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가 눈앞에 보인 독일
지난 3년 동안 독일은 엄청난 선전(宣戰)을 하고 있었습니다.
서부전선(西部戰線)에서는 비록 전쟁 초기 순간적(初期瞬間的)인 작전 미스로 마른(Marne)에서 진격(進擊)이 멈춘 이후 전선이 고착화(固着化)되기는 하였지만 아직도 파리 북쪽 프랑스 영토(領土) 깊숙한 곳에서 프랑스와 영국을 압박(壓迫)하고 있었고, 동부전선(東部戰線)은 독일을 중심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Austro-Hungarian Dual Empire), 오스만투르크(Osman Türkleri), 불가리아(Bulgaria) 등 모든 동맹국(同盟國)들이 제 역할(役割)을 충실(充實)히 하고 있었습니다.
↑전쟁 중반기에 동맹국에 가담하여 힘을 실어준 투르크
특히 루마니아(Romania)가 전선(戰線)에서 이탈(離脫)한 연합국(聯合國)과는 달리 동맹국(同盟國)의 단단한 결속(結束)은 계속 되어 제정(帝政)러시아의 영토(領土)였던 많은 지역(地域)을 점령(占領)하였고 세르비아(Serbia)와 몬테네그로(Montenegro)를 점령함으로써 발칸(Balkan)반도(半島)의 대부분을 석권(席卷)하였습니다.
그리고 전쟁 전 3국동맹(Triple Alliance)이었으면서도 눈치를 보다 얍삽하게 연합국 측에 가담(加擔)하였던 이탈리아(Italian)를 트렌티노(Trentino)에서 괴멸 직전(壞滅直前)까지 몰아갔습니다.
↑동부전선과 남부전선의 한축을 담당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1913년, 빈에서 열린 아스페른-에슬링 전투Bataille d'Essling(FRA)Schlacht bei Aspern(DEU)Battle of Aspern-Essling(ENG)와 바그람(Wagram) 전투 100주년 기념식에서 행진하는 제국군
더욱이 1917년 말에 있었던 프랑스군의 대공세(大攻勢)가 실패(失敗)로 끝나면서 연합군은 수세(守勢)에 몰렸고 비록 연합군 해군(海軍)에 봉쇄(封鎖)당하여 독일이 많은 고통(苦痛)을 겪고는 있었지만 섬나라 영국 또한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無制限潛水艦作戰)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받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다가 독일에 대항(對抗)하여 전쟁 개시(戰爭開始) 때부터 함께 싸워온 영국군과 프랑스군 사이가 삐걱거림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독일 유보트 공격에 영국은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1918년 3월 3일 브레스트 리토프스크(Brest-Litovsk)에서 독일 측 4개국과 소련(蘇聯)은 강화조약(講和條約)을 체결(締結)합니다.
형식적(形式的)으로는 휴전(休戰)이었지만 내용적(內容的)으로는 소련이 독일에게 항복(降伏)한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혁명(革命)으로 더 이상 독일과 전쟁을 수행(隨行) 할 수 없었던 신생(新生) 소비에트(Soviet) 정권(政權)은 폴란드(Poland)와 발트해 지역(地域)을 포기(抛棄)하고 배상금(賠償金)을 지불하면서 1914년부터 참여(參與)했던 연합군 대열(隊列)에서 빠져나갔습니다
↑러시아 혁명 후 정권을 잡은 소비에트 정권은 소련을 전쟁에서 이탈시킵니다
실질적(實質的)으로 승리(勝利)를 거둔 소련과의 휴전(休戰)은 전쟁개시 당시부터 동서(東西)에서 양면전쟁(兩面戰爭)을 계속(繼續)하여오던 독일에게 커다란 전환점(轉換點)이 되었습니다.
이제 모든 전력을 서부전선(西部戰線)으로 집중(集中)하여 프랑스와 영국을 무너뜨리면 이 지긋지긋한 전쟁도 승리로 막을 내릴 것이라고 판단(判斷)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더구나 앞서 설명(說明)한 것처럼 서부전선(西部戰線)의 상황(狀況)도 독일에게 좋은 방향(方向)으로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사진에 보이는 사람 중 가운데서 독일 제국군의 경례를 받고 있는 사람은 레프 카메네프(Lev Kamenev), 왼쪽에 있는 군복을 입지 않은 수염을 기른 사람은 러시아 대표 '아돌프 아브라모비치 요페(Адо́льф Абра́мович Ио́ффе)'이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체결 당시의 모습
하지만 그렇다고 시간이 충분히 많다는 의미(意味)도 아니었습니다.
모든 유럽국가가 장기간(長期間)의 전쟁으로 지쳐갈 무렵 팔팔한 미국이 연합국 측으로 참전(參戰)하겠다고 선언(宣言)을 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미국은 독일과 국교(國交)를 단절(斷切)한 뒤 1917년 4월 6일 선전포고(宣戰布告)를 하였으나 군대(軍隊)를 준비(準備)하여 대서양(大西洋)을 건너오려면 시간(時間)이 필요(必要)하기 때문에 1918년이나 되어야 실제 참전(實際參戰)이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豫想)되었습니다.
↑미군의 참전은 예정되어 있었고 그전에 독일은 승리를 쟁취하여야 했습니다
이제 이러한 호기(好氣)를 살려 독일은 최후(最後)의 일전(一戰)을 서부전선에서 벌이려하였습니다.
미군이 도착(到着)하기 전에 아무래도 프랑스보다 참여도(參與度)가 떨어질 수밖에 없는 영국 원정군(英國遠征軍)을 박살(撲殺)내어 영국과 프랑스를 분리(分離)시키면 프랑스를 굴복(屈伏)시키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까지 영국과 프랑스는 연합 지휘체계(聯合指揮體系)가 없었고 최근 들어 프랑스 최고사령관(最高司令官) 페탱(Henri Philippe Benoni Omer Joseph Pétain, 1856년 4월 24일~1951년 7월 23일)과 영국원정군 사령관 헤이그(Douglas Haig, 1861년 6월 19일~1928년 1월 29일)의 사이도 좋지 않았습니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