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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휼이 필요한 사람들(마태복음 9:9~13)
2025년 1월 5일 성락교회 주일연합예배 설교: 김성현 감독
(마태복음 13:9~13)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께서 ‘마태’라는 세리를 부르셔서 “나를 좇으라.” 하셨습니다. 그러자 마태는 자기 것을 다 버리고 주님을 좇았습니다. 그리고는 마태뿐 아니라 또 그와 같은 죄인들이, 사회에서 지탄받고, 미움받고, 버림받은 사람들이 예수 곁에 함께 둘러앉았습니다. 그 사회에서는 정말 싫어하는 사람들이 예수와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들과 식사를 같이 하셨는데, 식사를 같이 한다는 것은 마음을 나누는 것이지 않습니까? 굉장히 중요한 것이죠. 그들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를 본 사람들이 가만히 있지 못했습니다. 급기야 거룩한 것으로 자기들을 구별하고 있던 바리새인들이 당장에 와서 제자들에게 “어떻게 너희 선생은 저 더러운 자들이랑 같이 있을 수 있느냐?”라고 따졌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들이 듣도록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이 말씀은 많은 말씀들 가운데 복음의 가장 핵심적인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라든지, 기독교 신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말씀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저에게는 견딜 수 없는 대단한 감격과 큰 감동을 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면 복음을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을 또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그 긍휼하심을 이해하려면 우리의 상태를 알아야 됩니다. 우리는 성경에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이와 같은 자들입니다. 세리와 같고 또 여기 세리와 함께 있었던 그런 악한 자들과 같습니다. 그때 세리가 누구와 함께 했었는지 모르지만, 동료 세리라든지, 그런 사람들을 모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사회에서도 악한 사람들, 미움받는 사람들 또 버림받은 사람들을 하나로 일컫는 어떤 상징적인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을 이해하고 또 그의 구원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자기가 어떤 자인지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인간은 죄로 태어났고 죄를 벗지 못해서 겉은 번지르르 해도 대단히 악합니다. 시편에서도 항상 그 점이 강조돼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통회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인간은 다 망하게 생겼는데, 통회하는 자가 있느냐? 나는 통회하는 자를 살리려 있다.’
또 우리는 인자가 필요한 자들입니다. 사람이 다 상황이 다르지만, 모두다 불쌍한 자들입니다. 인간이 타락해서 악을 행하고 또 욕심이 많고 이기심이 많습니다. 순간순간 항상 그렇습니다. 남을 불리하게 하고 나를 유익하게 하려고 하는 그 습성이 계속 있습니다. 그 습성을 조절하지 못하면 금색 그 습성이 나와서 불의한 일을 일으킵니다. 비록 어떤 법으로 명시된 것이 아니더라도 계속 죄를 넘나들고 있는 것이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항상 하는 일입니다. 우리도 다 거기에 속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걸 자제하고 그러면서도 그런 상황을 괴로워하면서 하나님의 긍휼을,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앙생활 좀 했다고 거룩한 척하는 사람, 하나님은 원치 않으십니다. 원리적인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 교회 다니고 있습니다. 거룩하게 나가고 있습니다.” 그런 자를 하나님이 찾아오신 것이 아닙니다. 속은 하나도 변화되지 않았는데 겉으로만 거룩한 척하고, 계속 남을 무시하고, 그런 자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이 불쌍히 봐줄 수밖에 없는 그런 자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가인이 얼마나 악합니까? 아벨은 그 형한테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들도 악한 세상에 있던 자들입니다. 형 가인도 자기 속에 갖고 있던 그것을 참지 못해 동생을 죽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당장 그를 지옥에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그를 불쌍히 보시는 것입니다. 이 사람도 악하지만 연약한 자입니다. ‘너를 더 괴롭히진 않겠다. 너 여기서 죽을 때까지는 내가 너를 보호하겠다.’ 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인간들은 밉지만 또 동시 불쌍한 자들입니다.
다만 그들 중에는 복음의 소리를 듣고 만인 중에 튀어나와서 “나는 하나님의 자비를 구합니다.”라고 진정으로 어떤 소망을 꿈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말 최고 위에 있는 분이 자기를 용서해 주시기를, 근본이 잘못된 자기를 용서해 주시기를 원하며 그의 앞에 나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밉지만, 불쌍한 자들입니다.
