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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의 탄생 - 위의(威儀)와 예(禮)의 표상에서 국가 표상으로
국기는 깃발에 일정한 문양을 넣어 한 나라를 시각적으로 표상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끼리 있을 때보다는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과 함께하는 행사에서 그 역할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이러한 관습이 우리나라에서는 채 130년밖에 안 되었고, 일본이나 서구에서조차 그 연원이 오래되지 않았다. 말하자면 조선왕조 500년 동안은 ‘국기’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고, 여러 나라와 수교를 맺게 된 개항기에 새로이 나타난 제도였다.
조선 사회에서 깃발은 여러 차원에서 위상을 지녔다. 조선시대에 왕실의 중요 행사를 기록으로 남긴 의궤에 삽입된 반차도(班次圖)를 보면 수천 명의 인원이 줄지어 가는 가운데, 국왕의 행차 옆에 수많은 깃발이 늘어선 광경을 볼 수 있다. 왕의 행차 바로 앞에는 쌍룡을 그린 교룡기를 세워 국왕의 통치권을 상징했다. 깃발에는 우주의 질서를 뜻하는 해와 달, 별 등을 그려넣은 것이 있고, 청룡(靑龍)·백호(白虎)·백택(白澤)·해치(獬豸)·기린(麒麟) 등 신성한 동물들을 그려넣은 것도 있으며, 무늬 없이 오방색만 드러낸 기 등 모두 60여 종에 이른다. 그러나 그처럼 많은 깃발 가운데 국가를 표상하는 것은 없었다.
그러던 중 1876년, 일본의 거센 개항 요구를 받고 인천을 비롯한 항구들을 외국에 개방하면서 조선은 ‘국기’라는 것을 정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1876년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을 맺은 것은 일본이 ‘운요호(雲揚號)’라는 배를 강화도 앞바다에 보내, 강화도의 초지진을 지키던 우리 병사들이 정체불명의 배에 포격하게 된 것이 빌미가 되었다. 일본 측에서는 운요호가 일본의 국기를 게양하여 국적을 표시했는데 왜 포격을 가했느냐며 항의를 해왔고, 결국 이를 빌미로 조약을 체결하도록 했다.
일본에서는 이미 1853년에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이끄는 함대가 나타나 같은 방법으로 일본과 미국의 수교를 이끌어낸 바 있었다. 일본은 동래를 통해 국기를 제정했음을 알려왔지만 국기에 대한 개념이 명확치 않았던 조선에서는 운요호에 달려 있던 기가 일본 국기였다는 점을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물론 이러한 주장은 조약을 끌어내려 했던 일본 측의 것으로, 당시 일본 국기가 게양되어 있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
일본에 의해 마지못해 개항한 이후 조선은 청나라와도 새로이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 맺었고, 중국의 주선으로 미국, 영국, 프랑스 등과도 연이어 수교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미국과 수교를 맺을 때 미국 측에서 국기를 함께 게양하고 교환할 것을 요청해왔다. 조선은 1880년에 청의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에게 조선의 국기 제정에 대해 자문을 구하기도 한 것으로 보아 1876년 이후 국기 제정을 꾸준히 모색해왔던 듯하다. 1882년 5월 조미수호조규(朝美修好條規)를 맺으면서 마침내 미국과 국기를 교환했다. 국가의 표상이 탄생한 것이다.
국가 상징물의 제정은 이처럼 조선이 근대 국가로서 세계 여러 나라와 어깨를 나란히 해야 할 상황에서 필요한 장치였다. 국가의 정체성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상징물의 채택은 근대 국가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기의 제정은 중국 중심의 화이론(華夷論) 세계에서 만국공법(萬國公法)의 세계로 나아가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종주국임을 내세우고자 하는 중국과, 새롭게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일본 사이에서 조선의 국기 제정은 대내적인 자부심과 대외적인 자주독립 표방을 위한 장치로 작용했다. 그리고 국기 제정 이후 태극기와 그 핵심적 상징인 태극 문양은 우표, 훈장, 여권을 비롯한 각종 문서 등 근대적인 제도에 두루 활용되었다.
