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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8. 25. 주일 큐티
다니엘 10:1 ~ 11
힛데겔 강에서 본 환상
관찰 :
1) 다니엘의 금식의 이유
- 1절. “바사 왕 고레스 제삼년에 한 일이 벨드사살이라 이름한 다니엘에게 나타났는데 그 일이 참되니 곧 큰 전쟁에 관한 것이라 다니엘이 그 일을 분명히 알았고 그 환상을 깨달으니라” => 다니엘은 자신이 받은 환상에 대해서 분명한 일시와 배경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곧 이것이 꿈과 같은 허망한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 실제로 일어난 사건임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고레스는 옛 바사지역의 왕 캄비세스 1세와 메대 왕 아스투아게스의 딸 만데인 사이에서 태어나 메대와 바사 제국을 통합해 강력한 페르시아 제국을 건립한 고레스 2세를 가리킵니다. “그의 즉위 삼 년”이라는 것은 그가 외삼촌인 동시에 장인인 키악사레스 2세로부터 제국에 대한 실권을 처음 넘겨받은 B.C. 558년으로부터의 '3년'(B.C. 556)이 아니라 메대와 바사를 병합시켜 페르시아 제국의 공식적인 왕으로 즉위한 해(B.C. 536)로부터의 '3년', 곧 B.C. 534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때 다니엘은 노령으로 인해서 지방의 한직(閑職)으로 물러났던 것으로 추정합니다. “큰 전쟁에 관한 것”(צָבָא גָדֹול, 차바 가돌)은 직역하면 ‘큰 고통거리에 관한 것’ 혹은 ‘긴 고통의 시기’입니다. 역사적으로는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핍박으로 300년 뒤에 일어날 일들에 관한 것이며, 상징적으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마지막 날에 적그리스도로부터 받을 핍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이 환상을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니엘이 하나님이 주신 환상을 간직하고 묵상하고 깨닫고자 노력하는 가운데 계속해서 하나님은 보다 자세하고 확장된 환상을 보여주시게 되고, 다니엘은 급기야 그 환상의 의미를 분명하게 깨닫게 되는데까지 나아가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 2절 ~ 3절. “그 때에 나 다니엘이 세 이레 동안을 슬퍼하며 세 이레가 차기까지 좋은 떡을 먹지 아니하며 고기와 포도주를 입에 대지 아니하며 또 기름을 바르지 아니하니라” => 다니엘의 슬픔은 이 환상을 통하여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이 자신의 동족들에 대한 고난이기 때문에 슬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니엘은 고귀한 신분으로서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자였습니다. 그가 일상적으로 먹는 음식이 ‘좋은 떡’, ‘고기’, ‘포도주’ 등이었습니다. 다니엘은 자신의 슬픔과 애통을 이러한 일상적인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을 통하여 표현했습니다. 일각에서 금식을 이러한 것으로 여기기도 하는데, 성경에서는 물과 음식을 하나도 입에 대지 않는 금식도 언급을 하고 있기 때문에 다니엘이 행한 일상적인 음식을 입에 대지 않는 것을 금식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의 금식도 금식의 일종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또한 당시 페르시아에서는 향기 나는 기름을 얼굴과 몸에 바르는 것이 고귀한 품위를 드러내는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자신의 고통을 표현하고자 그러한 품위를 지키기 위한 기본적인 행위를 멈춘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성도의 온전한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2) 힛데겔 환상에서 만나는 한 사람
- 4절. “첫째 달 이십사일에 내가 힛데겔이라 하는 큰 강 가에 있었는데” => 다니엘은 여기서도 분명하게 역사적인 배경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성경에서 나오는 독특한 형태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진실로 역사속에서 일하시는 분이심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역사화되어 시간과 공간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확실히 파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정월 이십 사 일” 유대의 종교력상 이 정월(니산월)은 유월절 절기가 속해 있는 달이었습니다. 그런데 유월절은 정월 10일경부터 준비하기 시작해서 정월 14일에 유월절 양을 잡으며 무교절로 이어져 그 달 21일까지 행사가 계속되었기 때문에 다니엘의 3주간의 금식 기도가 이 유대의 유월절 기간에 행해졌음을 알게 됩니다. “힛데겔 강”은 ‘티그리스 강’을 의미합니다.