주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무조건 모두를 악하게 보시거나 모두를 착하게 보시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 땅에 오셔서 병자들을 대단히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지금은 병이 있거나 어떤 장애가 있다고 해서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경우는 드뭅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문둥병자나 소경들은 살아가는 것이 매우 힘들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다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들의 인생자체가 불쌍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죄악에 속박돼 있는 어떤 짐까지 지고 있습니다. 마치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꺼내면 권총이 나오고 하는 식으로, 어쩔 수 없이 타고난 그런 것이 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병자들을 항상 불쌍히 여기셨고, 또 목자 없는 것 같은 군중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고, 또 그를 따라온 자들을 다 먹이느라고 오병이어의 이적도 베푸셨습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불쌍한 자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아들을 잃은 나인성 과부 같은 자를 불쌍히 여기셨고, 또 그는 당신의 어머니도 불쌍히 여기셨고, 나사로를 불쌍히 여기시고, 소경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의 눈을 고치시며 ‘다시는 이런 너에게 나쁜 일이 있지 않도록 하라.’ 하셨습니다. 병자들을 남처럼 생각지 않으셨습니다. 또 지붕을 뚫고 내려서 주님 앞에 온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시고 그를 치료하셨습니다. 인간에게 주께서 먼저 대하시는 자세는 그것입니다. 불쌍히 여기셔서 살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 정직한 또 겸손한 마음이 없으면, 그가 그렇게 긍휼을 베푸시기 어렵습니다. 주님이 불쌍히 여기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치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다 똑같이 나쁜데 교만한 자는 주님이 싫어하시고 미워하십니다. 그에게 두 마음이 다 있는 거예요. 밉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하고.
그러나 그가 교만한 자는 구하실 수가 없습니다. 세리와 바리새인들이 성전에 와서 기도할 때, 바리새인은 자기 의로운 것들을 자랑했습니다. ‘난 금식도 하고 뭐도 하고…저기 있는 저 세리 같지 않고…’ 이런 자를 주님이 구하실 수가 없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다면 구할 수가 없는데, 우리 중에는 그런 모습이 대단히 많습니다. 기독교인들, 어디에도 다 많습니다.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이에 대한 참 교육이 계속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오해를 자꾸 버려야 합니다. 교회 모두가 겸손하여서 ‘우리의 지경이 이렇습니다. 하나님, 나의 모습이 이렇습니다.’라고 자기의 본모습을 드러내서 ‘살려주십시오’ 하는 말이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인간들이 사랑스럽고, 그들이 좋아서 어쩔 줄 모르시는 것이 아니거든요? 불쌍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독생자를 주셔서 그들로 멸망치 않고 영생에 이르게 하는 거, 왜 그러셨겠습니까? 불쌍히 여기시는 것이거든요. 하나님은 억울하게 당하고, 슬프고, 아픈 자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남을 때리려다가 손을 다쳐서 아픈 것 말고요. 아픈 자를, 슬픈 자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인자하시고 선하신 분이라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갖고 계시는 자비는 긍휼을 원하는 우리 마음과 정말로 잘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내 삶에 있어서도 악한 자들 있습니다. 가정에 침투해 들어와가지고 천륜을 꺾고 큰 범죄를 가행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밉지만은 대단히 연약한 것이 보입니다. ‘정말 인간이 이래서 그렇구나. 정말 이런 자가 회개하고 겸손히 하나님 앞에 나오면 다 용서할 것인데. 그렇구나.’ 주위에 있는 사람들 다 그렇습니다. ‘왜 저런가?’ 하는 시선이 전혀 떠나질 않습니다. 우리 중에서 특별히 누가 더 낫고 특별히 더 못나고 한 것도 아닙니다. 다 불쌍합니다. 죄와 저주를 극복해내가는 짐이 있는 자들입니다.
