐만 아니라 모든 기도에 다 해당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마태 6,9-15)
‘주님의 기도’는 겉으로 보이는 표현만 보면 ‘청원기도’입니다. 그러나 내용을 보면,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찬양하고 찬미하는 ‘감사기도’이고, 우리도 그 일에 협력하겠다고 다짐하는 기도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청하는 것으로 그치는 기도가 아니라, 청하면서 동시에 우리도 기도 내용을 그대로 실천하겠다고 약속하는 ‘응답의 기도’입니다.) 만일에 우리가 ‘삶으로써’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지 않는다면, 아버지의 나라를 건설하는 일에 협력하지 않는다면, ‘일용할 양식’을 독점하면서 사랑 실천을 외면한다면, 형제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고 앙갚음 하려고 한다면, 유혹을 물리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한다면, 악과 타협하거나 악을 방관한다면, 우리가 바치는 ‘주님의 기도’는 ‘빈말’이 되고,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는 십계명을 어기는 죄도 짓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는 곧 ‘삶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특별히 ‘용서’를 강조하시는데, ‘용서’는 ‘용서한다.’고 말로만 해서 될 일은 아니고, ‘마음으로부터’ 용서를 해야 제대로 된 용서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마음으로는 용서하지 않으면서 말로만 용서한다고 말하는 것은 용서가 아니고, 상대방을 속이는 죄를 짓는 일이 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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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김훈일 세례자요한 신부님]
<주님의 기도>
꽃은 물을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합니다. 새는 나뭇가지를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합니다. 달은 지구를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당신이 없다고 하고,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당신의 현존을 믿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게 하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올바로 하느님과 의사소통이 가능해졌습니다. 영어로 따지면 알파벳이고 한글로 따지면 자모입니다.
아무리 영어를 잘해도 영어권이 아닌 나라에서는 그리 효용이 없는 것처럼 아무리 기도를 해도 하느님께서 알아들을 수 없는 기도를 한다면 소용이 없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이러한 우리들에게 기도의 좋은 길을 가르쳐 줍니다. 먼저 느님의 뜻을 찾게 하며, 우리에게 양식을 주심을 감사하게 하며, 우리를 용서하시고, 악에서 구하시기 때문입니다.
즉 하느님의 뜻, 감사, 용서, 구원이 담겨 있습니다. 모든 기도의 핵심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콩나물시루에 물을 주듯이 아무 생각 없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외우는 기도이지만 주님의 기도는 콩나물이 자라듯이 어느새 우리의 신앙을 키우는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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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님]
<주님의 기도>
군(軍) 성당에서 장병들과 함께 미사를 하다 보면 솔직히 단조롭다는 느낌이 많이 든다. 제사보다는 젯밥에 더 관심이 많은 ‘초코파이 병사’들. 미사에 익숙하지 않은 그들은 강론시간에 부족한 수면을 채우고, 봉헌 때는 머뭇거리다가 영성체 땐 무조건 나와서 성체를 달라고 우긴다.
그렇다고 성가를 군인답게 씩씩하게 잘 부르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영성체 직전 ‘주님의 기도’를 할 때는 신자든 아니든, 졸고 있든 깨어 있든 관계없이 모두가 성당 건물이 무너질 듯 우렁차게 부른다.
어쩌면 병사들에게 성당에 대한 인식은 ‘초코파이’가 아니라 ‘주님의 기도’인지도 모른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군 성당에서는 오래된 그룹 Mocedades(‘젊음’이란 뜻의 스페인어)의 ‘Eres Tu’라는 곡에 ‘주님의 기도’를 붙여 부르고 있다. 굳이 해석하자면 ‘그것은 당신!’이라는 표현이 되겠지만 병사들은 알게 모르게 주님을 이렇게 큰소리로 외친다. “주님, 당신뿐입니다!”라고. 그때마다 사제가 느끼는 감동은 참 묘하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주님의 기도’는 사순절을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에 묵상했던 복음, 곧 올바른 자선·기도 그리고 단식에 대한 예수님의 지침 가운데 등장한다.
그러나 루카복음에선 기도하기를 원했던 제자들의 요청으로 이루어진다. 곧 세례자 요한이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준 것처럼 자신들에게도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는 청에 주님께서 친히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신다.
은혜로운 때인 이 사순절에 바치는 ‘주님의 기도’가 내가 행하는 자선·기도 그리고 단식과 함께 주님을 닮아가는 최고의 지름길임을 다시 한번 확인해 본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 온전히 이루어지는 날까지 병사들과 함께 바친다.
“Eres Tu! 주님, 당신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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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한국 본원)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기도는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는 길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진, 선, 미가 무엇이지를 알고 진, 선, 미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는 주님을 믿음과 희망과 사랑함으로 가능해집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은 자나 깨어있으나 생각하고 꿈속에도 찾아 만나는 것입니다. 이같이 주님을 밤낮 만나고 사랑하는 것은 인간의 본질에 속합니다.
왜 기도해야합니까? 필요한 것을 얻고 세상에서 편하고 안락하게 살기위하여 주님이 나의 방패 보호자가 되어 주시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 안에 살고 하느님과 하나가 되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기도를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 본 말은 “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부르는 소리에 모든 것이 들어있습니다.
