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일제강점기 잡지 《조선》 1923년 1월호에 수록된
“호모화(護謨靴)에 관한 조사”라는 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호모화의 유입은 1919년경부터 개시되어
당시는 양화형(洋靴型)의 것으로 극히 소량에 불과했으나,
1921년 봄 무렵 선화형(鮮靴型)의 것이 나타나자마자
별안간에 조선인들의 환영을 받아 도시에서 시골로 보급되고
지금은 한촌벽지에 이르기까지 잡화상의 점두(店頭)에도
고무신을 볼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 들어온지 100년 된 고무신(출처, 크라우드픽)
잡지 《조선》은 고무신이 우리나라에 처음 등장한 것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호모화’라고 말은 곧 ‘고무신’을 이르는 것인데,
‘호모’는 ‘고무’의 일본말을 빌려온 것입니다.
처음에는 서양식 구두를 본떠 양화형(洋靴型) 곧 단화 형태로 나왔지만,
나중에 조선식으로 개량해 선화형(鮮靴型)이 나온 뒤
도시는 물론 시골 두메까지 엄청난 인기를 누린 듯합니다.
이러니 다투듯 고무신 공장이 나타났는데,
그 가운데 ‘대륙고무공업’은 광고 문안에
순종 임금은 물론 모든 궁인이 다
대륙고무가 만든 고무신을 애용한다고 광고를 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인기를 끌었던 고무신에 큰 단점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땀이 빠져나가지 않는다는 것이었지요.
그 바람에 발에 부스럼이 나서 문제가 된다는 기사가 날 정도였습니다.
이런 문제점과 함께 전 세계적인 대공황의 여파로
한층 어려워진 경제사정을 들어
고무신 배척과 함께 짚신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벌이기도 했지만,
싸고 질긴 고무신의 인기는 사그라질 줄 몰랐습니다.
그 뒤 60~70년대는 타이야표 통고무신의 유행이 일기도 했지요.
어쨌든 고무신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 이제 100년 정도 되었는데
고무신이 마치 우리의 전통신으로 생각하여 한복 입을 때
고무신을 꼭 신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으니 문제입니다.
우리 겨레가 오랫동안 신었던 전통신은 짚신과 함께 태사혜 등 갖신이 있었습니다.
▲ 동아일보 1921년 8월 19일 자 고무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