태극기 제정을 둘러싼 의혹들 - 누가, 어떻게 국기를 만들었을까
태극기를 누가 만들었느냐에 대해 많은 사람이 궁금증을 지니고 있다. 이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박영효가 임오군란을 수습하기 위해 1882년 9월 일본에 가는 배 안에서 태극기를 만들었다는 ‘박영효 창안설’이다. 그러나 최근 여러 자료가 발굴되면서 박영효 창안설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우선 박영효 창안설은 널리 알려져 있듯이, 일본으로 가는 메이지마루(明治丸) 배 안에서 박영효가 국기를 그려 보이며 영국 공사 애스턴과 선장 제임스의 의견을 들어 팔괘가 그려진 기를 사괘로 정리하여 만들었다는 것이다. 박영효는 일본에 도착해 고베의 숙소였던 니시무라야(西村屋)에 이 기를 내걸었다고 기록했다. 또한 그는 일본에 가서 각국 공사들을 초청했으며 이 자리에 각국의 국기와 더불어 ‘조선 국기’를 게양하고, 이를 ‘기장서차도(旗章序次圖)’라는 도식으로 남겼다. 이 기록은 박영효가 장계로 조정에 보고했으며, 이 내용은 일본에 사신으로 갔던 박영효가 그 기록으로 남긴 『사화기략(使和記略)』에 적혀 있다. 그리고 박영효가 숙소에 내걸었다는 태극기 모양은 일본의 『지지신보(時事新報)』 1882년 10월 4일자에 게재되었다. 이로 인해 태극기를 박영효가 창안했다는 설이 1960년대 이후 널리 퍼졌다.
그러나 여기에는 몇 가지 의문을 일으키는 점이 있다. ‘국기’라는 중대 사안을 과연 일개 개인이 만들 수 있으며, 그것을 정부와의 논의 없이 외교관계에 사용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더구나 국기의 형태에 관해 외국 사람과 의논하여 정한다는 것이 합당한가라는 문제가 있다. 또 박영효는 이를 기록하면서 ‘이미 상(上)에게서 명을 받은 바 있다’고 기록해 그가 독자적으로 한 일이 아님도 시사했다. 박영효의 이러한 기록이 조정에 장계로 보내졌다고 했으나 이를 뒷받침하는 문서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으며, 이런 내용이 오직 박영효의 기록에만 나타난다는 것도 문제다. 또한 이조차 박영효의 친필이 아니라 필사본으로만 전한다는 사실은 기록의 신빙성 문제를 제기하게 한다.
무엇보다도 박영효가 기록한 날짜에 앞서 1882년 5월 조선과 미국이 조약을 맺으면서 국기를 교환했다는 회고가, 당시 조약 당사자였던 미국의 슈펠트 제독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더구나 이를 뒷받침하듯이, 그해 7월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각국의 국기 책자인 『해양 국가들의 깃발(The Flags of Maritime Nations)』이라는 책자에 조선의 국기가 게재되어 있는 자료가 발굴되었다. 이 자료는 적어도 박영효가 일본에 가기 2개월 전에 이미 조선의 국기가 미국 쪽에 제공되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미국과의 수교 과정에서 조선 쪽 대표자인 김홍집과 이를 주선한 청의 중개자 마건충(馬建忠)이 필담을 나눈 『청국문답(淸國問答)』이라는 자료가 전하는데, 여기에는 두 사람이 조선의 국기에 대해 나눈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수교 하루 전날 조선은 이미 국기 도식을 가지고 있었고, 마건충은 이를 ‘일본기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반대하며 흰 바탕에 푸른 구름과 붉은 용을 그린 ‘백저청운홍룡기(白低靑雲紅龍旗)’를 조선의 국기로 삼도록 권유했다.
