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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학루
이 홍사
어디를 가면 사진을 찍는 것보다 기념이 될 만한 물건을 나는 꼭 사 온다. 꼭 내가 아니라 누구라도 기념품을 사겠지만 나는 청동이나 구리로 된 조각품을 선호하는 편이다.
그것을 책상 위나 책꽂이에 장식해 두고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그 여행지의 기억을 더듬곤 한다.
후베이성 우한,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우한 폐렴의 진원지, 그 우한의 공단에 간 적이 있다. 여행이 목적이 아니었다. 순전히 사업상 볼일을 보러 그곳에 갔었다. 몽골에서 사업을 할 적에 벽돌 기계를 맞추고 조작하는 법을 익히고자 그곳을 찾았다.
볼일을 다 보고 황학루를 구경했다.
황학루.
중국의 시인들이 얼마나 다녀가고 얼마나 많은 시를 읊었는지 모를 곳이다.
거북이 등위에 학이 두 마리 서 있는 형상이 있는데, 황학루의 상징이다. 황학루에 가면 팔각정 앞에 거대한 형상의 누런 학이 서 있다. 후베이성이 우리 발음으로 하면 호북성湖北城이고 우한은 무창武昌이 된다.
당시에 나는 무창으로 가면서 그곳이 우한인 줄 몰랐다. 그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그곳에 다녀온 지가 십 년도 훨씬 넘었는데, 나는 지금 책상 앞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그곳에서 사 온 청동으로 된 학을 보며 황학루를 더듬고 있다.
황학루.
지금 제대하고 온 아들 녀석이 초등학교에 다닐 적에 데리고 갔으니 십 년은 훌쩍 넘었을 것이다. 그때 황학루에서 거북이 등에 앉은 학의 조각품을 사 왔다. 청동 재질로 만든 것인데 길이는 한 뼘 정도 되는데 책상 앞에 장식해 두니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은 게 볼 만했다. 지금 기억으로는 판매인인 훤칠한 미인과 실랑이를 하고 깎아서 팔십 위안을 주었다. 그 돈이 한화로 따지면 얼마인지 모르겠다. 달라는 금액을 다 주어도 상관없지만, 순전히 미인과 말다툼하는 재미를 즐기기 위해 한동안 실랑이를 했다, 그 학을 볼 때마다 우한의 기억과 그 훤칠한 미녀를 떠올리는데 애석하게도 그곳에서 산 기계는 본전을 빼지 못하고 고물처분을 했다. 그 기계로 시험 삼아 벽돌을 찍어 벽돌공장 귀퉁이에 사무실과 창고를 지은 게 고작이다.
그렇다고 몽골의 사업이 망했느냐, 그렇지 않다.
벽돌공장은 망했지만, 그 부지는 망하지 않았다.
벽돌공장을 한다고 철로가의 쓰레기로 메운 공장 용지를 샀는데 이 년 후, 벽돌공장 바로 옆에 육교가 생기고 사 차선 도로가 놓이면서 땅값이 시쳇말로 ‘떡상’을 한 것이다. 몽골은 양도소득세가 없다. 순전히 오른 대로 다 받는다.
벽돌을 찍지 못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벽돌을 찍어서 정부로부터 ISO 인증을 받는데 시간이 너무 걸린 것이다. 부패한 관료들에게 뒤로 손을 써도 그렇게 더디었다. 애초에 벽돌공장을 하기로 마음먹기는 한국인들이 아파트를 신축하는데, 한국에서 그려간 도면과 몽골의 전통 벽돌이 크기가 달라 벽 두께가 맞지 않는 것이었다. 한국 벽돌의 두께로 도면을 그렸으니 몽골 벽돌을 두 장을 쓰면 너무 두껍고 한 장을 쓰면 너무 얇아 벽돌을 쪼개서 한 장 반을 쓰는 것을 보고 한국형 벽돌을 찍기로 마음을 먹은 것인데, 건축 붐이 일어나 그 건물들이 완성될 때까지 인증 허가는 나오지 않았다. 당시에 우후죽순 시작해서 짓던 건물이 다 끝날 때까지 벽돌을 찍지 못했다.