사람들과 하나 되어 하느님의 일을 하도록 이끄십니다. 이는 하느님의 현존 아래 저희가 있고 “주여!.” 하고 부르는 소리에 하느님은 그 자리에 나와 하느님과의 만남과 통교가 이루어집니다.
하느님이 거룩하게 드러낸다는 것은 하느님과 하나 된 사람들의 몫이고 아버지의 나라에도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나라이고 하느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도 저희의 몫입니다.
기도가 빈말이 되지 않으려면 빈부의 격차를 좁히고 일용할 양식을 나누고 하느님과 하나 되듯이 사람 과 사람이 하나 되어 세상의 죄악을 물리쳐야 한다는 말씀의 기도입니다.
기도는 서로 사랑한다는 첫 걸음이며 완성입니다. 오늘 아침 일어나면서 주님을 찾고 주님과의 깊은 대화시간을 가지셨습니까? 아침의 첫 말은 하루를 행복하게 하기도 하고 불행하게 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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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한국 영화 ‘기생충’이 미국의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국제 장편 영화상’을 수상했습니다. 방탄소년단에 이어,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국제무대에서 인정받았습니다. 한국인으로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근심과 걱정이 많았는데 반가운 소식이라 생각합니다. 영화와 관련해서 어린 시절의 추억이 있습니다. 극장에서는 포스터를 동네의 가게에 붙이곤 했습니다. 포스터를 부치는 가게에는 극장에서 초대권을 주었습니다. 가게 할머니께서 주시는 초대권을 얻어서 가끔 영화를 보곤 했습니다. ‘혹성탈출, 벤허, 십계, 성웅 이순신, 홍길동, 졸업’을 보았습니다. 지금은 많이 없어졌지만 동네마다 비디오 대여점이 있었습니다. 처음 본당 신부를 할 때였습니다. 영화를 보려면 의정부까지 나가야 했습니다. 본당에서 비디오를 구입해서 신자들이 볼 수 있도록 했습니다. 청계천에 비디오 도매상이 있었고, 수녀님과 함께 가서 비디오테이프를 사오곤 했습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만화영화, 신앙에 도움이 되는 종교영화, 학생들이 좋아하는 영화를 구했습니다. 어느 날, 동네의 비디오 대여점에서 20만 원에 모든 비디오테이프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참 아련한 추억입니다.
영화가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몇 가지 기준이 있어야 할 겁니다. 작품성이 있어야 합니다. 기존의 방식과는 색다른 내용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새로운 방식으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서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표징은 파격적이셨습니다. 보편성이 있어야 합니다. 빈부의 격차는 예전부터 있어왔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부자와 나자로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과 부자의 헌금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쉽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배우들의 연기가 중요합니다. 아무리 작품이 좋아도, 아무리 보편적인 내용이라도 배우들의 연기가 뒷받침이 되지 않으면 곤란합니다. 예수님에게는 베드로와 바오로라는 멋진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목숨 바쳐 순교하였던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성인과 성녀들이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삶을 살았습니다. 관객으로부터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표징은 2000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은 신앙인들에게 삶의 이유가 되고 있습니다. 세계 인구의 삼분의 일이 매주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인류의 문화와 인류의 역사에 기준이 되었습니다.
신앙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들이 새롭게 보이게 됩니다. 우리는 물질의 옷을 입었지만 우주를 관통하는 영적인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영적인 존재인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의 자세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비는 땅을 적시고,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한 후에 다시 하늘로 올라갑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비는 아무런 조건을 요구하지 않고, 대지에 생명을 불어 넣어줍니다. 무상으로 자신의 것을 내어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는 것,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주님의 기도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바로 더불어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의인들이 울부짖자 주님이 들으시어, 그 모든 곤경에서 구해 주셨네. 주님은 마음이 부서진 이를 가까이하시고, 영혼이 짓밟힌 이를 구원해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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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분의 당부>
마태오 6,7-15 (올바른 기도, 주님의 기도)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분의 당부>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게나
그대의 거룩한 삶으로써
하느님의 나라가 오게 하게나
그대가 하느님의 나라가 됨으로써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게나
그대가 하느님의 뜻을 행함으로써
나날의 삶을 허락하신 하느님께 감사하게나
내일을 위한 그대의 것을 오늘 나눔으로써
하느님의 조건 없는 용서에 온전히 맡기게나
그대의 벗들을 그저 용서함으로써
삶의 온갖 유혹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롭게나
그대에게 자유를 주신 하느님을 굳게 믿음으로써
세상 온갖 악에 단호하게 맞서게나
그대가 선하신 하느님과 오롯이 하나 됨으로써
그대 언제나 어디서나 이러하게나
내가 언제나 어디서나 이러하였듯이
그대의 삶이 곧 기도가 되게 하게나
나의 삶이 곧 기도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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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 찬미예수님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우리는 기도를 합니다. 저 역시도 마찬가지인데 특별히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아버지의 천국 여정과 구원을 위해 진심을 다해 아주 간절히 기도했던 기억이 납니다.
저의 아버지는 제가 사제가 되고 나서 돌아가셨습니다. 외국에서 돌아가셨으므로 시신이 한국에 도착하기까지 매일 매일 아버지를 위해 미사를 거행해야 했는데, 평소에 자연스럽게 드리던 미사의 기도문 하나하나가 어찌나 간절히 느껴졌는지 모릅니다.