그 논리는 흰옷을 입은 백성과 푸른 옷을 입은 관료, 그리고 붉은 옷을 입은 국왕을 상징한다는 것이었지만, ‘용’을 중심에 두는 데는 이미 황색 바탕에 푸른색 용을 그린 황제기를 국기로 사용하고 있던 청과 조선의 국기가 같은 이미지로 보여 조선이 청의 속국임을 드러내게 하려는 속셈이 깃들어 있었다. 김홍집은 그 제안을 혼자 결정할 수 없다며 완곡히 거절하고 마침내 다른 도식으로 미국에 국기를 제공했으며, 이것이 미국 해군성 해양국에서 제작한 책자에 실렸다. 이 내용이 기록된 『청국문답』에 그 도식을 소매에서 꺼낸 사람이 이응준이라는 점 때문에 혹자는 이응준을 국기의 창안자로 보기도 하지만, 이응준은 김홍집의 수행원인 통역관일 뿐이었다.
국기 창안자에 관한 또 다른 설은 오경석이 이 도상을 착안했다고 한 회고다. 조선 말기의 역관이며 개화파의 한 사람이었던 오경석이 동래에서 일본이 조선의 국기에 대해 문의하자, 서원이나 향교의 문에 그려진 태극을 제시하며 이것이 조선의 국기라고 임기응변으로 대응했으며, 뒤에 이것이 그대로 국기로 채택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북한의 김두봉이 주장한 것으로, 한국의 국기가 제정된 과정을 폄하하려는 뜻에서 한 언급이지만, 오경석 집안에서 이미 이렇게 전해 내려왔다고 한다.
한편 국기의 창안에 관해서는 또 하나의 회고가 전한다. 조선 말기에서 일제강점기까지 국학을 연구한 유자후가 『경향신문』 1948년 2월 24일자에 남긴 「국기고증변(國旗考證辯)」이라는 글에 따르면, “김옥균 씨의 창의로써 김홍집 씨와 상의하고 어윤중 씨의 찬성을 받은 후에 박영효 씨의 동의를 얻어 고종 황제께 품달하여 재가를 받았다는 것이 사실에 가까운 듯하다”라고 했다. 유자후는 “국기라 하는 것은 국가의 의사(意思)와 민족의 정신을 선양하는 권위 있는 표지”라고 정의하면서 이를 김윤식으로부터 들었다고 기록했다. 김옥균과 김홍집, 어윤중, 박영효는 모두 당시의 개화파 관료로서 외국과의 수교에 앞장선 이들이었다는 점에서 이 논의는 비교적 신빙성이 있다.
이처럼 태극기의 제정이 정설로 정리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정부의 정식 기록이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이 과정을 유심히 보면, 당시 국기의 제정은 개화파 관료, 역관 등 외국과의 교류에 앞장섰던 이들과 관련 있으며, 국왕의 재가 없이는 이뤄질 수 없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어쩌면 오경석 집안의 구전대로 태극 도상을 중심에 놓는 아이디어가 오경석에게서 비롯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김옥균이 국기의 도식을 구체적으로 구상하고 이를 다른 개화파 관료들과 논의하여 고종의 재가를 받아 성립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오경석이 서원이나 향교의 문에 그려진 태극 모양으로 국기의 핵심 도상을 이끌어냈다고 하는 회고는 조금만 생각해보면 매우 자연스러운 발상으로 보인다. 조선은 성리학을 통치 원리로 채택한 나라였으며, 사회 정치를 이끌었던 사대부들은 성리학을 우주의 질서를 이해하는 철학이자 사회 통치의 원리로 여겼는데, 성리학자들이 생각한 사회 통치의 질서가 ‘예(禮)’였고 이를 표상하는 도상이 바로 태극(太極)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도설이나 도해를 통해 성리학의 이념을 설명하는 방식이 독특한 학문 방법으로 자리잡았다. 조식은 『학기유편(學記類編)』에서 역학, 태극, 이기(理氣), 심성(心性)과 관련된 설을 도설로 제시했으며 이황은 『성학십도(聖學十圖)』에서 「태극도」를 제시하기도 했다. 성리학에서 파악하는 우주 순환의 원리가 태극으로 표현된 것이기 때문에 태극은 성리학의 가장 핵심적인 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성리학이 사회에 깊이 뿌리내리면서 더욱 심화되자, 그 도상은 조선 곳곳에 채택되어 사용되었다. 성리학을 중심으로 하여 아이들을 가르치는 향교나, 선학의 영정을 모시고 제향을 올리는 서원의 사당 문에 태극 문양이 그려지는 일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러한 예의 표상은 군현의 관아 정문에도 그려졌으며, 조선의 군사들이 내건 깃발에도 그려지곤 했다.