뒤에 들리는 얘기로는 기존 벽돌공장에서 ISO 인증을 내주지 말라고 또 다른 루트를 통해서 손을 썼다고 들었다. 몽골 인구는 다 해도 300만이다. 울란바토르에 70만이 살고 있다. 울란바토르에 벽돌을 굽는 공장이 두 개가 있는데 자동화 기계가 들어가니 금세 소문이 나고, 솔롱고스 사람이 벽돌공장을 차렸다고 경계하는 눈치였다.
솔롱고스란 몽골어로 무지개라는 뜻이다.
몽골사람들은 한국을 두고 무지개의 나라라고 한다. 그만큼 한국을 선호하는데 솔롱고스 사람이 벽돌공장을 차렸다고 단박에 다른 벽돌공장에 언질이 들어간 모양이다. 몽골에는 시멘트 벽돌이 존재하지 않는다. 붉은 흙을 구워서 전돌을 만드는 것인데 강도가 약해서 한 차를 싣고 현장에 가서 부리면 반은 깨진다. 견고한 시멘트 벽돌이 자동화로 생산된다면 그런 공장에는 타격이 입게 마련이다. 시장은 좁고 작은데 생각지도 않은 경쟁자가 생겨서 좋을 일이 없다는 것을 알고 그 벽돌공장 사람들이 뒤로 또 손을 쓴 것이었다.
지금 돌이키니 무모한 경쟁을 한다고 겁 없이 설쳤는데 그, 무법천지의 땅에서 뒤통수에 칼이 꽂히지 않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몽골사람들이 드세다는 것을 당시에는 몰랐었다. 외국 사람들은 다 그런 줄 알았다.
몽골 남자들은 할 일이 없다. 대부분 다 그렇다. 오로지 아이를 만들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일 정도다.
먹을 것?
몽골사람들은 육식동물이다. 우리와는 식생활이 다르다. 양과 짐승은 방목한다. 방목하면 초원에 짐승을 풀고 불러들이는 일은 여자의 몫이다. 젖을 짜는 일도 마찬가지다. 양이나 말을 잡을 때 남자가 하지만 잠시 끝나는 일이다. 허구한 날 게르에 앉아서 보드카를 마신다. 그게 남자의 일이다. 술에 취하면 징기스칸의 후예답게 싸움을 한다. 남자들은 절대로 입으로 싸우지 않는다. 그게 징기스칸의 후예다운 것인가. 몸싸움에, 주먹으로 싸운다. 울란바토르 시내를 다니면 몸싸움을 하는 장면을 쉽게 볼 수가 있다. 거짓말을 좀 보태면 한 골목을 지날 때마다 싸움하는 장면을 목격하곤 한다. 한 사람을 때려눕히고 몸 위에 걸터앉아 주먹으로 내리쳐도 누구도 구경하거나 싸움을 말리지 않는 희한한 나라다. 그런 나라에서 몽골인 경쟁자를 물리치고 벽돌공장을 하겠다고 설쳤으니, 지금 생각하니 허가가 나지 않은 게 다행이라 여겨진다. 허가가 나서 작은 시장에서 납품 경쟁을 벌였다는 뒤통수에 비수가 꽂히지 않았다고 장담하기 어렵다.
벽돌공장을 꿈꾸며 많이 고민했다.
한국의 벽돌공장에서 사용하던 중고 기계를 가지고 들어가자니, 덩치가 상당했다. 콘크리트 벽들을 찍어서 스팀으로 쪄서 강도를 내는 시스템이라. 그렇게 하면 몽골 실정에 맞지 않았다. 전자동에 고작 몇 년 찍기 위해서 그렇게 투자할 수가 없었다. 배보다 배꼽이 커지는 투자다. 새우를 잡는데 고래 잡는 칼을 들이댈 수는 없는 이치였다. 나에게 필요한 건 인건비가 약하니 반자동이면 족했다. 인터넷을 뒤져서 그런 반자동이 있나 살펴보니 없었다.