- 5절 ~ 6절. “그 때에 내가 눈을 들어 바라본즉 한 사람이 세마포 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우바스 순금 띠를 띠었더라 또 그의 몸은 황옥 같고 그의 얼굴은 번갯빛 같고 그의 눈은 횃불 같고 그의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 그의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더라” => “한 사람”에 대한 본 절에서의 묘사는 성경 곳곳에서 반복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표현으로 반복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여기서도 “한 사람”의 존재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기에 본문은 구약에서 등장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상세한 묘사입니다. 다니엘은 그렇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던 것입니다. “우바스 순금 띠”는 우바스 지방에서 나는 불순물이 매우 적은 정금을 의미합니다.
3) 환상을 들은 뒤의 반응들
- 7절. “이 환상을 나 다니엘이 홀로 보았고 나와 함께 한 사람들은 이 환상은 보지 못하였어도 그들이 크게 떨며 도망하여 숨었느니라” => 다니엘은 이 환상을 다른 동료들과 함께 경험했습니다. 다른 이들은 이 환상을 보지 못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함께 있었지만 다니엘만 이 환상을 듣고 본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이 이 환상을 보지 못했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로 말미암은 초월적인 현상으로 말미암아 두려움을 느껴 도망하게 되었습니다. 이 계시는 다니엘이 홀로 어떤 엑시타시 속에서 체험한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함께 있는 가운데 겪은 역사적 사실임을 또다시 증거하고 있습니다.
- 8절. “그러므로 나만 홀로 있어서 이 큰 환상을 볼 때에 내 몸에 힘이 빠졌고 나의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 듯하였고 나의 힘이 다 없어졌으나” => 다니엘은 “홀로”있는 가운데 큰 환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다니엘이라고 할지라도 이 커다란 영적 체험은 다니엘의 영과 육이 감당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것이었습니다. 다니엘은 이전에도 천사 가브리엘을 만나서도 기절을 했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니 더욱 감당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니엘이라 할지라도 직접 계시를 보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다니엘은 온 몸에 힘이 빠지고, 거의 시체 같은 상태가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계시를 너무 쉽게 경험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 9절. “내가 그의 음성을 들었는데 그의 음성을 들을 때에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깊이 잠들었느니라” => 다니엘은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을 때에 그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고, 너무나 엄위하였기에 듣는 것을 감당할 수 없어서 얼굴을 앞으로 고꾸라졌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이 얼마나 지혜로운 사람이었는지, 그가 얼마나 고귀한 사람이었는지를 염두에 둔다면 다니엘이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권위에 영적, 육적으로 압도당하고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 10절. “한 손이 있어 나를 어루만지기로 내가 떨었더니 그가 내 무릎과 손바닥이 땅에 닿게 일으키고” => 다니엘은 어마어마한 신적 권위 앞에서 얼굴을 처박고 기절해 버렸는데, 너무나 공포스러웠는데, 그 ‘한 사람’의 손이 다니엘을 어루만지고 힘을 주고 있습니다. 다니엘은 너무나 두려워서 떨게 되었지만 그가 다니엘의 무릎과 손바닥이 땅에 닿도록 일으켰습니다. 다니엘은 얼굴을 땅에 처박고 꼼짝 못하고 있었는데, 그분의 손이 다니엘을 어린 아이를 다루듯이 일으켜 세워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 11절. “내게 이르되 큰 은총을 받은 사람 다니엘아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깨닫고 일어서라 내가 네게 보내심을 받았느니라 하더라 그가 내게 이 말을 한 후에 내가 떨며 일어서니” => 다니엘은 떨며 일어섰습니다. 그 이유는 그 ‘한 사람’이 말하는 바를 바르게 듣고자 함이었습니다. “은총을 입은 자”(חֲמוּדֹות, 하무도트)는 문자적으로 ‘아름다운 자’, ‘보배로운 자’라는 뜻으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다니엘의 신앙이 귀한 보배와 같이 아름답게 여겨졌음을 알게 됩니다. ‘지극히 사랑받는 자’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주님은 다니엘이 너무나 사랑스러우셨을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과 환상을 날마다 묵상하며 그리스도의 현현을 알아보고 그것을 드러낼 수 있는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가르침 :