따라서 강화도 조약을 통해 개항을 하고 외국과의 수교 과정에서 국기를 제정해야 했던 조선의 지식인들이, 나라를 보여주는 시각적 상징으로 성리학적 질서이자 우주 순환의 원리를 도상화한 태극을 착안해낸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더구나 미국과의 수교 과정에서 국기에 대한 논의를 청의 사신 마건충과 나누게 되었을 때 ‘용’ 도안이 그려진 깃발을 권한 청의 요구를 거절한 것은, 조선이 청과는 분명히 다른 정체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를 표현해야 한다는 자각이 강하게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의 국기는 미국과의 수교 이후인 1883년 3월 7일(음력 1월 27일) ‘국기를 제정했으니 사도(四都)와 팔도(八道)에 널리 알리도록 하라’는 명과 함께 공식적으로 시행되었다. 이후 외교관계를 맺게 된 나라들과 국기를 교환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현재 영국의 국립문서보관소에는 1884년 당시의 외교 통상 관서인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에서 제작하여 조선 주재 영국 총영사인 애스턴에게 제공했던 태극기 도식이 보관되어 있다. 이 도식은 애스턴이 주청 영국공사인 파크스에게 6월 10일에 보낸 외교 문서 안에 들어 있던 것이다. 또한 주한 프랑스 공사관에서 1888년부터 1903년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외교관으로 활약했던 콜랭 드 플랑시가 보관했던 외교문서 안에도 조선에서 제공한 태극기 도식이 들어 있다. 이처럼 국기는 다른 나라에게 조선의 이미지를 시각적으로 인식시키는 것이었다.
미국의 해군성이 발행한 『해양 국가들의 깃발』 책자에 수록된 태극기 도식도 조선에서 미국의 외교관에게 제공한 도식이 수록된 것이다. 1882년에 미국과 수교할 때 미국 쪽 전권대사였던 슈펠트는 이미 그의 회고담 「한미조약체결사」에서 당시 국기를 교환하고 상호 게양했음을 밝힌 바 있다. 그런데 국기 게양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는 바로 군함이나 상선에 걸어 국적을 밝히는 것이었다. 미국 해군성에서 발행한 이 책자도 각국의 군함에 단 국기를 식별하여 수교국인지를 밝히고 항구에 정박할 수 있도록 허가할 것인지를 판단하게끔 도본으로 제작한 것이었다.
외교관이 임지에 부임했을 때 국기를 사용하는 것은 아주 당연했다. 박영효가 임오군란을 수습하기 위해 1882년 일본에 갔을 때 고베에 도착해 숙소인 니시무라야(西村屋)에 태극기를 게양했고, 이것이 당시 일본 『지지신보』 10월 4일자에 게재된 일, 또 각국 공사들을 초청해 연회를 베풀었을 때, 각국의 국기와 함께 태극기를 배치한 것은 위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다.
