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선은 연산역을 경계로 주변의 경치가 완전히 뒤바뀐다.
서대전~연산간은 산지가 많은 험준한 지형으로 이루어진 반면,
연산-정읍간은 끝도 없이 넓게 펼쳐진 호남평야가 자리하고 있다.
부황역은 험한 계룡산 산자락을 지나 넓다란 호남평야로 가는 길목에 있다.
산줄기의 끝자락에 걸린 조그만 야산들이 양 옆으로 펼쳐지고,
그 가운데로는 마치 계곡처럼 넓은 벌판이 형성되어 있다.
예로부터 공주에서 논산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어 역원도 존재했었다는 부황리.
천안-논산간의 길이 조치원-대전쪽으로 우회하면서 동시에 부황리의 입지도 바뀌었다.
서울, 충청도에서 전라도로 넘어가는 길목의 역할을 하다가,
순식간에 조그만 촌락으로 그 역할이 많이 축소되었다.
마을 주민들도 서울 밑 수도권으로, 대전으로, 혹은 논산이나 전주로 대부분 빠져버리고,
노인 몇 분들만이 고요히 넓은 평야를 지키고 있다.
'호남'지역의 호남선 역들에 비하면 한발 늦긴 했어도,
더 이상의 역할이 없는 부황역 또한 모든 생이 이미 끝나버렸다.
뭔가 찝찝함이 남는 아쉬운 종말을 맞이한 것이다.
부황역의 위치는 '부황2리'에 자리잡고 있다.
호남선 철길이 바로 옆에 붙어서 소음이 꽤나 있긴 하지만,
넓은 들판 한복판에 자리잡은 아담하고 조용한 마을이기도 하다.
국도변과 도보 20분 거리에 떨어져 있어 이렇다할 건물조차 없다.
논산. 지금은 군사도시로 유명하지만 예로부터 화려한 역사를 갖춘 유서 깊은 고장이다.
충청권에서 유일하게 호남평야를 끼고 있던터라 가장 부유했던 지역이었으며,
후기 백제(공주-부여-익산-논산)의 중심지로서 백제의 문화유산이 무척 많이 남아있다.
또한 고려, 조선시대에는 호남으로 가는 길목에 놓여 역원과 관리소가 설치되기도 했었다.
지금도 그 흔적이 마을 한 켠에 뚜렷하게 남아있다.
부황역이 속한 '부적면'이란 지역은 논산과 연산의 중간에 끼어있다.
그래서 논산의 평야와 연산의 산자락이 태극물결을 일으키며 어우러지는 곳이다.
끝없이 광활한 평야가 드넓게 펼쳐진 곳이지만,
저 너머로 산줄기가 끊임없이 수를 놓는 이색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그래서 산지 속의 평야, 그 사이로 달리는 열차가 무척 멋있게 느껴진다.
부황2리 마을의 중심에 있었던 부황역.
각각 연산과 논산이라는 큰 마을에 샌드위치처럼 낀 탓인지,
애초부터 별 볼일 없는 조그만 역에 불과했다.
그래서 비둘기호가 운행하던 1993년에 일찌감치 무인화가 되어 역 건물이 헐렸고,
근근히 마주하던 열차들도 결국 2006년을 끝으로 더 이상 상대해주지 않았다.
그래도 아직은 선로관리가 이루어지는 거점의 역할을 톡톡히 하는터라,
완벽한 폐역이라고 보기엔 조금 이르다.
물론 역무원도 없고 역 건물조차 없는 조그만 곳이긴 하지만,
아직까지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있는 것만으로도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예전에 역 건물이 있었을법한 자리.
역 건물이던 아니던 간에 저 자리엔 분명히 커다란 건물이 하나 들어서 있었을 것이다.
평평하게 다진 시멘트 바닥이 옛 건물의 영광을 조금이나마 증명해준다.
여객취급이 중지되고 건물이 헐리면서 오랫동안 부황역은 무인역으로 남아있었다.
그나마도 열차가 더 이상 서지 않게 됨으로서 '역'으로서의 기능을 모두 잃게 되었는데,
그 때문인지 이미 건널목을 모두 헐어버린 상태다.
호남선 원정, 초강, 신흥리같은 역들의 선례를 보아선,
분명 부황역도 머지않아 승강장이 뜯겨져 나갈 것이다.
그럼 정말로 역의 제모습을 모두 잃게 될 테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잊혀져 나갈 것이다.
설치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던 '버스정류장'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고,
예전부터 있었던 벌거벗은 승강장 또한 언제 뜯겨나갈지 모른다.
호남선 역들은 다른 곳에 비해 너무 빠르게 흔적이 없어진다.
명색이 KTX가 직접 지나가는데 열차도 안 서는 역들의 흔적을 남기는 것을 '수치'라고 생각해서일까...
그래도 예전엔 수많은 통학생과 마을 주민을 태우고 애환을 깊이 실었던 역들인데,
이렇게 여지없이 허물어져 가는 모습을 보면 조금 안타깝고 속상하다.
선로관리용 건물 두 개, 복선 선로 옆의 쓰러져가는 승강장 두 개, 쓸쓸히 버려진 가로등 두 개.
마치 대칭이라도 시켜놓은 듯 양 옆으로 판박이의 모습을 하고 있다.
왜 자꾸만 호남선의 폐역들을 보면 운치보다는 안타까움이 먼저 드는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커다란 나무 숲 사이로 아련하게 놓인 부황역의 옛 간판.
이제 더 이상 논산역과 연산역은 부황역을 인정해주지도 않는데...
자신을 인정해 달라고 사정하는 듯 애처로운 모습으로 남아있다.
역 건물 부지가 오히려 본선의 역 부지보다 더 넓다.
그만큼 옛 부황역의 규모가 결코 작지 않았음을 보여주는데,
기반을 잃은 시골 간이역들이 매몰차게 내몰려지는 현실에 그저 한숨이 나온다.
시들하다 못해 다 썩어버린 한 송이 작은 꽃처럼,
부황역의 존재도 시들하다 못해 완전히 버려진 상황이다.
앞으로도 이런 역들은 해마다 늘어날 것이고,
쓸쓸한 종말을 맞을 역들도 점점 늘어만 갈 것이다.
그나마 화물취급이나 단선의 신호업무라도 하는 역들은 상황이 낫건만...
이미 복선화가 되어버린 주요역에서는 신호업무도 하지 못하고,
개발이 더디게 진행된 호남선의 특성상 화물취급도 하지 못한다.
그저 시간의 흐름에 못 이겨 결국은 시들어버린 한 송이 꽃에 불과하다.
첫댓글 그만큼 Maximum님이 호남선의 역들을 아끼시고 사랑하시나 봐요. 글도 잘 쓰시고... 언제 철도 문학가로도 활동해 보셔요. 정말 어울릴 듯... ^^;; (사족 : 아무 흔적도 없이 사라질 역들을 생각하니 저도 안타깝고 막막해져 오네요... ;ㅅ;)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문학가로 활동하기엔 아직 부족한 점이 너무나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