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 [列國誌] 721
■ 3부 일통 천하 (44)
제11권 또 다른 난세
제 5장 개혁 (9)
-내가 공숙좌의 말을 듣지 않았다가 천하 인재를 진나라에 넘겨주었구나!
위혜왕은 공손앙의 활약상을 듣고 거듭 후회하며 탄식했다.
본래 공손앙은 위(魏)나라에서 벼슬하려 했었다. 그런데 위혜왕은 공손앙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를 쓰지 않았다. 그 결과 서방 변토국인 진(秦)나라가 일약 중원의 초강대국으로 성장한 것이다.
이때 위나라에는 위문후 · 위무후를 도와 위나라를 크게 일으킨 자하, 전자방, 이극, 서문표, 적황 등
명신들이 모두 죽은 후였다. 대를 이을 인재들을 양성하지 못해 나라 경영에 어려움이 많았다.
- 오기나 공손앙 같은 인재를 다시 구해야겠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식이었으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한 위혜왕은 많은 비용을 써서
천하 인재를 모집한다는 소문을 내었다. 방연(龐涓)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또 손빈(孫賓)이라는
사람도 있었다. 두 사람은 동문(同門)으로 어려서부터 함께 병법(兵法)을 배웠다.
방연의 가계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손빈은 <손자병법>으로 유명한 오나라 병법가 손무(武)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제나라 아읍(阿邑)에서 태어났다고《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아읍은 지금의 산동성 양곡현陽谷縣) 동북쪽 아성진(阿城鎭)이다. 동아라고도 한다.
두 사람의 스승이 누구인지는 역시 정확히 알 수 없다. 《열국지》 저자는 그들의 스승을 귀곡(鬼谷)
선생이라고 기술하고 있지만 정확하다고 볼 수는 없다. 방연과 손빈보다 10여 년 늦게 등장하는,
전국시대 제일의 유세가인 소진(蘇秦)과 장의(張儀)의 스승이 귀곡 선생인데, 아마도 재미있게 하려고
방연과 손빈 또한 귀곡 선생의 제자로 설정한 것 같다.
이제부터 방연과 손빈에 관한 얘기를 전개할 것인데, 그들의 스승을 귀곡 선생으로 해도
크게 무리는 없으므로 여기서도 《열국지》의 저자가 설정한 관계를 따르고자 한다.
귀곡(鬼谷) 선생의 성은 왕(王), 이름은 허(栩)였다.
초(楚)나라 태생으로 젊어서 만년의 묵적(墨翟)과 교류하며 지냈다.
묵적은 겸애(兼愛) 사상가로 널리 알려진 묵자(墨子)의 본명이다.
왕허(王栩)는 묵적의 영향을 많이 받아 당시 사람들에게 유행하던 입신양명(立身揚名)의 길을 버리고
평생 산 속에 은거하며 살았다.그가 은거한 곳은 주나라 낙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양성(陽城)이라는
곳이었다.지금의 하남성 등봉현 일대로 당시는 주(周)왕실의 관할지였다.
양성 근처에 귀곡(鬼谷)이라는 곳이 있었다.산이 깊고 수목이 울창한 골짜기였다.
어찌나 깊숙한지 사람 살 만한 곳이 못 된다 하여 귀곡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어느 해인가 이 깊은 골짜기에 왕허(王栩)가 찾아 들었다.
그는 귀곡 골짜기를 둘러보고 나서 말했다.- 이 곳이야말로 내가 머물 곳이다.
이때부터 그는 귀곡에서 살았는데, 그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귀곡 선생, 혹은 귀곡자(鬼谷子)라 불렀다.
귀곡 선생의 학문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의 저서로 알려진 <귀곡자(鬼谷子)>라는 책이 있긴 하나 후세 사람이 지은 위작이 틀림없다.
귀곡 선생의 제자가 종횡가(縱橫家)인 소진과 장의가 분명한 것을 보면, 그의 학문 분야는
아마도 유세법(遊說法), 혹은 처세술이 아니었을까 싶다.
방연과 손빈을 귀곡 선생의 제자로 설정한 것은 <귀곡자>라는 책을 근거로 한 것이 분명하다.
귀곡(鬼谷) 선생의 학문은 다양했다.그 중 수리(數理) 분야에 밝았다.
위로는 천문에 통달하고 아래로는 지리를 꿰뚫어보는 안목이 있었다.