이건 영적인 관점에서고요, 영적인 것 말고도 세상에 나가면, 먹고 살기 대단히 어렵습니다. 뭐든지 자꾸 소비되고, 뭐든지 자꾸 제공돼야 되는데 공급은 적습니다. 뺏고 속이고 하는데 사회법으로 간신히 막고 있는 것이지, 그마저도 없으면 총칼 들고 나와서 싸우는 서부영화식으로 그런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무슨 즐거움이 있습니까? 그런데 세상에서 돈 조금 있다고 해서 그걸 과시하고 그러는데, 아무 의미도 없거든요? 인생 조금 있으면 끝납니다. 그리고 남을 무시하고 교만하고 악행하고 속입니다. 그게 무슨 소용있느냔 말입니다. 다 불쌍한 자들입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죄밖에 없습니다. 너는 죄를 지을 수 있는 잠재성만 풍부하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고 하나라도 구하려는 그 자비로우신 마음으로 이렇게 자기를 내놓으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체포당하시고, 엄청난 고난을 당하셨고, 또 죽으시고 무덤에까지 들어가셨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긍휼을 베풀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우리같진 않습니다. 다만, 그는 여러분과 나 같이 하나님의 긍휼을, 자비를 간절히 요구하고 죽는 순간까지 자비를 원하는 자들에게 긍휼을 주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 점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아주 강렬한 체험으로 깨달았습니다. 이것은 정말 하나님 주신 영감으로서 이자체를 깨달은 것에 대해 나는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 나는 모르는 게 너무 많고 무지하지만, 둔하지만, 그 긍휼이 필요한 인간의 비참함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소중합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에게 제가 ‘사랑하라.’라고 왜 가르칠까요? 사랑하기 싫어도, 그 이치를 모르더라도 어차피 해야 될 일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명령이거든요. 이스라엘이 율법을 안 지키면 사회에서 그냥 사형당했거든요. 그런 자는 돌로 처서 죽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사랑하라고 주신 그 명령을 지키지 않으면 똑같은 것입니다. 이치적으로는 사형당하는 거죠.
그러나 이제는 알아야 합니다. 이제는 마음으로 믿는 시대거든요? 성령 시대에는 마음으로 믿는 시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지원하고, 마음에 힘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초자연적인 힘으로 군사들을 물리쳤던 그것이, 이제는 우리를 통하여 우리 손으로 이루게 하시는 이런 역사가 있지 않습니까? 옛날 어마어마한 군사를 부리던 주님의 그 능력이, 하나님의 승리의 그 의지가 우리 속에서 흐르고 있는 거죠. 원수 마귀가 우리에게서 뽑혀져 나갑니다. 멍하게 있을 때 우리 가정에, 우리 삶에 파고 들어서 우리를 괴롭게 했던 것까지 다 척결하고 이겨낼 수 있습니다. 삶의 그런 고난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슬픈데 슬프지 않고 기쁨으로 그걸 물리칠 수 있는 그 의지와 하나님의 기쁨을, 평안을, 이기는 체험을 그가 우리 앞에 두셨습니다. 다 이기고 가야 되거든요.
제가 왜 성도들에게 교회 와서 좀 사랑하시고 섬겨주십시오.”라고 하는 줄 아십니까? 긍휼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성경에 완전히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고, 성경의 완전히 중심 중의 중심입니다. 가장 가운데에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미운 사람이 많습니다. “목사님, 돌아오겠습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그를 축복을 했는데 버리고 가버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나중에서야 ‘돌아갈 수가 없게 됐는데…’가 아니라 “돌아오겠습니다.” 하고 ‘헤헤헤, 아닌데.’ 이렇게 이중 마음을 갖고 있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불쌍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와 제 아이들이 외국에 있다가 돌아와서 교회에 합류했을 때 사람들이 너무 싸납고 차가웠습니다. 사랑이 없었습니다. 긍휼도 필요 없고 자비도 필요 없는 것 같았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주님을 만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나 이거 단호히 말하는데, 당신에게 긍휼이 간절하지 않으면 당신도 주님의 긍휼을 받지 못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 5:7)라고 했습니다. 긍휼히 여김을 못 받는 자는 구원을 못 받는 것입니다. ‘팔복’에 해당하는 말씀은 구원에 대한 말씀입니다. 구원받았기 때문에 복받는 것입니다. 구원받을 자가 복받은 자입니다. 긍휼히 여김을 받는 자가.
