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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신]
이미지를 어떻게 펼칠 것인가?
―병치의 시법
로메다 님,
아주 짧은 시인 경우는 하나의 단순한 이미지만으로
한 작품이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앞에서 예로 들었던 황순원의 「빌딩」이나 「옥수수」
그리고 정지용의 「호수 2」같은 작품이 그러한 경우입니다.
그러나 대개의 작품들은 한 개의 이미지에 다른 이미지들이 결합하여
이미저리(imagery, 이미지의 무리)로 발전하면서 시행(詩行)을 이루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시행들이 불어나 연(聯)으로 확대되고,
다시 그 연들이 불어나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되는 것이 일반적인 경우입니다.
이해하기 복잡한가요?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하세요.
하고 싶은 말이 적으면 짧아지고, 하고 싶은 말이 많으면 길어진다고―.
오늘은 이미지의 전개 가운데 가장 단순한 구조라고 할 수 있는
병치구조에 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대등한 이미지나 생각들을 나란히 늘어놓는 구조입니다.
다음에 예로 보인 작품은 대등한 이미지 혹은 생각들을
행 단위로 병치해서 만든 것입니다.
나는 왜 너를 보면 망명(亡命)을 하고 싶니?
나는 왜 너를 보면 맨발로 파도를 달리고 싶니?
나는 왜 너를 보면 백조왕자가 되고 싶니?
나는 왜 너를 보면 유서를 쓰고 싶니?
나는 왜 너를 보면 이 세상 모두를 뒤집어엎고 싶니?
나는 왜 너를 보면 장미꽃 현란한 꽃비를 보고 싶니?
나는 왜 너를 보면 하늘로 하늘로 금사다리를 놓고 싶니?
나는 왜 너를 보면 천국과 지옥의 합창을 듣고 싶니?
나는 왜 너를 보면 물구나무가 서고 싶니?
나는 왜 너를 보면 또 하나 태양의 부활을 보고 싶니?
나는 왜 너를 보면 길길이 길길이 뛰고 싶니?
―박두진「해비명(海碑銘)」전문
너무 도식적이다 싶을 정도로 단순한 구조입니다.
'바다'를 보자 떠오르는 여러 가지 상념과 이미지들을
11개의 행에 각각 담아 대등하게 배열하고 있습니다.
행과 행의 연결에 어떠한 관련성이나 인접성(隣接性)도 없습니다.
작품의 길이도 얼마든지 조정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대상 속에서 다양한 이미지를 찾아낼 수만 있다면
이런 유형의 시를 우리도 얼마든지 쓸 수 있지 않겠습니까?
로메다 님, 시에 자신감이 좀 생기지 않았나요?
다음에 예로 보인 작품은 연 단위의 병치입니다.
우리의 창이 되어
고요히 닫힌
그러한 눈.
보석보다
별을 아끼는
그러한 손― 왼 손.
우리의 뜻을
밝게도 장미빛으로 태우는
그러한 가슴― 둥근 가슴.
목소리―우리의 노래인
맑은 목소리.
우리의 기도를 다소곳이
눈물에 올리는
깨끗한 무릎.
그러한 여인을
아내로 어미로 맞는
남자의 기쁨.
남자로 태어난 기쁨.
―김현승「사랑하는 女人에게」전문
제1연에서부터 제5연까지는 '사랑하는 여인'이 지닌 아름다운 것들 가운데
다섯 가지를 들어 연 단위로 병치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인이 가진 눈, 손, 가슴, 목소리, 그리고 무릎에 대한 이미지들을
그저 늘어놓고 있을 뿐입니다.
다만 마지막 제6연에 가서 그러한 여인을 가진 것이
남자의 기쁨이라고 마무리를 짓고 있습니다.
로메다 님, 어떻습니까?
이러한 전개 구조라면 시 만드는 일이 크게 어려울 것도 없지요?
대상들 속에서 영롱한 이미지들만 끌어낼 수 있다면 말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도 한 편의 시를 만들어 봅시다.
「사계(四季)」라는 제목을 걸겠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계절이 지닌 이미지들을 하나씩 붙잡아 내서
4행 혹은 4연의 병치구조로 된 작품을 만들어 보기 바랍니다.
이것이 오늘의 과제입니다.
말복이 지나자 매미 소리가 더욱 기승을 부리는군요.
남도는 지금 자미화(紫薇花)가 한창이라고 합니다.
끝에 담아보낸 그림은
며칠 전, 어느 독자로부터 받은 명옥헌(鳴玉軒)의 자미화입니다.
세상에 자연처럼 황홀한 것은 없습니다.
음미하면서 마지막 더위를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임보.
[주] 자미화(紫薇花) : 목백일홍, 배롱나무꽃
[주] 명옥헌(鳴玉軒) : 당양 고서에 있는 정자. 광해조 때 은사(隱士)였던 오희도(吳熙道, 1583∼1623)를 추모하기 위해 그의 넷째 아들 이정(以井) 오명중(吳明中)이 세운 것으로, 연못 주변의 오래된 배롱나무들이 운치를 돋구고 있음. 개울물이 옥구슬 부딪는 소리를 낸다고 하여 명옥헌이라 했다고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