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향을 튼 지하철이 당산역을 거쳐 양화대교를 지난다
강의 잔물결을 스치며 시속 80km로 달려온 아침햇살이
서치라이트 켜지듯 역광으로 들이친다
눈앞이 환해지며 그의 검은 실루엣이
먹물을 듬뿍 머금은 듯 또렷해진다
1,500볼트의 역광이 왁자지껄한 광고판들을 지나
다음 칸의 문을 미는
반세기 후 아니 수세기 전의 그를
번개처럼 수거해 달아난다
- 시집 『복사뼈를 만지다』 (시안,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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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서울 지하철을 타면 선반 위의 무료신문을 수거하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자주 목격할 수 있었다. 이른바 ‘폐지 헌터’라 불리던 그들이 수년 전부터 자취를 감추기 시작해 지금은 싹 사라져버렸다. 행색이 초라하고 행동거지가 좋아 보이지 않아 다른 승객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는 이유로 그들의 출입을 막았다. 선반위에 신문지를 올리지 말라는 안내방송도 꾸준히 해왔다. 때를 같이하여 지하철 출입구에 놓였던 무가지도 스마트 폰에 밀려 점차 사라져갔다. 지하철 안에는 저마다 폰을 만지작거릴 뿐 신문을 펼쳐보는 이는 거의 없어졌다.
이들 폐지헌터의 대부분은 60~80대 노인들로 폐지를 팔아 생계에 보태고 소소한 용돈벌이를 해왔다. 그들이 하루 선반을 더듬고 부대자루를 밀면서 담아가는 폐지의 양은 1인당 평균 50∼60㎏정도다. 1㎏당 200원에 육박한 적도 있었으나, 지금은 신문지가 80원 수준이고 골판지는 오히려 그보다 밑도는 가격이다. 그래봤자 그들의 수입은 몇 천원에 불과하다. 지하철 신문지 수거가 안 되니 요즘은 거리에서 골판지를 줍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예전 같으면 추운 겨울엔 폐지수거량이 줄어 골판지 가격도 오르는 경향이 있었으나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택배 물량이 엄청나게 증가함에 따라 골판지 수요는 부쩍 늘고 원자재 값은 바닥이니 박스제조회사만 호황이다. 폐지 값을 좀 올려줘서 거리의 폐지헌터들에게 ‘안정된’ 일자리가 되도록 배려를 해도 충분히 여력이 있겠건만 수요와 공급 사이에서 폭리만 취하고 있다. 이럴 때 박스회사가 더 생겨 시장경쟁이 된다면 사정이 좀 나아지겠는데 현실은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더구나 중국에서 플라스틱과 함께 폐지도 수입을 제한하고 있어 국산 폐지의 물량이 쌓이고 적체가 발생하면서 폐 골판지 가격은 자꾸만 떨어지는 상황이다.
‘방향을 튼 지하철이 당산역을 거쳐 양화대교를 지난다’ 내게도 오래전 한때 익숙한 코스였다. ‘서치라이트 켜지듯 역광으로 들이친’ 실루엣이 내 그림자였을지 모를 일이다. 그래서인지 택시드라이버는 아니었지만 자이언티가 부른 이상한 문법의 노래 ‘양화대교’가 가슴에서 일렁인다. 사실 이 노래를 감동적으로 들은 건 복면가왕 ‘거미’를 통해서였다. ‘아버지는 택시드라이버 어디냐고 여쭤보면 항상 양화대교’ 아버지의 삶의 터전인 양화대교를 중심으로 생활비를 버는 반복된 삶의 현실과 무게를 지금의 청춘들이 얼마나 이해하고 느낄 수 있을까.
‘1,500볼트의 역광이 왁자지껄한 광고판들을 지나’ ‘다음 칸의 문을 미는’ ‘반세기 후 아니 수세기 전의 그를’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라고 해서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도 이 노래를 통해 ‘양화대교’에 밑줄 긋고 감성을 위로받는 것이다. 그 공감으로 슬픈 가사이지만 떼창도 하는 것이리라. 어쩌면 그것은 세상을 향한 토로이자 자기치료의 방식일지도 모른다. 그래 우리 모두 올해는 ‘행복하자 우리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아프지 말고 행복하자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그래 그래’ 언젠가 저 역광이 우리 모두를 번개처럼 수거해 달아날 때까지.
권순진(2020. 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