당시에 사돈의 팔촌쯤 되는 작자가 구미 시내 변두리에서 벽돌공장을 하고 있었다. 그 벽돌공장을 뻔질나게 들락거렸다. 나는 무엇에 한 번 꽂히면 스스로 올가미를 만들어 빠져나가지 못하는 성격이다. 아내의 지적이었는데 맞는 말이다. 몽골에서 한국형 벽돌을 찍어야 한다. 그게 우선의 목표였다. 다른 건 눈에 들어오지도 읺았다.
한국의 벽돌 기계를 뜯어서 어떻게 개조해서 반자동으로 만들고 간소화시켜 몽골 실정에 맞출까? 그 궁리를 하고 있는데 사돈의 팔촌쯤 되는 벽돌공장 사장이 말했다.
“중국제를 찾아보시지요. 한국제는 그런 벽돌 기계가 없어요. 그게 더 싸게 먹힐 걸요.”
중국제? 그 소리를 왜 이제야 해?
그래서 중국으로 벽돌 기계를 찾아 나서는 준비를 했다. 첫 번째 중국으로 벽돌 기계를 찾아 나선 것은 몽골에서였다. 몽골에서 공자 용지를 정리해 놓고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베이징에 들러 벽돌 기계를 만드는 공장을 찾아보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벽돌 기계를 슈퍼나 마트에 파는 것도 아니고 발품을 팔아야 했다.
그러자면 가이드가 필요했다.
전문 가이드는 비싸고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것도 인터넷으로 해결했다. 베이징 어원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 준비를 하는 진택이라는 학생과 연결이 되었다. 길림성 출신의, 조선족이었고 한국어에 능통했다. 진택과는 메일로 연락하며 친분을 쌓았다. 전문 가이드가 아니라 순박하게 하루 수고료를 얼마를 달라고 했는데 아주 싼 금액이었다.
언제 울란바토르에서 기차를 타고 쟈밍우드에서 내몽골을 거쳐서 베이징에 들어갈 것이 언제 베이징 서부 버스 터미널로 마중을 나오라고 했다. 울란바토르에서 출발한 기차는 밤을 새워 쟈밍우드에 도착한다. 또 쟈밍우드에서 출발한 국제선 버스는 밤새 달려 새벽에 베이징에 도착한다. 만약을 대비해 진택과 전화번호도 교환했다. 그런데 내가 내린 곳은 베이징 서부 터미널이 아니라 중앙 터미널이었다. 버스에서 만난 몽골 여자가 가르쳐준 대로 내리니 거기였다.
중앙 터미널 부근의 어느 식당에 들어가서 진택에게 전화를 했다. 서부 터미널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여기가 어디인가 설명이 힘들었다. 그래서 주인장을 바꾸어 주었다. 주인장이 중국어로 한참을 위치를 설명했다. 진택은 나를 바꾸어 달라고 한 모양이다. 진택의 전화를 다시 받았다. 서부 터미널에서 온다면 대략 한 시간 정도가 걸릴 것이니 그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곳이 천안문 광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한 시간쯤 후에 진택이 식당 문을 밀고 들어왔다.
식당을 들어서는 모습을 보고 단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 식당을 들어서는 진택을 보고 내가 손을 번쩍 들어 보였다. 이미 우리는 메일로 베이징에 가는 목적과 사진을 주고받았으니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는 사이가 되었고 낯설지 않았다. 진택도 새벽에 나와서 식전이었는데 진택은 여행용 가방을 끌고 왔다. 웬 여행용 가방이냐고 묻자 같이 자야 한다고 했다. 집에서 출퇴근하려면 가는데, 세 시간이나 걸린다고 했다. 베이징 시내가 숙소가 아니냐고 묻자 시내가 숙소는 맞지만 그렇게 걸린다고 해서 조금 놀랐다. 아침에 느긋하게 나와 벽돌 기계 공장을 둘러보고 저녁에는 집에 가서 잔다는 예상은 빗나갔다. 진택이도 식전이라 간단히 아침을 해결하고 둘이는 여행용 가방을 끌고 나와 부근의 싸고 만만한 호텔에 방 두 개를 잡았다. 어디로 갈지 모르는데 여행용 가방을 끌고 돌아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주일을 묵는다는 조건으로 진택을 방값을 상당히 깎았다.
