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명의「장미 한 다발」감상 / 조재룡
장미 한 다발
이수명(1965~ )
꽃집 주인이 포장을 했을 때 장미는 폭소를 터뜨렸다. 집에 돌아와 화병에 꽂았더니 폭소는 더 커졌다. 나는 계속해서 물을 주었다. 장미의 이름을 부르며.
장미는 몸을 뒤틀며 웃어댔다. 장미 가시가 번쩍거리며 내게 날아와 박혔다. 나는 가시들을 훔쳤다. 나는 가시들로 빛났다. 화병에 꽂힌 수십, 수백 장의 꽃잎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나는 기다렸다. 나는 흉내 냈다. 나는 웃었다. 그리고 웃다가, 장미가 끼고 있는 침묵의 틀니를 보았다. 장미는 폭소를 터뜨렸다.
........................................................................................................................................................................
사물의 침묵은 이름을 붙이면서 깨진다. 그러나 사물은 보다 완고해서 우리가 붙인 이름에 만족하는 법이 없다. ‘장미’ 하고 큰소리로 외쳐보자. 그동안 누구는 붉은 장미를, 누구는 노란 장미를, 누구는 벌레 먹은 장미나 애인에게 건넨 한 아름의 꽃다발을 떠올릴 것이다. 이름은 하나인데, 차마 헤아릴 수 없는 생각이 떠오른다. ‘장미’라는 이름에 장미를 오롯이 담을 수는 없다. 이름에 갇혀 답답해하는 장미의 심정을 누가 헤아리는가? 장미는 이렇게 말한다. 나에게 붙인 이름보다 나는 더 다채롭고 다양한 경험을 갖고 있다고. 나를 좀 흔들어 깨워달라고. 장미 한 송이의 외침과 아우성에 귀 기울이려면 언어의 마법사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조재룡 (문학평론가·고려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