미국과 수교를 맺은 뒤 1883년 박정양 일행이 외교사절단인 보빙사(報聘使)로 갔을 때 워싱턴의 호텔에도 태극기를 높이 게양했음이 당시 『워싱턴 포스트』에 보도되었다. 또 1888년 미국 주재 조선공사관을 워싱턴에 개설하고 옥상 높이 태극기를 게양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 공사관 건물은 오늘날에도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어 2012년에 우리 정부가 다시 매입했다. 사진으로 남은 주미 공사관에는 현관 포치에 태극기가 새겨져 있고, 1층 접견실 복도에 대형 태극기가 게양되어 있어 우리 공사관을 드나드는 외국의 외교관들에게 조선의 상징을 알리는 역할을 충실히 했다.
외국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서도 태극기는 우리의 표상이 되었다. 1893년 미국 시카고에 열린 만국박람회에 참여한 우리나라는 제조와 교양관에 전시 공간을 마련했고, 조선에서 가져간 갑옷, 깃발, 악기 등의 물품을 전시했다. 전시장 위쪽에 태극기를 걸어 조선의 표상을 알린 사진이 남아 있다. 1900년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서는 경복궁 근정전을 본뜬 전시관을 세워 대한제국을 좀더 본격적으로 세계에 알렸다. 이때의 모습을 화보로 그려 보도한 『르 프티 주르날(Le Petit Journal)』에는 한국관 모습과 함께 태극기 이미지가 제시되어 있다.
태극기는 우표에도 삽입되었다. 1894년에 발행한 우표는 태극기를 도안화한 것이다. 서울의 미국 공사관에서 미국 디트로이트로 보내진 우편봉투는 제물포와 홍콩, 워싱턴을 거쳐가면서 조선/대한제국의 표상을 세계에 널리 알렸다. 이처럼 태극기는 대외적으로 조선/대한제국의 표상으로서 점차 각인되어간 것이다.
태극기는 1880년대에 대외적으로 유포된 반면 국내에는 그리 널리 알려지지 못했던 듯하다. 그러나 1895년 기념일인 경절(慶節)을 제정하면서 중요한 거리나 집집마다 태극기를 게양하도록 했기 때문에 1890년대 중반부터는 국민도 태극기를 국기로 인식하게 되었다. 특히 『독립신문』에는 다음과 같이 애국심을 고취하며 태극기를 공경하라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애국하는 것이 학문상에 큰 조목이라 그런 고로 외국셔 각 공립학교에서들 매일 아침에 학도들이 국기 앞에 모여 서서 국기를 대하여 경례를 하고 그 나라 임금의 사진을 대하여 경례를 하며 만세를 날마다 부르게 하는 것이 학교 규칙에 제일 긴한 조목이요 사람이 어렸을 때부터 나라를 위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것이 사람의 직무로 밤낮 배워 놓거드면 그 마음이 아주 박혀 자란 후라도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다른 것 사랑하는 것보다 더 높고 더 중해질지라. (…) 국기라 하는 것은 그 나라를 몸받은 물건이라. 그러한즉 국기가 곧 임금이요 부모요 형제요 처자요 전국 인민이라 어찌 소중하고 공경할 물건이 아니리요."
- 『독립신문』 1896년 9월 22일자
학교에서도 계몽 교육의 시행을 통해 국기에 대한 인식을 널리 퍼뜨렸다. 소학교에서 교재로 삼았던 『심상소학(尋常小學)』에는 고종의 탄신인 만수성절(萬壽聖節)이나 개국기념일인 계천기원절(繼天紀元節)에 집집마다 국기를 게양하도록 계몽하는 삽화를 실었다. 특히 지리 교육이 이런 면에서 앞장섰다. 학부(學部)에서 1900년에 괘도로 제작한 「세계전도(世界全圖)」에는 각 나라의 위치를 알려주는 지구본 그림과 함께 36개 나라의 국기를 그려넣었다. 다른 나라의 국기와 더불어 있는 태극기는 세계 여러 나라 속의 한국을 떠올려 애국심을 고취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899년에 외국어학교 학도들이 모여 벌인 운동회에서는 태극기가 만국기(萬國旗)와 함께 운동회장에서 펄럭였다. 운동회 예식에서는 태극기를 게양하고 이를 향해 애국가를 부르게 하면서 애국심을 드높였다.