이를테면 미사 중에 우리가 흔히 듣는, “부활의 희망 속에 고이 잠든 교우들과 세상을 떠난 다른 이들도 모두 생각하시어 그들이 빛나는 얼굴을 뵈옵게 하소서” 혹은, “주님, 저희를 모든 악에서 구하시고 한평생 평화롭게 하소서” 등등의 미사의 모든 부분이 저의 아버지를 위한 절절한 기도문이었습니다.
이 기도문은 저에게 다음과 같이 받아들여졌습니다.
“부활의 희망 속에 고이 잠든 저의 아버지를 생각하시어 저의 아버지가 주님의 빛나는 얼굴을 뵈옵게 하소서”, “주님 저의 아버지를 모든 악에서 구하시고 평화롭게 하소서”.
이렇게 미사의 기도문에 간절함이 들어가면 기도 구절 하나하나가 그야말로 풍성하고 의미있게 느껴집니다. 주님의 기도 후에 사제가 외는 기도문 역시 그러한데 이 기회를 통해 찬찬히 그 의미를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 주님 저희를 모든 악에서 구하시고 한평생 평화롭게 하소서. 주님의 자비로 저희를 언제나 죄에서 구원하시고 모든 시련에서 보호하시어, 복된 희망을 품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게 하소서.
◎ 주님께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있나이다.
이 기도문에는 우리가 평소 주님께 원하는 모든 청원이 담겨 있습니다. 쉽게 걸려 넘어지는 죄악에서 우리를 지켜달라는 것, 모든 시련에서 보호를 받으며 희망을 품고 주님을 만날 날을 기다리도록 도와 달라는 것. 이 외에 어떤 말로 우리의 청을 종합할 수 있겠습니까?
그 밖에도 성찬 전례의 기도문들을 찬찬히 되새겨 보면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이 기도문에는 예수님의 따뜻한 마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사소한 존재인 나의 죄를 위하여 피를 흘리신 예수님께 얼마나 많은 감사를 드릴 수 있는지요.
그리하여 저는 사제로써 이러한 기도문을 외울 수 있음에, 혹은 들을 수 있음에 언제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미사 외에도 우리 그리스도교인들은 매일 기도를 합니다. 식사 전 기도를 비롯한 여러 가지 일상에서의 기도문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하느님께 드러냅니다.
기도에는 그 종류와 방법이 다양하지만 이 모든 것들의 공통점은 바로 진심을 담아 정성껏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인들은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부터 특별히 기도를 많이 했던 민족입니다. 대표적으로는 “쉐마”라고 해서 아침과 저녁에 의무적으로 암송하는 기도문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라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라는 구절로 시작되는 이 기도문은 유대인들의 참다운 하느님에 대한 공경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그들은 현재까지도 문설주에 이 기도문을 작은 통에 넣어 간직하며 집에 들어설 때마다 입을 맞추고 경외심을 표합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 역시 이러한 당시의 풍습을 알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권고하셔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그들을 닮지 말라”라고 경고하십니다.
빈말만 되풀이되는 기도는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가장 모범적인 기도, 즉 주님의 기도를 알려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유일하게 직접 알려주신 이 기도는 우리가 평소 흔히 바치는 기도입니다. 가톨릭 신자라면 모두 주님의 기도를 능수능란하게 할 줄 압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그 의미를 잊어버리고 입으로만 빠르게 외우고 지나치곤 합니다.
이 지점에서, 주님의 기도와 관련된 우루과이의 어느 작은 성당에 적혀있는 글을 소개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매번 이 글을 읽을 때 마다 타성에 젖어 기도를 하고 있지 않은지 반성하게 됩니다. 그 글귀는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는 ‘하늘에 계신’이라고 말하지 마라
늘 세상 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 라고 말하지 마라. 늘 혼자만을 생각하면서.
‘아버지’라고 말하지 마라. 한 번도 아들 딸로 산적이 없으면서.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고 말하지 마라. 늘 자기 이름을 빛내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라고 말하지 마라. 물질 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 지소서’라고 말하지 마라. 늘 내 뜻이 이루어지길 바라면서.
‘저희가 용서하듯이’라고 말하지 마라. 늘 미움과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라고 하지 마라. 늘 죄지을 기회를 찾으면서.
‘악에서 구하소서’ 라고 하지 마라.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으면서.
‘아멘’ 이라고 응답하지 마라. 주님의 기도를 진정 나의 기도로 바친 적도 없으면서.