긍휼히 여김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세리는 감히 고개를 들고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하나님, 날 살려주십시오.” 했습니다. “이 불쌍한 자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누가복음 18장에 있습니다[1]. 이사야서 보면 통회하는 자를 살려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2]. 그런데 왜 통회합니까? 특별히 잘못한 것이 있어서? 아니요. 모든 사람이 다 통회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 온 사람들이 다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저들을 사랑하고 위로해 주어야 할 텐데, 교인들이 너무 사납습니다. 새로운 사람이 오면 사심을 다 버리고 그에게 용기를 주고, “환영해! 우리, 널 환영해!” 이렇게 또 받아주고 적응할 수 있도록 해야 되는데 싸납습니다. 말로도 사람을 ‘타다닥’ 칩니다. 서로를 경계합니다. 교회 와서 경계를 하다니, 당신들이, 크리스천 맞나요? 십자가 밑에서 그렇게 할 겁니까?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긍휼이 나를 향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사랑하면은 내가 이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것처럼 그도 나를 불쌍히 여기실 것이다.’ 이게 원리란 말입니다.
거만하고, 으스대고, 과시하고 이런 것만 하려 하고, 교회를 괴롭히고, 거짓말하고 하는 그런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게 하면 긍휼을 베풀 수가 없습니다. 긍휼이 소중한 걸 모르면 절망인 것입니다. 자기에게 자비가 간절한 걸 모르면 그 사람은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비밀이면서도 누구든지 쉽게 알 수 있는 열려진 비밀입니다. 긍휼하지 않으면, 자비하지 않으면 구원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 앞에 “나 살려주시옵소서. 이 죄인, 맡아주시옵소서.” 하는 마음입니다. 겸손하라는 것이 이것입니다.
그렇다고 말로만 “나는 겸손합니다.” 이렇게 하면 겸손한 건가요? 베드로전서 3장에 보면 ‘체휼’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체휼하는 것이 뭔가요? 불쌍히 여기는 거, 그 사람을 느끼고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벧전 3:8)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의 생각이 이것입니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저는 교회에서 이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하심이라”라고 했는데, ‘너는 이렇게 하여 천국에 들어가게 하려 함이라.’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우리 교회 오면 용기를 갖게 하고, 평안을 갖게 하고, 소망을 갖게 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누가 소망을 주나요? 그게 ‘나’입니다. 근데 여기서 세상 사람이 싸우는 것처럼, 세상에서 서로 사기 치고 하는 사람을 다루듯이 그렇게 합니다. 교회 와서도 서로 싸우고 잘난 척하기 바쁩니다. 너무 그러지 말자고요. 물론 세상에 가서도 항상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교회에서만큼은 그렇게 하지 말자고요. 하나님의 긍휼이 당신에게 향할 수 있도록 여러분에게도 자비가 가득하고, 긍휼함이 가득하고, 불쌍히 여김이 가득해야 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건 지나가는 말씀이 아닙니다. 핵심입니다.
우리 교회에 새 영혼이 오거나 또 우리 청년, 대학부에서 누구 어떤 새 영혼이 오면 경계하고 자기랑 비교하는 것, 하지 맙시다. 불쌍하게 봐야 됩니다. 그도 긍휼이 필요한 자입니다. 이 사람은 절망입니다. 돌봐주는 자 없으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가 돌봄을 받으면서 하나님 앞에 자기가 진정 엄청 죄인인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 무릎 꿇기 전에 당신이 먼저 무릎 꿇은 자입니다. 그게 진짜 사랑받은 자거든요?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하실 때 그냥 마냥 좋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가 그냥 인자하신 것입니다. Loving Kindness(러빙 카인드니스). 불쌍히 여겨서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통회하는 자를 살려주신다.’ ‘겸손한 자를 살려주신다.’ 같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도 전혀 없고, 교회가 긍휼을 베풀어지는 교회가 되도록 나도 기여를 해 줘야 되는데 그러지 않고 ‘누가 나 혹시 얕잡아보지 않게 해야 돼.’ 하는 데에 온 신경이 집중돼 있습니다. 어떤 강박관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세상에서 살던 식으로 그대로 교회에 와서도 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그렇게 자기 연약함을 커버하는데 연연하지 말고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당신이 복을 받나 안 받나, 구원을 받나 안 받나를 증거를 얻어내는 것은 교회, 여기 함께 예배하는 자들 속에서, 이 환경에서입니다. 교회 밖에서는 당신의 구원의 여부를 알 수가 없습니다. 교회 밖에서 세상 사람이 들어오면 여기서 평안을 찾고 회개하게 해줘야 합니다. 따뜻한 그 주의 음성을 듣고서, 여러분의 입을 통해 나오는 주님의 음성 듣고서 그들이 무릎 꿇고, 환영받는 것을 듣고 가슴에 뜨거운 감동이 있게 해야 합니다. 불쌍한데 더욱 불쌍한 사람은 세상에서의 아픔을 겪는데 교회에서도 방어하고 싸우고 있는 자입니다. 그러지 말고, 교회 와서는 평안하길 바랍니다. 긴장하고 있다가도 여기서는 긴장이 풀어져야 합니다.
