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르 푸시킨(Aleksandr Pushkin, 1799~1837.1.29)은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몰락한 귀족이었으나, 프랑스 고전 문학으로 채워진 서고는 조숙한 아들의 문학적 재능을 키워 주었다. 어린 푸시킨은 페테르부르그 근교 차르스코예 셀로의 황실 리세에서 교육을 받았다. 여덟 살 때 처음 프랑스어로 시를 쓰기 시작한 푸시킨의 공식적인 문단 데뷔는 열다섯 살 되던 해인 1814년이었다. 이듬해 원로 시인 데르자빈이 참석한 자리에서 낭독된 시 「차르스코예 셀로의 회상」은 그를 러시아 문학의 기대주로 자리매김해 주었다. 이어 1820년에 발표된 첫 서사시 「루슬란과 류드밀라」 역시 선배 시인 주콥스키의 극찬을 받았다.
리세를 졸업한 뒤 1817년부터 1820년까지 외무성에서 근무하다가, 체제 저항적 시들이 문제가 되어 러시아 남쪽으로 유배되었다. 형식적으로는 전근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귀양이었고, 푸시킨은 1827년까지 페테르부르그에 돌아오지 못했다. 그러나 이 유배 기간은 시인으로서 생산적인 기간이었을 뿐 아니라 서구 문학의 영향에서 벗어나 성숙기에 돌입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이 기간에 그는 역사극 『보리스 고두노프』를 쓰고 『예브게니 오네긴』을 시작하여 제6장까지 진행했다. 1826년 출판된 그의 첫 시선집은 두 달 만에 품절되는 인기를 얻기도 했다.
푸시킨은 위험인물로 간주되었으므로 페테르부르그에 돌아온 다음에도 황제의 검열 없이는 그 어떤 작품 발표도 할 수 없었고 여행도 불가능했다(푸시킨은 죽을 때까지 러시아 땅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언제나 빚에 시달렸다. 1830년 미인 나탈리아 곤차로바와 결혼했으나 아내와 관련된 소문은 그에게 정신적인 타격을 주었다.
푸시킨은 아내의 연인으로 여겨진 프랑스인 당테스에게 결투를 신청했고, 결투에서 부상한 뒤 이틀 만인 1837년 1월 29일 사망했다. 시인의 안위를 걱정하는 인파가 집 앞에 모여드는 바람에, 주콥스키는 시시각각 푸시킨의 상태를 적어 문밖에 고시해야 했다. 그의 서재에는 총 3,560여 권의 책이 소장되어 있었는데, 그 책들에 눈길을 멈추었던 시인의 마지막 한마디는 “안녕, 친구들!”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알렉산드르 푸시킨 [Aleksandr Pushkin] (해외저자사전, 2014. 5.)
첫댓글 이 또한 지나 가리라!
(This too shall
Pass)
지금은 힘들어도
참고 견디자는
간절한 소망이 담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