태극기는 민간 행사에도 자주독립의 상징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청의 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迎恩門)을 허물고 1896년에 그 자리에 세운 독립문 기공식에서 태극기를 게양해 자주독립을 고취하는 의식을 거행했으며, 1년여의 공사 끝에 건립한 독립문에는 문루 높이 ‘독립문(獨立門)’이라는 글씨 양쪽에 태극기를 새겨넣어 독립의 뜻을 드높였다. 1898년 10월 29일 독립협회 회원과 정부 관리들이 함께 참석해 개혁적인 헌의 6조를 채택했던 관민공동회에서도 태극기를 게양하는 의식이 치러졌다.
저항정신과 국권 회복의 상징이 되다
이처럼 국민과 정부를 통합하던 태극기였지만 국권이 점차 기울면서 그 위상은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외교권이 박탈당하자 미국 워싱턴의 공사관이 철수되고 태극기가 내려졌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태극기는 오히려 국권 수호의 표상이 되었다.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들은 태극기에 ‘불원복(不遠復)’이라는 글자를 새겨 ‘국권 회복이 멀지 않았다’는 뜻을 높이고자 했다.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고종이 강제로 양위를 당하고 황제에 오른 순종을 새로운 황제로 인식시키기 위해 1909년 1~2월에 영남 지방과 서북 지방으로 순행하도록 했을 때, 국민은 태극기를 통해 저항정신을 드러냈다. 새 황제의 행차를 맞이하는 국민에게 태극기와 더불어 일장기를 흔들도록 했지만, 연도에 선 학생과 천도교인들이 일장기를 거부함으로써 이른바 ‘국기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또 평양이나 정주의 몇몇 학교에서는 일장기 게양을 거부하고 태극기만 높이 내걸었다. 『대한매일신보』 등에서는 이를 크게 보도해 국기 사건을 공론화하기도 했다.
해외의 한인들도 태극기를 국권 회복의 상징으로 삼았다. 1902년 하와이에 이민을 갔으나 고국의 주권이 침탈되어 더 이상 그들을 보호해줄 조국이 없어진 재미동포들은 1910년 이후 해마다 국권이 무너진 8월 27일에 모여 국치를 잊지 않도록 행사를 벌이며 국권 회복을 꿈꾸었다. 이들은 대회장 정면에 높이 걸었던 태극기를 늘어뜨렸다가 국권 수복의 연설과 더불어 애국가를 부르면서 다시 태극기를 올려 게양하는 ‘국기 부활 예식’을 거행함으로써 국권 수복을 다짐했다. 이러한 예식은 미주 한인들뿐만 아니라 상하이 임시정부에서도 이뤄졌다. 임시정부의 국무원과 각부 직원들은 1919년 9월부터 아침 9시 집무를 시작할 때 태극기 앞에서 집합식을 하여 집무를 시작하는 예식을 거행했다.
1919년 3월 온 국민을 하나로 만든 3·1운동에 거리에서 집집마다 태극기를 품고 흔들 수 있었던 것은 국권이 흔들릴 때 태극기가 국민을 하나로 통합하는 상징으로 받아들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태극기는 개항기에 외부로부터의 필요성으로 인해 제정되었지만, 국권이 침탈되는 위기를 겪으면서 정부의 국기가 아닌 국민의 국기로 거듭났다. 오늘날 월드컵이나 올림픽을 치르면 우리 선수단은 태극기를 앞세워 입장하고, 응원단은 태극기를 흔들며 결속을 다진다. 이제 세계의 소통이 자유롭고 국경이 해체되어가는 오늘날, 국기로서의 태극기의 위상과 의미는 어떻게 재평가되어야 할까.
첫댓글 공부하려고 업어왔습니다.
대단하십니다. 그 열정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