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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극우에 대한 외신 칼럼을 읽는데 한국 이야기가 잠깐 나온다.
한국의 경우 최근 역사에서 권위주의와 독재에 대한 '집단 기억'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공격한 (윤석열의) 위협을 '즉각적이고 강력한 반발'로 제압했다는 것이다.
반면에 오스트리아 국민들은 최근 역사에서 권위주의와 독재에 대한 기억이 없다고 푸념한다. 이렇게 비교를 하는 데는 속사정이 있다. 오스트리아는 지난 9월 총선에서 자유당이 28.9%의 득표율로 1위를 차지해 세계를 놀래켰다.
자유당이 무슨 당이냐면, 나치잔당이다. 독일에서는 나치 청산이 이루어졌지만, 오스트리아에서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치 잔당들이 2차 세계대전 직후 '독립자동맹'을 결성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자유당의 전신이다. 역사적 무게 때문에 비실대던 자유당에 불씨를 불어넣어준 이가 외르크 하이더라는 당대표였다. 아버지가 전 나치 당원이고, 어머니는 히틀러의 유겐트 출신이다.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것이다.
이런 나치잔당이 오스트리아 총선에서 승리한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로 벌어진 초유의 사태다. 이민자 추방, 요새주의와 민족주의, EU로부터의 독립, 오스트리아 우선주의를 내세웠다. 오스트리아는 이원제 형태다. 대통령이 의회 연정 과정에 개입하고, 시민들도 거리에서 자유당의 의회 연정을 반대했다. 그 덕분에 아직까지 자유당 주도의 연정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하지만 자유당의 지지율은 식을 줄 모른다. 재선거를 치룬다고 해도 자유당의 승리가 예상된다.
문제는 이 상황에서 자유당이 오스트리아 헌정과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비판과 모독의 강도를 점점 더 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합법적 독재의 길을 열어젖혀 트럼프를 비롯해 전세계 극우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 헝가리의 오르반처럼, 오스트리아 헌정 질서를 무너뜨리자는 암묵의 신호를 보내고 있다는 분석이다.
그런데 오스트리아 국민들 대다수가 최근 역사에서 권위주의와 독재를 겪지 않아 집단 기억, 즉 독재 항체가 없다. 그러니까 내가 읽은 칼럼은 오스트리아 국민들에게 그 집단 기억이 없으니 자유당이 보내는 위험천만한 신호를 전혀 감지하지 못한다는 하소연을 하는 것이다.
또 한 번 어쩔 수 없이 가슴을 쓸어내린다. 정말로 득달같이 그날 밤 달려간 시민들, 의원들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나. 소극적이나마 명령 앞에서 주저하고 망설였던 군인들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나. 탄핵안 가결을 외치며 삽시간에 전국에서 여의도로 몰려든 시민들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나. 아마, 오늘 개소리와 헛소리가 난무하던 윤석열의 최후 변론에 콧웃음을 치는 이 순간의 짧은 자유를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 독재와 민주주의에 대한 집단 항체를 갖고 있는 사람들로 저 칼럼에 인용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앞으로 헤쳐나가야 할 길이 첩첩산중이지만, 그래도 정말 운이 좋았던 것이다.https://www.facebook.com/share/1KsSjmvpPc/
한편 네덜란드에서는.
2002년 네덜란드 총선 기간. 한 정치인이 총을 맞고 바닥에 쓰러졌다. 정치적 불만을 품은 동물운동권 활동가가 쏜 총이었다. 그의 이름은 핌 포르튀인(사진 위).
TV 토론 명사였고, 극우 정치인이었으며, 커밍아웃한 게이였다. 그가 죽자마자 지지자들이 들고 일어났다. 사망 9일 만에 그의 이름을 딴 정치정당 '리스트 핌 포르튀인(LPF)'을 급조해 선거에 임했다. 26석을 얻었다. 2번째로 많은 득표. 세상이 깜짝 놀랐다. 정작 당사자는 죽었는데 그의 이름을 딴 정당이 원내에 입성한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그걸 '포르튀인의 반란'이라고 불렀다.
