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3. 15. 쇠날
[공약]
아침에 윤건이랑 딱지치기 한 판을 했다. 딱지 접기도 할 줄 안다고 한다. 긴 머리를 묶은 귀엽고 아름다운 우리 윤건이는 푸른샘 1학년, 맑은샘에 입학하자마자 그 기개를 뽐내고 있다. 푸른샘 1학년답게 학교 규칙 배우느라 애쓰고 있다. 형님들이 좋아서 형님들 교실에 자주 드나들어 모두에게 웃음을 주고 있기도 하다.
아침이라 아이들을 만나며 아침 뭐 먹었는지 인사를 나누는데 개구리 반찬 먹은 어린이는 없다. 누구는 죽을 먹었고, 누구는 시리얼을 먹었고, 누구는 미역국을 먹었단다. 4학년 이안이가 어린이모임 선거에 출마하는데 공약 마련에 걱정이 많다. 어제도 이야기를 나눴는데 오늘도 달려와서 의견을 묻는다.
이안: 선생님 공약을 더 마련해야는데 생각이 안나요.
나: 어제 많이 얘기했는데 그 가운데 마음에 드는 게 없나요? 한 달에 한 번 아침 새참 먹기, 공연보기, 놀러가기, 또 뭐 많이 있었잖아요.
이안: 다른 후보들이 많이 했어요.
나: 음 그럼 자연속학교 때 날마다 맛있는 거 먹기 어때요?
이안: 그건 지금도 그렇잖아요.
나: 그렇군요. 그럼 산 오르기 할 때 더 많이 쉬기나 생일 맞은 친구에게 공연해주기 어때요? (승주가 옆에 있어서)또 한 달에 한 번 1학년 승주 업어주기는요.
이안: 그럼 승주만 좋잖아요.
나: 그럼 푸른샘 1학년 업어주기로요.
이안: 그럼 푸른샘만 좋잖아요.
나: 그렇군요. 그럼 또... 생각나면 이야기할게요.
[텃밭농사 시작]
쇠날은 텃밭 공부가 있는 날이다. 6학년이 씨감자를 자르고, 4,5학년이 씨감자 싹을 키울 채비를 하고, 모든 학년이 텃밭에 거름을 넣고 뒤집는다. 낮은 학년에게 텃밭에 거름을 넣고 뒤집기는 쉽지 않은 일이지만 온 힘을 다해 삽질을 하는 모습을 보면 절로 웃음이 난다. 물론 선생들이 구슬땀을 흘리며 일하니 밭 모양이 잡히고 거름이 깊게 들어갈 수 있다. 노학섭 선생님이 2학년을 데리고 거름을 넣고 삽집을 하는 걸 돕다가 손길이 닿지 않는 호박구덩이쪽을 정리했다. 마늘이 올라온 밭은 울타리를 쳐주어 어린이들이 밟지 않도록 했다. 1학년 시현이가 어머니 보고 싶어 아침에 울었는데 어머니가 다시 오셔서 진정이 된 터라 어머니 잘 보냈다고 선물을 준다고 하니 눈이 반짝인다. 선물은 텃밭 지렁이다. 함께 텃밭 지렁이를 찾아서 보여주었더니 환하게 웃는다. 다른 어린이들이 우루루 몰려와서 지렁이를 만져보고 귀엽다며 다시 흙 속에 넣어주었다.
텃밭은 선생들에게도 큰 공부다. 도시에서 자란 분들은 맑은샘학교에 와서 처음으로 텃밭 일을 하는 터라 어린이들에게 배우고 동료 선생에게 텃밭 일을 배운다. 철마다 달마다 때마다 중부지방에서는 무슨 작물을 채비하고 심고 거두는지 한 해를 살아봐야 익힐 수 있다. 또 어느 때 김을 매줘야 하고, 웃거름을 언제 넣어야 하는지, 토마토 순은 어떻게 따는지, 모종을 내고 밭에 옮겨 심을 때 뭘 조심해야 하는지, 지지대는 언제 어떻게 세워줘야 한느지, 고구마순은 어떻게 심어야 하는지, 밀과 마늘 같은 겨울 농사는 언제 어떻게 시작하는지, 식물의 한 살이로 배울 게 정말 많다.