일단 씻어야 했다.
차에서 잠은 잤지만, 몽골에서 육로로 베이징까지 오는 이틀 동안 씻지를 못했다.
씻고 나와 둘이 간 곳은 부근의 PC방이었다.
인터넷으로 검색하니 벽돌공장만 검색되었지, 벽돌을 찍는 기계를 만드는 공장은 나와 있지 않았다.
“그럼 벽돌공장에 가서 중국 벽돌은 어떻게 찍는지, 어떤 기계를 쓰는지, 그 기계를 어디에서 샀는지 알아보자. 그게 빠르지 않을까?”
“그게 좋겠네요.”
진택은 모니터에 나타난 벽돌공장 주소를 서너 개 노트에 적었다. 그리고 나와서 택시를 잡았다. 택시를 타고 나서 진택은 가는 곳마다 택시를 잡지 말고 택시를 아예 하루 전세 내자고 했다. 중국인 운전자가 우리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하루에 얼마냐고 물었더니, 우리나라 택시 전세의 반절에 못 미치는 가격이었다. 그게 좋겠다. 진택은 그 택시도 일주일 가까이 쓴다는 조건으로 또 깎았다. 가만히 생각하니 그렇게 깎은 가격에서 진택에게 애초에 제시한 수고료가 빠질 정도였다.
벽돌공장은 시내에 있는 것이 아니다. 다 변두리에 있었다. 택시를 전세 내지 않았다면 어림도 없는 길이었다.
첫 번째로 찾아간 벽돌공장은 재래식 기계로 진흙을 압축시켜 굽는 공장이었다. 내가 찾던 기계가 아니었다. 다음에 찾아간 공장도 마찬가지였다. 공장 두 군데를 돌아다니니 점심나절이었다. 택시 기사와 셋이서 골목에서 파는 국수로 점심을 때우고 또 다른 벽돌공장을 찾아다녔다. 그 정도 돌아다니니 택시 기사도 우리의 목적이 무엇인지 감을 잡았다. 택시 기사의 도움으로 벽돌공장을 찾아다녔고 기어이 벽돌 기계 공장 아니, 대리점을 찾아냈다. 어느 골목 깊숙이 자리한 곳이었다. 그게 이틀만이었다.
벽돌 기계 대리점에는 여러 종류의 벽돌 기계가 있었는데 내가 찾던 스타일의 반자동 기계도 있었다. 중국 사람들은 몽골을 보고 멍구라고 부른다. 한문으로 쓴 몽고蒙古가 멍구로 발음이 되는 모양이다. 진택은 한꿔韓國 사람이 멍구로 가져간다고 했다. 작동요령과 하루 생산량 기계의 가격을 체크하고 그 대리점에서 푸짐하게 저녁을 얻어먹었다. 대리점 지점장은 외국 바이어가 오기는 처음이라고 했다. 그 유압 기계의 원리와 내구성 등이 인쇄된 카탈로그를 챙기고 명함을 챙기고 대금을 지급하면 멍구로 보내줄 수가 있느냐고 물었다. 가능하다고 했다.
당시에는 기계 대금을 준비하지 않았다.
기계를 만드는 공장은 우한에 있다면서 가서 볼 수가 있느냐고 물었다. 지금은 기계 대금을 준비하지 않았고 다음 달에 몽골을 나가면서 중국에 들렀다가 기계를 주문하고 들어가겠노라고 했다. 지점장은 그 때는 자신이 베이징에 있을지 우한에 있을지 모른다고 했다. 우한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기차를 타고 열두 시간이 걸리는 곳이라고만 했다.
택시는 이틀을 쓰고 돌려보냈다. 나머지 시간은 진택과 둘이서 베이징 명소를 구경하고 한국으로 들어왔다.
한국에도 일이 없는 게 아니다.