가끔 우리는 너무나도 소중한 주님의 기도를 타성에 젖어 급히 지나쳐 버리곤 합니다. 물론 매순간 깊이 묵상 하며 기도문을 외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깊은 사랑과 은총을 알고 있는가, 모르고 있는가는 기도의 방향에 있어 매우 커다란 차이를 지닙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우리가 평소에 드렸던 기도문들이 실제로 어떤 풍요로움을 담고 있는지 다시금 되새기는 기회를 가지시길 바랍니다. 비록 미사를 드릴 수 없는 상황이지만, 오늘의 기회를 통해 매일 미사 책 앞에 있는 미사 통상문을 천천히 읽어보시길 추천 드립니다. 그리고 다시금 우리가 마음과 입을 모아 이 풍요로운 기도문들을 듣고 읊을 수 있는 날이 다가오길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우리들에게 오늘 1독서에서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은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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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아름다운 모습으로…>
우리 교회에는 죄인이었다가 성인이 되신 성 프란치스코가 계십니다. 성인의 아버지는 큰 부자였고, 성인은 세상 부족함을 모르고 개망나니로 살았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삶이 바뀐 것입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 성인께서 나병 환자를 만나고 입맞춤을 하면서, 착하게 살려고 결심하려는 순간부터 성인에게 시련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하나의 사건이 생깁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에 재워 달라는 나병 환자와 함께 잤는데, 깨어보니 그 나병 환자의 자리에 장미가 세 송이가 있었습니다. 그때야 그 나병 환자와 장미 세 송이가 예수님께서 남기고 간 성부, 성자, 성령 즉, 삼위일체 하느님이심을 알았습니다. 이 사건이 프란치스코가 성인의 길로 들어서는 축복의 통로가 되십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라고 하시면서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즉, 주님의 기도를 통해 보여주신 아버지의 뜻은 용서입니다. 하늘은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땅은 내 몸입니다.
“용서하면 내 인생은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복음 말씀에는 이미 용서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보복하지 않으면 하늘도 너희의 ‘모든 것을 잊어 준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용서의 ‘첫걸음’은 ‘보복하지 않겠다.’라는 생각입니다. 이 마음 자세가 용서의 첫 단추입니다. 그래서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라고 간구하는 것은 “보복하지 않게 해달라.”라는 마음입니다. 그래도 미움은 남습니다. 그러나 미움에 보복은 하지 마십시오. 마음에 새기는 소리가 있습니다.
“세상에는 높고 귀한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당신의 오묘함을 겸손한 사람에게만 드러내십니다.” 아멘.
성 프란치스코가 나병 환자를 맞이하면서 만났던 장미 세 송이처럼, 고운님들이 오늘 새삼 바치는 주님의 기도가 코로나 19로 고생하고 희생하는 모든 분이 곤경과 어려움 속에서 하느님의 위로를 기다리는 세 개의 동백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용혜원, 날마다 나를 설레게 하는 꿈”이라는 글을 보면서 ‘기도의 시간을 만드는 일이 어려운 일이 아니다.’라는 묵상을 해봅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하느님께 마음의 눈까지 뜨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세수할 때는 언제나 깨끗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청소할 때는 마음 구석구석 더러운 죄가 없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밥 먹을 때마다 감사기도를 드립니다.”
“쉴 때도 자비를 베풀어 영원한 안식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주님, 저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십시오.”라고 청하니, “기도를 시작하기를, 기도로 살아내기를, 기도가 은총이기를, 기도가 안식이기를, 그리고 너희들이 내 이름으로 내 아버지께 청한다면 무엇이든 받을 것이다.” 아멘, 알렐루야.
거룩한 이 날에…. 인자하신 주님을 기억하면서, 오늘 저 두레박이 기억하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베풀어주시기를 간구하고, 또한 몸과 마음이 아픈 님들과 간호하는 님들, 그리고 고운님들의 자녀에게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영적 일기를 마무리하면서….
하느님의 뜻인 용서가 고운님들 몸과 마음 안에서, 그리고 기도로서 고운님들 삶 안에서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와 충만한 은총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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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425)
♧♧ 시편 76편 6절…
"심장이 강한 자들도 가진 것 빼앗긴 채 잠에 떨어졌습니다. 역전의 용사들도 모두 손을 놀릴 수 없었습니다."
* 심장이 강한 자...
이는 마음이 억세게 모질고 고집스러워 정의에서 멀리 떠난 자를 말합니다.(이사야서 46장 12절. 참조) 여기서는 남을 해치기 좋아하여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정복한 아시리아를 가리킵니다.
* 가진 것 빼앗긴 채 잠에 떨어졌습니다.
여기서 ‘잠에 떨어졌습니다.’라는 말은 일상적인 잠이 아니라 영원한 잠(예레미야서 51장 39, 57절. 참조),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의 의미는...예루살렘을 침략하여 하느님이 선택한 백성을 멸망시키려 했던 아시리아 군대들이 도리어 패배자가 되어 자신들의 소유를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죽어 주검이 되었음을 말합니다.(열왕기 하권 19장 35절. 참조)
* 역전의 용사들도 모두 손을 놀릴 수 없었습니다.
아시리아가 비록 싸움에 능한 용사와 같다할지라도 하느님의 진노의 칼은 피하지 못하고 졸지에 죽음을 맞이했다는 뜻입니다.
♧♧ 시편 76편 7절…
"야곱의 하느님, 당신의 호령에 수레도 말도 까무러쳤습니다."