일월성신(日月星辰)의 갖가지 현상과 변화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알고 있었다.
때문에 미래를 예언하는 능력도 뛰어났다.또 그는 병학에도 통달했다.
온갖 진법(陣法)과 계책을 사용할 줄 알았다.그가 거처하는 모옥(茅屋)에는 기화요초가 가득했는데,
그것들은 한결같이 변화무쌍한 진법에 맞춰 심어졌다.귀곡 선생은 유세법(遊說法)에도 밝았다.
워낙 기억력이 좋아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한 번 보고 들은 것은 잊어버리는 적이 없을 정도였다.
한 번 입을 열면 아무도 대적할 사람이 없을 만큼 언변이 뛰어났고, 그의 변설(辨舌)을 듣기만 하면
누구나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귀곡(鬼谷) 선생이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그의 예언 능력 때문이었다.
어느 때인가 시장에 나갔다가 우연히 딱한 사람을 만나 점을 쳐준 일이 있었다.
귀곡 선생은 그 사람을 위해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알려주었는데, 그것이 모두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다.
그 후로 그를 사모하여 찾아오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났다.
심지어는 제자가 되기를 청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귀곡(鬼谷) 선생은 그런 그들을 거절하지 않았다.
신분과 나이를 따지지 않고 모두 제자로 받아들였다.또한 중도에 포기하고 나가는 사람들도
만류하지 않았다.- 오는 자 막지 않고, 떠나는 자 잡지 않는다.귀곡 선생의 방침이었다.
그는 제자들의 성격과 능력에 따라 각기 가르치는 내용이 달랐다,
어떤 제자에게는 병학(兵學)을 가르쳤고, 어떤 제자에게는 유세술(遊說術)을 지도했다.
그 초창기 제자 중의 하나가 바로 방연과 손빈이었다.
방연은 위(魏)나라 태생이고, 손빈은 제(齊)나라 출신이었다.
두 사람은 모두 어려서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다.갈 곳 없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다가 귀곡 선생
문하로 들어왔다.방연과 손빈은 서로의 처지가 같음을 알고 결의형제를 맺었다.
손빈(孫賓)이 나이가 두 살 많아 형이 되었고, 방연(龐涓)은 동생이 되었다.
귀곡(鬼谷) 선생은 그들의 재능이 병학에 있음을 알고 두 청년에게 병가(兵家)의 학문을 가르쳤다.
과연 두 청년 모두 총명하고 재질이 뛰어났다.그들은 일취월장(日就月將)하여 일가를 이룰 정도가 되었다.
어느덧 그들의 나이 서른이 넘었다. 귀곡 선생의 제자가 된 지도 5년의 세월이 흐른 것이다.
두 사람은 같은 선생에게서 배웠지만 성격은 너무나 판이했다.
방연(龐涓)은 성격이 급하고 음흉한 반면, 손빈(孫賓)은 순수하고 맑은 심성을 지녔다.
방연(龐涓)은 생각했다.'이만하면 나도 이제 병법(兵法)의 대가라 할 수 있다.
언제까지 이 산골짜기에서 썩어 지낼 것인가. 세상에 나가 나의 능력을 마음껏 펼쳐 보일 때가 되었다.'
반면 손빈(孫賓)은 이렇게 생각했다.'참으로 병가(兵家)의 학문은 깊고 넓구나.
아아, 언제나 그 오의(奧義)를 깨달아 할아버지 손무(孫武)의 발뒤꿈치에라도 따라갈까.
더욱더 열심히 공부하여 손가(孫家)의 명성을 되찾아야겠다.'
하루는 방연(龐涓)이 생활용품을 구하기 위해 산 아래 마을까지 내려갔다가 길가는 나그네로부터
귀가 번쩍 트일 말을 들었다.- 지금 위(魏)나라에서 천하 인재를 구하고 있다 하오.
방연의 가슴은 설레었다.위나라로 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학사(學舍)로 돌아갔으나 책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선생께서 허락하실까? 만일 허락하시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방연(龐涓)은 차마 하산하겠다는 말을 하지 못해 하루 종일 귀곡 선생의 주변만 맴돌았다.
722편에 계속
첫댓글 전국시대 흥미있는 방연과 손빈의 이야기가 시작되군요.
유려한 필치의 작가와 수고해 주시는 이준황님에게 박수를 보냅니다.