한국의 중기 임대 사업은 그대로 병행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일하다가 한 달 후에 기계 대금을 달러로 준비해서 중국으로 다시 갔다. 그때는 방학이어서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 녀석이 따라가겠다고 우겨서 여권을 급하게 만들고 동행했다. 그동안 진택은 건설회사에 취업해서 광쩌우로 가고 없고 진택의 친구인 성화를 소개해주었다. 성화와 메일을 주고받고 사진을 보내고 공항으로 마중을 나왔다. 같은 베이징 어원 대학 출신이고 고향이 길림성이며 조선족이라 진택의 절친한 친구라고 했다.
성화는 물건값을 더 잘 깎았다.
중국에서는 잘 깎는 게 능력이라는 말도 있다.
그 벽돌 기계 대림점의 대머리 지점장에게 연락했더니 우한의 공장에 있다고 했다. 우한으로 내려와 공장의 규모를 보고 벽돌 기계를 주문하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당연히 가야지. 성화와 통화를 하여 며칠에 기차를 타고 몇 시에 도착하겠다고 하니 역으로 나오겠노라고 했다.
성화가 인터넷으로 표를 구했다.
성화도 우한은 처음 간다고 했다.
나는 한국에 있는 동안, 한국 벽돌의 규격을 알아냈고 벽돌도 한 장을 준비해서 여행용 가방에 넣었다. 우한역으로 마중을 나오겠다고 해서 우한역이 대충 서울역 정도의 규모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곳에 내리는 사람이 인산인해였다. 마중 나온 사람들이 양쪽으로 줄지어 있었고, 그 통로를 따라 나오니 끝에 대머리 지점장이 서서 손을 번쩍 들어 보였다. 기사가 딸린 승용차도 준비되어 있었다. 만나서 바로 승용차를 타고 아침을 먹으러 갔다. 중국 사람들은 실하게 먹는다. 아침을 먹고 호텔을 준비했다고 하면서 여장을 풀고 공장으로 가자고 했다. 아담한 호텔이었는데 깨끗해서 마음에 들었다.
공장은 생각보다 컸다.
거기서 호텔 제공에 세 끼 접대를 받으며 나흘을 머물렀다. 저녁이면 지점장과 한 잔씩 하고 호텔로 들어갔다. 당시에 기계 가격이 우한의 아파트 한 채 값이었으니 적은 가격은 아니었다. 그 공장에 외국 바이어가 방문하기는 처음이라고 해서 공장장과 인사를 하고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그날 밤 성화와 아들 녀석을 먼저 호텔로 보내고 말이 통하지 않는 공장장과 요염한 아가씨가 있는 술집에 가서 접대를 받았다는 말은 생략하자.
계약하던 날 내가 배낭에서 달러 뭉치를 꺼내서 주니 경리부 직원이 승용차를 타고 바로 은행에 갈 정도의 금액이었다. 미리 현금으로 주는 조건으로 성화가 5%를 깎았다. 그 사실은 그 자리에 있었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중국어로 내가 그런 제안을 한다고 성화가 시치미를 뚝 떼고 말했던 모양이라 나는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담담했다. 그건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거기서 출장경비와 성화의 수고비가 빠지고도 남았다.
몽골 울란바토르까지 보내주는 조건으로 계약을 했다. 납기는 삼 개월이라고 못을 박았다. 울란바토르에 도착하면 내가 매니저를 통해서 세관 통과를 시키고 공장에 기계를 설치해야만 했다.
기계의 원리와 설치법, 작동원리와 작동법, 응급처치를 숙지하는 이틀 동안 아들 녀석은 혼자서 호텔 주변을 걸어 다니며 중국의 속살을 구경했다. 성화는 통역해야 했기 때문에 나랑 같이 다녀야만 했고, 아들 녀석에게 중국 돈을 조금 주고 말은 통하지 않지만, 호텔 명함을 주었으니 주위에서 혼자서 놀았다. 호텔 주위의 시장에 가고 걸어서 다닐 수 있는 곳은 다녔던 모양이다. 아들 녀석은 성화를 보고 형이라고 부르면서 호텔에서 내 방에 자지 않고 성화의 방에 가서 형이랑 같이 잔다고 할 정도로 정이 들었다.
우한이라고 했지만 나는 자꾸 무창을 떠올렸다. 한문으로 그렇게 표기가 되어 있으니 우한이라는 말이 오히려 생소하게 들렸다.