여기서 ‘수레와 말’은 아시리아의 군사력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까무러쳤습니다.’라는 것은 완전한 패배를 의미합니다.(열왕기 하권 19장 35-37절. 참조) 한편, 하느님이 아시리아의 ‘수레와 말’에 ‘호령을 하셨다.’라는 것은 ‘진노를 내리셨다.’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 아시리아 군대는 졸지에 전부 멸망당하고 말았는데, 이 과정에서 유다 백성들의 역할은 전혀 없었습니다. 오직 유다 백성들은 하느님의 능력을 지켜보기만 했을 뿐이었습니다(열왕기 하권 19장 28절. 참조) 이는 마침내 하느님이 진노하시면 세상의 그 무엇도 대항할 수 없으니, 인간은 그 하느님께 순명해야 할 것임을 나타내 줍니다.(8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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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인간은 기본적으로 판단력이 부족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운전할 때면 더욱더 수긍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 앞의 차가 천천히 가면 앞차를 향해 ‘바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빠르게 자기 차를 추월하면 그 차를 향해 ‘미친 X’이라고 말합니다. 단순히 천천히 가거나 또 빠르게 간다는 것이 그렇게 극단적인 말을 들어야 할 일일까요? 어느 성당으로 강의를 갔을 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처음 가보는 길이었기에 내비게이션이 가르쳐 주는 대로 운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직 제가 나가야 하는 고속도로 출구까지는 꽤 거리가 남아 있는데, 맨 오른쪽 차선으로 길게 차가 서 있는 것입니다.
‘내가 나가는 곳으로 가는 차들은 아니겠지? 이렇게 몇 Km나 차가 밀릴 리가 없잖아?’라는 생각으로 쭉 앞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얼마 뒤, 이렇게 늘어선 차들 모두가 제가 나가는 출구로 나가려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고민이 생겼습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기다려서 출구로 나가려는 차들 앞으로 끼어든다는 것이 염치없고 미안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음 출구로 나가면 강의 시간에 늦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염치 불고하고 끼어들었습니다. 이런 저의 모습에 뒤의 차는 경적을 울리며 난리였고, 어떤 차는 정말로 부딪히려는 듯 위협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때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함부로 남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상황이 이들에게도 있을 수 있으니까요. 내 처지에서 바라보는 판단은 상대방을 전혀 배려할 수 없게 됩니다. 사랑이 전혀 없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판단을 내세우는 삶이 아닌, 하느님의 판단을 내세우는 삶이 더욱더 올바른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그래야 우리 모두 함께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기도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이 기도가 바로 ‘주님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모두 7가지의 청원이 담겨 있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나라가 오게 하시며, 하느님의 뜻이 완전히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앞의 세 가지 청원은 영원한 삶과 관련된 것입니다. 그리고 일용할 양식과 죄의 용서, 유혹에 빠지지 않고 악에서 구원받기를 바라는 뒤의 네 가지 청원은 현세의 삶과 관련된 것입니다. 이 기도를 통해 하느님 뜻이 먼저이고 이 세상의 것은 나중이라는 것을 묵상할 수 있게 됩니다. 또 뒤에 나오는 이 세상의 것도 결국 하느님의 뜻과 연결되어 있기에 모든 청원은 하느님께 맞출 수 있는 믿음을 달라는 것이 됩니다. 이 기도를 진정한 마음으로 바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자신의 판단을 내려놓고, 하느님 판단을 가장 앞에 내세워야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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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성에 충실하십니까?>
한 수도승이 길을 걷다가 독을 잔뜩 품고 있는 전갈이 강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헤엄칠 능력이 없는 전갈이기에 그냥 두면 죽는 것을 알고 있는 수도승은 이 전갈을 집어서 자기 손바닥 위에 올려놓습니다.
그러자 곧바로 전갈이 수도승의 손을 문 것입니다. 깜짝 놀라서 손을 흔들었고 전갈은 다시 강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잠시 뒤, 수도승은 다시 전갈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전갈은 수도승의 손을 또 물고 말았지요. 이번 역시 손을 흔들 수밖에 없었고, 전갈은 또 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 수도승은 다시 전갈을 구했습니다. 이번에도 전갈은 수도승의 손에 독을 찔렀고 이번에는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꾹 참고 안전한 풀숲에 전갈을 내려놓았습니다. 이 전갈이 고마워했을까요? 전갈은 아무런 감사의 표시도 없이 재빨리 사라졌습니다. 이 모습을 모두 본 동료 수도승이 말합니다.
“전갈이 당신을 계속 찌를 게 뻔한데 왜 끝까지 구한 거죠?”
이 질문에 이렇게 답합니다.
“전갈은 찌르는 것이 본성이고, 나는 생명을 구하는 것이 본성입니다. 전갈이나 나, 모두가 본성에 충실했을 뿐이죠.”
본성에 충실하십니까? 특히 내 안의 낮은 본성이 아닌, 하느님께서 주신 높은 본성에 충실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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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의 참 소중한 선물>
-말씀, 기도와 삶-
어제는 문득 며칠전 송부한 ‘복음적 공동체 생활의 증거-자전적 체험 고백-’이란 원고를 읽으며 흡사 마지막 유언遺言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아니 매일 목숨 걸고 쓰는 강론 역시 유언처럼 생각됩니다. 매일 일상에서 하는 말도 마지막 유언처럼 생각한다면 참 각별한 느낌일 것이고, 매일 하루가 마지막 날의 유언처럼 생각한다면, 또 매일 순간 읽는 글이 마지막 유언처럼, 또 듣는 말씀이 마지막 유언처럼 생각한다면 참 간절하고 절실한 삶이 될 것입니다.