1) 다니엘은 놀라운 환상을 경험했습니다. 곧 그리스도를 구약의 그 시대 속에서 만난 것입니다. 이 일은 다니엘이 어떤 신비한 개인적인 체험을 통하여 한 것이 아니고, 실제 역사 속에서 여러 사람이 있던 상황에서, 그러나 ‘홀로’ 체험한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2) 다니엘은 하나님 앞에서 그의 나이와 상관이 없이 고꾸라졌습니다. 심지어 얼굴을 땅에 처박으며 고꾸라져 버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 앞에서 그 분의 너무나 엄위하심에 대하여 다니엘이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신적 권위를 체험하며 그의 체통과 상관이 없는 반응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차원을 생각해 보자면, 그와 함께 있던 이들을 도망가고 피하는 것으로 그 상황이 종료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그분의 임재의 실제를 알았고, 그 음성을 듣고, 그분의 생생한 임재를 볼 수 있는 마음이 청결한 자였기에 그렇게 반응하고 경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니엘 이었기에 그나마 이렇게 구약에서 그리스도를 가장 면밀하게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것은 다니엘이 ‘큰 은총을 받은 자’가 된 것입니다. 구약에서 누가 이렇듯 예수 그리스도를 구체적으로 만나 그 분을 묘사할 수 있었겠습니까?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성육신 하셔서 제자들에게 자신을 실제로 보고 만나고 듣는 것이 얼마나 큰 영광인지 알아야 할 것을 말씀하신 이유입니다(눅 10:23 ~ 24).
3) 다니엘이 큰 은총을 받은 자가 된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또 하나님이 보여주신 환상을 깨닫고자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며 날마다 묵상을 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은 천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며,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보다 선명하게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향후의 일들에 대해서 알게 되고, 깨닫게 되어, 그것을 다음 세대에 알려주는 소중한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적용 :
1) ‘큰 은총을 받은 자’ 다니엘에게 급기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나주셨습니다. 구약에서도 주님을 갈망하는 자에게 주님이 자신을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모세를 통하여 주신 율법을 날마다 묵상하고, 예레미야를 위시로 하는 선지자들의 글들을 날마다 묵상하고 연구하며,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환상들을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여 그것을 깨닫게 되었던 다니엘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현현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자에게 주님은 오늘도 그렇게 자신을 말씀을 통하여 드러내 주시고, 보여주심을 알게 됩니다.
2) 그러나 주님의 임재를 진정으로 체험하고자 한다면 대단한 ‘깡’이 있어야 합니다. 다니엘과 같은 존재마저도 주님 앞에서는 얼굴을 땅으로 향하여 고꾸라지며 기절했던 것입니다. 주님의 임재로 인해서 벌벌 떨며 감당이 되지 않는 상황에 어찌할 도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임재가 다니엘이 주님을 초청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의지에 의해서 이루어졌고, 그 임재로 말미암아 다니엘은 거의 시체나 다름이 없을 정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진짜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고자 하는 자는 주님의 엄위하심 앞에서 내 모든 것들이 부서지고 고꾸라지는 것을 작정을 해야 합니다. 주님을 만난다는 것이 너무 쉽게, 친구 만나듯이 그렇게 여겨지는 것을 우리는 경계해야 합니다. 주님은 너무 좋은 분이시지만 진짜 내 친구는 아닙니다. 주님이 나를 친구로 여겨주시는 것은 주님이 대해 주시는 영역입니다. 그러한 주님의 반응에 내가 진짜로 주님이 나의 친구인양 생각하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그렇게 반응하면 안됩니다. 주님은 주님이십니다. 친구가 아닙니다. 엄위하신 주님의 임재를 진짜로 경험하고자 한다면 목숨을 거는 ‘깡’ 혹은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3)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