마지막 날은 오전까지 노트에 꼼꼼하게 중요사항을 기록하고 사진을 찍고 오후에는 시내 구경을 나섰다. 그 기계공장에서 기사가 딸린 승용차를 내주겠다고 했지만 극구 사양하고 시내버스와 택시를 이용해서 돌았다. 할 일을 마치고 하는 여행은 언제나 기분이 홀가분했다. 혹시나 하고 신경을 쓰며 배낭에 넣어 메고 다니던 달러 뭉치가 든 가방도 없으니 훨씬 자유로웠다.
중국을 여행하면 그 규모에 항상 놀란다.
우한의 상징이 황학루라고 했다.
시내버스를 이용하여 그곳을 찾았다. 성화가 있긴 하지만 성화도 초행길이었으니 어느 버스를 타야 하는지 현지인에게 물어야만 했다. 우한에는 외국 여행객이 적게 오는지 버스를 타니 승객들의 관심은 아들 녀석에게 쏠렸다. 버스 승객들은 외국인임을 단박에 아는데 일본인지 한국인지 물었다.
한국인이라고 하자, 승객들 모두가 안녕하세요, 를 연발했다. 성화의 말로는 한국 드라마를 하도 보아서 그 정도는 안다고 했다. 동양 어디를 가나 한국 드라마가 인기다. 몽골도 그렇고 미얀마도 그렇다.
황학루도 작은 정자쯤으로 생각했는데 우리나라의 어지간한 공원보다 그 규모가 컸다. 황학루 앞에 있는 팔각 정자가 팔층으로 되어 있었다. 목탑 형식인데 팔층까지 걸어 올라가니 전망대처럼 시내가 잘 보였고 기념품 판매장이 팔층에 있었다. 중국인의 행운의 숫자는 8이다. 그래서 베이징 올림픽을 2008년 8월 8일 8시 8분에 성화대에 점화를 한 것으로 알고 있다.
황학루의 상징인 청동으로 된 학을 산 곳도 그곳이었다. 미녀 안내원이 있어서 황학루의 역사와 수없이 다녀간 시인들에 대해서 안내를 했는데 중국어라 나는 알아듣지 못했다. 그것까지 성화가 통역하지는 않았다. 청동으로 된 학을 사는데 미녀들을 골려주느라 농담을 하며 한동안 실랑이를 하며 깎았다. 깎아서 사고 나서 서비스라며 미녀들을 양쪽에 세우고 사진을 찍은 기억이 있는데 그 사진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황학루의 상징인, 거북이 등에 올라선 두 마리의 학의 모형은 팔각정에서 내려오니 바로 앞에 거대하게 만들어 놓았다. 거의 사층 높이였다. 그걸 보고 나서야 내가 무엇을 샀는지 알 수가 있었다.
그 학은 지금 내 책상 앞의 책꽂이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성화는 황학루를 보고 나면 일이 잘 풀린다고 중국 사람들은 믿고 있는데 아마도 이번에 계약한 벽돌 기계로 대박이 날 것이라고 했다. 나도 그렇게 믿는다고 했는데 대박은커녕, 벽돌을 찍어 사무실과 창고를 지은 게 고작이었다. 황학루에서 나와 뒤에 있는 호수에 가서 보트를 탔다. 아들 녀석이 타자고 해서 탔는데 호수 저쪽에 가서 내려주었다. 걸어서 돌아 나오는데 거대한 고목들이 인상적이었다.
그날 밤 저녁을 먹고 베이징으로 가는 기차를 타고는 바로 잠이 들었고, 다음날 오후에 아들 녀석을 데리고 울란바토르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성화는 공항까지 배웅을 나왔다.
우한, 나는 그렇게 우한을 다녀왔는데 자꾸만 무창을 다녀왔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21세기에 가장 거대한, 세계적인 역병이 창궐했다.
그 진원지가 우한이다. 우한 폐렴이라고 미얀마에서 들었다. 이미 몽골의 사업은 완전히 접고 미얀마에서 다른 사업을 시작했다. 티눈이었다. 내 인생의 티눈이었다. 생각하니 미얀마 사업은 내 인생의 티눈이 분명했다. 하는 것마다 꼬이고 거대한 빚을 지고 있다. 그 얘기는 나중에 하자. 아무튼, 빚더미에 앉아 있다.