이렇다면 참으로 하루하루는 물론 모두가 소중한 하느님의 선물처럼 느껴질 것이요, 깨어 감사하며 지낼 것입니다. 무엇보다 마지막 유언처럼 소중히 대할 것이 말씀이요 기도요 삶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자녀답게 살 수 있는 참 나를 결정하는 결정적 요소들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우선적인 것이 하느님 말씀의 공부와 실천입니다. 인간의 본질은 말씀이자 사랑이요, 말씀 사랑보다 더 중요한 본질적인 일은 없습니다.
무지의 어둠을 몰아내는 말씀의 빛입니다. 말씀은 생명이요 빛이요 영입니다. 말씀을 통해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 위로와 치유도 받고 정화되고 성화되는 영혼들입니다. 참으로 부단한 말씀 공부와 실천만이 참 나를 실현할 수 있게 하고 존엄한 품위의 하느님의 자녀가, 빛의 자녀가 되어 살게 합니다.
하여 매일 말씀으로 이뤄진 시편성무일도와 미사의 공동전례기도를 바치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비단 수도자가 아니라도 매일 찬미와 감사의 시편 말씀으로 성무일도를 바친다면 이보다 영혼에 유익한 수행도 없을 것입니다. 바로 제1독서 이사야서가 말씀의 진수를 잘 보여 줍니다. 하늘에서 내려와 대지를 촉촉이 적시는 생명의 비와 눈같은 말씀입니다.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55,10-11)
얼마나 은혜로운 살아 있는 말씀인지요. 참으로 이런 말씀으로 드리는 기도 말은 함부로 사용해서도 안되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기도할 때 빈말을 뒤풀이 해서는 안됩니다. 기도는 짧고 순수해야 합니다. 우리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다 알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다 아시는 데 기도할 필요가 무엇인가 의아해 할 것입니다. 단견입니다. 하느님이 아쉬워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쉬워서 하는 기도입니다. 참으로 기도할 때 우리가 진정 필요로 하는 본질적인 것을, 바로 하느님의 뜻을 깨달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정말 필요한 것은 하느님 하나뿐임을 깨달을 것입니다.
우리가 평생 배워야 할, 해야 할 말씀의 기도는 단 하나, 주님의 기도뿐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같은 기도입니다. 아니 예수님의 복음 말씀은 하나하나가 마지막 유언처럼 생각됩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 자녀답게 살게 해주는 말씀의 기도, 주님의 기도입니다. 혼자 바치는 기도가 아니라 함께 바치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말씀중의 말씀이 주님의 기도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 주신 최고의 선물인 주님의 기도입니다. 우리 모두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들이요 서로간에는 형제들임을 깨달아 알게 해주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하여 주님의 기도의 본 자리는 미사전례임을 깨닫게 됩니다. 평생 배우고 실행해야 할 주님의 모두가 담긴 주님의 삶의 요약과 같은 기도입니다.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호칭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아버지라 부를 때마다 눈물이 난다는 어느 형제의 말도 잊지 못합니다. 앞서의 아버지께 드리는 세가지 간절한 청원이 날줄의 세로줄과도 같고, 하늘 위에 수직으로 세운 삶의 지주와도 같습니다. 참으로 하늘 아버지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함이 우선입니다. 하늘 아버지야 말로 우리 삶의 목표이자 방향이요 중심이자 의미입니다.
우리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하느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우리의 응답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이런 하느님 중심을 잃어버려 방황이요 혼란이요 표류입니다. 바로 인간 불행과 비극도 하느님 중심을 잃어버림에서 기인합니다.
하늘 아버지는 우리 삶의 무지와 무의미, 허무에 대한 유일한 답입니다. 하늘 아버지가 자리 잡고 있어야 할 삶의 중심에 온갖 헛된 우상들이, 잡신들이 자리 잡고 있기에 황폐화되는 사람들이요 급기야 악마가 괴물이 야수가 폐인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어진 인간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갈림없는 온 마음으로, 온 힘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참 삶의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어지는 후반부의 말씀은 수평의 가로줄 씨줄과도 같습니다. 일상의 땅에서 본질적으로 필요로 하는 최소한의 것들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가난하고 단순하고 겸손하게 하는 삶의 필수적 본질적 요소들입니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땅에서 기본적 필수적 네가지 간절한 청원이 더불어 우리의 책임감을 일깨웁니다. 하느님께 일방적으로 내 맡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하는 것입니다. 100% 하느님 손에 달린 듯이 기도하지만 또 100% 내 손에 달린 듯이 책임을 다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와 삶은 함께 갑니다. 둘이자 하나인 기도와 삶입니다. 이런 주님의 기도가, 주님의 말씀이 우리 삶을, 삶의 꼴을 형성합니다. 하느님과의 부단한 생명과 사랑의 소통인 기도가 우리 삶을 형성해 줍니다. 참으로 기도없는 삶이 얼마나 헛된 불행과 비극의 삶인지 단박 들어납니다. 결코 하느님 말씀과 기도없이는 인생 허무와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말씀과 기도, 특히 주님의 기도는 인간의 물음에 대한 궁극의 답임을 깨닫습니다. 참 구원의 삶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자 답이 평생 깨어 배우고 공부하고 실행해야 할 주님의 기도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주님의 기도를 항구히 충실히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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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기도하면 할수록 하느님을 알게 됩니다>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기도한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누군가가 기도해 준다고 하면 마음의 위로를 받습니다. 본인은 기도에 소홀히 하면서도 남에게는 기도해준다고 말하고 또 기도해 달라고 청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기왕 기도할 바에야 효과 있는 기도, 올바른 기도를 해야 하겠습니다. 그저 입으로 하는 기도가 아니라 되는 기도, 열매를 맺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빈말을 되풀이 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6,7-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청하기도 전에 알고 계신다니 청하는 바가 하느님 마음에 드는 것인지를 먼저 살펴야 하겠습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기도의 본질적 요소는 많이 생각하는 데에 있지 않고, 많이 사랑하는 데 있다. 기도란 사랑의 행위 외에 다른 아무 것도 아니다”고 하였습니다. 더 많이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 마음을 잘 살아가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고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사랑함으로써 사랑자체이신 하느님과 잘 통할 수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묵주기도, 9일기도, 15기도, 33일 봉헌기도,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등등 성인 성녀들이 즐겨 봉헌하였던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 기도에 따르는 삶의 쇄신과 실천 없이 목표한 바를 채우기에 급급해 하면서 꼭 들어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을수록 그만큼 더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해서 무엇을 그 대가로 얻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면 할수록 하느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께 나를 맡기게 됩니다.