무대 관중들에게 하는 거수경례가 트레이드 마크였던 핌 포르튀인, 네덜란드뿐 아니라 서유럽 우익 포퓰리즘의 전설로 꼽힌다. 그가 암살당했던 해, 내 주목을 끌었던 이유는 단순히 이거였다. 왜 게이가 극우 포퓰리즘을 선도했는가?
핌 포르튀인은 애초에는 좌파였다. 사회학 교수였다. 그래서 별명이 '교수'다. 그러다 신자유주의자로 전향하게 된다. 네덜란드의 복지 시스템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른 유럽 국가들은 가열차게 신자유주의 폐달을 밟던 90년대, 네덜란드는 오래된 복지 시스템과 방만한 재정 운영 방식 때문에 좌우파할 것 없이 더디게 개혁을 진행한다는 게 그의 입장이었다.
그의 전기 작가들과 포퓰리즘 연구가 사이에서는 핌 포르튀인을 종종 세계화에 반발한 기수라고 평가하지만 잘못된 분석이다. 그는 세계화, 재정 긴축, 노동 시장의 자유화를 주장했다. 통설과는 다르게 강경하게 신자유주의를 주창했다.
물론 그는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폐해를 잘 알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세계화에 대해 불안해한다는 걸 기민하게 캐치했다. 그러면 대안은 무엇이냐? 바로 문화 전쟁을 치루는 것이다. 문화 전쟁으로 그 불안과 불만족을 대리 보충하는 것이다.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복지배외주의, 둘째 이슬람 방화벽.
네덜란드는 50년대부터 이주 노동력을 받아 안았다. 그러다 8, 90년대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더 많은 이주자들을 끌어들였고 현재는 전체 노동력의 20% 이상을 이주 노동자들에게 의존하는 터다.
핌 포르튀인은 신자유주의는 더욱 강화하되, 그것으로부터 발생하는 피해와 불안을 민족주의 방화벽으로 제어하자고 주장한 것이다. 일단 공공재정을 줄여 이주 노동자와 이민자들에게 주어지는 복지 혜택과 사회적 서비스를 삭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순수한 네덜란드인이 아닌데 왜 복지 혜택을 준다는 말인가. 그들을 배제하라. 즉 복지배외주의를 주창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주 노동자, 특히 이슬람인에 대한 인종적 편견을 주창하고 민족주의를 강화할 구실과 정당성이 필요하다. 그래서 등장시킨 게 '후진 이슬람론'이다. 문화적으로 우월한 네덜란드는 '동성애자에게 관용적이며 여성차별을 하지 않는다'는 게 핵심 주장이다. 반면에 후진 이슬람은 동성애자들을 때려 죽이고 되바라진 여성들을 명예살인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네덜란드에서 위험한 이슬람 문명을 추방하자는 결론을 내놓는다. 그들의 문명은 유럽의 진보된 문명에 비해 너무 후지고 미개하다는 것이다. 10여년 전, 유명 소설가를 비롯해 한국의 식자들이 이러한 주장을 덥썩 문 채 이슬람은 후지다는 이야기를 복창했던 건 한국 지식사의 흑역사라 할 것이다. 핌 포르튀인과 유럽의 극우들이 이슬람 문화를 격하하고 후지다고 조롱하는 이유는 결국 그들의 노동력을 불법적 지위에 놓은 채 계속 값싸게 전유하겠다는 탐욕의 배면일 뿐이다.
기묘하게도, 핌 포르튀인이 주창한 이러한 '문화 전쟁'은 정확히 대서양 건너 미국의 상황과 유사하다. 미국의 경우엔 클린턴부터 민주당이 신자유주의를 적극 끌어안으면서 공화당과의 경제 정책의 변별점이 사라지자, 정치적 적대를 형성하기 위해 6, 70년대 문화 혁명의 성과를 받아안아 성평등, 동성결혼, 재생산권 인정 등을 표방한 터였다. 그걸 낸시 프레이저를 비롯한 다양한 연구가들이 '진보적 신자유주의'라고 분류한다. 오늘날 트럼프와 미국 극우들이 정치적 올바름과 벌이는 문화 전쟁은 결국 '진보적 신자유주의 vs 권위주의적 신자유주의'간의 전쟁이다.