어린이 농부들과 텃밭 농사를 지으려면 앞뒤채비도 먼저 해야 하고, 일할 때마다 격려와 칭찬으로 즐거운 일 놀이가 되게 하고, 땀 흘리는 보람을 찾게 하는 게 선생의 일이다. 어린이 농부들은 선생들이 어떻게 일하는지 보고 따라 배우기에 삽질부터 텃밭 이야기까지 선생은 준 농부가 되어야 한다. 지금이야 어릴 적 시골에서 자란 덕을 보지만 나는 제대로 농사를 배운 적이 없다. 아이가 어릴 적 과천에 이사 와서 아내 덕분에 시작한 주말농장에서 도시에서 땀 흘려 일하는 맛을 보기 시작했고, 맑은샘학교에 와서야 농사라 부를만한 규모로 텃밭 일을 했다. 어머니 살아계실 적에 고추밭에서 고추를 따다 과천에서 아이들과 백 평 정도 농사를 짓는다니 빙그레 웃으시던 모습이 아직도 떠오른다. 더 넓은 밭에서 늘 일하던 어머니 처지에서는 소꿉장난처럼 보였을 것이다. 더욱이 어릴 적부터 일을 하지 않고 도시로 나가살던 아들이 나이 들어 농사를 짓는다니 웃음이 절로 나왔을 터다. 그래도 어릴 적 부모님이 하던 일을 보고 자란 덕분에 농사 때마다 큰 도움을 받았다. 보고 자란 게 그렇게 중요하다.
도시에서 살지만 어린이들과 텃밭에서 일하는 세월이 제법 되니 어느 정도 농사짓는 흉내를 내지만, 농사를 업으로 하는 시골 농부들 삶에는 견줄 수도 없음을 잘 안다. 다만 어린이들과 함께 농사를 짓는 방법과 중요한 규칙을 새기고, 텃밭 작물과 땅 심에 대한 지식이 조금씩 늘어났다. 직업으로 농사를 짓지 않고 농사 교육으로 꾸준히 농사를 짓다보면 뭘 심을지 작물을 생각하기보다 땅 심을 어떻게 기를지 발전하게 된다. 학교에서 거름통을 만들어 거름을 만들어보기도 하고, 농약을 치지 않고 비닐을 쓰지 않기에 더 손발을 놀려야 할 일들도 배워갔다. 텃밭 곡식은 농부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처럼 부지런해야 농사를 지을 수 있다. 또한 농사는 사람의 힘만으로 지을 수는 없다. 지금이야 기름을 때고 전기를 많이 쓰는 비닐집 농사가 보편이 되었지만 맨땅에서 짓는 농사는 하늘과 땅 속 생물의 도움을 받아야 지을 수 있다. 철마다 계절의 흐름에 따라 농사를 지어야 하고, 날씨에 큰 영향을 받는 게 농사다. 인류 문명이 만들어낸 기후위기 영향으로 이상기온 때문에 곳곳에서 농작물이 죽어가고 갈수록 농사짓기가 어렵다. 어린이들에게 때마다 자연의 호흡을 들려주고 텃밭 식물의 한 살이를 겪어보게 하지만, 선생은 어린이 농부들을 위해 틈나는 대로 텃밭을 살피고, 김을 매고 더 앞뒤에서 일을 해야 한다. 그러니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내가 아는 게 농사다. 거짓 없이 정직한 농사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훌륭한 교육과정으로 교육에서 실천되고 있다. 농사를 지어본 어린이들에게 쌓인 감성과 일머리는 고스란히 성장으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