루이 에블린은 “사람에게 비는 하느님”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고 열심을 다해 공덕을 쌓고, 많은 것을 청하지만 실제로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구원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기를 빌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먼저, 더 많이, 더 깊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한상봉) 그러므로 구하기도 전에 우리의 뱃속까지 환히 꿰뚫어 보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때때로 기도가 들어지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 이사야서 말씀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시온은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고 말하였지.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49,15)
들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직 때가 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14,14)
그러나 “결코 의심하는 일 없이 믿음을 가지고 청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주님에게서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야고 1,6-7)
나보다 나를 더 환희 아시고 필요한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채워주시는 하느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원하는 때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주시지 않고 더 좋은 것을 당신께서 주시고자 하는 때 당신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주심을 믿습니다.
우리기도의 중심은 내 생각, 내 뜻에 있지 않고 하느님께 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갈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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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우리는, 진정으로 해야 할 말, 해야 할 일에 대하여 배웁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 55,10)
세상과 인간을 향해 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은 "이루어지는 말씀"입니다. 하느님 입에서 발설되는 말씀에는 하느님의 뜻과 사명이 담겨 있어, 그저 헛되이 허공에 사라지지 않습니다.
"기도할 때에 ...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마태 6,7)
반면 아직 하느님과 관계가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하느님을 향한 인간의 말은 자칫 "빈말"이 되기 쉽습니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미사여구로 치장해 장황하게 쏟아내는 말에는 진심이 담기기 어렵습니다. 실행 없이 일단 쏟아내고 보는 인간의 말은 듣는 이의 귀에조차도 남지 못하고 포말처럼 사라질 허상입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의 부귀, 영화, 권력, 건강, 명예의 주인이라 여겨 그걸 꼭 얻어내고 싶다면 사실 그분께 청하고 싶은 건 무궁무진할 겁니다. 그분과의 관계보다 그분 주머니에 관심이 더 많다보니, 말로 그분을 추켜세우고 구스르다가 원하는 바를 요구하는 식으로 기도가 흐르겠지요. 들으시는 분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무례하고 자기중심적인 대화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마태 6,9)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주님의 기도에는 인간이 하느님께 청해야 하는 골자가 담겨 있습니다.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나라, 아버지의 뜻, 일용할 양식, 용서, 유혹과 악에서 보호..."
이 기도에 가만히 머물러보면 거의 대부분의 청원이 하느님께서 해주셔야 할 영역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딱 하나, "용서"만 빼고 말이지요. 용서는 하느님과 인간의 콜라보가 필요한 영역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주님의 기도를 가르치신 뒤 14절부터 "용서"에 대해 덧붙여 설명하십니다. 용서는 주님의 기도 안의 다른 청원들과 달리 인간이 협력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의 말이 빈말이 되지 않으려면 주님의 기도 안의 청원에 실제로 참여해야 합니다. 우리가 용서하면 아버지도 우리를 용서하시고, 용서받은 우리가 또 용서하게 됩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용서할 줄 아시고 앞당겨 우리에게 용서를 베푸시지요. 용서가 용서를 부릅니다. 이쯤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용서는 하나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아버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그분의 "앎"이 곧 "이루어짐"이니, 우리는 우리에게 절실한 바를 충분히 받고 또 받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편에서 할 수 있는 바를 성심껏 준비합시다. 용서가 그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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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말씀 묵상]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마태 6,7)
<쓸데없이 많은 말을 하지 마라>
믿지 않는 이들은 말을 많이 할수록 주님으로부터 자신들이 원히는 것을 더 쉽게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러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우리가많은 말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난 믿음의 기도를 바치기 바라십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의로움의 공덕을 그분께서 판단하시도록 맡깁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더 잘 아시며, 우리가 아뢰기도 전에 우리가 무엇을 청할지 아시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아퀼레이아의 크로마티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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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십자가, 더하기(+)표이기도 하다.