핌 포르튀인은 단명했지만 그가 축조한 문화 전쟁은 이후 서유럽 극우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성소수자들에게 관용적이고 성차별을 하지 않는 백인 유럽의 문명. 이슬람 문명으로 더럽혀질 수 없는 순결성의 문명. 핌 포르튀인은 마리화나 합법화도 주장했다. 또 줄곧 표현의 자유의 가치를 역설했다. 그 모든 고유한 유럽 백인 문화의 가치는 이슬람으로부터 공격 당하고 침해될 수 없다는 것이다.
요컨대, 백인들만을 위한 유럽을 요새로 만들 것. 복지가 갖춰지고 깨끗한 생태환경이 보장되는 유럽의 성채가 변방의 미개한 존재들에게 침탈당하지 않게 방어할 것.
어느 순간, 유럽 백인 문명은 피해자로 둔갑된다. 저번 책에도 썼지만, 서유럽의 극우 운동은 뒤집혀진 식민주의의 표현이다. 수백 년 동안 가해자였던 이들이 이제는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수백 년 동안 가난한 남반구의 노동력과 자원을 쥐어짜 번쩍거리는 성채와 찬란한 문화를 쌓아올렸던 이들이 이제는 장벽을 쌓고 남반구 사람들을 침입자로 몰아세우며 피해자인 척하는 것이다. 식민주의의 동학과 진화 과정을 헤아리지 않는 한 오늘날 서구 극우 운동의 번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어쨌거나 핌 포르튀인은 죽었다. 하지만 그의 유산은 더욱 확대재생산됐다. 헤이르트 빌더르스가 핌 포르튀인을 계승했다. 반이슬람과 반이주 이데올로기를 더욱 보강했다. 그의 자유당은 이번 네덜란드 총선에서 1위를 하는 기염을 토해냈다. 심지어 모든 정당이 다 인정하지 않으면 총리를 하지 않겠다며 연정에서 스스로 빠져나오며, 몸값을 더 올려놓는 화려한 꼼수를 수행했다.
"이슬람화를 저지하지 않으면 우리들은 스스로 모든 자유를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코란 금지, 머리 스카프에 대한 과세, 부르카 금지는 물론 유럽의 국경을 강화하고 난민을 강력하게 배척하는 시스템을 만들자 선동하거나,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요르단에 정착시키자고 주장하는 헤이르트 빌더르스.
그의 별명은 네덜란드의 트럼프지만, 극우 포퓰리즘의 테크닉에 관해서라면 훨씬 더 트럼프를 능가하는 인물이다. 그가 당수로 있는 자유당은 놀랍게도 1인 정당이다. 기존의 민주적 제도들을 부정하는 걸 넘어 아예 자질구레한 정당 시스템 구조를 파괴해버린 것이다. 자유당의 민주주의를 주창하던 모든 반란자들이 가볍게 제압됐다. 모든 매개가 사라지고 오로지 남는 건 1인 카리스마와 지지자들의 직접 연결이다. 인터넷, 그리고 1인 계정과 팔로워들뿐이다. 디지털 시대의 극우 포퓰리즘의 정수를 보여준다.
나중에 기회가 닿으면 이야기하겠지만 빌더르스의 성공은 네덜란드 좌우 신자유주의와 녹색 자본주의가 자초한 실패다. 신자유주의에 버려진 도시 변방의 빈자들, 그린딜의 녹색 전환 프로그램에 분노한 농민들, 그리고 이주자와 난민 때문에 지위 하락을 염려하는 중산층... 그들이 바로 빌더르스가 먹어치운 자양분이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엊그제 서유럽 극우들이 성소수자와 페미니즘 이슈를 적극 차용하거나 유보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글을 쓰자 많은 분들이 보충 설명을 요구하시길래, 덧붙여 간단히 몇 줄 더 부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