미얀마에서 우한 폐렴이라고 들었을 때 우한이 무창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무창으로만 기억하고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호북성의 무창, 내가 다녀온 곳이 후베이성의 우한이었다는 사실을 유튜브를 보고 알았다. 그곳이 그곳이었다.
그 우한에서 창궐한 폐렴 때문에 미얀마에서 발이 묶였다.
설을 쇠고 들어가서 미얀마에서 볼일을 보고 있는데 예약된 비행기가 운항이 중단되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매일 뜨는 대한항공의 운항이 중단되었다면 그런 소문이야 교민사회에서 금세 퍼지게 마련이다. 인터넷으로 확인을 하니 운항 스케줄이 없이 백지였다. 연락도 없이 그렇게 갑자기 중단될 줄은 몰랐다. 내가 예정한 한 달이 되어 돌아올 비행기를 찾으니 없었다.
돌아올 길이 다 막혔다.
베트남 하노이에서 환승을 하는 비행기는 베트남 정부에서 막았고 방콕을 경유해서 오려고 하니 그곳에서 갈아타는 비행기는 태국 외교성에서 막았다. 방역 차원이라고 했지만 길은 폐쇄되었다.
돌아올 방법이 없었다.
뉴스를 보니 한국의 우한 폐렴이 급속하게 확산하고 있었고 미얀마에서도 골목마다 방역이랍시고 횟가루를 뿌리고 집에서 나오지 말라고 했다. 경찰들이 돌아다니며 골목마다 노는 아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완전히 고립이었다.
미얀마 사람들은 우한 코로나라고 했다.
그 말을 들으며 우한 아니, 무창과 황학루를 떠올렸다. 그때야 비로소 무창에 다시 가고 싶다고 생각을 했던가? 황학루의 상징인 조형물이 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 조형물은 한국의 내 사무실 책상 앞에 놓여 있었다.
미얀마에 고립되어 발이 묶여있는 동안 인터넷으로 황학루를 찾아보았다. 이태백을 비롯하여 당대의 숱한 시인들이 황학루에서 시를 썼다.
그냥 본 정자가 아니었다. 유서 깊은 곳이었다.
이태백은 망치로 황학루를 부수고 싶다고 썼다. 왜 그랬을까?
그에 대한 답은 인터넷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았고 당대의 최호가 유명한 걸작을 남겨서 그 걸작을 넘어설 시를 쓸 수가 없어서 이태백은 붓을 내려놓았다고 했다.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황학루는 자자한 명성만큼 재미난 전설이 깃들어 있다. 옛날 황학루 터에는 주막이 있었다고 한다. 주인은 공짜 술을 즐기는 도사를 싫어하는 기색 없이 환대했다. 어느 날 먼 길을 떠나게 된 도사가 밀린 술값이라며 주막 벽에 황학 한 마리를 그려 줬다. 그리고 도사는, 손님이 올 때 손뼉을 치고 노래를 부르시오. 황학이 나와서 춤을 추며 주흥을 돋울 거라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고 한다.
실제로 주인이 손뼉을 치고 노래를 할 때마다 황학이 나와 춤을 추었는데, 이것이 입소문을 타고 널리 알려지면서 주막이 크게 번성하였다. 십 년 뒤 도사가 돌아와서는 피리를 불어 황학을 불러내더니 그 학을 타고 하늘로 날아갔다는 전설이다. 훗날 부자가 된 주인이 도사와 학에게 고마운 마음을 담아 주막을 헐고 누각을 세웠는데 그게 바로 황학루다.
나는 그런 전설이 있는 줄도 모르고 황학루를 다녀왔다. 몇 군데를 개조하기는 했지만, 우한에서 산 벽돌 기계는 몽골 실정에 잘 맞았다. 단지 건축 붐이 사그라들 때까지 ISO 인정 허가가 나지 않아, 파장 무렵에 필요 없는 기계를 분해하여 모터는 모터대로 팔고 나머지 부품도 필요한 사람에게 팔았다.