인간관계와 세상 것들에만 집착하는 횡적인 관계의 삶은 빼기표(-)로 나타나는 피해의식과 원망과 한 많은 적자인생을 살아간다. 신자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하고 십자성호를 긋는다. 이것은 횡적인 빼기(-) 인생에다 하느님과의 관계의 삶을 살겠다는 표시로 종적(ㅣ)인 선을 그어 십자표를 가슴에 새긴다.
♣이는 "내 인생에 내 이웃과 당신을 더해가렵니다."라고 사랑의 약속과 더하기를 말씀드리는 것이다. 우리는 십자성호를 그을 때마다 더하기(+) 인생 계산법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흑자인생을 사는 것이 우리들의 참된 신앙생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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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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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기도’는 마음을 온전히 드러내는 지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위해 기도하는지를 보면,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드러내줍니다. 곧 그래서 그의 기도를 보면, 그가 무엇을 고민하고 있고, 무엇을 목표로 살고 있으며, 무엇을 귀하게 여기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기도를 “욕망의 해석자”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기도’를 보면, 그 사람이 보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이 기도에 담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기도 안에는 그 사람이 담겨있다.”
그러니, “주님의 기도”에는 예수님이 담겨 있습니다. 곧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또한 당신을 믿는 사람들의 마음에 담기기를 바라시는 것들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가르치시려는 모든 말씀이 이 기도문 안에 수정처럼 농축되어 있습니다. 비록 이 기도는 짧지만, 그리스도교 신학과 신앙의 근본과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참으로 복음 전체를 요약한 것이다.”
그래서 “이 기도”는 그리스도교 신앙인이 드리는 ‘기도의 모범’을 제시해줍니다. 곧 우리가 드리는 모든 기도는 어떤 형태로든 ‘주님의 기도’를 본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사실, “이 기도”는 ‘주님께서 직접 가르쳐준 기도’로서, 예수님의 기도라는 사실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기도를 드릴 때, 예수님과 함께 아버지께 기도드리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Oratio Domini)라는 전통적인 표현에 대해서 [가톨릭교회교리서]에서는 “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고 전해 주신 우리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라는 뜻이다.”(가톨릭교회교리서 2765)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기도의 배후에는 언제나 예수님이 함께 동행 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영으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드립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아드님을 통하여, 비로소 아버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 기도를 정확하고 올바르게 이해하는 일은 그리스도인에게 필수적입니다. 교회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중세시대로부터 전해지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십계명’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며,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원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주님의 기도’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가장 완전한 기도이다. ~주님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올바르게 바랄 수 있는 것을 모두 청할 뿐 아니라, 우리가 마땅히 청해야 할 것을 순서대로 청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 기도는 청해야 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줄 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정서까지도 형성시켜준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드림으로써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를 알고, 욕망을 훈련시켜 하느님의 목적과 조화를 향하도록 변화한다.”
사실, 올바르게 사는 것은 우리의 올바른 기도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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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마태 6,13)
주님!
유혹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당신을 만날 수 있게 하소서!
없애려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당신의 사랑을 만나게 하소서!
스스로 구원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구원자이신 당신께 의탁하게 하소서.
그 속에서, 잠시도 떨러져 있지 않는 당신의 동행을 볼 수 있게 하소서!
바로 그 속에서, 마음을 당신께 드리고 주님이신 당신께 속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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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빈 껍데기>
"빈말을 되풀이 하지 마라."
기도하되 껍데기만 그럴싸하고
속이 비어있는 마음 상태를 지적하십니다.
직접 가르쳐주신 기도를 하라하시는데,
그 뜻을 깊이 묵상하며 바치면
이 보다 완벽한 기도는 없습니다.
그러나 ~ 얼마나 자주 영혼없이 외워서
입술로만 바치며 양적으로 만족하려는가?
빈말로 기도하다 하느님을 놓치고
위로받기 원하는 이들을 잡아먹으려
노리는 자들이 대놓고 미끼를 던집니다.
이단은 하느님을 포장해 교묘히 성경을
계산하고 144,000명에 뽑힌 이들만이
구원받는다는 특권을 부여하며 학사모를
씌우고 수녀에게까지 신문을 내밉니다.
결국 늙어 죽어갈 인간이 신인것처럼
가족도 모르는 교세 확장의 도구로
비밀공작처럼 다단계의 수법으로 ᆢ
하늘아래 요행은 언젠가 들통나며
비밀스런 종교는 그 자체가 비정상!
"말씀 하나 하나 새기며 정신 똑바로 차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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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마태 6, 9)
산다는 것과
기도한다는 것은
언제나 하느님을
향하는 삶의
가장 애틋한 사랑의
방식입니다.
기도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 삶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우리 삶을 봉헌하고
우리 생명을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탁합니다.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주님의 기도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는
아버지 하느님을
더욱 잘 알게
해줍니다.
믿고 의탁할 분은
오직 아버지
하느님이십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용서를 모르는
우리를 용서로
이끄십니다.
주님의 기도는
용서의 기도입니다.
용서를 통해
아버지 하느님께로
나아가도록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이렇듯 예수님의
삶의 방식은
기도의
생활이었습니다.
주님의 기도에
참여하는 기도의
자녀들입니다.
주님의 기도가
미움과 원망으로
얼룩진 우리를
씻어줍니다.
주님의 기도는
주님께서 걸어가신
주님의 길입니다.
그 길을 닮고
그 용서를
따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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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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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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