이제 그 이치를 아셨습니까? 이치를 아시는 분은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서로를 경계하지 말란 말입니다. 물론 경계하지 않으려고 해도 그게 잘 안 될 때가 있습니다. 어떤 집사님이 되게 싸납습니다. 몇 십 년을 그렇게 살았는데 그게 하루 아침에 바꾸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사나운 그 한 마디에 사람들은 ‘아유, 관두고 싶다!’ 하고 마음이 닫힙니다. 그래서 함께 해야 합니다. 이해하길 바랍니다. 여기서는 사랑할 수 있는 것이 당신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그냥 사랑해 주는 것이 정말 도토리 같은 이 쪼끄만 이 무리들 중에서 그나마 위대한 하나님의 모습이 약간 드러난 위대한 모습입니다.
긍휼한 자가 되시길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긍휼한 교회가 세워지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건방지고 교만하다는 것은 여전히 어두움에 있는 것입니다. 마귀가 완전히 자기를 삼켜서 인생을 주무르고 있는데, 모르는 것입니다. 목회자인데도 그렇다고요? 그럼 더욱 위험합니다. 하나님 없이 종교 이론만 계속 나가고 있고, 정작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지신 마음은 자기에겐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우리가 회중으로 함께 했을 때 하나님의 평강과 하나님의 위로와 하나님의 큰 자비를 느끼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주의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또 부활하신 능력이 정말 우리 안에 충만하고, 우리 삶에 충만하고 우리 교회에 오는 자들에게 충만해질 수 있도록 놀라운 이적이 일어나는 교회를 만드는 긍휼한 사람들 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내 본질을 찾게 해 주십시오. 나 방황하고 원수의 속임에 여전히 이렇게 놀아나고 세상과 교회 사람이 구분 안 되는 이런 마음에 아무런 변화가 없는 나, 이런 거 말고, 긍휼하게 교회를 섬길 수 있도록 해 주시옵소서. 교회를 섬기겠습니다. 사랑을 베풀겠습니다. 긍휼을 나타내겠습니다. 나에게 베풀어진 그 주님의 인자를 닮은 자가 되겠습니다. 주여, 역사해 주시옵소서! 다 같이 합심하여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들은 우리 영혼들 다 기억하여 주시옵시고, 저들 심령이 정말 이 사실을 온전히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긍휼하신 하나님은 나 자신을 또 여기있는 성도들 각인을,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오셨다는 것을 알고, 그렇다면 사랑해야 되고 그렇다면 이 위험하고 이 정말 초라하고 비참한 처지를 불쌍히 여길 수 있는 주님과의 마음이 공감 있는 자여야만 될 것입니다. 주 앞에서 겸손한 자가 돼야 될 것입니다. 겸손한 마음을 심어주시옵시고, 우리 마음과 태도가 변하여서 정말 구원을 얻을,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영접할, 또 무덤에서 일어나신 주님을 환영할 준비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녹취: 성락교회 성락선교센터
[1]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 18:13~14)
[2]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사 57:15)
[출처] 20250105 긍휼이 필요한 사람들(마태복음 9:9~13) 성락교회 주일연합예배 김성현 감독|작성자 태초에 말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