우한
황학루를 떠올리며 석 달을 미얀마에서 더 버텼다. 가져간 당뇨와 혈압 등, 기저 질환에 먹는 약은 이미 떨어졌고 말도 통하지 않는 데서 내 나름대로 약을 사서 먹으며 누가 우한 바이러스나 우한 코로나라고 하면 대뜸, 황학루를 떠올렸고 책상 앞에 있는 황학루의 상징인 학이 보고 싶었다.
왜 그랬을까?
황학루! 그게 불현듯 못 견디게 보고 싶었다.
볼일은 고사하고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무료하게 집에만 머물며 가정부에게 사육당하고 있다가 인터넷에서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정기 노선이 아니라 한국산 긴급 구호품과 의료용품을 실으러 가는, 미얀마 국적의 작은 비행기였다. 한국으로 가는 한국인 승객만 탑승할 수가 있었다. 항공료는 정기 노선의 두 배가 훌쩍 넘었다. 그것도 인터넷으로 예매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항공사의 지점에 가서 여권을 제시하고 현금을 미리 내고 예약을 할 수가 있었는데 타고 보니 승무원들은 완전히 우주인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때야 비로소 우한 코로나가 세계적으로 얼마나 심각한 수준임을 알았다. 인천 공항에 들어오니 입국 절차가 얼마나 복잡한지, 거의 세 시간에 걸쳐 공항 청사를 빠져나올 수가 있었다.
한국에 들어오니 또 집에서 보름간 자가 격리를 해야만 했다.
한 달은 미얀마 한 달은 한국에서 생활하며 일을 하던 나는 지금 다섯 달이 넘도록 미얀마에 나가지 못하고 있다. 미얀마의 모든 일은 그대로 올스톱이다. 모든 걸 중단 시키고 우한 코로나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다. 미루어 예상하는데 아마도 올해 안에는 미얀마에 못 나가지 싶다.
큰일이다.
일이 이렇게 꼬일 줄이야.
느긋하게 생각하자. 시간이 가면 해결되겠지. 그 또한 지나가리라 하지 않았던가?
책꽂이 위에 황학루의 상징인 학을 올려다본다.
무창 아니, 우한의 기억이 새록새록 살아난다.
책꽂이 위에는 학 외에도 다른 잡상들이 많다. 반가사유상도 있고 놋으로 만든 작은 잔도 있다. 최근 들어 자투리 시간을 메우려고 일주일에 한 번씩 골동품 경매장에 다니고 있으니 소유욕이 유난히 강한 나에게 그런 물건이 없을 리가 없다. 황학루를 다녀와서 그런지 다른 물건보다 학에 애정이 간다. 학을 보다가 그놈을 책꽂이에서 내렸다. 청동 재질이라 제법 묵직했다. 한국 사람은 애정이 가는 사물은 눈으로 그냥 보는 건 보는 게 아니라고 했다. 꼭 손으로 만져봐야 직성이 풀린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내려서 만져보니 온통 먼지다. 책꽂이 위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손에 쥐어보니 그랬다. 책상 위에 놓인 안경을 닦는 보드라운 천으로 학을 닦기 시작했다. 거북이 등 위에 올라선 학은 두 마리인데 한 마리는 외발로 서 있다. 최대한 평온한 표정을 형상화 시켰다.
이 학이 주막에서 취객들이 손뼉을 치면 나와서 춤을 추었단 말이지?
구석구석 닦기 시작했다. 한참을 닦고 있는데 어디서 풍기는 것일까? 물씬 묵향이 내 코를 자극했다. 분명히 청동 녹에서 나는 냄새가 아니라 묵향이었다.
이 묵향이 이태백의 붓끝에서 나는 향기란 말이지? 아니면 최호의 붓에서 나는 묵향인가?
학을 닦던 손놀림을 멈추고 묵향에 취해 눈을 감았다. 황학루의 전경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아! 황학루여!
그대 곁에 언제 다시 가보지?
불현듯 그곳에 다시 가보고 싶은 마음이 불쑥 일었는데 황학은 내 손 안에서 날려고 버둥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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